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인용한 경의 내용은 여섯가지 알음알이.. 즉 6가지 식의 헤량을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이식, 비식,설식,신식,의식으로 헤량했다는 뜻인데요...
이識의 알음알이, 즉 헤량, 감지는... 주관인 견분으로서의 識이, 그 객관인 상분을 인식했다는 말입니다.
<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여섯가지의 견분인 識인데.. 여섯가지의 견분으로서의 識이 그 대상인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의 조건지어짐>을 감지했다는 뜻이어서...
그 감지가 바로 헤아림이고, 알음알이이고, 분별이고, 헤량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위의 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識이 분별해서 안다는 것>은 과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경에서와 같이 [분별해서 안다]라고 설하신 말씀의 뜻은..
안식은 안식대로, 이식은 이식대로......의식은 의식대로 딱딱 구분지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드러남에 딱 그만큼의 식이 과보로서 드러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식의 드러남은 딱딱 구분지어지고 , 딱딱 분별지어져 하나의 드러남에 하나의 식이 있다는 뜻이지요.
<식>의 대상인 <상분(수,상,행)>중...
차별하고 분별하여 개념을 짓는 행위를 하는 상온과 같이, 개념작용으로서 이것과 저것을 차별짓고 분별짓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이어서... 여기서의 헤량, 감지, 분별등은 인식결과인 과보입니다.
이미 <이것과 저것으로 차별짓고 분별지어 드러난 상분>을 헤량했다는, 즉 감지했다는 뜻으로 ...이렇게 여섯 개의 분별된 과보인, 여섯가지의 식으로 딱딱 구분지어 감지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식 자체가 어떠한 개념작용이라 할 분별을 한 것은 아닌 것이지요.
지난번 글에서 말씀 드렸듯... 과보로 드러난 분별된 것들은.. 대상입니다. 식이라는 거울에 비친 명색입니다.
식(거울)에 똥이 비치든, 꽃이 비치든... 식은 있는 그대로를 담아낸다고 했습니다.
식은 똥을 더럽다고 분별하지 않으며, 꽃을 아름답다고도 분별하지 않습니다.
식은 어떠한 상도 없기에.. 똥은 똥으로 그대로 드러냅니다. 즉 똥이라는 과보를 헤량하고, 감지하고, 분별한 것입니다.
또한 식은 어떠한 상도 없기에... 꽃은 꽃으로 그대로 드러냅니다. 즉 꽃이라는 과보를 헤량하고, 감지하고, 분별한 것입니다.
이렇게 식의 감지는 ...<색은 안식으로 드러나고>, <성은 이식으로 드러나고>, <향은 비식으로 드러나고>,< 미는 설식으로 드러나며>, <촉은 신식으로 드러나고>, <법은 의식으로 드러납니다>.
안식이 이식과 뒤섞이지 않으며, 비식이 설식과 뒤섞이지 않습니다. 마구마구 뒤섞여 드러나지 않습니다. 딱딱 하나의 식으로 드러납니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식으로 드러나는 것...
이것이 과보로 드러난 식의 헤아림입니다. 이것이 과보로 드러난 식의 분별입니다. 이것이 과보로 드러난 식의 알음알이입니다. 이것이 과보로 드러난 식의 감지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識에는 상이 없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識에 想이 없기에 대상으로 드러난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그래서 여섯가지의 識이 대상을 그대로 담아낸 것... 그것을 분별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별이라 이름하고 있지만.... 상온으로서의 개념짓고 차별하는 분별작용과, 식의 감지로서의 분별은 전혀 다른 뜻입니다.
낱말에 휘둘리면 올바른 이해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만일 識에 상이 있다면..
거울에 비친 똥과 거울에 비친 꽃을 차별하고 분별할 것입니다. 똥과 꽃에 작위를 가할 것입니다.
만일 識에 상이 있다면...
거울에 비친 똥이... '똥꽃'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거울에 비친 꽃이... '꽃똥'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識은.. 識 자체는 그 어떤 스스로의 상도 갖고 있지 않기에.. 드러난 그대로의 과보로 분별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똥은 똥으로 드러나고, 꽃은 꽃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똥을 드러낸 識, 즉 거울은 상이 없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습니다.
꽃을 드러낸 識, 즉 거울은 상이 없어 자신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관계로.. 識은 상이 없기에 識으로서 識을 감지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첫댓글 본래 식은 한 놈입니다.
사유해 보세요.
유심론 계열등 대승 전승에서, "심의식"이라 하여...8식에 '심'을, 7식에 '의'를, 그리고 6식에 '식'을 대응시키는데요. 머...일상에서 생각도 안하는 용어다 보니, 이제 자꾸 헷갈리는데요. 맞을 거예요. 심이 6식은 아닐 듯...
하지만 위와 같은 의미의 "심의식"은, 고요님이 사용하는 빨리어대장경상 용례와는 별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빨리어대장경 표현상의 "심(citta)-의(mano)-식(vinnana)"은요. 지금 억지로 기억해 보자면, 보통 다음과 같이 볼 수 있을 건데요. '심'은, 그냥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용어가 아니라, 일상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의(mano) 혹은 식(vinnana)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구요. ['마음작용인 수상행의 전체 혹은 일부'와 '식'이 결합한 덩어리]를 칭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의는, 특히 의근과 관련해 사용되는 편이구요. 그래서 의는, 12처 그리고 18계와 관련해서도 쓰이는 거죠. 마지막으로 식은, 특히 오온의 분류에서 식온을 칭하는 편입니다. 주의할 점은...이처럼 기억상 대충 분류하여 위와 같이 정리한 것은, 절대적인게 아니예요. 언어의 의미는 문맥에서 결정이 되요. 소위 학자풍의 전문 저술이 아닌 [경]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경우, 칼로 두부 자르듯 개념 정의를 할 수 없습니다. 뭐...전문적 저술이라도, 칼로 두부 자르듯 되진 않지만...
어쨌든 빨리어대장경에서 사용되는 해당 "심-의-식"등의 표현들은, 소위 전문용어로 쓰이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밖에 없죠.
고요님이 시도하는 소위 "경전의 표현에 충실하자"는 슬로건은요. 취지는 좋을 수 있는데요. 고요님이 선택한 방식은 나빠요. 당최 이해가 없다는 말이죠... 더 나아가,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안힙니다. 이거는 사실이란 말이죠... 근데 뭐...시간낭비고, 오히려 이해가 가로막히고, 상식과 멀어져도...내 일은 아니니까... 자기 시간을 자기가 그렇게 쓰겠다는 것을 뭐라고 하겠어요. 자기 시간 낭비는 자기만의 책임이니까...택도 엄이, 옳고 그름을 가리며 나서지만 않으면 별래무양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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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말한다 !] 게시판 1532번글, ['식'도 '공'합니다.]에 적은 바에서 알 수 있듯...법은 구체적인 겁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식'이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하다 보면, 그러한 점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법에 대한 사유를 하는 경우, 보통명사를 사용하더라도, 반드시 구체적인 점을 고려하는 습관을 들이는게 좋습니다. 보다 간략히 비유적으로 말하자면...법담에서 보통명사를 사용하더라도, 법은 고유명사라는 점을 고려해서 논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즉 그냥 "식"이라는 표현을 쓰더라도, 머리속에서는 구체적인 "A식"이라는 점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드러남은, 정확히 딱 그만큼의 식과 함께 합니다.
A식이라 함은...A와 함께 하는 A식이지, B와 함께 하는 B식은 아닌 겁니다. 대상이 식을 결정하는가? 식이 대상을 결정하는가? 이는, 단정적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함께 하는 법은 원래 그래요. 근데 필요에 따라, 그리고 말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엄이...한쪽에 비중을 둬서 표현하게 되고,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분별식이라는 표현은, 분별한다(본글에 사용되기로는 식별한다)는 표현은...함께 하는 대상과 식이라는 법에서, 대상이 아니라 식에 초점을 맞춘 설명인 겁니다. 뭐..."식이 뭔가?"를 설명하려는 거니, 식에 초점을 맞춰 비중을 두고 말할 수 밖에요. 반대로 말이죠... 대상을 조건으로 식이 발생한다는 표현에서는 어떤가요?
대상이 식을 결정하는 것처럼 이해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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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으로 식을 알 수 없다. 식은, 알아차림의 대상이 되는 법이 아니다... 사실 참 웃긴게요. 논리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에 충실하면 간단해요. 식의 대상은, 색수상행입니다. 식은 식의 대상이 아니예요. 그런즉 식은, 당연히 알아차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뭐가 웃기는가? 식의 대상은 색수상행이라고 암기하고 있고, 나름 이해도 하고 있다고 자처했으면서 말이죠... "오온이 없는 상태"가 알려지기 전까지, 그러한 점이 선명하지 몬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은 상이 없어, 마음으로 마음을 알지 몬한다"는 말이 뭔 말인지 잘 몰랐다는 겁니다. 납득이 안되니까... 중생이 그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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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비슷한 말이 나왔으니... 위의 꼬리말에 { ['마음작용인 수상행의 전체 혹은 일부'와 '식'이 결합한 덩어리]를 칭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는 말이 있죠? 그런 말이 나왔으니 적는단 말이죠...
대념처경의 내용을 두고 4념처라고 합니다. 신, 수, 심, 법의 4념처예요. 대념처경이, 4념처의 심에 citta라는 표현을 써요. 제가 거칠게 파악하기로, 4념처 중 심처는 "행온과 식이 결합한 덩어리"를 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4념처 중 심처는...행온이, 알아차림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물론 수상행과 식은 함께 합니다. 소위 무기라는 느낌도 고려한다면...수온 역시, 식의 드러남에는 반드시 함께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연습을 위해서, 수상행과 식이 결합한 덩어리에서 행온에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그러니까...4념처는요... 신은 색온을, 수는 수온을, 심은 행온을 대상으로 삼아 알아차림 연습을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온이 안나왔죠? 4념처 중 법처가 상온이 대상입니다. 그래서 식의 대상이 되는, 색수상행의 네가지가 념처가 되는 겁니다.
위에서요... 수(수온)는 (마음 상태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과보구요, 행(행온)은 업이죠? 업보를 고찰함도, 법처가 됩니다. 4념처에서 신수심이 되니까, 그것을 기반으로 4념처 중 법도 될 수 있는 거구요. 소위 칠각지가, 알아차림으로 개발될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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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당간, 마음은 상이 없어요.
보통 8식을 허공에 비유하고 텅빈 앎이라 합니다.(뉴런 자체가 되겠지요;뉴런과 시냅스가 정보가 교환하지 않으면 뉴런 자체의 성질인 앎만 있음;이를 선가에선 자성이라 하고 본래청정하다 하고 뉴런과 시냅스가 정보를 교환할 땐 허공꽃이 폈다하고 진공묘유라 함.)
7식은 본래 있던 것이 아닌 이 순간까지 살아오면서 생겨난 식이라 실체가 없음(뉴런과 시냅스의 전기화학적 작용으로 얻은 정보 지식이 자아형성(고정관념 업 운명).
7식은 신구의로 듣고 말하고...등등으로 생겨난 업(식의 쌓임;상을 지음)인데 실체없는 놈이 8식을 의지해 스스로 자아라 여김.(교학과 수행은 7식인 자아의식을 해체하는 건데 굳어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공으로 조견 무상고무아를 통찰해 자아의식을 해체하는 것임)
6식은 분별식이라 하는데 7식 스스로가 사량하고 아는 식을 6식이라 함.
7식이 사라지면 8식인 텅빈 앎이 스스로 6식으로 드러남.(이 땐 식이 식으로 드러난다 함)
탐진치로 인해 무명업이 형성되고 불선업을 짓게 되고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고
마음은 텅빈 놈이기에 현재 선업을 지으면 선한 마음이 되고 즐거운 과보를 받게 되고 해탈열반의 길로 가게 되는데 업(운명)이 여간 질진 놈이 아니고 귀신같이 요상한 놈이라 길들이기가 쉽지가 않지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즐거운 과보를 받기에 보람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불교는 텅빈 곳을 보는 공부가 아닙니다.
그 마음이 그 마음이라 현재 선업(선업도 환이라 집착하면 안 됨)을 짓고 공으로 조견 무상고무아로 통찰해 해탈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에선 기득권 유지를 위해 식을 뇌작용이라 인정하지 않으나 이미 과학으로 증명된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환으로 환을 닦는다고 합니다.
업도 환이고 사띠도 환입니다.
사띠로 환을 제거하면 어둠이 사라지고 밝음이 드러나는데
어둠(무명)따로 밝음(명)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이 들어오면 밝음이고 불이 사라지면 어둠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마음 그대로가 진여불성인데 좋은 방향으로 쓰고 나쁜 방향으로 쓰는 것은 자신이 선택(의도 의지)하는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마음 한번 잘 쓰면 부처고 못 쓰면 중생입니다.
마음도 부처도 중생도 과보도 공하나 과보로 인한 고락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12연기는 붓다가 괴로움의 발생 소멸과정을 선정에서 슬로우비디오로 돌려보니 자아란 놈이 업이고 형성된 거고 본래 있던 놈이 아니고 윤회 전생도 없고 괴로움과 번뇌망상이 업놀음이라 깨친 것입니다.
비디오를 빨리 돌리면 생각하는 놈도 그놈이고 생각하는 줄 아는 놈도 그놈이고 생각을 아는 놈도 그놈이고.
본래부터 아는 기능이 있는 8식 한놈이 다하는데 그놈은 본래청정해 물들지 않더라는 것(뉴런과 시냅스가 지들끼리 정보를 주고 받는 것)
2600년 전 무지할 때 뇌사 식물인간이 되면 뇌회로에 이상이 있는 줄 모르고 궁극적 실재,입자인 영혼,식이 심장에 머물다가 떠났다고 하고 다시 의식이 돌아오면 영혼이 돌아왔다고 망상
윤회 전생이 없다는 견해는 단멸론이 아닙니다.
오온이 그대로 불생불사이기에 윤회 전생의 유무에 대한 하나의 견해에 불과합니다.
죽으면 끝이다.
그래서 윤회 전생이 없다 하면 단멸론이 됩니다.
오온을 생사로 전제한 후 이미 양변에 떨어져 윤회 전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 단멸론이 됩니다.
연기법은 연기법만이 진리다고 견해를 세우지 않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연기법만이 진리다 하면 법과 법 아님 양변에 떨어진 것입니다.
연기법에 의지하고 존중할 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청정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면서 업을 녹이면 자연히 마음이 선해지고 자신의 지난 행불행의 원인이 자신의 탐진치에서 비롯됐음을 알게 됩니다.
관이 깊어져 미세한 번뇌까지 관찰하면 마음의 속성을 꿰뚫게 되고 신구의로 불선업을 지으면 스스로 괴로운 과보(마음이 짓고 마음이 받음)를 받게 됩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불선업을 짓지 않겠지요.
선업을 짓는 것은 자신의 탐을 버려 마음을 비우고 깨닫기 위한 과정인데 거기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이 낙과입니다.
불자는 선업을 짓고 복을 받으려는 탐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학과 수행은 뭔가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얻는 것은 지식으로 충분합니다.
불교로 뭔가 얻을려는 하면 불교란 상만 더하게 되고 거꾸로 자아만 커져 갑니다.
불교는 나라고 고집하는 무지,아집을 녹이는 것입니다.
"불법이 불법이 아니라 그 이름이 불법이다"-금강경
수행은 팔정도입니다.
무착 세친 용수보살도 초기불교의 대가들이고 팔정도(37조도품)를 닦았습니다.
대승불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초기불교는 소승이 아닙니다.
소승이라 하니 초기경전을 소승이라 아는데 소승은 초기불교 이후 부파불교를 말합니다.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같이 공부해 보완해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