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뒤흔든 랜드마크]
건축의 한계를 뛰어넘은 기적
르네상스를 창시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
120년 동안 이루지 못한 피렌체 최고의 랜드마크인
두오모 성당의 쿠폴라(돔-지경 42m)을 완성
두오모 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꽃의 성모 마리아’란 뜻을 가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Santa Maria del Fiore)’은 직경 42m, 높이106m, 무게 2만 5000t의 8각형 2중쉘 구조의 돔을 가졌다. 최대 3만 명을 수용하는 피렌체의 대성당이다. 1436년 완공된 이 성당 앞에는 8각형의 산 지오반니 세례당이 있고, 오른쪽에는 82m 높이의 종탑이 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이 완성되기 전까지 피렌체 대성당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으며, 현재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피렌체 대성당은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에 따라 기공한 후 설계 변경과 공사 중단이 반복됐다. 그러다가 1369년까지 라포 기니(Lapo Ghini)에 의해 돔을 제외한 구조물이 완성됐다. 특히 성당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돔은 필립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년)가 1420~1434년까지 14년에 걸쳐 완성한 걸작이다.
이 성당은 다른 지역의 대성당과는 달리 녹색, 분홍색, 흰색의 대리석을 사용해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부드럽다. 다른 성당과의 확연한 차별은 돔이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외부와 달리 높이 146m, 길이 106m의 내부는 검소하다. 돔의 안쪽 천정화인 ‘최후의 심판’은 조르지오 바사리와 주카리의 작품이며, 스테인드글라스는 도나텔로와 로렌쪼 기베르티가 만들었다. 중앙 제단 왼쪽의 피에타상은 미켈란젤로가 75세에 시작, 미완성으로 끝나 더 의미있다.
르네상스는 수많은 천재가 활약했던 시대이지만 그 시작점에 위치하는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어려서 도제시절을 거치며 조각을 했으나 건축가로 변신해 르네상스 양식을 창안했다. 그의 대표작은 뭐니뭐니해도 피렌체 최고의 랜드마크인 두오모 성당의 쿠폴라(돔)다. 이 구폴라가 지어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294년 13세기가 끝나갈 무렵이다. 피렌체 상인들은 돈 되는 양모산업에서 세계시장을 장악하면서 많은 부를 모았다. 돈이 생기면 누구든 꾸미는 법이다. 비록 군주도 없이 살아가는 작은 도시였지만 남들에게 자신 있게 선보일 큰 성당 하나 짓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많은 돈이 모였고 설계가 시작되었다. 모양을 놓고 옥신각신 말이 많았지만 설계가 얼추 완성된 해가 1334년이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차용해 대리석으로 뒤덮일 아름다운 성당이 그려졌다.
그런데 그때 피렌체 시민들의 화를 돋우는 소식이 들려왔다. 앙숙관계에 있는 인근 도시 시에나에서 경쟁적으로 더 큰 성당을 짓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가만히 지고만 있을 수 없었다. 시민들의 빗발치는 요구로 기존 설계가 완전히 바뀌어 그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게 되었다. 공사주체가 파산하고 이어 흑사병을 겪는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성당의 지붕까지 공사가 진행되어 본 건물의 윤곽이 드러난 해는 1380년이다.
그런데 이 무렵 피렌체 시민들에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소식이 알려졌다. 이 성당 설계에서 핵심은 주위를 압도하는 거대한 쿠폴라인데 중간에 설계를 변경할 때 너무 크게 설계하는 바람에 당시 기술로는 이 쿠폴라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의 건축명장들을 불러 대책을 상의했지만 모두 고개를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도시의 자부심으로 지어진 건물이 일순간 도시의 망신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매주 이 성당에 와서 미사에 참석하는 시민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후회하면서 이 쿠폴라를 지어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른다.
■ 당시의 기술로는 지을 수 없었던 거대한 쿠폴라
브루넬레스키가 이 쿠폴라를 완공한 이야기는 1401년 있었던 한 공모전에서 시작된다. 두 번째로 피렌체를 덮친 흑사병이 다행히 큰 피해 없이 물러가자 시민들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청동문을 만들기로 한다. 피렌체 시민들이 태어나면 세례를 받는 유서 깊은 산 조반니 세례당의 낡은 청동문을 신약성서의 28장면을 새긴 새 청동문으로 교체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공모전을 열었는데 엄청난 상금과 지원금이 걸려 있다 보니 많은 이의 관심사가 되었다.
공모전의 과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삭의 희생’을 주제로 작은 청동패널 하나를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었다. 최종 결선에 오른 사람은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였다. 이 둘은 모두 금은 세공을 익힌 신예 조각가로 출품작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는데 심사위원들은 보다 친화력 있는 기베르티를 선정했고, 브루넬레스키에게는 보조 작업자를 맡겼다.
워낙 큰 지원금이 걸린 일이라 그 일부만 맡아도 이른바 횡재였다. 그런데 당연히 수락할 것으로 예상한 그 제안을 브루넬레스키는 단번에 거절한다. 그러고는 얼마 후 아끼는 후배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로 떠나버렸다. 로마에서 건축을 공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브루넬레스키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폐허로 변해 황량한 로마에는 변변한 건축물도 없었고 건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 건축을 배운다는 건 파리나 브뤼셀 등지로 가서 고딕양식의 건축을 배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세 천 년을 지나는 동안 철저히 파괴된 로마에서 건축을 배운다는 것은 독학을 의미했다. 파괴된 유적들을 모두 실측하여 이를 다시 상상으로 복원해 조상들의 건축비결을 찾아가는 어려운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15세기 전반 로마는 포로로마노처럼 폐허의 상태였다.(사진제공=김태진) |
■ 안정된 삶을 버리고 건축을 배우러 폐허로 가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 이 두 사람의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였을 리 없다. 아마도 미친 사람이나 주술사처럼 보였을 것이다. 대형 건물들의 흔적은 샅샅이 살피며 길이를 재고 기록했다. 필요하면 깊게 땅을 파기도 했다. 땅을 파다가 발견한 조각들은 나중에 따로 모아서 피렌체로 보냈다. 도나텔로는 먼저 피렌체로 돌아왔고 브루넬레스키는 남아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가 로마로 떠날 때 자신의 힘으로 두오모 성당의 쿠폴라를 짓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필자는 당연히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어릴 적부터 매주 두오모 성당을 가면서 어른들로부터 성당이 지어지던 과정과 이것이 다른 도시 사람들 보기에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등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조각을 포기하고 건축을 하기로 마음을 먹을 때 이미 두오모를 자기 손으로 완성하겠다는 포부가 없었을 리 없다. 그는 로마에 남아 있던 가장 큰 돔건물인 판테온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어떤 경력도 없는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 건축가라는 데 있었다. 혼자 공부만 했지 지금까지 그 어떤 건물도 직접 만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스펙이 전무했던 셈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브루넬레스키. 하지만 건축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그에게 쿠폴라는커녕 그 어떤 일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 누구라도 혼자서 독학으로 공부했고 지금까지 어떤 건물도 지은 적이 없었던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로마로 갔다. 가서 이번엔 자신이 하나의 건축양식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피렌체에서는 두오모 성당 쿠폴라를 지어줄 건축가를 찾고 있었다. 수차례 공모전에서 해결책을 얻지 못한 피렌체 당국이 마지막 희망을 품고 자국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설계안을 공모하는데, 그 해가 1417년이었다.
■ 스펙 없는 설움 끝에 기회가 찾아와
공모전이 열렸을 때 그의 나이는 사십 줄에 이르렀다. 그를 제외하면 이제 남은 건축가도 없는 형편이라 이게 브루넬레스키에게 자신의 제안을 제대로 설명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이 제안의 자리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브루넬레스키가 말로 설명하는 제안은 심사위원들도 난생처음 들어보는 건축방법이었다.
보통 돔을 지을 때는 내부에 나무구조물을 짜서 지탱하는 방법을 썼다. 그런데 브루넬레스키는 그 어떤 지지대도 필요 없이 그냥 벽돌쌓기만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심사위원들이 설계도를 보자고 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
브루넬레스키는 설계도를 보여줄 수 없다고 버텼다. 자신의 노하루를 다른 사람들이 쉽게 베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설계도를 보여주면 일을 주겠다는 주최측과 절대 보여줄 수 없다는 브루넬레스키 양측이 모두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 브루넬레스키의 계란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보통은 콜롬부스가 했다고 하지만 실은 그 원조는 브루넬레스키다. 설계도를 보여달라는 심사위원들에게 브루넬레스키는 갑자기 계란을 건네 주었다. 세로로 한번 세워보자는 것이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자 계란을 건네받고서는 밑을 툭 깨서 세웠다. 그걸 누가 못하냐고 심사위원들이 항의하자 그는 자신의 설계도도 이와 같다고 했다. 남들이 자신의 방법을 빼낸 후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심사는 한없이 지연되었다. 브루넬레스키의 방안을 제외하면 마땅한 대안도 없었다.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한쪽은 지을 수 있다고 자신하고 다른 한쪽은 설계도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질질 끌게 된 공모전은 무려 3년이 지나서야 결론이 내려졌다. 결국 브루넬레스키가 이겼는데 실제로 일이 되든 안 되든 일을 맡겨보라는 여론이 훨씬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브루넬레스키의 능력을 알아보고 뒤에 알게 모르게 지원을 해준 코시모 데 메디지의 영향력도 작용했다
공모전이 열리는 동안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 최고의 가문으로 등극시킨 코시모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해 브루넬레스키가 중요한 공사를 맡아서 일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심사위원들도 아무런 경험이 없다는 이유를 대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심사진들도 그대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브루넬레스키를 총책임자로 정하되 감독관을 두어 견제를 하도록 한 것이다. 그중에는 연이어 브루넬레스키의 앞길에 나타나 심기를 뒤집어 놓은 기베르티도 있었다.
두오모 성당 옆에 자리한 브루넬레스키의 조각상.(사진제공=김태진) |
■ 코시모 데 메디치의 도움으로 일을 따내다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사람들은 브루넬레스키의 뛰어난 능력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수학에 뛰어났고 기계를 만드는 데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엄청난 양의 벽돌을 위로 실어나르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는데 하루는 그가 며칠 작업한 기계를 성당에 설치했다.
그리고 말 한마디를 데려와 기계에 묶어두고 기계 주위를 계속 돌도록 했다. 레버를 당기자 많은 벽돌이 순식간에 위로 올라갔다. 말하자면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만든 셈이었다. 사람들은 난공사 구간마다 필요한 장치들을 스스로 만들어 공사를 진척시키는 브루넬레스키를 신뢰하게 되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돔이 이대로 가면 정말로 완공이 될 것처럼 보이자 평소 브루넬레스키를 미워하고 견제하던 이들의 방해와 모함이 빗발쳤다. 하루는 공사장에서 전격체포 되기도 했는데 그 이유란 것이 겨우 길드 회비 두 달분을 체납했다는 이유였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브루넬레스키로서도 기베르티를 중심으로 한 이들 반대파의 짓거리들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돔 공사가 곡선구간으로 접어들어 아주 어려운 구간이 되었을 때 브루넬레스키는 아프다는 핑계로 병상에 누워버렸다. 이는 후배인 도나텔로가 참다못해 꾀를 낸 것을 따른 것이었다.
브루넬레스키가 공사장에 나오지 않자 사람들은 감독관인 기베르티에게 달려갔다. 사실 기베르티는 건축에 대해 잘 몰랐다. 청동문을 비롯해 다른 일 일을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하지만 감독관으로 많은 보수를 받고 있던 터라 못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름 고심해서 설계도를 공부하고 작업을 지시했는데 그러다 일을 크게 망치고 말았다. 기베르티가 결국 일을 망쳤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브루넬레스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공사장으로 가서 잘못된 부분을 다시 원상으로 돌린 후 다시 공사를 진척시켰다. 아무런 문제 없이 공사가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아무것도 모르는 기베르티가 사사건건 브루넬레스키를 방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기베르티는 해고되고 브루넬레스키는 마음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혁명적 공법과 디자인의 돔 탄생
브루넬레스키는 리브(부재(部材)를 보강하기 위해 부착한 가늘고 긴 판 모양의 것)를 이용해 지지대 없이 돔을 만들었다. 나무로 된 비계없이 벽돌과 돌로만 만들어진 스스로 지탱하는 수평 부재 링을 만들고, 이러한 링이 연속으로 쌓여 전체 돔을 구성한다.
피렌체 대성당의 돔 내부 구조에 이를 만들기 위해 새롭게 발명한 크레인, 기중기 등 기계 장치들. |
공법이 천재적이기도 했지만 디자인도 혁명적이었다. 돔의 큐폴라를 두꺼운 안쪽 쉘과 얇은 바깥쪽 쉘로 나눠 돔의 경량화에 성공했다. 바깥 쉘은 바람과 비를 막는다. 이 때 두 쉘 사이에 생긴 공간에 계단실을 넣어 검사·보수 등이 쉽게 진행되도록 했다. 덕분에 최근에는 이 계단으로 관광객이 돔의 꼭대기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다. 피렌체 대성당은 황갈색과 회색빛이 도는 사암으로 만들어진 24개의 리브가 돔의 꼭대기로 모여지는 형태다. 24개의 리브 중 8개가 8각형의 코너를 형성하고, 나머지 작은 16개 리브는 돔의 안쪽에서 구조를 잡아준다. 100m 높이의 돔 꼭대기에는 직경 6m짜리 둥근 창이 있다. 그 위에 브루넬레스키가 디자인했지만 죽은 다음에야 완성된 랜턴이 올라갔다. 또 하나의 획기적인 발명은 체인과 꺾쇠를 이용해 돔의 구조를 보강한 점이다. 돔 제작에 필요한 건설기계도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했다. 소가 돌리는 동력으로 움직이는 기중기를 나무로 제작해 무거운 돌을 플랫폼까지 올리고, 회전하는 크레인을 만들어 옮겨진 돌을 지정된 위치에 설치했다. 돔 꼭대기의 랜턴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크레인은 롤러 위에서 회전하는 방식이었다. 기계 장치뿐만 아니라 새로운 건설관리 방식도 도입했다. 돔이 올라갈수록 인부들이 오르내리는 일이 불편해지자 브루넬레스키는 돔 안에 와인 주점과 식당을 만들어 인부가 한번 올라가면 저녁까지 내려올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 온갖 어려움과 방해를 재능과 기지로 이겨내
16년 세월이 지났다. 그 누구도 지을 수 없다고 했던 거대한 돔 구조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축성식이 열린 일요일은 브루넬레스키의 날이었다. 브루넬레스키가 타고 갈 가마를 자기가 메겠다고 사람들이 밀고 밀치는 일이 벌어졌다. 연도의 시민들은 브루넬레스키에게 꽃을 던졌다.
황제도 이랬을까. 수십 년 동안 피렌체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던 일을 해결한 이가 그 동네에서 자란 브루넬레스키였다. 그는 이제 최고의 건축가로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피렌체에서 지어지는 대형 건물은 모두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그가 창안한 르네상스 양식은 이후 건축의 기본으로 자리하면서 전 유럽으로 퍼져 수 백 년 동안 서양 건축사에 영향을 미쳤다.
브루넬레스키는 1446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무덤을 어디로 할지를 정했다. 논란이 있었지만 그가 만든 쿠폴라의 바로 아래 성당 바닥으로 정했다. 이는 교황도 누리지 못한 영예였다. 또한 피렌체 시민들은 부르넬레스키의 조각상을 어디에 둘지 고민했고 자리를 정했다. 두오모 성당 바로 옆, 쿠폴라가 가장 웅장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뷰포인트, 그곳에 브루넬레스키의 조각을 두었다
■ 진정한 르네상스의 출발점
피렌체 대성당은 인간의 도전 정신을 잘 보여준다. 먼저 흑사병과 경제난을 극복하고 원래의 성당 계획안을 추진해 나간 피렌체 시민들의 정신이다. 건축 재료의 부족과 새로운 규모의 돔 건축이란 도전을 창조적인 생각으로 새 공법과 기계 설비를 발명해 극복한 건축한 지혜도 대단하다. 그래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이은 여덟번째 기적으로 불린다.
피렌체 대성당의 입구에 있는 반원형 모자이크. |
르네상스는 인본주의 사상과 이상적인 미(美)의 추구, 측정에 기초를 둔 이성주의, 사물의 모방과 장식의 단순화 등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브루넬레스키는 금 세공가, 조각가, 수학자, 시계탑 설계자, 건축가로서 맹활약했다. 무엇보다 근대 건축공학의 아버지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수학자적인 원근법의 첫 발견자이자, 중앙 중심 설계의 교회를 만든 사람이다.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이루어낸 진정한 르네상스맨이었다. 이런 브루넬레스키가 완성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도시 피렌체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김태진 대표는 서울시립대 겸임교수 서울대에서 보들레르를 전공했다. 현재 기업인재연구소를 운영하며 기업과 대학을 도와 인재를 길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없다면’ ‘300프로젝트’ ‘아트인문학’ 등을 저술했다.
김태진 대표, ⓒ 한민족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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