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感一首示伯至廉使
牧隱 李穡
立德如登天
立功吾已衰
立言不足傳
秋蟲自知詩
霜露日以嚴
喞喞令人悲
方張遺吾悶
豈念孫謨貽
鳳凰去已遠
麟也來何遲
悠悠君子心
後來知者誰
느낌이 있어 한 수 지어서 전오륜 안렴사에게 보이다.
목은 이색 지음
덕을 세우긴 하늘에 오르기 같고
공을 세우자면 내가 이미 쇠했고
말을 남겨도 전할 만하지 못한데 1)
가을벌레도 스스로 때를 알아서
서리와 이슬이 날로 차가워지매
요란히 울어 사람을 슬프게 하네
방금 내 번민이나 풀 따름이지
어찌 후손 위할 계책을 생각하랴?
봉황새는 이미 멀리 떠났거니와 2)
기린은 어찌 그리고 더디 오는고
유유하여라 군자의 이 마음을
후세에 알아줄 이가 그 누구일꼬
[출전] 【增補】 牧隱集 詩藁 卷二十五(도판 十二)
[출처] 삼현실기 ( 정선전씨 채미헌공파 종회 )
1) 춘추시대 노나라 대부 숙손표(叔孫豹)의 말에 “ 가장 높은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요, 그 다음은 공을 세우는 것이요, 그 다음은 훌륭한 말을 남기는 것이라 한다. 「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携」”라고 한데서 온 말이다. (춘추 좌씨전)
2) 봉황새는--- 떠났거니와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봉황새는 훨훨 높이 날아가서 본디 스스로 제 몸 이끌어 멀리 떠난다. 「鳳漂漂其高逝兮 夫固自引而遠去」” 한데서 온 말로 이는 곧 난세를 피해 은거한 현자를 비유한 것이다.
@ 전오륜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채미헌(採薇軒). 대제학(大提學) 전분(全賁)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고관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이성계 세력에 의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창업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두문동으로 들어간 인물로서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오륜 [Jeon Ohryun, 全五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색 [ 李穡 ]
고려의 마지막 대학자, 정치가
출생 – 사망/ 1328 ~ 1396
어떤 국가나 지역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일차적인 요인이 지리적 조건이라면,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수는, 그런 지리적 조건을 포함해서, 시대적 환경일 것이다. 물론 인간과 그 인간들의 집합체인 국가는 그런 불가항력적인 전제에 도전해서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지만, 그런 시도 또한 결국은 그런 규정적 조건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동일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번영과 안정을 구가하는 태평한 성세를 살았을 때와 빈곤과 전란에 허덕이는 쇠망의 시기에 활동했을 때, 그의 삶이 그리는 궤적은 분명히 크게 다를 것이다.
모든 국가의 종말은 대부분 혼란스럽고 비참하다. 국가의 멸망이라는 거대한 변동에는 언제나 복잡한 국내외의 원인들이 작용하며,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행동 또한 어느 때보다 첨예한 이해관계의 충돌에 따라 극도로 거칠고 파괴적으로 전개된다. 전근대 한국사의 마지막 왕조 교체인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하는 과정 또한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런 격동의 시기에 명멸한 여러 주요한 인물들 중에서도 이색(李穡, 1328~1396)은 특히 중요하고 두드러진 존재였다.
훌륭한 가문적 배경
이색의 본관은 한산(韓山, 지금 충청남도 서천)이고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그의 외형적 조건과 개인적 경력은 고려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도 특별히 빼어났다고 말할 만했다.
먼저 그의 아버지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2품)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역임하고 문효공(文孝公)에 책봉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고, 어머니는 요양현군(遼陽縣君)과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에 책봉된 김씨였다. 긴 관직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이곡은 탁월한 능력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던 원(元)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이뤘다.
그는 19세 때인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내내 그곳에 체류한 것은 아니었고 본국을 오가며 혼인 등의 중대사를 치렀지만, 16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공부한 뒤 그는 1333년(충숙왕 복위 2) 원의 제과(制科, 천자가 직접 주관하는 과거)에서 차석으로 합격해 승사랑(承事郞) 한림국사원(翰林國史院) 검열관(檢閱官)에 임명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원이 차지했던 정치적 영향력이나 학문적 수준을 생각하면, 이것은 대단한 성취였다. 그 뒤 이곡은 원에서 고려의 국무를 관장하는 직책인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郎) 등을 역임했으며, 고려에서도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도첨의찬성사 등의 요직을 맡았다.
전근대의 주요한 정치인이 대부분 뛰어난 문인이자 학자였듯이, 이곡도 그러했다. 그는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보완하고, 충렬·충선·충숙왕 3대의 실록을 편찬했다. 그와 관련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재는 [죽부인전(竹夫人傳)]일 것이다. 고려 후기에 유행한 가전체(假傳體) 소설의 대표적 작품인 그것은 대나무를 절개 있는 부인으로 의인화해 칭송한 내용이다. 이곡의 문학적 능력과 위상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작품이 다수 실려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아버지의 능력과 성취도 탁월했지만, 아들은 여러 측면에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업적을 이뤘다. 거기에는 물론 아버지가 닦아놓은 가문적 배경이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겠지만, 이제 보듯이 이색의 자질과 능력은 분명히 뛰어났다.
영민한 능력과 순조로운 출세
이색은 1328년(충숙왕 15) 5월 9일 영해부(寧海府, 지금 경상북도 영덕)에서 태어났다. 앞서 말했듯이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 이곡은 학업과 직무로 원에 체류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훈육을 많이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색은 자신이 7세 때(1335, 충숙왕 복위 4)부터 한산 숭정산(崇井山)에서 독서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독서처가(讀書處歌)] 서문). 6년 뒤 그는 13세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시에 합격함으로써 영민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1341, 충혜왕 복위 2). 그때 아버지는 연경(燕京)에 체류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아직 아들의 학문이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뒤부터 17세까지 이색은 열심히 학문을 연마했다. 성균관 구재도회(九齋都會)에서 공부했고, 삼각산(三角山), 감악산(紺嶽山), 청룡산(靑龍山), 대둔산(大芚山), 목단산(牧丹山) 등에서 독서했으며, 성균관 동당(東堂)에서 치르는 과거에도 응시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학문에 더욱 매진하라고 격려하는 시를 연경에서 보내기도 했다(1345, 충목왕 1).
시대에 따라 적절한 연령과 그 개인적·사회적 의미는 상당히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중요한 전기는 직업의 획득과 배우자의 선택일 것이다. 이색은 18세 때 안동 권씨와 혼인했다(1346, 충목왕 2). 그녀의 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종1품 문관의 품계) 화원군(花原君) 권중달(權仲達)이고, 조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右政丞, 정1품)을 지낸 권한공(權漢功)이었다. 가문과 경력에서 이색의 처가는 명망 높은 집안이었다.
더욱 중요한 경험은 처음으로 원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혼인 1년 뒤 이색은 원에 체류하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뵈려는 목적에서 연경으로 갔다가 그곳의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해 [주역]을 배웠다(1347, 충목왕 3). 이듬해에는 원에서 벼슬하고 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학자감(學子監)에 생원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거기서 이색은 당시 중요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현(歐陽玄)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학자감에서는 월과로 제출한 이색의 부(賦)를 높이 평가했다(1348, 충목왕 4).
이색은 학자감에서 3년 동안 공부한 뒤 1350년(충정왕 2) 가을에 귀국했지만, 학업을 계속하려는 목적에서 12월 다시 도원(渡元)해 이듬해 1월 학자감에 거듭 입학했다(1351, 충정왕 3). 그러나 그 해 1월 1일 아버지 이곡이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는 한 달만에 전해졌고, 이색은 즉시 귀국했다. 그때 그는 23세의 약동하는 청년이었지만, 고려는 멸망을 41년밖에 남기지 않은 노쇠한 나라였다. 이런 선명한 대비(對比)는 그의 삶을 일차적으로 규정한 시대적 환경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색 [李穡] - 고려의 마지막 대학자, 정치가 (인물한국사, 김범, 장선환)
@ 즉즉 [ 喞喞 ]
① 베 짜는 소리.<목란시木蘭詩>
② 가을 밤 벌레 우는 소리.
但聞四壁 蟲聲喞喞 如助余之歎息(단문사벽 충성즉즉 여조여지탄식 ; 다만 사방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연하여 나면서, 나의 탄식을 돕는 것같이 들릴 뿐이다.)<구양수歐陽修 추성부秋聲賦>
喞喞鳴蟲夜轉幽 虛窓無夢數更籌(즉즉명충야전유 허창무몽수경주 ; 찍찍 벌레 우는 소리에 밤은 더욱 그윽한데, 빈 창에 잠은 없어 시각 알리는 숫자만 세어보네.)<이의무李宜茂 추야서회秋夜書懷>
③ 참새 소리.<왕유王維 청작가靑雀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즉즉 [喞喞] (한시어사전, 2007. 7. 9., 전관수)
@ 霜露 [ 상로 ]
서리와 이슬.
@ 鳳凰 [ 봉황 ]
예로부터 중국(中國)의 전설(傳說)에 나오는 상상(想像)의 새. 몸은, 전반신(前半身)은 기린, 후반신(後半身)은 사슴,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등은 거북, 턱은 제비, 부리는 닭을 닮고, 깃에는 오색(五色) 무늬가 있음. 성천자(聖天子)의 치정(治政)의 징조(徵兆)로 나타난다고 함.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라고 함. 봉황새(鳳凰-).
@ 기린
중국 고대의 상상속의 동물. 그 형태는 시대에 따라서 다르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로서는 몸이 사슴과 유사하고 머리에 뿔이 있는 점에서 거의 일관되어 있다. 수컷을 기(麒)라 하고, 암컷을 린(麟)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가사상의 대두와 함께 기린은 인덕있는 왕자나 성인이 출현했을 때만 사람의 눈에 띤다는 전설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기린은 인수(仁獸)는 서수(瑞獸)라고 하고, 봉황, 거북, 용과 함께 4령이라고 불리며, 암수의 교미에 의해서는 태어나지 않으며, 울음소리는 음악의 음계와 일치하고 살아있는 풀이나 벌레를 밟지 않는다는 등의 전설이 탄생했다. 후세의 각단도 기린의 아종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린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 悠悠 유유
1. 아득하게 먼 모양(模樣).
2. 때가 오랜 모양(模樣).
3. 침착(沈着)하고 여유(餘裕)가 있는 모양(模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