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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연
지은이:벌마로(김윤식)
회사로 병휘오빠의 편지가 날아왔다.
‘나의 영원한 사랑 영우에게!’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에 편지를 쓴다. 나는 지금 강릉 앞바다에 와있어, 그대와
함께 보냈던 그 장소 그 모래를 밟으며 혼자 걷다 멈추고 걷다가 멈추고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이렇게 곁에 없는 영우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걷고 있어, 남이 보면 실성한 사람처럼 보이겠지, 작년에 보았던 모래, 파도치는 바다, 간간히 불러오는 바람조차도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여기 함께 있어야 할 영우만 없네,,, 그러다 지금은 영우와 머물렀던 그 숙소에 들어왔어 혹시 나의 애타는 마음이 저 멀리에 있는 영우에게 전달이라도 될까 하는 마음에 커튼을 젖히고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며 내 마음의 창도 열고 있어.
지금 나는 순백의 영혼으로 하얀 종이 위에 영우의 영상을 새겨 보려 해. 영우를
향한 그리움은 차곡차곡 쌓여만 가고 이별의 상흔이 가시처럼 돋아나는데 사랑하고 행복했던 날들은 부질없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구나. 그대와 만났던 그
시간이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나뭇잎 띄워 보낸 시냇물처럼
이렇게 긴 여운을 남길 줄을 몰랐어. 일 년 전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은 그대로인데 내 심장은 저기 보이는 파도처럼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있네, 지금 내 심정은
부딪쳐서 깨어지는 물거품만 남기고 사라지는 파도처럼 가버린 영우를 못 잊어
울고 있어.
수원에서 오리배 타다가 빠졌을 때 당황하며 놀라던 너의 모습, 횡계에서 함께
지내던 많은 날들, 강릉에서 모래를 밝으며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너의 상큼한 모습, 송도에서의 추억, 이런 기억들이 마치 어제 있었던 것처럼
또렷이 떠오르는데 그대가 이별을 고할 때 적극적으로 잡지 못한 바보 같은 미련에 나 스스로 자책하고 있어. 이제 영우 없는 세상 무슨 의미로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혼자서 술을 마셔 보기도 하고 거리를 정처 없이 걸어도 보고 잊으려고 일부러 쓸데없이 많은 생각도 하고 밤하늘을 쳐다보며 한없이 울어도 봤는데,
그 순간은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었지만 결국 수많은 추억의 공간과 시간들을 마주 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영우의 모습만 떠오르는 걸 막을 수 가 없었어. 그래서
사랑했다고 말하려는 거야.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떨쳐 버리려 무진 애를 써보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걸 어쩌지 못하겠어,,,
병휘오빠의 마음은 마냥 잔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어떤 감정보다 깊고 격렬한 사랑이 가득 차 있었음을 편지 속에 구절구절 내포되어 있었다. 영우가 편지를 읽으며 그걸 알 수 있었다.
‘그리워요 병휘오빠’
병휘의 편지를 읽으며 입안에서 맴도는 그리움을 삼키며 순간 이별을 후회하지만
그러다가 다시 생각을 바꾼다.
‘그땐 이별이 최선의 선택이었어, 다른 길이 없었잖아. 이제 와서 후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영우의 요즘심정은 이렇게 갈팡질팡 종잡을 수없이 헤매인다. 겉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달랠 길 없이,,,
부산까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미경이를 만나기로 했다. 영우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지금, 미경이를 찾는 이유가 있다. 미경이는 영우와 중학교 친구지만 나이로 치자면 영우보다 한 살이 많고 생일도 빨라서 간혹 언니 같을 때가 있다. 거기다 고등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고 일찍 사회에 나아갔기 때문에 영우보다 경험도 많고 한번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진 경험도 있었다. 이별의
슬픔을 겪어봤기 때문에 조언을 듣고 마음을 달래기에는 미경이 만한 친구가 없다.
미경이가 영우에게 말했다.
“사람은 저마다 아름다운 추억을 안고 사는 거야, 영우야 너에게도 이 사랑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별까지도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하잖아,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해 나갔으면 좋겠어, 아마 이별의 아픔이
너무 커서 다시는 사랑 같은 것 하지 않겠다고 말할지도 몰라, 이렇게 아픈 사랑이라면, 그런 아픔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가슴이 뛰는 일은 다시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런데 있잖아, 신기하게도 그런 일은 또 일어나
시간이 좀 걸릴 수는 있어도,,, 그러니 아픈 마음 덮어 두지 말고 치료를 해주어야 돼, 스스로 괜찮다고 토닥여 주면서 말이야, 그러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야,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기억을
흐려지게 해 줄 거야, 어릴 적 낭만적 사랑은 결혼에까지 이르기 어려운 관계로
끝나고 만다는 말 못 들어봤니? 첫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고 마음의 상처만 남긴다고 하잖아,”
“들어는 봤는데 설마 그 비련의 주인공이 내가 될지는 몰랐어,”
눈물을 안 흘리려고 했지만 헤어진 얘기를 하자마다 또 눈물이 또로록 떨어졌다.
그리곤 마음이 차분해 졌다. 미경이는 확실히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 미경이와 상담을 하면 영우도 한층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리운 병휘오빠에게!
오빠편지 받았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몇 번을 망설이다, 이제야 펜을 들었어.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 하지만 이 말은 꼭 전하고 싶었어. 나도
오빠 보고 싶고 그리고 사랑했다고 말하려고 해. 그래서 오빠 마음 알 거 같고,,, 나도 괴로운데,,, 이제 우리 꿈결보다 깊고 예쁜사랑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가만히 내려놓자.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지만, 긴 세월이 흐르고 어른이 된 후에 우연히 보게 되더라도 마음 아프지 않게,,, 열심히
살아줬으면 좋겠어. 나도 열심히 살아갈게. 오빠는 나의 영원한 첫사랑으로 기억 될거야. 행복해야 돼, 오빠
영우가,,,
영우의 기억 속 병휘는 언제나 차분하고 마지막까지 착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맺은 인연으로 영원히 소중히 여기며 기억되는 추억 속의 첫사랑으로
남겨졌다. 병휘가 남긴 사랑했었다는 말은 영우의 가슴 속 깊이 새겨지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영우는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진실로 무엇을 좋아하며 자신의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발견해 갔다. 영우의 첫사랑은 이렇게 잊혀져가고 있었고 영우 스스로는 한층 성숙해졌고 모든 면에서 성장을 하고 있었다.
직장동료들도 영우의 실연을 알게 되었고 영우의 실연을 자신들의 슬픔인양 서로
위로해 주었다. 덕분에 영우는 조금씩 평정심을 찾아가는 중이다.
‘시간이 약이다’ 이 말은 어느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이지만 영우에게 와 닿기로는
미스김 언니가 한 말이다. 직장동료들은 영우에게 위로를 해준다는 빌미로 거의
매일 부평의 번화가를 찾았다. 이곳은 젊은이들의 순수함과 열정으로 가득한 곳
이기도하지만 영우에게는 잠깐 동안이라도 외로움을 잊을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춰진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은 영우에게도 매력적인 곳이다. 영우 또래의 젊은이들은 이곳에 모여서 그들만의 문화와 유행을 만들어 갔다. 그들과 어울리다
보면 어느새 모든 슬픔과 번민이 사라지고 즐거움과 기쁨에 젖어든다. 그래서 이곳은 그들에게 안식처와도 같은 곳이기도 하다.
영우 일행은 오늘도 변함없이 평소에 자주 가는 학사주점으로 향했다. 저녁 겸
술을 마시고 그 다음으로 중저음의 목소리가 멋있는 훈이를 보러 진선미 음악다방으로 향했다. 마치 정해진 코스처럼 서로에게 의견을 물어볼 필요도 없이 마법에 걸린 듯 한쪽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진선미 음악다방은 일행들 모두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자주 들려주기도 하지만, 훈이의 목소리가 다른 디제이들보다
감미롭고 매력적인데다, 특히 이곳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언제나 정감이 있고
그녀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멘트를 많이 들려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영우의 직장 동료들의 퇴근 후 저녁 코스는
정해 놓은 듯 일정하게 움직였다.
드디어 영우가 신청한 비틀즈의 노래 렛잇비가 흘러나오고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매력인 훈이의 멘트가 들려왔다.
“오늘도 변함없이 진선미 음악다방을 찾아주신 영우씨의 신청곡 띄웁니다.”
훈이가 자신의 이름을 호명할 때는 가슴이 설렌다.
‘헤어지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지혜를 주세요. 그들이 깨달을
기회가 있도록,,,’
렛잇비 노래가사가 영우의 가슴에 와 닿았다. 음악이 중간정도 흐를 때쯤 영우에게 메모지 한 장이 전달되었다. 훈이의 메모지다.
‘영우 씨 오늘 영업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어떤 이유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마음으로 영우를 기다리라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영우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종업원 아가씨에게 알겠다고 대답을 해버렸다.
종업원 아가씨가 돌아갔고 뮤직 박스 안으로 들어간 종업원 아가씨가 훈이에게
귓속말로 무슨 말인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훈이는 영우 쪽을 향해서 웃음 띤 얼굴로 손을 들어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때부터 영우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병휘오빠와 이별 후 누군가와의 새로운 만남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훈이의 메모지를 받아 든 영우는 잠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다시는 인연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 영우는 가슴이 셀레이는 자신이 미웠다.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건가, 여기 키 크고 예쁜 여자애들도 많은데 그냥 자주 오는 손님이라 의례적으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는 건가.’
‘그럼 우리 네 명한테 똑같이 전해야지 왜 나한테만 살짝 메모지를 전달해?’
미스김 언니 작은 미스김 미스정은 궁금한 듯 영우에게 물었다. 영우는 메모지를
그녀들에게 보여주었다. 동료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데이트 신청 받은 거라고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다방 디제이들은 영우또래 여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고 연예인 수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디제이와 사귀는 여자애들은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더구나
진선미 음악다방의 9시 진행자 훈이는 잘생기고 키도 크고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음악도 우리 취향에 잘 맞게 골라서 들려주고 흠잡을 데 없는 가장 잘 나가는 디제이오빠다. 그러다 보니 여자들의 우상 같은 존재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 오빠와 한번 사귀고 싶어 하는 애들이 많았다. 그런데 영우가 오늘 훈이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동료들이 잘해보라는 응원과 시샘의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은 영우가 옷매무시를 다듬고 뮤직박스 쪽을 보고 있을 때 일을 마친 훈이가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훈이오빠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마주하기는 처음이다. 뮤직박스 안에서 비치던 모습하고 다르게 보였다. 잘생긴 얼굴인데
하얀 피부가 조금은 낯설게 보였다. 밤에 일하고 낮에는 방안에서 자고, 하루일상이 햇볕을 못 보는 환경이라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영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훨씬 더 예쁘구나! 기다려 줘서 고마워”
예쁘다는 말이 좋았다.
‘그런데 이건 뭐지? 첫 대면에 반말이라니 칫!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처음부터 반말이야’
경쟁심이 생겼다.
“으~응! 오빠도 가까이 보니까 더 멋있어∼요”
“하 하 하! 영우도 말 놔두되. 우리 마주 앉은 거는 오늘이 처음이지만 자주 봤잖아. 영우 사연 내가 여러 번 들려주기도 했고 영우가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을 내가 기억할 정도인데,,,”
“그건 그냥 시집에 있는 글귀예요, 그게 진짜 내 사연인 줄 알았나 봐, 오빠도 순진하셔라 어떡하나, 나한테 속아서”
그동안 영우는 병휘오빠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감정을 신청곡 메모지에 적어서 훈이의 목소리로 들으며 마음을 달랬었다. 괜스레 속마음을 들킨 거 같아 창피한
생각에 에둘러 거짓말을 해 버렸지만 알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에 개의치 않았다.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훈이를 따라서 영우도 일어났다. 2층 계단을 훈이가 먼저 내려가고 영우가 뒤따라 내려갔다. 거리에는 여기저기 술집과 음악다방에서 쏟아져 나온 젊은 청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11시30분 통행금지 예비 사이렌이 울리고 분주히 움직이는 발걸음에 일찍 떨어진 가로수 낙엽이 이리저리 발길에 차이고 있었고 상점들의 네온사인 불빛이 하나둘
꺼지자 거리는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택시 부르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그녀는 오늘 택시를 잡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오늘 그녀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
“오빠 어디로 가는 거야. 나 집에 가야 하는데...”
“응 나 오늘 생일인데 영우한테 생일 축하받고 싶어서...”
“아! 그랬구나. 그럼 미리 얘기를 주지 나 아무것도 준비를 못했는데”
“응 그냥 영우만 있으면 돼, 내 친구들이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오빠혼자 있는게 아니었어? 어떤 친구들인데”
“영우도 보면 알걸! 음악다방 디제이들이니까 영우가 어디에서든 한 번쯤은 봤을 거야 여기 부평은 바닥이 좁아서 다 알게 되잖아”
영우는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순간 창피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끼며 훈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이 말을 하며 골목을 지나 근처의 훈이가 자취하는 이층 양옥집 대문 앞에 다다랐다. 훈이가 철재대문을 소리 없이 열고 들어가다,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영우의 손목을 살짝 잡아서 끌었다.
“어서 들어와, 왜 무서워”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정말 있어도 되는 거야?”
“그럼! 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영우도 올 거라고 미리 얘기해 뒀거든”
아까 다방에서 영우의 대답을 듣자마자 친구들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다.
영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훈이의 손에 이끌려 사뿐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훈이가 사는 방은 3층 옥탑방이다. 그들은 밖으로 난 철재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쇠붙이에서 나는 소리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주인집에서 들을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발뒤꿈치를 들고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올랐다. 옥상은 제법 넓은 편이고 꽃 화분도 놓여 있다. 남자들의 속옷이 빨랫줄에 걸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인다.
저 중에 훈이오빠의 속옷도 있겠지, 하는 생각에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엌문 앞에 다가선 영우가 자신도 모르게 훈이의 팔짱을 꼈다. 그녀의 행동을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색한 모습을 보이면 훈이오빠 친구들이 오늘 처음
만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릴까 봐 숨기고 싶은 것은 아닐까?. 오래 사귀었던 연인처럼 보이고 싶은 감정일 것이다.
방안을 들어서자 함성과 함께 시기의 말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야 훈이 너 나쁜 놈 우리 허락도 없이 영우를 꼬신거냐, 에이 나쁜 놈아 하하하”
“영우 씨 섭섭합니다, 우리를 배신하고 훈이를 선택하다니”
영우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말이다.
‘오늘 처음 보는 사이에 무슨 배신이라니,,,’
영우가 생각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영우의 아리따운 용모에 반해서 가슴앓이를 하는 남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심하게 몸살을 앓는 남자도 있었고 은근히 데이트 신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남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전부터 그들끼리는 영우에 관해서 주고받은 말들이 꽤나 많았었고, 오히려 디제이들 사이에선 영우를 사귀고 싶은 여자1호였던 모양이다.
훈이오빠 친구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자리에 합석한 영우는 종규오빠와 혜철오빠 그리고 영우의 또래쯤 되어 보이는 두 명의 남자들을 소개받았고 그들이 진행하는 게임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물론 영우가 그들을 위해서 무슨 장기를 보여주거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영우가 한 것은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고 웃어 준거 밖에는 없다. 단지 그들이 영우의 귀여운 행동 하나하나,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
맑은 목소리, 가끔씩 까르르 웃어주는 웃음소리에 모두들 정신 줄을 놓고 행복해
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영우는 그날 밤 여기 모인 모든 남자들을 황홀경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날 밤 그렇게 훈이의 생일 파티는 영우의 등장으로 유쾌한 시간이
되었다. 아마 훈이의 생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즐거운 생일 파티를 마무리하고 한 명 두 명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영우와 훈이 단둘이 남았다. 훈이오빠와 함께 지내는 종규오빠도 오늘은 다른 친구
집에서 자겠다며 가버렸다.
영우는 집이 너무 멀고 버스도 끊어진 시각이라 집에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영우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달랑 좁다란 단칸방에서 처음 만나는
남자와 단둘이 밤을 보내야 하는 영우의 입장을 의식한 듯 훈이가 방금 함께 있었던 친구네 집으로 가서 잔다고 했다. 그러나 영우는 그것이 더 무섭고 당황스러운 제안이다. 영우가 급하게 훈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안 돼요 오빠! 혼자 있는 게 더 무서워, 그냥 여기서 나하고 같이 있어”
영우는 황망하게 말을 하며 순간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거리낌 없이 같이 있자고 하는 대범함과 적극적으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잠시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영우는 혼자 있는 것이 무섭기도 하지만 은근히 좋은 감정을 마음속에 품고 있던 훈이 오빠와 단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싫지가 않았다. 걱정스러운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늦은 시각이고 피곤도 하건만 훈이오빠가 기타를 집어 들었다. 방금 전에 생일파티 할 때는 친구들이 손에서 기타를 놓지 않는 바람에 훈이오빠 기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훈이오빠가 기타 반주에 맞춰서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를 불렀다. 훈이오빠의 기타 솜씨는 친구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멋있고, 노래소리는 너무도 부드럽고 감미로워 영우의 마음을 몽땅 빼앗아 버렸다. 훈이오빠는 기타 반주와 노래에 영혼을 담아서 부르는 듯 영우의 심장을 울렸다. 귀에 익은 노래를 부를 때는 영우도 옆에서 따라 불렀다. 이 순간은 마치 두 사람의 영혼이
하나가 된 기분이다. 그러다 문득 훈이오빠의 기타 치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고 알 수 없는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노래는 멈추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눈이라도 붙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잠을 청했다. 훈이오빠는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들었고 영우는 여러 생각들이 뒤엉켜 잠이 달아나는 바람에 한참을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영우가 은근히 걱정했던 훈이오빠의 입맞춤은 밤새 없었다.
그날 이후 영우는 다방에서 훈이가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날이 많아졌고 통금시간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훈이의 집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늦은 밤까지 훈이오빠의 기타 반주에 맞춰서 노래 부르고 이야기하며 보내는 시간이 꿈같이 포근하고 행복했다. 간혹 훈이오빠의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왁자지껄 정신이 혼미해질 때도 있지만 그것도 새로운 느낌으로 영우를 즐겁게 해 주었다.
날이 갈수록 훈이오빠를 향한 마음이 점점 더해갔고, 훈이오빠의 자취방에서 단둘이 함께 있던 어느 날, 그렇게도 완강하게 거부하던 영우가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훈이오빠는 금세 잠이 들었고 숨을 고른 영우가 몸의 열기도 식힐 겸 밖으로 나왔다. 겨울 찬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엉클어진 긴 머리가 얼굴을 휘감는다.
훈이오빠가 준 심리적 안정감은 병휘오빠와 이별에 가슴이 다 타서 재만 남은 채
지쳐 그을린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했다. 영우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금 느끼고 있는 안정감이 누군가를 향한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 작은 불씨가
되면 좋겠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 마음이 이끌릴 때 이 작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면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고 지난 과거의 상처와 아픔은 서서히 치유되겠지, 새로운 사랑은 지난 과거의 아픔을 막아줄 수 있는 그 무엇이 될 거야’
영우는 이렇게 들뜬 마음으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첫댓글 멋진 소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