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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죄, 시험, 악에 대해서
주기도는 구조적으로 볼 때 일용할 양식을 중심으로 앞에 세 항목이 나오고 뒤로 세 항목이 나오오. 앞의 세 항목은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이고, 뒤의 세 항목은 사죄, 시험, 악이오. 앞의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뒤의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소. 일용할 양식은 더 구체적으로 사람의 것이오. 이런 주기도의 구조로 볼 때 기도는 우선 하나님이 드러나는 내용으로 시작해야 하오.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이런 기도를 만나기는 쉽지 않소. 거의 모든 기도가 개인의 간구에 떨어져 있다는 말이오. 기도를 자기에게 소용되는 것들을 간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어떤 이들은 기도가 구체이어야 한다는 논리로 기도를 철부지 아이들의 떼쓰기로 떨어뜨리고 있소. 어떤 청년들은 결혼하고 싶은 상대의 세세한 조건을 기도의 내용으로 삼고 있소. 결혼 정보 회사에 제출하는 서류와 똑같은 내용이오. 내가 직접 동영상으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목사는 선교사들에게 원하는 승합차의 차종을 비롯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놓고 기도하라고 말했소. 차의 색깔까지 구체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거요. 그렇게 기도를 해야만 하나님이 더 빨리 응답하신다는 거요. 내가 보기에 그런 기도는 속임수요. 아무리 좋게 봐도 심리학에 불과하오.
그대의 기도 경험은 어떻소? 이것만은 분명하게 알아두시오. 말이 되든지 않든지, 기독교적이든지 사이비이단적이든지 일단 열정적으로 기도하면 나중에 기분이 좋아진다오. 초상집에 가서 실컷 울던 사람이 “누가 죽었는데?” 하는 것처럼 내용이 없어도 감정적으로 고조가 되면 일단 기분이 좋아지는 건 분명하오. 어떤 신자들은 목사의 설교에서 한 문장마다 매번 ‘아멘’이라고 화답하오. 그것도 자꾸 하다보면 기분이 좋아지오. 그대도 실험적으로 그렇게 기도해보시오. 35평짜리 아파트를 달라고 말이오. 위치와 아파트 이름도 거명하시오. 그대가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인터리어도 넣어 보시오. 그런 방식으로 기도할 내용은 많으니 몇 시간도 기도가 가능할 거요. 기도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대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했다는 사실이 기특하게 여겨질 것이오. 이런 방식으로 그대는 기도꾼이 될 수 있소.
그대는 “주기도와 영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당신의 기도생활은 어떤가?” 하고 질문하고 싶을 거요. 나의 지난 이야기는 하지 않겠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를 갔다면 사춘기 시절에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을지 상상이 갈 거요. 목회를 하는 목사들은 거의 대부분 새벽기도회를 하오. 그게 목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제법 되오. 샘터교회에는 새벽기도회가 없소. 혼자라도 새벽기도를 하는 게 목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경건생활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럴 수도 있소. 나는 지금 새벽에 기도를 하지 않소. ‘지금’ 안 한다고 하니 언젠가 여건이 되면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되겠구려.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소. 언젠가 내가 수도원 원장이 된다면 아마 새벽 5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른 아침 기도회를 정기적으로 하게 될 거요. 수도원 원장이 내 꿈이오. 수도사들이 함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농사를 짓는 수도원의 책임자로 당분간이라고 살고 싶소. 이런 꿈은 이뤄지기가 어려울 거요. 당장 가족이 있으니 움직이기가 쉽지 않고, 나 같은 신학자 연 하는 사람을 수도원에서 받아주지 않을 거요. 지금 나는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건 없소. 밥 먹기 전에, 수시로 영적 감동이 올 때 잠시, 잠들기 전과 깨어난 후에 잠시 기도하오. 그것도 그렇게 뜨겁게 하는 게 아니라 거의 형식에 가깝소. 예배를 인도하거나 수요일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도 물론 기도하오. 그것도 짧은 시간이오. 이렇게 보면 나는 기도하지 않는 목사에 가깝소. 겉으로 보면 기도와 무관하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는 늘 기도에 갈급하오. 시인이 막 되려고 하는 문학청년처럼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은 거요. 잘 들으시오. 기도꾼이 아니라 기도 시인이 되고 싶은 거요.
지금까지 여러 책을 쓰고 번역했소. 앞으로 당분간 이런 작업을 계속될 거요. 가장 크게 마음을 두고 있는 분야는 두 가지요. 하나는 <365일 기도하기> 이고, 다른 하나는 <젊은 목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요. 두 번째 책은 지금까지 다른 책에서 쓴 내용이 중심을 이룰 거요. 목사의 정체성에 대해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목회의 구체적인 현장에 대해서, 설교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하게 될 거요. 학문적인 차원보다는 내 영혼에서 진솔하게 피어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소. 정말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앞의 책이오. 이건 남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요. 내가 그분에게 귀를 여는 작업이자, 내 입을 여는 작업이기도 하오. 평소에 기도에 힘쓰지 않은 목사가 365일 동안 기도문을 쓸 수 있겠소? 상투적인 소리가 아닌 영혼의 소리로 기도하려면 뭔가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야만 하오. 지금은 여러 가지 일들이 내 영혼을 긴장시키고 있어서 참된 기도를 드리기 힘드오. 환갑이 되기 전에 이 일을 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도하지 못한 책임을 진다는 심정으로 한번 시도해 보겠소. 응원을 부탁하오.
사죄기도
주기도 후반부 세 항목의 첫 번째는 사죄에 대한 것이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는 우리가 죄를 행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말이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거요?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른 반응을 보이오. 기겁을 하는 사람도 있고, 숙연해지는 사람도 있을 거요. 어떤 신자들은 죄에 대해서 거의 노이로제 현상을 보이오. 그걸 약점으로 삼고 공격적으로 설교하는 목사들도 있소. 또 어떤 신자들은 사람이 다 그런 거지 뭐, 하면서 죄에 대해서 무관심하오. 죄 냉소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소.
나름으로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거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겉으로는 “이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소. 남의 것을 훔치지도 않았고, 남을 드러내놓고 비난하지도 않았소. 복음서에 보면 십계명을 어릴 때부터 잘 지키던 사람이 있었소이다. 그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소.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항목을 나열하였소. 이 사람이 얼마나 우쭐했을지 알만하오. 자기가 자신 있는 대목에서 질문을 받았으니 말이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소. 그러자 이 사람은 돈이 많은 탓에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다 하오.(막 10:22) 이 이야기는 십계명을 잘 지켰다는 말이 허튼소리일 수고 있고, 십계명만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있소. 인간사회의 몇몇 도덕규범으로 인간을 평가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오. 친구에게 욕을 하는 것은 아미 살인할 것과 같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은 이미 간음한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보시오. 성서가 말하는 죄는 단순히 겉으로 도덕적인 행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것을 가리키오. 그것이 무엇이오?
신학자들의 죄 개념은 조금씩 차이가 나오. 어거스틴은 휘브리스(교만)를 죄라고 했고, 아퀴나스는 아모르 수이(자기사랑)를, 판넨베르크는 자기집중을 죄라고 했소. 분노, 질투, 이기심 등으로 표현할 수도 있소. 우리가 성서에서 배운 바대로 말하면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이 죄의 출발이오.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을 받았다 하오.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는 유혹에 넘어간 거요. 자기를 확대해서 높이려는 마음이 죄의 씨앗인 셈이오. 이렇게 본다면 피조성의 부정이 바로 죄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하오. 카인의 아벨 살해 사건에서도 그 동기는 자기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시작되었소. 거기서도 결국은 자기중심성이 문제였소. 우리가 부도덕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자기에 대한 과도한 관심에서 시작되었소. 일종의 나르시시즘이 죄인 셈이오.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나는 유무형의 잘못도 거의 모두 나르시시즘의 변용이라 할 수 있소.
사람의 자기중심성, 자기 집중은 본능적인 경향이오. 그것이 어쩌면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경향일지도 모르오. 그건 강렬한 힘이오. 식욕, 성욕, 사회적 성취욕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대로 알 거요. 그런 것들이 없으면 인류 생명의 지속이 불가능할 지경이오. 이런 본능 자체를 기독교는 죄의 본질로 여기오. 자기 생명을 지키려고 하는 그 강렬한 욕망이 오히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라오.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거요. 그들은 그냥 생명 현상에만 머물러 있소. 그것의 욕망을 최대한으로 발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오. 그것이 진화의 원리이기도 할 거요. 기독교는 생명 현상을 그것 너머의 빛에서 성찰하오. 그 빛은 물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오. 그 창조주로부터 생명이 온다는 사실을 말하는 거요. 그 빛을 외면하는 것이 바로 자기 집중이오. 생명 현상 자체에 매몰되는 거요.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생명이 밖에서 주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내부의 원리인지에 대한 질문이오.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오.
이제 성서가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전달이 되었을 거요. 생명의 근원, 생명 창조자를 외면하고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곧 죄요. 하나님 집중과 자기 집중은 대립하고 있소. 사람이 하나님과 돈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도 기억할 거요. 자기에게 집중하는 사람은 결국 삶이라는 화살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하마르티아)이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는 문장은 앞에서 말한 성서의 죄 개념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오. 성서의 죄 개념은 생명 창조주인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인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했소.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이오. 그런데 ‘우리에게 죄지은 자’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잘못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오. 남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 말이오. 우리가 일반적으로 죄라고 생각하는 것들이오. 남의 집의 물건을 훔쳤다거나 중상모략 같은 것들이오. 파렴치한 행위들이오. 이런 것들은 사실 종교적인 차원보다 먼저 이 세상의 도덕률이나 실정법의 차원에서 책임을 져야 할 사안들이오. 성서가 이런 정도의 차원에서 인간의 죄 문제를 접근하는 것은 아니지 않소. 성서의 차원에서 이런 것들은 죄라기보다는 죄의 결과들이오. 죄와 죄의 결과들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소.
오해는 마시오. 성서가 부도덕한 행위들에 관해서 관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오. 로마서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소. 로마서가 말하는 항목들을 열거하겠소.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 불효, 우매, 배약, 부정, 무자비(롬 1:29-31)요. 이런 항목 앞에 이미 동성애를 지적했소. 갈라디아서는 육체의 일에 대한 목록을 열거했소.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그와 같은 것들이오.(갈 5:19-21) 그 외에도 바울의 여러 편지에는 부도덕한 일을 경계하고 도덕적인 일에 권장하는 내용들이 나오오. 기독교는 처음부터 도덕적인 일에 매우 민감했소. 그래서 방탕한 것을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남편을 둔 로마의 부녀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좋게 생각했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이오.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마음대로 내버려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성서의 이런 표현들이 그대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으면 하오. 성서가 죄의 항목들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이오.
예수님은 신약 성서 기자들에 비해서 이런 문제를 훨씬 근원적으로 접근하셨소. 그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도덕적인 변화를 요구하지 않으셨소.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돌아서라고 요구하셨을 뿐이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지 사람들을 교양이 있고 도덕성을 갖추게 하는 것이 아니었소. 이 문제는 좀 까다롭소. 참고적으로 나무와 열매의 변증법적 관계로 이해할 수도 있소.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좋은 열매로 좋은 나무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오. 우리의 존재론적 변화에서만 행위도 선하게 되고, 우리의 선한 행위를 보고서 존재론적 변화를 알 수 있다는 뜻이오. 나무와 열매가 변증법적인 관계라고 하더라도 나무가 핵심이오. 열매를 말하는 이유는 복음이 열매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열매 자체를 평가하는 것은 아니오.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놓고 볼 때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그렇다면 주기도에서 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문장이 나오는 거요? 이 문장은 분명히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행한 잘못을 말하는 것이오. 여기서 ‘죄 지은 자’라는 단어는 ‘빚진 자’라는 뜻도 되오. 성서 난외주에 나왔듯이 이렇게 번역해도 되오.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 죄를 지은 것과 빚을 진 것은 보기에 따라서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오. 빚도 잘못이긴 하니 죄를 진 것이고,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빚을 진 것이니 죄라고 하기는 어렵기도 하오. 고대 사회에서 빚은 지금 은행 융자를 얻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생존의 위기였소. 그것은 일용할 양식과 직결되는 것이오. 이런 점에서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어야 할 것이오. 그런데 그게 잘 안 될 거요. 자기가 빚을 못 갚은 것은 작아 보이지만, 남이 빚을 못 갚은 것은 크게 보인다오.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그보다 작은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을 감옥에 넣었다는 주님의 이야기를(마 18:21-35) 기억하기 바라오. 그게 사람의 본 모습이오.
좀더 실제적인 차원에서, 그대는 이 주기도를 오늘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겠소? 빚진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는 일말이오. 모든 이들의 빚을 탕감한다면 경제체제가 허물어질 것이오.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요. 어느 신학자가 이런 제안을 했소. 가난한 나라의 빚을 부자 나가가 모두 탕감해주자고 말이오. 이런 정신은 구약의 희년 제도에도 그대로 들어 있소. 이런 일을 시도하지 않으면서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라고 기도드리는 것은 공허한 기도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했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아니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기브앤드테이크’ 방식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그렇다면 주기도가 우리를 용서해달라고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했다는 단서를 단 이유는 무엇이오? 그 대답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소. 하나는 이 단서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용서’라는 사태 안으로 빠져드는 것이오. 용서의 현실로 말이오. 용서하고 용서받는 현실에서 우리는 구원을 경험하는 거요. 사죄 기도는 생명의 중심과 연관된 경건한 행위요. 여기서 조심해야 할 사실은 사죄 기도를 감정의 카타르시스로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오.
오늘 교회 현장에서는 이런 감정적인 접근이 많은 것 같소. 눈물이 너무 흔하오. 툭 하면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신앙을 겨우 유지하고 있소. 소위 부흥회라는 집회에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오. 온갖 종류의 죄 목록을 기억하면서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통곡도 마다하지 않소. 성찬식에 참여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소. 한숨처럼 ‘주여!’를 반복하기도 하오. 몇 년 전에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동영상으로 시청한 적이 있소. 그는 툭 하면 설교 중간에, 또는 설교 끝에 눈물을 보였소. 10분 가까이 대성통곡하는 일도 있었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눈물이라는 사실은 분명할 거요. 그의 개인적인 영성을 젬 삼자인 내가 뭐라 평가할 수 없지만, 그리고 왜 그런지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동의할 수는 없소. 목사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반복된다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소. 그렇게 울음을 주체할 수 없다면 골방으로 들어가는 게 맞소.
그런 감정의 방식으로라도 뜨거운 신앙을 경험한다면 그것도 좋은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긴 하오. 요즘 신앙인들은 너무 감정이 메마른 게 문제 아니냐 하고 말이오. 오해는 마시오. 감정과 눈물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오.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이성과 합리성으로만 규정하려는 것도 아니오. 하나님 경험은 이런 언어, 이성, 논리를 뛰어넘는 세계라는 것은 분명하오. 그렇지만 이런 언어 너머의 경험(불립문자)과 감정 주관성은 구분되어야 하오. 이단 사이비에 가까울수록 감정적인 요소가 강하오. 감정은 모든 비합리와 비상식의 문제점들을 단숨에 폐기처분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대는 소위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탕자가 아버지 앞에 나오면서 울었다고 생각하시오? 본문의 보도만 보면 그런 장면이 없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들의 자격을 잃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오. 내가 보기에 탕자는 자기 잘못을 인정할 때 울지 않았을 거요. 대신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울었을 가능성은 높소. 자기의 죄를 인정할 때는 최대한 맨 정신으로 하는 게 좋소.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확신이 가고 그것이 감격스러울 때는 당연히 눈물이 날 거요.
복음서에는 탕자의 비유와는 성격이 다른 이야기도 있소.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중에 그 동네에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한 여자가 나타났소.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8)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그 장면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소. 그러자 예수님은 큰 빚을 진 사람과 적은 빚을 진 사람이 동시에 탕감을 받았을 때 큰 빚을 진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이 있다고 하셨소.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이 이야기는 이 여자의 눈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지적하는 것이오. 자기 업적이 많은 사람은 결국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오. 사랑의 능력이 없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고, 동시에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소? 오스카 쿨만에 따르면, 우리는 용서를 구함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역장(力場, Kraftfeld)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멋진 표현이오. 우리는 주기도에서 사죄를 기도하오. 그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역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오. 예수님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 24)고 말씀하셨소. 용서하고 용서받는 사건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오. 현실의 삶에서는 이게 간단한 건 아니지만 그쪽으로 나가도록 하시오.
시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에 든다는 게 무슨 뜻이오? 악의 유혹에 빠진다는 말이 아니겠소. 우선 시험에 들게 하는, 또는 유혹하는 자가 누군지 생각해보시오. 성서에는 이런 유혹에 대한 일화가 많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하고 있었을 때요. 마귀가 나타나서 세 가지 시험을 하셨소. 돌로 떡을 만들라. 하나님의 아들라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주리라. 각각의 시험이 특색이 있소. 특히 세 번째 것을 보시오. 부귀와 영화는 결국 마귀의 선물이라는 뜻이 아니겠소? 이 내용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하지 않겠소. 지금은 시험의 주체가 누군지를 말하고 있는 중이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처럼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고 있소. 잘 생각해보시오. 마귀는 누구요, 무엇이오? 마귀가 주체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할 수 있다는 말이오? 마태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소.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4:1) 성령에게 이끌렸다고 하오. 그렇다면 예수님을 시험한 주체가 성령이라는 말도 되는 거요. 시험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운 대목이 바로 이것이오. 시험은 사람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마귀의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사건은 없다면 점에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도 아니오.
욥의 시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소. 욥의 삶을 파괴한 이는 사탄이요. 그런데 사탄의 독단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행위요. 만약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사탄도 욥을 시험할 수 없었소. 욥의 불행이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말이 가능한 거요? 이건 가능하지 않소. 이런 설명이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소.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임이 없다고 하니 말이오. 이 문제를 확연하게 이해하려면 세월이 더 필요하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밖에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모순을 다 해결할 수 없는 거요. 다시 정리하겠소. 성서기자들은 두 가지 사태에서 고민한 거요. 인간에게 임하는 모든 불행과 시험은 사탄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하나이고,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다른 하나요.
그대는 조금 더 솔직하게 질문해도 좋소. 실제로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시험했는지가 궁금하지 않소? 이 문제는 뒤에 나오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와 연결되오. 악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오. 마귀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사물과는 전혀 다른 현실이오. 그것을 마치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생각하면 잘못이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 세상의 사물과 비슷한 존재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과 같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성서의 진술을 깊이 생각해보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음성학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오. 하나님의 언어는 무엇이오?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영어, 독일어,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시는 거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사실적인 게 아니라 시적인 의미요. 마귀가 예수님에게 나타나서 실제로 예수님이 당시에 사용하던 언어인 아람어로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한 것은 아니오. 예수님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험을 당하신 거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인간을 모든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고 예수님 자신이 생각했을 수 있소. 사람이 떡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기억한 뒤로 그는 그 시험을 극복한 거요. 굳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초능력을 시험할 필요가 없었던 거요.
앞에서 성서의 언어들은 시(詩)적이라고 말했소. 성서를 읽으려면 이런 점에서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오. 오해는 마시오. 성서가 단순한 종교 문학이라는 말이 아니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뜻이오. 그대가 이 대목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라오. 하나님의 말씀은, 또는 하나님의 계시는 초자연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냐, 문학적으로 임한다고 하니, 약간 이상하다고 말이오. 여기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차이를 길게 말하지 않겠소. 다만 한 가지만 지적하겠소. 하나님을 너무 초자연적인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시오. 이 세상의 자연적인 모든 것도 하나님의 행위요. 초자연적인 것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연적인 인식으로 따라가지 못하는 것뿐이오. 이런 점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부질없는 일들이오. 시에도 사실은 초자연적인 내용이 많소. “나는 시를 쓴 적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는 구절을 보시오. 이게 말이 되오? 시가 왔다는 말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읽는 사람은 시를 모르는 사람이오.
문학적인 상상력을 배운다는 차원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받은 유혹이 무엇인지를 그린 소설을 소개하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예수의 최후의 유혹>이 그것이오. 그 소설에서 예수는 십자가 처형 순간에 십자가에서 내려와 백마를 타고 가서 마리아 자매들과 결혼하오. 아이를 낳고 평범한 목수로 살아가오. 어느 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의 집에 들어와 멱살잡이를 벌이오. 예수를 넘어뜨리고 머리를 발로 밟으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도망친 탓에 자신들이 세상에 나가서 실패했다고 항의하오. 예수는 혼미해지는 의식 가운데 자신은 십자가에서 도망치지 않았다고 외치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십자가 위였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학적 상상력에 따르면 예수가 받은 마지막 유혹은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소. 무슨 말이오. 예수님을 비롯해서 우리 모두의 실존은 시험의 연속이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시험에 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생각하시오. 앞에서는 시험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질문을 했소. 마귀, 또는 사탄이 주체적으로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오. 이제는 시험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오. 시험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이오. 우리는 시험을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시험을 하오. 시험은 이 양면성을 그래도 갖고 있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시험의 본질이 아니겠소? 욥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해보시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분명히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재앙을 만났다고 윽박질렀소. 그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오. 욥은 재앙을 당할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반론을 폈소. 하나님이 누구냐, 그의 섭리는 무엇이냐에 대한 논란이 욥 이야기의 배경이오. 결론은 인간의 합리적 논리와 의로운 삶만으로 하나님과 그의 통치를 모두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최선의 삶이고 신앙이라는 말이오. 이런 구도로만 사람이 살기가 힘들다는 데에 문제가 있소. 하나님은 사람의 기대를 그대로 채워주는 분이 아니기에 그분을 신뢰하고 살기가 힘든 거요. 그래서 사람은 시험에 드는 거요. 시험에 들려 넘어지고, 그래서 다시 시험하는 주체가 되는 거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오. 다른 사건은 접어두고 가장 상징적인 사건 하나만 예로 들겠소.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이 시작되었소. 애굽의 삶과 광야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는 그대도 잘 알 거요. 광야에서는 최소한의 생존 조건마저 확보하기가 어렵소. 그들은 당장 마실 물과 먹을거리가 늘 부족했소. 그들은 출애굽 후 3개월 만에 시내 산 아래에 도착했소. 원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오. 한두 달 내에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가려는 것이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소.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서 감감 무소식이오. 모세는 40일 동안 시내 산에 머물면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완성했소. 모세는 광야생활을 가나안 시대까지 포함해서 멀리 내다본 것이오. 그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 상(像)을 만들었소. 사람들은 그 앞에서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하고 외치면서 제물을 드리고 먹고 마시며, 정신없이 뛰놀았다고 하오. 자세한 줄거리는 그대가 잘 알고 있을 터이니 이만 줄이고, 결론 대목으로 넘어가겠소. 이 사건으로 인해서 결국 한 나절에 3천명이나 죽었소. 모세가 레위 사람들에게 칼을 주면서 닥치는 대로 죽이라고 한 거요.
모세는 왜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무엇이오? 그들은 왜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소? 성서가 말한 그대로요. 그들에게는 금송아지 상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였소. 그런 방식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버텨낼 수 없었던 거요. 생존이 불투명한 상황 말이오. 그들은 모세가 일러주는 신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소. 그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이”요. 그런 신의 약속을 믿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소. 그런 신보다는 당장 생존의 조건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신이 필요한 것이요. 그래서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소. 그들의 죄는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오.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요구였소. 마귀는 첫 시험과 둘째 시험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전제를 하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 6:16)고 대답했소. 세 번째 시험도 역시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요. 부귀와 명예를 줄 수 있는 마귀에게 절하라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의심이기도 하오. 예수님은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는 대답을 하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시험에 빠지오. 어떻게 사는 것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인지 혼란스러워 하오. 이것에 대해서 내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되겠소? 아니면 이미 충분히 깨닫고 있소. 단적인 것 하나만 이야기하리다. 신자유주의는 금송아지 상이요. 그것은 부 증식과 경쟁력 제고를 절대 가치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오. 사람들을 삶의 기쁨과 자유와 신비가 아니라 두려움과 욕망으로 몰고 가오. 그것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로 사람들을 몰고 가는 거요. 과연 그런 거요? 거기서만 인류의 미래가 보장되는 거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만 경험할 수 있는 거요? 오늘 교회는 이런 신자유주의를 신으로 섬기는 일에 앞장서고 있소.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왕상 12:28)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금송아지 사건이 왜 반복되었는지를 우리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았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함으로 우리 자신이 시험에 들렸소.
깨어 기도하라
이제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시험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소. 시험은 교회에서도, 수도원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오. 또 시험이 반드시 나쁜 결과만 일으키지도 않소. 우리를 단련시키는 시험도 있소. 마귀는 우리를 파괴하려고 유혹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 시험하오. 시험을 완전히 마귀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이원론적인 차원에서 분리할 수는 없소. 궁극적으로는 모든 시험이 하나님과 연결되오. 그러나 마귀가 주도적으로 시도하는 시험은 있는 거요. 그것마저 우리를 단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소. 반복되는 말이지만 그것을 구분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소.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하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우리는 어떻게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거요? 시험에 들지 않는 길은 어디에 있소?
이 질문을 다시 정리해야겠소. 시험에 들지 않는 길은 없소. 시험을 피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오. 예수님도 시험을 받았는데 우리가 어찌 시험을 받지 않을 수 있겠소. 예수님이 당한 세 가지 시험만이 아니오. 마지막 순간인 십자가에서도 시험을 받으셨소. 그는 십자가 위에서“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셨다고 하오.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는 뜻이오. 그것은 그의 영혼을 향한 악마의 속삭임이었소. 이상하지 않소? 공생애 초기에 마귀의 시험을 극복하신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다시 시험에 들렸다는 것이 말이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시험을 받으신 거요. 그것은 인간의 숙명이오. 시험에 들지 않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시험과 상관없이 산다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시험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이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장면에서 에피소드가 발생하오. 당시 예수님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소. 소위 수제자 세 명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자기 옆에 머물러 깨어있으라고 하셨소. 제자들은 잠이 들고 말았소. 그것을 보신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고 말씀하셨소.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되오. 우선 본문 자체로만 본다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에 깨어 있지 않은 것은 민망한 일이기는 하지만 시험에 드는 건 아니오.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 전체에 대한 진술이라고 보는 게 좋소. 그들이 처한 신앙적 삶의 자리와 겟세마네의 사건을 연관해서 보도하는 것이라고 말이오. 초기 기독교에서도 시험에 드는 일은 많았다는 말이오. 가장 결정적인 시험은 배교요. 이단과 사설도 물론 시험에 넘어가는 것들이오. 복음서 기자는 이런 시험의 근본 이유를 깨어 있지 않고, 또 기도하지 않는데서 찾은 것이오. 나도 여기에 동의하오.
깨어 있지 않은 상태는 잠든 상태요. 잠이 들었을 때는 무의식이 발동하오. 그 무의식이 훨씬 큰 덩어리이기 때문이오. 우리의 욕망이 절제되지 않고 작동하오. 그대도 그것을 꿈에서 경험했을 거요. 살인도 저지를 수 있소. 평소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꿈에서는 가능하오. 이와 달리 깨어 있는 상태는 어떤 것이오? 단순히 잠들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게 아니오. 우리는 잠들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치 꿈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가 있소. 우리의 욕망이 제어되지 않는 상태가 대낮에도 똑같은 작동된다는 말이오. 그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소.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쉽게 분노하는지를 생각해보시오.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불법을 저지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행한다오. 이런 일들이 시험에 들리는 것이오.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그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소? 그래봤자 종이 한 장 차이요. 겉으로 자기 욕망이 얼마나 드러나는지 아닌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오. 이런 점에서 볼 때 깨어 있는 것은 단순히 잠에 떨어지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소.
깨어 있음은 기도에서만 가능하오. 이런 말이 상투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대가 알았으면 하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호흡이라고 하지 않소. 그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종말의 주인이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바로 창조와 종말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하오.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생명 창조를 직면하는 일이며, 앞으로 일어나게 될 생명의 완성을 기대하는 일이오. 여기서만 우리의 영혼은 깨어 있을 수 있소.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기도요. 죽음을 직면할 때 우리 영혼이 깨어 있을 수 있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그대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거요. 가장 궁극적인 현실을 직면하는 것만이 우리의 영혼이 깨어있는 가장 참된 길이오. 더 노골적으로 말하겠소. 그대가 내일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상상해보시오. 지금 무얼 하겠소? 여전히 스펙을 쌓으려고 동분서주하겠소? 집 장만을 위한 은행융자를 받으려고 뛰어다니겠소?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한 마디 더 하겠소. 내일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그대가 알았다면 오늘 무얼 하겠소? 이런 설명을 공연히 겁주려는 말로 오해하지 마시구려. 모두 죽을 테니 이 세상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로 받지 마시오. 그 반대요. 정신을 차리는 유일한 길을 설명하는 것이오. 하나님 앞에, 즉 하나님의 행위에 직면하는 것이 기도요. 거기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소. 무엇이 참된 현실인지를 인식하기 때문이오.
참고적으로 잠에 취하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약간이라도 맛보기 위해서 짧은 시를 소개하겠소. ‘하이쿠’는 5-7-5의 음수율을 지닌 17字로 된 일본의 짧은 정형시를 가리키오. 아래의 시 모음은 서울샘터교회 메뉴에서 퍼왔소.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벚꽃 아래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잇싸-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게 물리다니! -잇싸-
여름 소나기
잉어 머리를 때리는
빗방울! -시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것을 모르다니! -바쇼-
울지마라 풀벌레야
사랑하는 이도 별들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는 것을! -부손-
초조해 하지마 애벌레들아
시간이 지나면
모두 부활할테니 -잇싸-
목욕한 물을
버릴 곳이 없다
온통 풀벌레 소리 -오츠나라-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이 매미 허물은 -바쇼-
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
똥을 누느라 나갈 수가 없다 -소세키-
다음 질문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한다고 할 때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하는 거요. 기도를 방법으로 생각하지 말기를 바라오. 물론 방법도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오. 한국교회는 지금 기도 인플레이션에 떨어져 있소. 그것이 모두 방법론의 차원에서 머물러 있다는 증거요.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느냐에 목숨을 거오. 기도가 습관이 되었소. 커피 한 잔을 놓고도 기도하오. 목회 중에 심방이라는 게 있소. 일단 어느 신자의 집에 가면 예배를 드리오. 원칙적으로 말하면 이건 예배라기보다는 기도회라고 하는 게 옳소. 편의상 가정예배라고 합시다. 대표기도, 설교 후 기도, 주기도나 축복기도를 하오. 다과를 먹기 전에 또 기도하오. 좋은 기도습관은 필요하지만 기도의 상투성에 떨어지지는 말아야 하오.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원칙적으로 무의미하오. 이건 마치 숨을 어떻게 쉬는가 하는 질문과 같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기를 내놓는 사람은 당연히 기도하게 마련이오. 우리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숨을 쉬는 것처럼 말이오. 다만 숨을 더 잘 쉬는 방법이 있긴 하오. 마치 단전호흡이 숨쉬기 연습이듯이 좋은 기도 연습도 있긴 하오. 두 가지 길이 있소. 하나는 좋은 기도문을 읽고 외우는 것이오. 좋은 시를 읽고 외우는 게 시인이 되는 바른 훈련과정인 것과 비슷하오. 그대는 일단 좋은 기도문을 읽고 외우도록 해보시오. 다른 하나는 직접 기도 경험을 하는 거요. 기도 경험을 설명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오. 그런 경험이 나에게 많지 않기 때문에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소. 시 쓰기와 비교해서 간단히 설명하겠소. 아무리 좋은 시를 읽고 외워도 자기가 직접 시를 쓰지 않으면 시인이 될 수 없소. 시인을 가리켜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한다오. 삶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일이오. 이를 위해서는 삶을 이해하고, 언어의 세계를 이해해야 하오. 기도하기도 비슷하오.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오. 시와 다른 점은 삶을 단순히 현상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한다는 점이오.
위의 설명을 듣고 그대는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구려. 기도가 너무 어렵다거나, 기도가 너무 작위적으로 나갈 염려가 있다고 말이오. 기도가 자칫 자기의 신학적이고 현학적인 지식을 자랑하는 기회로, 그래서 교언영색에 떨어질 수 있다고 말이오. 그것보다는 성령의 감동이 더 중요한 게 아니냐고 말이오. 그대의 말이 옳소. 기도는 어린아이의 옹알이와도 같소.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호소요, 탄원이요, 간구요. 지금 나는 그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오. 그런 기도의 영성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오. 아무런 마음도 담기지 않은 공허한 말장난으로 나타나는 기도를 그대도 많이 경험했을 거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말이오. 주일공동예배에서 드려지는 대표기도의 내용을 돌아보시오. 담임 목사를 위한 기도, 각 교회 기관을 위한 기도, 빈자리를 채워달라는 기도, 교회의 한 해 목표를 위한 기도가 드려지오. 이런 식의 기도가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을 위한 것이 맞소? 그런 기도에 우리의 영혼이 움직일 수 있겠소? 거꾸로 우리 영혼이 잠들기 맞춤하오.
아무리 노력해도 상투적인 기도 그 이상의 기도를 드릴 수 없는 사람은 어찌하란 말이냐, 하고 묻고 싶소? 억지로 기도하려고 하지 마시오. 억지로 기도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거요. 기도의 부담감에 허우적거리든지 아니면 전문적인 기도꾼으로 자리를 잡을 거요. 기도의 요령만 피울 거요. 일단 기도의 영성으로 들어가는 게 필요하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상태요. 이를 위해서 앞서 말한 대로 좋은 기도문을 읽으시오. 특히 시편을 읽으시오. 시편의 영성에 공감이 갈 때까지 읽고 배우시오. 충분히 준비가 되면 누가 옆에서 말려도 기도하고 싶어질 거요. 기도의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에 위배되는 게 아니냐, 하고 생각이 들지 모르겠소. 아니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도를 말하는 게 아니오. 늘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영혼이 깨어 있으라는 뜻이오. 그럴 때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이 가능하오. 이런 점에서 그대와 나는 이미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오.
악에서 구하소서
주기도의 실제적인 마지막 항목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요. 이 구절은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에만 나오오. 누가복음이 이를 생략한 이유는 악 문제가 시험 문제와 연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요. 학자들도 악에 대한 진술이 시험에 대한 진술에 대한 후렴과 같다고 말하오. 그건 옳은 이야기요. 시험은 악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오. 물론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있지만 그 경우에도 악이 활동하는 거요. 하나님이 악의 활동을 이용한다고 보면 되오. 악의 실체가 무엇이오?
‘악’은 ‘악한 자’라는 의미도 되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자이거나,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자이오. 앞에서 몇 번 거론한 마귀, 사탄이오. 성서는 그를 다르게도 표현하오. 악령, 귀신, 악한 권세라고 말이오.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악을 행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악에 의해서 피해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기도 하오. 우리는 악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악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오. 그 중심에는 ‘악’이 자리하고 있소.
우리는 앞에서 이 악에 대한 이야기를 제법 많이 했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악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말이오. 성경에 나오는 몇 가지 예를 들었소. 아담과 이브로 선악과를 취하게 한 뱀, 욥에게 재앙을 내린 사탄, 예수님에게 세 가지 시험을 한 마귀, 등의 이야기요. 우리는 이제 가장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거요. 하나님이 왜 악의 활동을 허락하시는가, 하는 질문이오. 이것은 앞에서 잠간 언급한 신정론(神正論, Theodizee)에 대한 질문이오. 하인리히 오트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대답할 수 있소.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욥의 대답에서 이를 찾을 수 있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요 42:3,5) 궁극적인 고난과 재앙에 관한 대답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하다는 뜻이오. 둘째는 십자가 신학에서 제공하는 대답이오. 악과 고난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라고 말이오. 셋째는 부활신학에서 제공하는 대답이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무의미성이라는 무(無)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오. 넷째는 종말론적 대답인데, 마지막 날이 이르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오. 다섯째는 윤리적 대답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끊임없이 고난과 악에 대항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오.
위의 설명으로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는 신정론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오. 여기에 대한 완벽한 대답은 없소.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말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어리오. 궁극적인 것 앞에서는 놀랄 뿐이지 더 이상의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오.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쉽게 설명해보리다. 악의 활동으로 인한 이유 없는 고난은 흡사 수술을 받고 있는 중환자의 경우와 비슷한 게 아니겠소? 지금은 고통으로 견딜 수 없지만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면 그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는 것처럼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종말의 순간이 되면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이오. 지금은 아무런 고난과 아픔 없이 사는 것을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날이 오면’ 여기서 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요. 절대적인 세계에서는 그 이전의 상대적인 세계가 별 큰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소. 이런 말로 지금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을 쉽게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오. 고난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은 따로 없으니 감수할 수밖에 없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할 세계가 오기 전의 중간시대(Zwischenzeit)를 살고 있으니 온갖 짐을 질 수 밖에 없소. 그러나 악에게 지지는 말아야 하오. 거기서 절망하지는 말아야 하오.
신정론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악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하지 않았소. 악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대답할 수 없소.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존재론적 세력이라는 사실보다 더 구체적인 것을 말할 수 없소. 그런 세력이 여러 방식으로 성서에 묘사되어 있소. 지금도 그대로 활동하오. 아무래도 한 가지는 더 말해야겠소. 악은 뿔이 달린 괴물이 아니라오. 밖으로 흉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 생각하면 안 되오. 거꾸로 마귀는 세련된 모습으로 활동할 때가 많소. 아주 합리적이기도 하고, 실용적이기도 하고, 도덕군자 연하기도 하오. 이런 악을 거부하되 두려워 떨지는 마시오. 오스카 쿨만은 말하기를 마귀는 하나님의 줄에 매여 있다고 하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계 안에서만 우쭐댈 뿐이오. 쉽지 않겠지만 그대는 오히려 마귀를 조롱할 수 있으면 해 보시오. 그게 안 된다면 거들떠보지도 마시오. 그 녀석들은 날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에 불과하오. 악에 담대하게 맞서기 위해서라도 그대는 마귀를 줄로 제어하고 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오. “악에서 저희를 지켜주소서”
영광송
주기도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소위 영광송이오. 이 구절이 누가복음에는 없소. 고대 사본 중에서도 이 구절이 없는 사본이 제법 되오. 초기 교회가 처음에는 이 구절 없이 주기도를 사용하다가 주기도가 예배 순서와 연결되면서 이 구절을 삽입하게 된 것 같소. 오리지널 주기도에는 없었다는 말이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원래의 주기도에 없는 내용이지만 영광송을 포함시켜서 주기도를 드린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오. 영광송은 당시에 모든 기도에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래서 예수님이 생략한 것일 수도 있소.
이 마지막 영광송에 세 단어가 나오오. 나라(바실레이아), 권세(뒤나미스), 영광(독사)이오. 고대인들에게 나라가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시오. 이스라엘 나라, 로마 나라, 이집트 나라가 있었소. 사람들은 나라에 속하오. 왕의 통치는 나라에서 절대적이오. 고대의 왕정은 나라를 왕의 소유라고 생각했소. 지금은 민중이, 즉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오. 그게 민주주의요. 여전히 대통령이 나라의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는 이들도 있긴 하오. 주기도는 나라가 아버지에게 있다고 하오. 이런 기도는 왕의 목을 쳐야만 가능한 혁명이나 마찬가지요.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이유를 알만 하오.
고대사회에서 권세는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오. 생사여탈권을 왕이 쥐고 있었소. 초기 기독교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시오. 로마제국이 지중에 연안을 지배하고 있었소. 그들은 ‘팍스 로마나’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고의 군사력을 확보했소. 지금의 군작전 개념도 그 기초가 모두 로마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오. 말을 잘 듣는 식민지는 문화와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었지만 거부하는 식민지는 쑥대밭을 만들었소. 고대 로마의 권세를 지금은 누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오? 지금도 모든 나라들이 이런 권세를 쥐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소. 초기 기독교는 그 권세가 아버지에게 속한다고 노래했소. 놀라운 발상이오. 세상 권세의 허위의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노래요. 로마가 기독교를 얼마나 껄끄럽게 생각했을지 상상이 가오?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혁명적 노래를 까맣게 잊어버렸소. 권세자들에게 아부하기 바쁘오. 권세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사실을 포기하고 말았소.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그대는 잘 알 거요. 한 마디만 하리다. 지금 한국교회는 평화운동과 담을 쌓고 있소.
영광은 헬라어 ‘독사’의 번역이오.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훈장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영광스럽다고 말하오. 그것이 명예이기는 하나 영광이라고 할 수는 없소. 왜냐하면 사법고시나 훈장은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오. 그렇게 상대적인 것을 영광이라고 말할 수는 없소. 사람은 그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고 해도 영광을 얻을 수 없소. 다 지나가는 것이오. 그래도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오. 왕들이 대표적이오. 자신들에게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왕권에 온갖 장치를 마련하오.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은 불멸의 꿈도 꾸었소. 아무리 큰 명예를 획득해도 곧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상상이 가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을 거요. 결국 그들은 자신을 미라로 만들어서 피라미드 안에 매장했소. 그런 방식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오. 주기도를 드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왕들에게 영광이 없다는 사실을 주장한 거요. 왕을 영광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거요. 이 세상의 그 어떤 위치의 사람도 영광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이오. 주기도는 일종의 혁명가라 할 수 있소.
주기도의 영광송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했소. 헨델의 칸타타 <메시아>에도 ‘영원히’가 반복되는 노래가 나오오. 영원하다니, 참으로 놀랍지 않소? 우리는 우리 삶이 한 순간이라는 사실만 알뿐이지 ‘영원히’라는 단어의 깊이를 알 수는 없소. 알이 새의 시간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소. 물속의 고기가 물 밖의 세계를 모르는 것과 같소. 동굴 안과 동굴 밖이 다른 것과 같소. 질적으로 다른 생명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속한다는 뜻이오. 초기 기독교는 애송이 시절부터 이렇게 우주론적인 차원에 속한 세계를 노래했소. 주기도에 영광송이 보충되었다는 것은 주기도가 단순히 기도가 아니라 찬송가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요. 주기도는 기도이며, 동시에 찬송이요.
이제 주기도 공부는 다 끝났소. 따라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조금이라도 그대에게 남는 게 있었으면 하오. 주기도 공부를 통해서 기도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기를 바라는 거요. 내가 기도에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는 않았소. 주로 주기도의 내용을 설명하기만 했소. 그러니 다른 질문이 많이 남아 있을 거요. 그것을 내가 정리해보리다.
1) 기도에 반드시 응답이 따르는가?
2)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인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나?
3) 얼마나 자주 기도해야 하나, 얼마나 오래 기도해야 하나, 기도의 시간은?
4) 식사 기도는 반드시 필요한가?
5) 자유기도와 성문기도의 장단점에 대해서.... 6) 기도도 배워야 하는가?
7) 기도가 잘 안 된다. 2, 3분 기도하면 끝이다. 길게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은?
8) 방언기도, 통성기도, 안수기도는?
9) 관상기도, 금식기도, 약정기도, 서원기도에 대해서....
10)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기도하셨나?
11)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가능한가?
12) 기도하지 않으면서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한가?
13) 강청기도는 신앙적인가? 14)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을 붙여야하나?
15) 꼭 무릎을 꿇거나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기도해야 하나?
16) 시편에는 저주 기도가 나오는데, 그것도 신앙적인가?
17) 결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하나?
18)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한다는 말(롬8:26)이 무슨 뜻인가?
위의 목록으로 기도에 대한 모든 궁금증이 다 해소될 수는 없을 거요. 지금 이 자리에서 위 목록에 대한 대답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소.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천천히 설명해보리다.
그대는 이번 주기도를 주제로 한 매일묵상을 통해서 기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소? 더 심화되었소, 아니면 부담이 더 심해졌소, 아니면 기도 냉소주의로 흘렀소? 기도를 너무 조심하느라 기도를 멀리하지 않기를 바라오. 성서는 어느 한 군데에서도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 구절이 없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오. 그분에게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기도를 드려야 하오. 아버지에게 어린아이들의 요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버지는 그것을 듣기 원하는 것과 같소. 그러니 우리가 어찌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소. 기도하시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그대의 영혼을 하나님에게 집중해보시오.
마지막으로 주기도의 마지막 단어인 ‘아멘’을 그대에게 화두로 주고 싶소. 우리는 기도 끝에 ‘아멘’으로 화답하오. 아멘은 히브리어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는 ‘옳습니다.’는 뜻이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할 때의 그 진실로가 ‘아멘’이오. 주기도가 아멘으로 끝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 기도의 내용대로 살겠다는 뜻이기도 하오. 아멘은 궁극적으로 진리논쟁인 셈이오. 진리를 알아가고, 진리대로 행동하는 투쟁이오. ‘진리’를 생각해보았소? 무엇이 진리요?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소.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그러자 빌라도는 이렇게 물었소. “진리가 무엇이냐?” 주기도가 진리라는 것을 그대가 이번에 배웠기를 바라오.
이제 진짜 마지막이오. 기도에 자신이 없는 그대에게 주는 조언이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책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마지막 대목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오. 그가 어머니를 뵈러 양로원을 방문했다고 하오. 마침 식당에서 예배가 드려졌소. 어떤 설교자가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으나 별로 반응이 없었소. 죽음을 눈앞에 둘 정도로 나이가 많은 이들이래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던 거요. 그런데 설교자가 ‘주기도’를 시작하자 모든 노인 회중들이 따라서 주기도를 드렸다고 하오. 주기도가 그들에게 체화된 거요. 그대는 죽는 순간에 주기도가 저절로 나올 수 있도록 주기도에 힘쓰시오. 다른 기도를 모른다 해도 하루 중 잠에 깨어난 순간, 그리고 잠들기 전에 주기도를 드리시오. 주기도에 그대의 영혼을 걸어두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