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主化’운동의 시작점에는 ‘建國 불복’이 있지만,
결국, 우파에서 ‘정체성’문제로 말하고, 좌파에서 ‘색깔론’이라고 말하는 것의 핵심은 한 가지다. ‘민주화’운동의 시작점에는 ‘건국 불복’이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아무개가 빨갱이다!’하면 왜 그렇게 부끄러워 하는가? 왜, 우파는 못 잡아 먹어 안달하는가? 배경에서의 ‘근본 이유’는 간단한 것이었다.
혹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럴까? 당대의 일반인들의 익명의 데모꾼 수준에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역사를 기록하는 좌파 지식인의 입장에선 분명히 다르다. 좌파 역사가 어디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 기록은 ‘惡’의 승계 쯤으로 기록된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의 시작은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에 대하여 ‘미국’에 업혀서 ‘일본’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바의 비판으로 기록된다. ‘대한민국 헌법’은 기득권의 보호요 대한민국 헌법 정립 이전의 남쪽 지역의 공산주의적 경향성이 ‘일반적인 것’으로 주장된다. 그러나, 좌파 논거대로 따라가면 ‘공산주의 공동체’에서 전향자로서의 ‘합법운동가’들에 대한 질책이고, 일반 소시민들의 ‘헌법’에 기록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체제 보호의 국가보안법은 ‘기득권’과 아무 상관없이 절대로 중요하게 된다.
좌파 텍스트가 개방되었다. 넉넉하게 연구된 거 터뜨려서 심기가 노여우면 안되며, 심기가 노여우면 어떻게 하겠다는 협박 상황은 심히 갑갑하다. 박근혜대표에 대하여 부족한 부분과 잘못에 대하여 얼마든지 비판이 가능하다.
李 최고위원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한나라당은 집권한다 하더라도 장악력 미흡으로서 김대중 정부 초기의 모양새를 할 가능성이 높다. 김대중에 대한 공략은 사실상 포기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간은 분명히 통일 흐름을 이어가겠다는 선언도 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는 즉시, 풀뿌리 수준에 대해서도 ‘정서’를 앞질러 가는 갑작스러운 보수화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러한 수준에서도, 한나라당의 당 지지자에 ‘꿈’과 ‘열망’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조차 ‘애국우파’입장에서 불만에 대한 토로를 하지 않는다면, 좌파 열린당 미디어가 ‘양여’해주는 권력만을 받아먹는 입장을 택하겠다는 바가 아닐까?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군중들의 감수성을 과도하게 초과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 상황이 ‘문민정부’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각자의 마음들에 물어보고 싶다.
사사껀껀 뭐든지 ‘몰아간다’라는 말을 지적하는 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신문 정치란이 크게 일부 이슈를 크게 키워서 터뜨려서 나아간다는 뜻의 내용이다. 빨갱이로 ‘몰지도’ 않았고(대한민국의 정당한 역사의 긍정성을 지킨다는 차원의 목소리를 ‘기득권’으로 보는 표현에서도, 사회의 위기 상황에서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수준의 토로감정 이상이 일반 지지자의 차원에선 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간적 감정으로 상처를 주지 않았다는 말도 아니다. 김영삼 정부 때에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정치를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한번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국민’이 기대하는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면서도 ‘보수정체성’으로 평가되는 바가, 어떠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곰곰이 묻고 싶어진다.
열린당의 약점을 공격하려 하면 반드시 공격을 하지 않는 시대로서 90년대 김영삼 정부가 시작되었다는 흐름의 모습의 지속된 출현은, 1997년과 2002년 대선 실패의 주된 원인이었다. 1주일간 시간 보고 복귀하겠다는 바에 대해서는,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 실패의 그 길대로 나아가는 것을 기다리겠다는 말로 여겨진다. ‘건국 불복’에 이어지는 바에 대해서 한나라당 지지자가 양보할 수 없고, 그것을 밝히면서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길 바라면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북한의 ‘선군 타령’으로 한국의 국방력을 제로 베이스화하겠다는 타령이 나오는 순간에서, ‘건국 정당성’의 확인을 말하면 자신들을 불쾌하게 했기 때문에 안된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스카보로 페어]의 노래가사 처럼 들려진다. ‘민주화’세력의 머리에는 ‘건국 불복’정신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바탕을 마지막까지 옹고집 처럼 똥베짱으로 유지되었을 때에, 대화와 타협이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상황에서의 ‘언어’의 한계를 대단히 즐기는 듯 하다. 10년 간 한솥밥을 먹어왔던 이에게 그토록 감정적 공략을 했음에는 심히 유감스럽다. 그러나, 북한이 ‘선군 타령’하는 국면에서의 한나라당의 보수적 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기득권 운운’하는 바에서는, 자유민주주의적 정당성으로는 합당했다고 여겨진다.
한나라당으로서 하나의 가족임에 대하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연 하나의 가족으로서 ‘무엇을 해왔는지’ 궁금해진다. 이최고위원은 외형상 많은 것을 해왔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결국, 이명박 전 시장의 이최고위원 지지 선언과 이명박 전 시장의 ‘이념전쟁’의 두 손 두 발 놓기의 일관된 자세가, 이최고위원에 대한 감정적 과장을 사실상 만들었다.
김영삼 문민정부는 보수적 가치를 중시하면서 좌파 자료 공개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성세대 우파들이 모르는 영역을 속속들이 아는 좌파 영역을 우파의 눈으로 재단하는 입장을 허락해야 했다. 그러한 차원이 가능하도록 터놓고 자기를 맞춰 가며 변화를 했었어야만 옳았다.
김영삼 김대중의 라이벌 관계에 ‘보수’ 대 ‘진보’의 입장을 씌우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때는 편했다. 그러나, 그러한 라이벌 관계에 그렇게 공식 세우면 서로가 서로에게 변형적 보증서기와 지원으로서 다른 내용을 사실상 말하지 못하게 한다.
이명박 시장에 ‘이념 투사’로서의 모습을 주문하면, 내년의 대권 후보에서 한나라당에서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선다. ‘이념 투사’로서의 모습을 포기한 입장으로서, 열린당에 다정다감한 건설 회장 이미지는 온당치 않다. 당내 여론조사 해보고서 경선에 빠진다는 말은 비겁의 극치이다. 왜, 건국 정당성 승복의 입장에서의 자연적인 이념 지평은 왜 언제까지 안 얻으려는가? 그저, 김영삼 보호 입장의 형식주의적 농담이 아니라, 건국 정당성 승복 차원에서 진심으로 행동한다는 신뢰와 믿음을 따는 시간이면, 넉넉하게 이명박 강세 국면이 이루어질 것으로 본다.
민주화운동의 기점에 건국 정당성 불복이 있으니, 건국 정당성 승복의 정상행위자는 기득권 행위자에 수구꼴통이 되어 버리는 논리가 형성된다. 건국 정당성 불복의 정신을 되살리는 바탕의 일체의 집단 문화가 싫다. 그렇다고, 반체제운동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유대주의 율법주의로 나아가고 싶지는 않다.
외국은 노동유연성까지 접어들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어째서 노동유연성까지를 무력 없이 사회적 합의를 하지 못할까? 정말로, 한나라당 지지자가 이최고위원(그보다는 이명박 시장에 대한 실망감이 만든 바가 더 컸다! 이명박시장의 노골적 경선 지원 표현이, 이명박 시장에 대한 실망감이 이재오최고위원에 투사되게 만들었다.)에 갖는 실망감은, 한국 사회가 노동유연성까지를 무력 없이 합의하지 못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로서의 책임감 문제에 해당된다고 본다. 노동유연성인즉 ‘국민국가’의 국민복리 위주의 통치력의 승복이다. 통치력과 경영력이 종합되어 이윤이 많을 때 직장수가 진정하게 늘어난다.
‘한나라당’의 시작에는 그렇다면 무엇이 있었는가? 김영삼 문민정부의 경제 실정이 드러나자 마자, 성급하게 봉합하고 정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좌파적 가치에 타협하기만 했던 바탕에 있다. 한나라당의 첫 앰블램은 한반도기였다. 훗날 한나라당이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는 한나라당의 앰블램에 대해서, 왜 그리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러한 이회창 체제가 붕괴되어도 한나라당이요, 최병렬 박근혜대표 체제가 되어도 한나라당이었다.
2007년 대선은 대선 승리가 되면 계속 북한민주화운동의 수호지로서 ‘대국가당’의 자세가 유지겠고, 대선 실패가 되면 사실상 ‘대국가당’의 종말이 날 가능성이 많다. 한나라당이 박근혜당이란 말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박근혜당이라면 ‘당명’에 대한 교체가 이루어지고도 남았어야만 한다. 당의 성질 변경에 절대 불허한다는 김문수의원의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한나라당의 시작은 이회창 자녀 문제로서 지지율 하락 국면을 만회하기 위해서 정신없이 좌파에 타협할 때이다. 한나라당은 ‘인물 중심 사당’으로서의 모습을 사실상 버렸다. 당명 변경으로서 ‘인물 중심 사당’의 기회에서도, 당의 성질 변경은 불허가 되었다. 따라서, 한나라당은 ‘북한민주화운동’의 이유가 남아있는 한 ‘하나로 존재’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곳이 된다.
대한민국 역사에 반체제 인사를 악으로 기록하고, 민주화운동(반체제)역사에 정권 수호자들을 악으로 모는 것을 다 인정하는 측면의, 언어 곡예는 곡예자를 비참하고 서럽게 만든다. 한나라당은 한나라당 고유의 형이상학과 진리가 있다.
한나라당은 이회창 자녀 문제로서 지지율 하락 국면을 만회하기 위해서 급조되었던 한계를 가졌지만, 나름대로 개별 정치인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바닥을 가지고 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마지막은 창대했으면 좋겠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