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사제
선교의 수호자
동방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서구 열강의 정복 민족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정복하는 데에 골몰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부분의 정복자들과는 달리,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따라 한 분뿐이신 임금께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506년 스페인 나바라(Navarra)의 하비에르(Javier)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수학하던 1534년에 이냐시오와 함께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1537년에 로마에서 사제로 서품받아 자선 사업에 헌신했다.
1541년에 성 이냐시오의 권고를 따라 포르투갈령 인도로 가서 선교하였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참회하는 모범을 보였으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뛰어난 설교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켰다.
그는 인도(1541-43,48,51-52년)와 스리랑카(1544-45년), 몰로카스 제도(1545-47년)
그리고 일본(1549-51년)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활동적인 모습은 그리스도교 모든 젊은이에게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정열을 쏟으라는 격려가 된다.
그는 1552년 중국으로 들어가던 도중 상찬 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을지라도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이 말은 학문으로써 장래가 극히 촉망되며 성공과 명에, 특권의 생활이 그의 앞에 놓여 있던 한 젊은 철학 교사에게서 여러 번 반복된 것이다.
그 당시 24세이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파리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이 충고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이냐시오 로욜라와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냐시오의 끈질긴 설득은 결국 프란치스코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했다.
프란치스코는 이냐시오의 지도 아래 영적 훈련을 했고 1534년에는 그의 작은 공동체인 갓 창설된 예수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함께 몽마르트르에서 교황의 지시에 따르는 청빈과 정결 그리고 사도직 수행에 관한 서원을 했다.
프란치스코는 1537년,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베니스를 떠나 리스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동인도로 항해하여 인도의 서쪽 해안인 고아에 상륙했다.
그후 10년 동안 그는 인도인들,말레이 인들,일본인들 등 사방에 흩어진 국민들의 신앙을 깨우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과 잠자리를 함께 나누었다.
그는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특히 나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잠잘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으며 심지어는 성무일도를 바칠 시간조차 갖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그의 편지에서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말레이지아 섬을 거쳐서 일본으로 갔다.
그는 일어를 열심히 배워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교훈을 주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교 본부를 마련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이 계획은 중국 본토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선교는 반드시 머나먼 외국에 가서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자녀들,남편이나 아내,혹은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는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직 희생으로써, 개인적인 모든 이익을 포기함으로써 프란치스코는 자유롭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희생은 좀 더 큰 선익을 위하여 때로는 자신을 양보하는 것이다.
기도의 선행,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선행, 단순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선행등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시간이다.
프란치스코는 이 가장 큰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홍콩에서 남서쪽으로 7백 마일 떨어진 산치아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란치스코가 배 안에서 병으로 죽어 갈 때 그 배에 있던 포르투갈 선원들은 그를 배에서 옮겨야만 했다.
그에 대한 친절로 선장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는 바닷가 모래밭에 프란치스코를 내려둔 채 떠나 버렸다.
그러나 어떤 포르투갈 상인이 쓰러질 듯한 오막살이 안으로 프란치스코를 데리고 갔다.
그는 열이 심한 발작과 피를 빼는 불안한 치료 속에서도 계속해서 기도했다.
그는 갈수록 허약해져만 갔다.
"나(그의 친구인 안토니오)는 그의 임종을 지켜 보았으며 그가 죽어갈 때 그의 손에 촛불을 들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예수의 이름을 입술에 올리며 평화와 안식을 지닌 채 자신을 하느님께 바쳤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