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5월6일(토)■
(신명기 3장)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29 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
(묵상/신 3:23-29)
◆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표면적 이유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모세는 정말 간절했다.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무려 40년이나 광야를 헤매면서 다니지 않았던가? 그런데 모세가 말년에 치명적 실수를 했다.
사건은 출애굽 40년째다(민 20:1-13).
백성이 물이 없어서 불평했다. 세일산 주변을 다닐 때는 계속 물 주변을 돌았으니까, 문제가 없었는데, 북쪽으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신 2:1) 가데스 바네아까지 왔을 때 백성들은 물이 없어서 불평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이 모세를 비난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민 20:4)
원망하면서 애굽의 종살이를 또 비교하는 것을 보니 출애굽 40년째에도 여전히 당시 사람들이 살아있었던 듯하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다.
모세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민 20:10)
마치 자신이 물을 내게 하는 것처럼 건방을 떨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팔을 높이 들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때림으로써 누가 봐도 모세가 자기 능력으로 물을 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했다. 결국 모세는 이 일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반석에서 물을 내는 일명 '므리바' 사건은 광야 시기에 두 번 일어났다.
최초는 출애굽 첫해에 일어났다(출 17:1-7).
그때는 하나님께서 반석을 치라고 하셨다(출 17:6). 아마도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모세를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백성 중에서 높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명령하셨을지 모른다. 그때는 아무 문제 없었다.
두 번째는 출애굽 40년 차다. 이제 모세는 지도자로서의 위치와 리더십은 매우 확고해졌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반석을 치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냥 지팡이를 가지고 명령할 것을 명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경험대로 반석을 쳤다. 1년 차에서는 긴가민가하면서 지팡이를 반석에 대는 수준이었다면, 40년 차에서는 마치 자신이 반석을 쪼개는 것처럼 두 번이나 내리쳤다.
우리가 사역하면서 많이 범하는 실수다. 우리의 경험을 의지해서 익숙한 방식대로 하다 보면 어느덧 교만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취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역하는 자들은 점점 사람들에게 높아질수록 오히려 힘을 빼야 하고 의도적으로 숨겨야 한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자신을 과대평가할까 봐 간증을 생략했다(고후 12:6). 이런 사도 바울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안수한답시고 머리를 쥐어짜듯이 꽉 잡는 행위나, 아픈 곳을 기 치료하듯이 손대고 마사지하거나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몽둥이 드는 행위들이 모두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사역 초기에는 마치 내 힘으로 무언가 하는 것처럼 해도 봐주실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오랫동안 섬겨온 자가 초신자처럼 행세했다가는 버림받는다(고전 9:27). 내 힘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주님의 능력이며 주님의 힘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모세는 이 사건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모세는 후회하고 회개했겠지만, 하나님의 징계는 철회되지는 않았다. 모세는 결국 느보산에 올라가서 죽었다. 정확히는 느보산에서 2km 떨어진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신 32:1)에 올라가서 가나안을 바라보고 마지막을 맞이했다.
26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된 것이 '너희 때문'이라고 한다. 남 탓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므리바 사건은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싸잡아서 비난했기 때문에 감정이 상해서 저질러진 사건이었다. 도대체 40년 동안 월급 한 푼 안 받고 백성들을 위해 수고했건만, 감사할 줄은 모르고, 언제나 잘못은 자기들이 저질러놓고 문제만 생기면 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느냐며 모세를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어찌 화나지 않았겠는가?
◆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구속사적 이유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오직 여호수아가 데리고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다(28).
왜 모세는 안되고 여호수아이어야만 하는가?
표면적인 문제는 모세의 실수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더 깊은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다. 우리는 여호수아라는 이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여호수아는 '예수'의 히브리 발음이다. 여호수아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예수아'(스 2:2)로 발음이 바뀌었다. 헬라어로는 '예수스Ἰησοῦς'라고 한다. 모두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다.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는 구약의 여호수아, 예수아를 모두 헬라어 '예수스 Ἰησοῦς'로 표기한다.
모세는 종종 율법을 상징한다(눅 2:22). 그런데 율법의 역할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에는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이끌어야 한다. 이는 먼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써 구원받으며, 모세가 아닌 예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실 구주가 되실 것을 암시한다.
율법은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인임을 인식하게 하지만,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이것이 모세의 한계다. 율법의 역할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도하는 역할, 딱 거기까지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3-25)
따라서 모세의 역할은 가나안 입구에서 멈추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게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그 역할을 여호수아가 감당해야 했다.
수천 년 전에 별생각 없이 지은 이름 '여호수아'가 결국 이런 예언적 의미가 있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래서 성경은 참으로 놀라운 책이며, 이런 섭리가 역사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신기하고 오묘하다.
우리 인생이 보잘것없는 듯 해도 구속사적으로 볼 때, 모두 꼭 필요한 장소,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거대한 건축물이 완성되었을 때, 단 하나의 벽돌일지라도 자기 역할을 못 하면 완전한 작품이 될 수 없다. 구석에 박혀있는 조그마한 돌마저도 꼭 필요한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과 비교하지 말고 주어진 일이 크든 작든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충성하며 살자.
주님,
제가 더 큰 것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