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가고 / 조경숙
특별한 병명도 없이 엄마는 시름시름 아팠다. 영양제를 맞아도 녹용을 넣은 보약을 먹어도 통 기운을 못 차리더니 뜬금없이 백화점에 같이 가자고 한다. 백화점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던 분이라 더럭 겁이 났다. 갑자기 변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이 생각나서다.
엄마는 내게 옷 한 벌 장만하라고 한다. 내가 엄마 옷을 사드려야지 엄마한테 얻어 입을 나이는 아니라고 해도 막무가내 우긴다. 그렇게 원하시니 이참에 멋을 좀 낼까 응석을 부렸다. 백화점 안을 화려하게 수놓는 비발디 음악에 맞춰 왈츠라도 추듯 미끄럼을 타며 매장을 둘러보았다. 꽃들이 화려하게 그려진 고가의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옷이 날개라더니 사람이 달라 보인다며 웃는 엄마 얼굴에 복사 꽃물이 번진다. 매장 직원이 우리에게 커피를 권하며 의자를 내주었다. 옷도 샀고 커피도 마신 엄마는 일어나지 않고 느닷없이 생판 모르는 직원에게 이야기 좀 해도 되느냐고 수줍게 물었다.
자존심이 강한 분이라 남에게 속을 내보이는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엄마의 얼굴을 살폈다.
“자식 자랑하는 게 큰 흠이라 여겨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자식 자랑 좀 하려고요.”
자식 자랑이라니? 자랑할 자식이 어디 있다고. 더구나 처음 보는 사람한테. 노인네가 없던 주책이 생기셨나. 무참한 나는 괜히 진열된 옷을 만지작거렸다.
“여자가 수학 잘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라는 엄마의 말에 깜짝 놀랐다. 다른 자식 다 두고 내 이야기를 하다니. 손사래를 쳤으나 본 척도 않는다. 엄마는 사십 년이나 지난 그때 일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갔다.
어느 날 엄마는 먼 친척집으로 나를 보내셨다. 그 집에는 고등학생과 중학생 아들들이 있었는데 공부를 좀 봐 주라는 것이었다. 내가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곡히 부탁하니 용돈도 벌고 좋은 일이라며 떠밀다시피 했다. 내 공부 하기도 버거운 마당에 남의 공부까지 봐 주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자고 나면 베개에 코피가 묻어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지만 용돈이라고는 차비 정도뿐이던 내가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솜사탕이었다. 두둑한 봉투를 받아 엄마에게 드리자 코피를 흘려가며 번 돈이라며 대견해 했다. 그 돈은 모두 적금을 넣었다. 적금통장을 보면서 기뻐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점점 신이 났다. 공부를 봐 주는 일도 좋았지만 돈 버는 일이 세상에서 최고 재미난 놀이였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는지 학생은 성적이 올랐고 과외비도 껑충 뛰었다. 소문을 듣고 왔다며 이웃집에서도 공부를 봐 달라고 오더니 점점 학생 수가 늘어나 주 중이고 주말이고 나는 쉬는 날이 없었다. 엄마는 적금을 타면 이웃에 빌려줘 매월 이자를 받고 그 이자로 적금 통장을 또 만들었다. 늘어나는 통장 개수만큼 내 꿈이 멀어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친구들이 박사학위 논문에 매달릴 때 나는 돈 버는 놀이에 푹 빠져버렸다. 마르셀 에메의 소설 <벽을 드나드는 남자>의 주인공 뒤티유욀이 무시로 드나들던 벽 속에 갇혀버린 것처럼 나는 돈이라는 두꺼운 벽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내게 그 벽은 힘이 되었고 즐거움이 되었고 행복이 되었다.
그때 못한 공부의 아쉬움 때문인지 요즘 지식에 목마르다. 공부는 다 때가 있다더니 젊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집중도가 떨어지고 눈이 나빠 오래 책을 읽을 수조차 없다. 돌아서면 잊어버려도 책 속에 파묻혀 있는 시간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이 행복하다. 엄마가 반찬 해서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책 읽고 있는 나를 나무라기도 하고 공부하러 간다고 나서는 것도 못마땅해했다. 번지르르하게 입지는 못해도 외모에 신경도 쓰고 남들처럼 친구들하고 여행도 다니지 이게 뭐냐고 잔소리를 늘어놨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니 옷을 사 주는가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딸 자랑으로 시작한 엄마는 당신이 어리석고 미련해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일류 대학교수도 할 아이를 당신이 발목을 부러뜨린 게 미안하다는 말에 목이 멨다. 이제 늙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데 뭘 해 줄 게 없어 옷이라도 한 벌 사주고 싶어 왔다는 말이었다. 그제야 난데없이 백화점에 와서 옷을 사준 이유를 깨달았다. 그게 어떻게 엄마 탓인가.
엄마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작고 초라한 엄마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백화점을 나왔다. 어둠이 내리는 길에 연분홍 벚꽃이 화르르 떨어지고 있었다.
첫댓글 엄마 살아계실 때 못다한 속내들도 서로 털어내고 알콩달콩한 추억들 많이 쌓으세요.
요즘 어머니 모신다고 얼굴이 좀 수척해진 것 같데요. 선생님 몸도 잘 챙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