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구원의 관계(2)
(빌립보서2: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성령의 인도로 말씀을 받을 때는 먼저 용어 정리가 필요 합니다. 믿음이니 구원이니 거듭남이니 회개니 기도니 성령이니 등등.... 무수한 오해에서 탈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원이란 말이 나의 구원 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입니까? 이 말은 내가 건져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승리 입니까? 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나, 하나님의 나라나, 영적으로 거듭나는데 기여 될 수 없고 오직 홀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완성 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용어를 받을 때 자기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용어는 하나님의 용어입니다.
특히 중요한 단서는 사람이 스스로 속는다는 것입니다. 구원 없는 구원, 거듭남 없는 거듭남, 성령 아닌 성령에 사로잡힌 체, 거짓 신앙을 참 신앙으로 오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너나없이 아담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아래 있다는 말은 아직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말이 되고,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죽어 있다는 말은 아직 생명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인간 스스로의 힘이 개입해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그토록 중요하게 말하는 십자가란 무엇이며,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은 무슨 관계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이 개입된 일을 왜 비밀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엄밀히 말하면 성경으로 이미 세상에 공개되어 있는 일은 비밀이 아닙니다. 비밀은 군사비밀처럼 어느 공간에 꼭꼭 감추어진 채 누구도 볼 수 없도록 통제된 상태에 있어야 비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비밀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달을 수 없는 것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은 성령을 받아서 예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은 일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고자 하신 이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1:27절 뒷부분에서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책망하면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말대로 하자면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대대로 하나님을 섬겨온 민족이고 율법을 지키기 위한 열심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런데도 호세아는 이들의 앎을 앎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예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한 무지한 자로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를 안다고 해도 이 비밀에 접근 되지 못해서 예수의 피로 완성하신 은혜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면 그의 피로 말미암은 은혜의 완성에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은혜의 세계에 눈이 열리게 되면서 은혜로 인한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비밀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비밀로 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커다란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율법 행위, 인간의 선행, 인간의 착함, 인간의 노력, 인간의 기도로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히려 복음을 받는데 방해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 열심으로 주어지는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 선물의 특징은 값을 지불하지 않는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에 갇힌 인생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일은 인간의 집단의식이나, 상담 행위나, 부흥회 같은 것으로 접근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창세전에 세우신 일, 즉 하나님의 창조로 되는 것입니다. 이 창조는 바로 사망 권세에서 구출하는 것입니다.
인간 실존이 에덴에서 추방되어 사망권세 아래에 깊이 잠식된 상태에서 새 생명의 능력이 주어짐으로 하나님께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없이 독립된 인간에서 성령이 인간 속에 들어가심으로 새롭게 된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말은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인 성령이 임재한 상태를 말합니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해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 십자가의 승리로 이루어진 일을 힘입지 않고는 실제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이란 나의 죄, 나의 더러움과 결핍이 씻어지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채워져서 하나님께 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은 존재로 부상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육체적 구조를 부정하게 되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입장에서 “온전케 되었다”는 뜻은 실제로 엄청난 함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온전케 되었다는 말은 육체를 일컬어 온전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임재하신 “그리스도의 영을 일컬어 온전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말은 인간 개입 없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홀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한 새 창조가 무엇이냐? 입니다.
즉 신령한 존재로의 창조를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의 가능성과 열심과 협조를 철저히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일방언약” 이라고 합니다.
이 일방 언약 때문에 인간 부정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6:24,25)“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고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일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전부가 되는 일이 이것 입니다. 그러나 육적 구조에 섞여 있는 자들은 십자가 따로, 행함 따로, 오히려 십자가가 거리끼고 미련하고 이치에 안 맞는 폭력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22~24)“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러면 십가가를 모든 것으로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증거 합니다. 구원 받은 자는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김으로써 인간의 능력이나 힘은 가치가 없고 헛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자신이 대접받고 인정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야말로 무능만을 드러낸 채 죽임을 당한 예수는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지해야 하는 것은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9,20절을 보면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다
이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