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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서 피를 뽑힌 채 정신을 잃은 여자가 남자 두 명에게 이끌려 밖으로 옮겨졌다. 소진이
신경질을 내며 피가 담긴 유리시험관을 벽에 던졌다. 실험기계 화면에 불일치라는 표시가 깜
박였다.
“왜 못 찾아내는 거야?”
“그게.. 이 타투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때 흰색 가운을 입고 두꺼운 안경을 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남자가 들어왔다.
“아무나 데려오니까 그렇지. 여기 연구자료에 의하면 이 타투가 왼쪽 어깨에 만들어진 때가
17살. 13년 전에 우리를 피해 급하게 주사를 놓았다고 써 있어. 아마 맞고 나서 아팠겠지만
병원에 가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정확히 30세라는 말이지. 아무나 잡아오지 말고
30세 여자를 찾아. 그리고 이런 비슷한 타투를 한 사람 말고.. 이런 타투를 알고 있는 여자를
찾아.”
“30세?”
소진이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님.”
“왜?”
“이것 좀 보십시오.”
유형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최근에 신고한 사람들 중에 공통점이 발견된 자들이 있습니다.”
“무슨 신고를 했는데?”
“괴한에게 납치되어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인적이 드문 공터에서 쓰러져 있었답니다.”
“그런 시답잖은 사건 말고 지난 번 은행강도 사건 좀 더 캐 봐.”
“그런데 말입이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
“신고를 한 여자 3명 다 왼쪽 어깨에 비슷한 타투를 했고, 피를 뽑힌 것 같다고 증언했습니다.”
한반장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언니가 배우 최예나한테 타투해준 사람이죠?”
“아니거든요. 내가 어떻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을 만나겠어요?”
“그래요? 언니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할 거에요, 말 거에요?”
“하.. 할거에요.”
여자손님이 침대에 누웠다.
“정말 이 도안 괜찮겠어요?”
“네. 제 남자친구가 그 타투가 섹시해 보인다면서 꼭 하라는 건 아니라고 말하더라구요. 알죠? 남자가 그렇게 말 하면 꼭 하라는 뜻이라는 거.”
“타투 처음 아니에요?”
“맞아요. 그래서 지금 엄청 긴장돼요. 제가 말이 많은 건 다 긴장 때문이에요.”
“네~.”
규린이 몸을 돌려 여자손님의 왼쪽 어깨에 문신을 만들려고 하는데 여자손님이 침대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들어올렸다.
“언니.. 그거 안 아파요?”
“아파요~.”
“그래요?”
“지워지는 것도 있어요. 그건 안 아파요. 그걸로 해 줘요?”
“하지만 남자친구가 그런 건 짝퉁같다고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남자랑 결혼 할 거예요?”
“네?”
“결혼할 남자 아니면 그런 남자 말대로 하지 마요.”
“2년 동안 짝사랑 했었어요. 이제야 제 인생이 꽃밭 되었는데.. 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난 그 남자와 결혼할 거예요.”
“그 남자도 같은 생각이에요?”
“아마..도요?”
“다시 생각할 시간 줄게요. 한 번하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흔적이 남아요.”
여자직원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고민하더니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할래요. 언니.. 대신 빨리 해 주세요.”
“알았어요. 시작합니다.”
규린이 여자손님의 어깨에 별 모양 안에 꽃이 가득한 모양의 타투를 하기 시작했다.
<형.. 방해해서 미안한데.. 급한데.>
그의 차 스피커에서 진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혁이 그녀를 안은 팔을 살짝 풀었다.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든 혜영이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옷깃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옷깃을 만
지는 그녀의 손을 잡고 차로 향했다. 그녀를 조수석에 앉히고 차 문을 닫았다. 그가 빙 돌아
차에 오르기 전에 스피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형이 이어폰을 안 끼우고 있어서..>
혜영이 피식 웃었다. 도혁이 차에 오르면서 그녀의 얼굴을 살피며 뭐냐는 듯 표정을 짓자 혜영이 고개를 저었다.
“이어폰 이제 꽂을 테니까 주파수 바꿔.”
<응.>
도혁이 주머니에서 작은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집에 데려다 줄게.”
“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시켰다.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조심해서.. 가요.”
그가 차에 등을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봐요..”
“올라가. 문 단 속 잘하고..”
“네.”
그녀가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기대어 그의 차를 내려다보
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혜영도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가
몸을 돌려 차에 오르고 출발했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천천히 책상에서 내려왔다.
“무슨 일인데?”
<집에 와서 사진이랑 같이 보는 게 좋겠어.>
“알았다.”
<형..>
“응?”
<좋아?>
“시끄러워!”
도혁이 이어폰을 뺐다. 진혁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를 마친 혜영은 한 숨을 내쉬며 TV를 틀었다. 그리고 뉴스채널에 고정시키고 커피를 마셨다.
원성과 함께 화면을 보면서 진혁의 설명을 들었다.
“아직 뉴스에 보도되지 않은 내용이에요. 실제로 살인이나 강간이 일어난 게 아니기 때문에
윗선에서도 긴장만 하고 있을 뿐이고요. 그런데 오늘 경찰서 컴퓨터 한 대에 이런 자료가 떴
어요.”
진혁이 화면에 세 명의 피해자 사진을 띄웠다.
“나이가 규칙적이지 않아요. 27세, 43세, 35세. 하지만 이 여자들에게 비슷한 특징이 있는데 왼쪽 어깨에 비슷한 모양의 타투가 있어요.”
진혁이 세 사람의 타투를 확대해서 띄웠다.
“별모양 안에 꽃?”
“네. 최근 여자배우 최예나가 해서 유명해진 타투에요. 묘하고 아름다운 모양 때문에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선호한다고 해요.”
“흔해진 타투를 갖은 여자들을 왜?”
“팔에 피를 뽑은 흔적이.. 있대요.”
원성과 도혁이 놀란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혁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혹시.. 그거 찾는 거 아니에요?”
“찾았다고 하지 않았어?”
원성이 도혁에게 물었다.
“네.”
“그럼 그들이 찾는 건 뭐지?”
“모르겠어요.”
“뭔지 몰라도 그들보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것 같다. 비슷한 피해자가 더 나오는지 살펴 줘.”
“네~.”
도혁이 냉장고 문을 여는데 그의 핸드폰이 징~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문을 닫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넣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냈다.
“쟤.. 뭐냐?”
원성이 진혁에게 물었다.
“소름끼치죠?”
“조금.. 뭔데?”
“난 늘 영감이랑 형수 보면서 소름끼치거든요?”
“뭔 소리야~. 아~. 닭살 돋는다고?”
“소름! 응? 소름이라고!”
“설마.. 저 녀석..”
“맞아요. 맞습니다. 삽사리푸들이랑 같이 있다가 들어온 길이에요.”
“삽사리푸들? 아.. 혜영씨?”
“저 문자도 그 여자일테지.. 일하러 나갈 때 저 폰은 압수해야지. 어디 집중하겠나..”
원성이 도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올라가서 쉬고 있을 테니까 불러..”
“응.”
“형도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도혁아..”
계단을 올라가던 도혁이 멈추고 원성을 바라보았다.
“소중히 해라.”
“네.”
도혁이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원성이 진혁을 팔꿈치로 눌렀다.
“아! 영감! 뭐하는 거지? 응?”
“힘 자랑하는 중이시지~.”
“진짜! 아파.. 아프다고..”
진혁이 손으로 원성을 때렸다.
밤사이에 그녀가 주목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TV를 끄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한 그녀를 기다리는 건 솔희였다.
“일찍 왔네?”
“알았어.”
혜영이 코트를 벗다가 조금 멈칫하고는 “무슨 소리야?” 라고 말하며 코트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몸을 돌려 솔희를 바라보았다. 솔희가 그녀의 책상에서 내려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즘 남자직원들이 너에게 말을 거는 이유.”
“아.. 이유가 있긴 있어?”
혜영이 웃으며 책상을 빙 돌아 의자에 앉았다.
“넌 루저의 천사야.”
“뭐?”
“루저들의 천사라고. 네가 다른 여자직원들이 말을 걸지 않는 루저의 대명사 박한성씨와 사진
이 찍히고 난 후부터야. 남자직원들 특히나 소심하고, 연애에 소질이 없어 보이는 남자들이
너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뭔가를 물어보기 시작한 게..”
“설마..”
“얘가..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 어떻게 하려고.. 맞다니까.”
“친절한 대화를 원하는 거라면.. 난 괜찮은데?”
“설마 그들이 너에게 대화만을 원할 것 같아?”
“아닐..까..?”
“한성씨와 저녁식사를 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어. 근사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지고.”
“다진이.. 이것을 그냥..”
“점점 나를 닮아간다?”
“그런가..?”
혜영이 피식 웃었다.
“너랑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분명히 생길 거야. 그럼 절대로 응하면 안 돼.”
“응. 그래야지.”
솔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소 지었다.
“왜?”
“그냥.. 다른 루저들과 한성씨의 차이점이 뭔데?”
“다른 직원들은 잘 모르고, 한성씨는 바로 옆 사무실이어서 자주 봤고, 어떤 사람인지 관찰하기도 했고.”
“관찰도 했었어?”
“말했잖아. 스파이 같다고..”
“아직도 그 얘기야?”
솔희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선까지만 할 거야. 저녁식사나 데이트 신청은 받지 않아.”
“그런 마인드로 연말 파티에서 다진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겠어?”
혜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납작 엎드려야지 뭐. 내가 졌소~.”
혜영이 허리와 목과 머리를 구부리듯 앞으로 숙이며 양 팔을 앞으로 뻗었다.
“하여간 루저들에게 조심하고..”
“응. 고마워."
솔희가 밖으로 나가고 혜영은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컴퓨터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
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그녀의 양 볼에 홍조가 올랐다. 그리고 입가
에 미소가 번졌다. 컴퓨터를 켜고 서류를 들었는데 문이 다시 열리고 솔희의 얼굴이 들어왔
다.
“너 남자있지!”
“응?”
혜영이 흠칫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역시.. 있구나?”
“아니..”
“거짓말은.. 얼굴에 다 티 나는구만.. 어제 좋은 일 있었지? 최근 달걀 귀신같은 모습과 전혀 다른 분위기야.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낱낱이 말해줘야 할 것이야.”
솔희가 눈을 찡끗하고 문을 닫았다. 그녀가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오후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네.”
고개를 들자 다른 층에서 근무하는 최호성이라는 직원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혜영씨.”
“네.”
“안녕하세요.”
“네. 무슨 일이시죠?”
“오늘 저녁 퇴근 후에 시간 괜찮으세요?”
“왜 그러시죠?”
“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지금 하시죠.”
“아니 그것보다는 저녁식사를 하시면서..”
혜영은 아침에 솔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죄송해요. 근무시간 이외에는 저도 일이 있어서요. 연말 파티 준비도 해야 하고..”
“아.. 죄송합니다.”
그가 붉어진 얼굴로 문을 닫고 나갔다. 혜영이 손을 들어 이마를 감쌌다.
“진짜인가? 내가.. 그들의 천사라고? 후우..”
그녀는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일을 시작했다.
솔희와 인사를 하고 지하철역으로 걸으면서 그녀는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제 같은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왜요?”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그렇게 물어?>
“치.. 알았어요.”
그녀는 핸드폰을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신혜영씨.”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최호성씨..”
“바쁘세요?”
“네. 조금.. 왜 그러시죠?”
“저녁식사 하시죠.”
“제가 왜 최호성씨와 저녁을 먹어야 하죠?”
“그건.. 그거야.. ”
“제가 박한성씨와 저녁식사를 했기 때문인가요?”
그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박한성씨는 같은 층에서 1년 동안 같이 근무했어요. 일하면서 그 분의 됨됨이를 알았기 때문
에 저녁식사를 같이 한 거예요. 물론 둘이서 한 것도 아니구요.”
“아니라구요?”
“네. 다른 남자분이랑 셋이서 함께 했어요. 도중에 박한성씨는 먼저 일어나서 가셨구요.”
“그럼 데이트를 하신 게.. 아니란 말씀이세요?”
“사귀지도 않는 분과 데이트라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혜영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혜영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저녁 식사를 해요. 말을 해 봐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겠어요?”
그녀는 그의 눈에서 광기 비슷한 걸 보았다. 아마도 간절함이 만들어 낸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좋아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런 방법은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아요.”
혜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그래요?”
“천천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세요. 박한성씨는 1년 동안 저에게 말도 걸지 않으셨어요. 여자들
은 관찰하는 걸 좋아한답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 자신감을 갖으시고
패션 잡지도 좀 보시고, 열심히 일하셔서 능력을 보여주세요. 분명히 호성씨를 마음에 들어할
여성분이 계실거에요.”
그녀가 미소 지으며 그의 팔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가 더욱 세게 잡았다. 그의 눈빛이 진해졌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거.. 놓으세요.”
“싫다면.”
혜영의 심장박동이 거세어졌다.
“내가 노력 안 해 본 줄 알아? 그래도 여자들은.. 날 루저라는 그룹에 마음대로 넣었어. 너랑 저녁식사라도 해서 사진이 찍히면.. 난 그 그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틀려요.”
“시끄러워.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해.”
그가 그녀의 팔을 끌고 길에 세워놓은 자시의 차로 이끌었다. 그녀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에 힘을 주었다. 그에게 잡힌 팔이 빠질 것 같았다.
“이거 놓으세요!”
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옆구리에 뭔가로 살짝 찔렀다.
“시끄러워. 조용히 가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어.”
그녀의 몸이 떨려왔지만 겁먹은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녁 먹죠. 하지만 이런 식은 곤란해요.”
그가 그녀에게서 조금 멀어지며 주머니에 칼을 넣었다.
“나도 신사답게 하고 싶었어.”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혁은 그녀가 남자직원과 말다툼에 몸싸움까지 하는 소리를 들으며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그녀가 바닥에 앉아 숨을 몰아쉬며 멍하게 앉아 있었다. 거칠게 차를 세우고 내린 도혁이 대
로를 뛰어 건너 그녀에게 달려가 앞에 한 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그녀의 턱 아래 손을 대
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괜찮아?”
그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대답대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 자식은 어디 갔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나를 밀치고 차에 타더니 가버렸어요. 아마도 한성씨 차가 다가오는 소릴 들었나봐요.”
그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바보를 혼내는 건 조금 있다가 하지.”
그녀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화가 난 듯 빠르게 걷자 다리 길이가 차이가 나는 그녀는 거의 날아가듯 뛰어야만 했다.
“저기.. 화가 난 건 알겠는데.. 아파요..”
그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와 줘서..”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볼을 만졌다.
“울지 말던가, 웃지를 말던가..”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커다란 손에 얼굴을 묻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코트를 잡았다. 잠시 후
그녀는 그의 차 조수석에 앉아 그의 코트 주머니를 잡고 잠이 들었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그가 차를 세우고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안쓰러웠다. 그가 그
녀 가까이에 다가가 손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흠칫 놀라 눈을 뜨고 그를 바라
보았다.
“아.. 벌써 다 왔어요? 미안해요. 혼자 잠들어 버려서..”
그녀가 안전벨트를 풀고 그를 바라보았다.
“원래 크게 놀라면 잠을 잘 못 자는데.. 당신이 옆에 있어줘서 안심이 됐나봐요.”
그녀가 미소를 짓자 그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웃지 마. 하나도 안 예쁘니까..”
“알아요. 원래부터 안 예쁜 거..”
“들어가서 거울보고 놀라지나 말라고..”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화장 번졌구나.. 그럼 얼른 들어갈래요.”
그녀가 양 손을 펴서 얼굴을 가렸다.
“이제껏 무방비로 다 보여줘 놓고 새삼스럽게..”
“지금이라도 신비주위로 가려구요. 그럼 조심해서 가요. 오늘도.. 조심하시구요.”
그녀가 몸을 돌려 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최호성에게 잡힌 부분을 그가 건드리자 그녀가 움찔했다.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파?”
“멍들었나봐요. 괜찮아요. 씻고 약 바르면 돼요. 갈게요.”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그도 내렸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도혁을 바라보았다.
“왜 내려요?”
“같이 가.”
“됐어요..”
그녀가 당황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5분이요. 5분 후에 한 계단, 한 계단 이름 붙여가면서 올라와요.”
그녀가 말을 마치고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4층에 다다랐을 때 그녀의 심장은
크게 뛰고 있었고, 호흡을 거칠어져 있었다. 그는 조금 전 그녀의 두려움에 떠는 심장소리를
듣고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할까 두려움을 느낀 것이 떠올랐다. 손이 저릿하자 그는 주먹을 쥐
었다가 폈다. 그녀가 방을 정리하는 우당탕당 소리가 들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창문이 열리
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올라오세요.”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고 계단을 올라갔다. 4층에 도착하자 그녀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가 현관으로 들어오자 그녀가 문을 닫았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그를 지나쳐 주
방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랑 변화가 별로 없었다. 그가 구두를 벗으
며 물었다.
“엄청난 소리가 나던데.. 뭘 치운 거야?”
“허! 안 치웠거든요?”
그녀가 당황한 듯 어이없다는 웃음과 함께 말했다.
“내숭은..”
“저녁 준비할 테니까 드시고 가세요.”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저녁 먹으려고 올라온다고 한 거 아닌데.”
그가 깊어진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심장이 다른 기분으로 투닥
거렸다. 그가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내 실패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낮은 웃음소
리에 그녀는 심장이 귀에서 뛰는 것 같았다. 그가 더 큰 소리로 웃었다.
“왜.. 왜 웃어요..”
그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귀여워서..”
그녀는 확 붉어진 얼굴을 뒤로 젖히며 귀를 손으로 막았다.
“하하하.. 상처.. 확인하려고 온 거야.”
“아..”
그녀가 창피해져서 몸을 돌렸다.
“무슨 상상을 한 거야? 심장 소리 엄청 난데..”
“내가 뭘.. 아무 것도..”
“정말 아무것도?”
그가 그녀 바로 뒤에 섰다.
“치사하게..”
그가 웃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입맞춤을 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정수리를 눌렀다.
“왜.. 자꾸 놀려요..”
“귀여우니까. 하지만 일단 상처부터 보고.”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 그가 보기 쉽게 커다란 반팔 티셔츠를 들고 욕실에 들어가 갈아입었
다. 그 사이 그는 비닐팩을 꺼내 얼음을 담고 수건으로 감쌌다. 그녀가 다시 나와서는 팔을
뒤로 감추었다.
“제가 봤는데.. 약 바르면 괜찮을 것 같아요.”
“꿈도 꾸지 마.”
그가 그녀가 잘 하는 말을 흉내내어 말했다.
“팔.”
그가 손을 뻗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 닿지 않게 뒷걸음질을 쳤다.
“좁은 방에서 술래잡기 하자는 건 아니지?”
“정말 괜찮아요.”
그가 다가와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느 정도 인지 예상하고 있으니까 놀라지 않을게. 더 이상 도망치지 마.”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팔을 내렸다. 그가 그녀의 왼쪽 팔을 살폈다. 소매를 조금 들어올리자 검게 멍든 팔이 보였다.
“별거 아니죠..”
그는 대답대신 얼음을 감은 수건을 그녀의 팔에 대고 수건 끝을 묶었다. 그녀가 움찔했다.
“어제 할 말이 있었는데 정작 그 말은 안 하고 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런 일이 생길줄은 몰랐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요?”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난 보통 사람보다 감각이 좋은 편이야. 사람들 소리를 잘 듣고, 냄새도 잘 맡고, 잘 보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고..”
“얼마나.. 잘 들어요?”
그녀가 긴장하는 걸 느낀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른 나가는 게 좋겠어요.”
그는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자신의 특별한 능력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어.”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상처받은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그녀가 봤다.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틀려요. 당신이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어요. 평범한 사람이 그런 일을 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지금 당신보고 가라고 하는 건..”
그녀가 볼을 붉혔다.
“내 심장이 얼마나 미친 듯이 뛰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진 않는
지.. 내 눈에는 안 보이는 게 당신 눈에 보일까봐.. 창피해서.. 그래서 그런 거라구요. 가더라
도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가 그녀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그가 그녀의 어깨 위로 팔을 둘러 그녀의 목을 팔로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 위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댔다.
“고마워.. 당신의 말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모르지..”
그녀가 오른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잡았다.
“알았으니까.. 얼른 나가요. 나중에 청소 완벽하게 하고 나서 다시 초대할 테니까..”
“당신 심장소리는 어쩌고?”
“안정제 먹죠.”
그가 그녀의 머리위에 턱을 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그의 낮은 웃음소리와 코 앞에 있는 그의 옷에서 나는 향기에 다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녀가 그를 밀어냈다.
“공평하지 않아요. 난.. 모르겠는데.. 당신이 지금 어떤지..”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볍게 끌어 당겨 자신의 왼쪽 가슴에 그녀의 귀를 대도록 안았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만큼이나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오늘.. 고마웠어요. 덕분에 살았어요.”
“조심해. 나랑 소문이 나는 바람에 당신이 곤란해져서 걱정이야. 아무나 잘 도와주는 당신도 문제이기도 하고..”
“솔희가 그러던데요? 제가.. 그들의 천사라고.. 하지만 분명히 나쁜 마음을 갖고 한 행동은 아닐거에요.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조바심이 나서.. 그래서 그랬을 거에요.”
“이런 바보.. 남자들이 그렇게 당신 생각처럼 착한 쪽으로만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제대로 된 시나리오 하나 또 생각해 보죠. 뭐..”
“어떤 시나리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걱정되는 데.. 어떤 폭탄을 던질지..”
“연말 파티 계획은 정말 나 혼자 세우는 거예요? 얼마 안 남았다구요.”
“아.. 내 도움이 필요한가?”
“물론이죠. 당신은 그 날.. 내 파트너로 참석하게 될 거예요.”
그녀가 그의 옷깃을 만지며 말했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
“걱정하지 마요. 그날 당신은.. 박한성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남자도 아니에요. 그냥.. 내 남자에요.”
그녀가 수줍게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가 의심가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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