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삿갓 시(詩) 번민煩悶)하는 시인(詩人)
백일 장에서 자기가 그토록 추상 같이 매도했던 대역 죄인 김익순(金益淳)이 바로 자기 할아버지였음을
확인한 김병연(金炳淵)은, 한순간에 천길 나락으로 떨어진 운명의 비통함과 조상에게 지은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罪責感)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자괴감(自愧感)으로 하여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이라고 자처했다.
몇 번이고 죽기로 결심했지만 늙은 어머니의 만류를 거역하지 못한 그는 어디 가서 술이라도 퍼 마셔야겠
다고 생각하면서 일전의 백일 장 길에 만났던 주막의 범상(凡常)치 않은 주인 영감을 머리에 떠 올렸다.
짧은 만남 속에 몇 마디 나눈 대화였지만 그는 분명 예사 노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전일 보다 한결 반갑게 맞아 주는 주막집 노인은 찾아온 젊은이가 일전에 백일 장에서 장원 급제한 김병연
이라는 시골 선비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변응수(邊應洙)라는 자기 본명을 굳이 숨기고 주옹(醉翁)이라고만
한다는 이 노인은 과거(科擧)를 열 번이나 보아서 모두 낙방 하고 세상을 떠돌다가 우연히 젊은 주모(酒母)를
만나 이곳에 숨어 산다고 했다.
그는 주옹(醉翁)이라는 자기 별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 태 백의 시 한 수로서 설명을 대신했다.
醉後先天地(취후선천지) : 술 취하면 세상 만사를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올연취고침) : 정신없이 외로운 꿈에 잠기네.
不知有吾身(불지유오신) : 내 몸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니
此樂爲最甚(차락위최심) : 세상에 이런 즐거움이 어디 있으랴.
병연과 술자리를 마주한 취옹은 병연의 백일 장 시(詩)를 줄줄 외우면서 참으로 놀랄 만큼 재기(才氣) 넘치는
명시(名詩)라고 칭찬해 대면서도 그 내용은 별로 찬성할 바가 못 된다고 했다.
어떤 점이 그토록 못 마땅하였느냐고 따져 묻는 병연에게 그는 이런 말을 들려준다.
"老子 道德經(노자 도덕경)에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뜻을 천하에 펼 수 없다.
(樂殺人者 不可鎰志於天下)"고 했는데, 그대는 산 사람도 아닌 죽은 사람을 다시 한번, 그것도 무참히
난도질을 해 놓았으니 그것을 어찌 지각 있는 사람이 찬성할 일 이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에 김익순(金益淳)에게 후손이 있어 그대 글을 보았다면 그대를 얼마나 원망하겠느냐."
고도했다. 이 말에 깜짝 놀란 병연은 이 노인이 자기와 조부와의 관계를 훤히 알면서 비웃는 것 같아서 화가
치밀어 거세게 항변했지만 무심 중에 자기 비밀만 스스로 폭로한 꼴이 되고 말았다.
70 평생을 산 사람으로서 그저 원칙 론을 폈을 뿐인 취옹은 병연의 처지를 알고 보니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覆水不返盆(복수불반분)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찌하겠는가. 그는 슬쩍 은유적(隱喩的)인
표현과 익살로 그를 위로한다.
죽고 싶다는 병연에게 "어머니가 계신데 그 앞에서 죽는 것은 또 하나의 죄를 짓는 것이라" 하고,
죽지도 못하면 어떡하느냐는 물음에는 "自作之孼不可活(자작지얼 불가활)이라는 말과 같이 스스로 저지른
재앙은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니 그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스스로 지은 죗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仰不愧於天(앙불괴어천)이라고 했는데 하늘을 어떻게 우러러보며 사느냐고 하니, 그는 허허 웃으면서
"상제처럼 삿갓을 쓰면 되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삶이라도 이야기 하는 듯, 모든 욕망을 초월한
棄世人(기세인)이 되면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고 했다.
"취옹의 뜻은 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산수 간을 마음대로 떠도는데 있다.
(醉翁之意不在酒 在乎山水之間也(추옹지의 부재주 재호산수지간야)"고 슬쩍 자기의 속내를 내비친 그는
술 한 잔을 다시 들이킨 후에 목청을 돋우어 옛 시 한 수를 읊는다.
萬事無心一釣竿(만사무심일조간) : 만사 무심에 낚싯대 하나 드리우니
三公不換此江山(삼공불환차강산) : 삼 정승도 이 신하와 바꾸지 못하겠네
술에 취하고 자기가 읊는 시에 취하여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뜬 그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모든 욕망을 깨끗이 버리고 한 세상을 산천경개와 더불어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도 매우 운치 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고.
<출처 :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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