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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유업이 흐르게 하라
슥11:1-8
2025년3월2일(주일)
기동찬
1.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2.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쓰러졌음이로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들아 곡할지어다 무성한 숲이 엎드러졌도다
3.목자들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들의 영화로운 것이 쓰러졌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쓰러졌음이로다
4.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5.사들인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하게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6.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7.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8.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제거하였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믿음의 유업이 흐르게 하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멸망이냐, ‘믿음의 유업이 후대에게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믿음의 유업이 흐르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유업이 가정에 흐르게 하고, 셀에, 교회에, 성읍에 흐르게 하고, 나라에, 열방에 흐르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계획을 세우고, 믿음으로 동작함으로 가정에 <믿음의 유업이 흐르게 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결단하는 의미에서 ‘아멘’해 봅시다.
<믿음의 유업>을 이어 받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대들은 망해야 하는 과정만 남아 있습니다. 망하는 자리에서도 그루터기가 남아 있긴 하겠습니다만, 좌우간 우리는 망하지 말고, 오늘부터 <믿음의 유업이 가정에 흐르게 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유업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믿음의 유업을 이어 받지 못한 세대’들이 어떤 결론을 맞이 해야 하게 되는 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1-3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무리 읽어도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과 축복의 말씀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믿음의 유업이 흘러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유업을 흘려 보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유업을 흘려 보내지 못한 결과, 망하는 일만 남았는데,
1.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2.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쓰러졌음이로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들아 곡할지어다 무성한 숲이 엎드러졌도다
3.목자들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들의 영화로운 것이 쓰러졌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쓰러졌음이로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성읍이 망하고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말씀입니다. 망한 자리에는 ‘곡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1-3절의 말씀은 전부 망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망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니 ‘곡하라.’는 것입니다.
2절에 “곡할 지어다...곡할지어다”
3절에 “영화로운 것이 쓰러졌음이로다...요단의 자랑이 쓰러졌음이로다.” 이거 전부다 망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4절에서 6절까지도 보면 복의 말씀이 없습니다.
4.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5.사들인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하게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6.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4절,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고 합니다.
5절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5절)라고 합니다.
6절에는 하나님께서도,
6.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망하는 것입니다. 망할 일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들을 신경 안 쓴다는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신경 쓰기 싫은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스가랴 선지자는
7.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잡혀 죽을 양 떼”(7절),
‘가련한 양 떼’(7절)를 먹이는데, 이들을 불쌍히 여김으로, “은총”과 “연합”이라고 하는 막대기로 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떼가 스가랴 선지자를 싫어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를 미워합니다. 선한 목자를 미워합니다. 선한 리더를 미워합니다. 그러니 선한 목자도 이들에게 진저리가 납니다.
더 이상 그들의 목자가 되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는 대로, 망하면 망하는 대로 내버려 둡니다.
8.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제거하였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자,
망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6.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자,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 왔길래,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6절과 같은 이런 소리를 들어야만 했을까요,
자, 여기에 대한 답을 저는 토요일 큐티 본문으로 돌아가서 찾아 봤습니다.
슥10:12.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 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좋아 합니다.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슥10:12)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10:12)인데 이들이 오늘 본문 6절과 같은 말씀,
6.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는 말씀을 받았으니,
이들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자기가 자신의 삶에 주인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라고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전혀 의지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인 줄 알고, 자기 마음대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런 자들은 언제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옵니까, 다 망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안되기 때문에,
오늘 제가 하나님께 받은 레마의 말씀은, 너는 충원의 권속들로 하여금 <믿음의 유업이 흐르게 하라>는 레마의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들로부터 <믿음의 유업>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다 망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 주심으로, 당대 선한 목자, 스가랴 선지자를 그들에게 보내 주셔서 이들을 먹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은”을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어제도 오늘도 언제든지 변찮고 보호해 주시네 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주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서 오늘도 충만케 하소서.” 라고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들은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7절입니다.
7.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7.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됨이 복이야, 하고 양 떼를 먹였는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렇게 찬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찬양 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망하게 된 이들에게 스가랴를 보내 주셔서, “은총”과 “연합”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하여 나아갈 때,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라고 “은총”과 “연합”이라는 막대기를 가지고,
7절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7절). 이들을 이렇게 먹였는데도, 이마저도 이들은 외면했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답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망해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보면, 이들을 향하여 뭐라고 했습니까,
7절. “잡혀 죽을 양 떼...”
7절. “참으로 가려한 양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보내 주신 ‘스가랴 선지자’도 거부했습니다. 싫어 했습니다.
8절.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제거하였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그러니 이들에게 남은 것은 망하는 것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망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을 통해서 결국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까지 가지 말라고, 항상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 선한 리더를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을 일컬어, 성경에서는 ‘어리석은 자’, ‘교만한 자’라고 합니다. ‘어리석고 교만한 자’의 결과는 망하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잠18:12.“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잠18:12)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잠18:12.“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에 더 가까울까요?
멸망의 선봉인 교만한 모습에 더 가까운지,
존귀의 앞잡이인 겸손에 더 가까운지,
오늘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함으로 새롭게 회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거부하고 싫어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단 한가지 망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되면 안되기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냥 왔다가 그냥 일어나 집으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뭐라도 하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라면,
하나님, 하나님을 의지하는 중에 더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또는
나 자신도 모르게 교만합니까,
그렇다면, 오늘 즉시로 그 교만을 십자가에 처형시키고 겸손한 자가 되기로 결단하고 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뭐라도 정리하고 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를 좋아 하십니다.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10:12).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 세상에 살아가는 날 동안 나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행하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좋아 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 다윗을 보니 내 마음에 합한 자로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의 아들 누구를 보니 내 마음에 합한 자로구나’라고 하는 이런 칭찬을 듣는 자들이 우리 중에 많이많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다윗은 정말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성경 삼상17:45절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이런 다윗과 함께 하시기를 좋아하신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가문에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삼하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5:10).
자신의 인생과 자신의 가문을 점점 강성하게 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아는 다윗은 날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중에 더 의지하는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거인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당대와 후대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유업’을 흐르게 합시다.
이를 위하여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중에 더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중에 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의 유업이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흐르게 하는 당대와 후대,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가문, 믿음의 유업이 흘러가는 가문으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
그 가정의 자녀까지 그 자녀의 자녀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