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에서 여사울까지는 약 5킬로다. 한가한 농촌길을 걷는 맛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농로 곳곳에 거름구덩이가 있어 코를 톡쏘는 냄새에 도시에 살던 나는 코를 막고 다녀야 했는데 이제는 그 거름내음도 정겹게 그리워진다. 이제 농촌마을에는 거름내음도 쇠죽 끓이는 여물내음도 사라졌다. 흔하던 소달구지도 보이지 않는다. 경운기마저 트럭과 차량에 밀려 보기 드믈다. 논밭일할 때 새참 나르던 아낙네의 모습도 짜장면과 커피 배달하는 오토바이에 밀려 보이지 않는다. 시골 구석구석 농로까지도 대부분 말끔히 포장되어 흙먼지를 뒤집어 쓸 일도 거의 없다. 길은 옛길이되 모든 것이 변한 것이다. 그래도 길섶의 풀꽃들과 날아다니는 벌나비들은 예나 똑같다.
예산 땅 여사울 성지는 충청도에 가장 먼저 복음이 전해진 한국 천주교회 못자리다.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드비꼬 생가가 있는 곳이다. 여사울이라는 지명은 농업과 상업이 번창해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서울과 같다는 '여(如)서울'로 불려진데서 비롯된다. 1759년 여사울 부농집안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서울의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조선초기 천주교 주역 권일신을 스승으로 교리를 배우고 1785년 세례를 받았다. 권일신은 그에게 그리스도교를 고향에 전파하라는 사명을 주었다. 사교적이면서 워낙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 사람들에게 호감을 받는 이존창은 충청도 전역을 다니며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같은 그의 활동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마케도니아 지방을 수 없이 돌아다닌 사도 바오로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이존창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운다. 다블뤼 주교는 기록에서 여사울의 30여 가구 친척 뿐아니라 3백 명이 넘는 마을사람 모두 그의 전교대상이었다고 밝혔다. 그의 전교활동은 신분과 지역을 가리지 않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조선 최초 사제들인 김대건, 최양업 두 신부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했다. 특히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는 김대건 할아버지 김택현에게 시집가 김대건의 할머니가 되었고 그녀의 사촌은 최양업 모친 이성례의 숙모이다. 다블뤼 주교는 충청도 지역 순교자 대부분이 이존창이 입교시킨 집안의 후손이라고 기록했다.
한때 조선 평신도들은 성직자가 없는 현실에서 신앙생활에 많은 한계에 부딪치자 스스로 주교, 신부를 만들어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집행했다. 가성직제라고 하는 이러한 현상은 세계 역사상 없는 일이다. 나중에 북경교회에 문의하여 이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신자들은 자신들 과오를 깨닫고 즉시 철폐했다. 1년 남짓한 가성직제도에서 이존창은 충청도 일대를 담당하는 신부역할을 맡았다. 이는 교회 내 그의 지도자적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존창의 신앙생활에 시련이 닥친다. 1791년 진산에서 제사문제로 일어난 신해박해 때 그가 충청도지역 사학괴수로 지목되어 체포된 것이다. 그런데 체포된 이존창은 목숨을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생각으로 배교를 선언했다. 그의 배교가 진심이 아니었던 것은 풀려나온 후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배교가 신자들에게 미친 파장은 상당이 컸다. 관에서는 그의 배교를 대대적으로 선전해 신자들이 자진하여 마음을 돌리도록 유도했고 이존창 자신도 신자들 앞에 떳떳히 설 수 없게 되었다. 다블뤼 주교도 훗날 내포 신자들이 가장 슬퍼하고 창피스럽게 생각한 것은 그들의 사도 이존창의 배교였다고 기록했다. 배교로 인해 여사울에서 얼굴을 들 수 없게된 이존창은 그해 말 부여 홍산으로 이주했다. 그는 계속 유항검, 강완숙 등 천주교 지도자들과 함께 1795년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고 사목활동을 돕는데 진력했다. 이존창은 전라도 고산에서 주문모 신부를 추적하던 관헌에 잡혀 공주 감영에 압송된다.
이번에는 이존창이 고문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했으나 당시는 많은 학자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아까워한 정조의 관용정책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계속 천주교 지도자들과 접촉하여 북경교회에 사람을 파견하는 일을 의논하고 재정을 부담했다. 그가 이런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에서 재물을 써서 옥중생활을 편하게 해주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존창은 1799년 감사에게 다시는 서학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감사는 이를 조정에 보고하고 조정에서는 그를 석방하여 천안에 두고 날마다 동태보고하라고 명했다. 그가 천안에 있는 동안 관에서는 그를 형리로 발령했으나 군수는 일을 시키지 않고 거처에 연금만 시켰다. 정조의 관용정책은 그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한 후 대왕대비 김 씨가 수렴청정하면서 끝나고 1801년 신유박해가 터졌다. 이때 또 체포되어 동료신자를 대라는 심문을 받은 이존창은 자신은 이미 서학을 끊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연락이 없노라고 거짓 자백했다. 이는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는 1801년 4월 10일 "호서(湖西) 사학괴수 이존창을 처형하여 민중을 타이르라"는 왕명에 따라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목은 여섯 번 칼질 만에 떨어졌다. 다블뤼 주교는 "그는 마지막 순간에 비난받을 어떠한 나약함도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한번 배교하고 그후에도 거짓자백으로 목숨을 이어가기도 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거목으로 성장해 지금도 온갖 새들이 깃들고 있다. 나는 이존창의 나약한 모습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모르긴해도 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목숨을 도모했을 것만 같다. 이존창은 배교자였다는 주홍글씨 때문에 지금도 하늘에서 괴로워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내포의 사도였다.
여사울 성지는 이밖에도 홍병주 홍영주 형제 두 분 성인과 김광옥 김희성 부자 등 8명의 시복예정자와 이름이 밝혀진 12명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이다. 초저녁 무렵 성지에 도착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성지를 둘러보았다. 이존창 생가터는 터만 남았으나 넓직한 잔디밭에 대형 십자가와 성모상, 야외제대를 갖추어 성지로서 손색없이 꾸며졌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까지 이존창의 묘를 찾지 못한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여사울 산에 있는 20여 기 옛무덤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생가아래 기념성당도 아담한 규모에 내부도 소박해 기도처로서 훌륭했다. 다만 나의 개인적 느낌을 말하자면 스페인 마을성당 같은 서양식 성당 외관은 조선교회 못자리라는 성지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또한 성당 외벽에 라틴어로 크게 써놓은 "Dominus Vobiscum"라는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그것도 중세 글씨체로 써놓아 내가 무식한 탓인지 스팰링도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성당 외벽에 크게 써놓을 정도면 모든 신자가 알아들어야 하는 메시지가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한글로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쓰면 안되는 것일까. 이곳이 라틴전례 성당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글이란 무의미한 도형일 뿐이며 몇 사람만 이해하도록 써놓았다면 그야말로 촌스러운 지적교만이라고 생각한다.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니 벌써 해가 저물어 어둑했다.(뉴욕 허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