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지코지, 바람이 먼저 걷는 길
제주의 동쪽 바다는 아침을 서두르지 않는다. 섭지코지로 향한 날도 그랬다. 아직 해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바다는 푸른 어둠을 품고 있었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번지고, 바람은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쉼 없이 밀려왔다. 멀리 성산일출봉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처럼 수평선에 앉아 있었다. 제주에 여러 번 왔지만 새벽의 섭지코지는 낯설 만큼 다른 얼굴이었다.
해안 가까이 다가가자 작은 배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바다로 나가지 못한 채 뭍에 놓인 배였다. 바람에 닳고 소금기에 씻긴 흔적이 몸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한때 파도를 가르며 바다를 오갔을 배가 지금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모습에서 쓸쓸함보다 기다림이 느껴졌다. 사람에게도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달려가는 것보다 잠시 멈춰 자신이 건너온 바다를 바라보아야 하는 시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섭지코지의 바람은 제법 거칠었다. 옷깃을 잡아당기고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제주에서 바람은 풍경의 일부가 아니라 풍경을 만드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풀을 눕히고 구름을 밀어내며 파도의 방향까지 바꾸어 놓는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제주의 표정이 달라졌다.
물이 빠진 해안에는 검은 현무암이 넓게 드러나 있었다. 돌 사이마다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고 그 속에 하늘이 들어앉았다. 조금 전까지 바다였던 곳이 잠시 육지가 되고, 바다가 남겨 놓은 물에는 구름이 비쳤다. 돌 표면에는 초록빛 해조류가 붙어 있었다. 검은 돌과 초록의 생명, 푸른 물빛이 어우러지자 거친 해안이 하나의 거대한 그림처럼 펼쳐졌다.
나는 그 앞에서 걸음을 늦추었다. 여행은 멀리 가는 일이 아니라 천천히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빨리 지나가면 바위만 보이지만 멈추면 돌 틈의 물이 보이고,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작은 물속에서 살아가는 생명까지 보인다. 풍경은 바라보는 사람의 속도만큼 자신을 보여준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붉어졌다. 처음에는 구름 끝에 연분홍빛이 묻어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바다까지 붉은 기운에 젖었다. 물웅덩이에도 여명이 내려앉았다. 하늘에서 한 번 피어난 빛이 바다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었다. 멀리 성산일출봉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어둠 속의 윤곽은 점점 선명해졌다.
잠시 후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둥근 해 하나가 수평선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매일 뜨는 해인데 여행지에서 만나는 일출은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움직인다. 어제와 같은 태양이지만 바라보는 내가 어제와 같지 않아서일 것이다. 우리는 일출을 보러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다시 시작할 마음 하나를 만나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가 높아지자 바위 위에 모여 있던 새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여러 마리가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새는 날개를 활짝 펴고 바람을 맞았다. 젖은 깃털을 말리는 것인지, 이제 막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한 마리가 바위에서 몸을 띄웠다.
커다란 날갯짓 몇 번으로 새는 바다 위를 건너갔다. 그 장면이 오래 눈에 남았다. 새에게 바다는 길이었다. 사람에게는 건널 수 없는 물의 경계가 새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바람마저 새의 길이 되었다. 우리는 길이 있어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새는 길 없는 곳에서 자신의 길을 만든다. 여행도 그러하지 않을까. 정해진 목적지를 찾아가는 일보다 익숙한 자리에서 한 번쯤 몸을 일으켜 보는 것. 그 작은 용기가 새로운 풍경을 만나게 한다.
두 마리 갈매기가 구름 사이를 지나갔다. 푸른 하늘에 작은 점처럼 보였다. 거대한 구름과 넓은 바다 앞에서 새는 한없이 작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두 마리가 들어오자 풍경 전체가 살아났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생명이 없다면 한 장의 그림에 머물 뿐이다. 새가 날고 파도가 움직이고 풀이 흔들리면서 비로소 풍경에는 이야기가 생긴다.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다 문득 처음 보았던 배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바다로 나가지 않는 배와 하늘을 건너는 새가 한 풍경 안에 있었다. 하나는 머물고 하나는 떠난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떠나야 할 때가 있고 머물러야 할 때가 있다.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떠나는 법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돌아와 머무는 법도 배우게 된다.
섭지코지에서 만난 아침은 특별한 사건 하나 없이 흘러갔다. 구름이 지나가고, 파도가 밀려오고, 새가 날았다. 바위 사이의 작은 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움직임 속에서 나는 오히려 오래 잊고 있던 삶의 속도를 만났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걷는다. 목적지가 있어야 길을 나서고, 도착해야 여행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주 바다는 아무 데도 도착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파도는 해안에 닿았다가 다시 돌아가고, 바람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지나간다. 새는 어느 순간 날아왔다가 또 어디론가 사라진다. 자연은 도착보다 순환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섭지코지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뒤돌아보니 성산일출봉 위로 아침빛이 번지고 있었다. 새벽의 짙은 푸른빛은 어느새 옅어지고 바다는 환해져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세상은 몇 번이나 색을 바꾸었다. 길을 돌아 나오며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마리 갈매기가 바람을 타고 멀어지고 있었다. 날갯짓을 크게 하지 않아도 바람이 그들을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생각했다. 삶에도 저런 순간이 있을 것이다. 애써 힘을 주지 않아도 되는 때, 바람의 방향을 믿고 잠시 몸을 맡겨도 되는 때.
섭지코지에서 나는 바다보다 오래 바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람보다 오래 새의 날갯짓을 바라보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작은 배 한 척이 머물고, 그 위의 푸른 하늘로 두 마리 새가 날아간다. 떠난다는 것은 멀리 가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에 고여 있던 바람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