2024년 2월 17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첫 번 아담은 선악의 판단 구조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과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뜻대로 행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뱀 곧 사탄의 꾀임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자기 자신을 판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여 사도 바울은 누구도 나를 판단하지 못하며 자기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으며 오직 주님만 자신을 판단하신다고 하였습니다(고전 4:3-4).
우리를 판단하실 이 곧 심판주로 오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는 누구도 판단하지 말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틈만 나면 이 사람 저 사람을 판단하며 나의 선악 구조로 심판을 하곤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말입니다.
이런 나는 주님의 공의로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나는 어디에도 소망이 없던 자입니다.
그저 쥐구멍이라도 보이면 들어갈 자였습니다.
하지만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께서 그런 나를 품어 안으시고 친히 십자가를 지셨으며 주의 보혈로 나를 대속하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우리 주님과 연합하여 새 생명으로 또 하루를 시작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 주소서.
나의 심령을 채우고 있는 온갖 상념을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4:66-72
제목 :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 나의 묵상
예수님은 재판장인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는다.
가야바는 거짓 증인 둘이서 예수를 치는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 묻는다.
너는 이 증언을 듣고 아무 할 말이 없느냐?
하지만 예수께서는 침묵하시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가야바가 이내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자 곧바로 ‘내가 그니라’하고 답하셨다.
이를 신성모독으로 여긴 가야바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더 이상 증언이 필요없다고 간주하였다.
이에 거기에 있던 관리들이 예수님께 침을 뱉고 얼굴을 치는가 하면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때리기도 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여 누가 너를 때렸는지 맞혀보라고 조롱한다.
한편 산헤드린 공회원이 모여서 예수님을 심문하던 가야바의 집 안쪽 뜰에서 바깥쪽 뜰로 장면이 바뀐다.
그 바깥쪽 뜰에는 베드로가 추위 속에서 불을 쬐고 있다.
그 때 어떤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한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던 자 맞지?
그 말에 베드로는 아마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이를 부인하는 말이 튀어 나왔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그 말을 하고 그는 앞뜰로 나갔다.
여기서 앞뜰은 앞마당 또는 현관이라는 의미이다.
여종의 말에 전면 부인한 베드로는 불을 쬐던 곳에서 자리를 옮겨 앞마당 쪽으로 나간 것이다.
이는 여종의 집요한 추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추궁을 피하고자 간 그곳에서 또 추궁이 계속된다.
베드로는 이 말에 대해서도 부인하고 말았다.
조금 후에 다시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또 추궁한다.
너도 갈릴리 사람이자나, 너야 말로 진짜 그와 같은 한 패다.
사람들의 이 말에 베드로는 불끈 화를 내면서 손사래를 친다.
나는 절대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예수를 저주까지 하였다.
그러자 닭의 두 번째 울음소리가 났다.
베드로는 닭이 첫 번째 울음소리가 날 때는 그 소리를 들을 경황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자기의 마음을 숨기는데 급급하였다.
하지만 두 번째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주님이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그 말씀이 기억이 났다.
그래서 그 일을 생각하며 울었다.
이 내용을 병행본문인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 하고 있다.
(눅 22:60-62)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세 번째 부인에서 저주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그를 집요하게 추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의 부인을 확증하고자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였다.
그런데 베드로가 내뱉은 이 저주는 과연 누구를 향한 저주였을까?
물론 그런 상황에서 예수를 저주하는 것으로 자신의 부인이 정당함을 확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저주는 자신의 부인이 진실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저주가 떨어져도 좋다는 것을 일컫는 일종의 자기를 저주하는 맹세였다.
다시 말하면 나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확증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저주의 맹세를 한 것이다.
71절에서 ‘저주하며’로 사용된 헬라어 ‘아나데마티제인’은 상대방을 저주할 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라, 자신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저주가 떨어져도 좋다는 것을 일컫는 일종의 자기저주적 맹세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한편 이렇게까지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해서 저주의 맹세까지 사용하여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거듭거듭 부인했던 베드로.
그가 세 번째 부인이 끝나자마자 닭이 울었고 또한 예수님의 눈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눅 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그 때 베드로는 어떠했을까?
그의 몸은 아마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내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을 하였다.
오늘 나는 이런 저주를 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는가?
나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하여 아내에게도 그러했고 성도들에게도 그러했었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의 추궁 앞에서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욥 40: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의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 된다.
그동안 입술로만 했던 말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의 심장을 찢는 심정으로 주님 앞에서 나를 저주한다.
하지만 주님은 이러한 나의 저주를 그대로 받지 않으시고 주님이 대신 받으셨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놀랍고도 기이한 일을 주님께서 친히 받으신 것이다.
나를 향한 나의 저주는 주님께서 친히 받으시고 이를 행하셨다.
이는 얼마든지 그 고난의 쓴잔을 벗어날 수 있지만 나의 원대로 마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는 그 말씀 안에 다 들어 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자신의 뜻을 접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나를 향한 나의 저주를 그대로 몸으로 받으신 것이다.
그렇게 기꺼이 고난의 쓴잔 곧 십자가를 품으신 것이다.
나는 저주의 맹세를 너무나 쉽게 한다.
내가 당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나의 마음이 진실됨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렇게 저주의 맹세를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것까지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던 것처럼, 나 또한 주님의 그 십자가를 품고 함께 십자가를 진다.
그것이 진정한 자기부인임을 믿는다.
주님께서는 내가 매일 이런 고통 속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날마다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 속에서 아들의 생명 곧 영생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창세전 언약(딛 1:2)이며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기 원하신 뜻(요 6:38-40)이다.
내가 행했던 일들, 주님을 부인하고 이를 확증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저주하기까지 맹세했던 그 악함을 주님이 다 받으셨다.
그리고 이런 나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그 영원한 유업을 잇도록 하신 것이다.
날 구원하신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안에 아담의 ‘하나님처럼’ 되기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나는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그 부인이 진실임을 확증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맹세까지 했던 베드로 그 자체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그 무엇으로도 쓸 수 없는 쓰레기이며 배설물입니다.
고쳐 쓸 수 없는 재활용 불가입니다.
이런 나를 생각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복음을 알게 하시고 오늘도 이 복음으로 주님과 사귐을 갖게 하시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어둡고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광야에서 길이 되어 주시고 빛이 되어 주신 주의 말씀은 나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나를 살게 하였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였을 때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보기 좋고 읽기 좋은 대로 이용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알고 난 후로는 주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이 복음이며 이와 연합할 때 비로소 새 생명으로 일으킴 받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우리 주님과 늘 연합하여 살기 원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나의 모든 것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