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골대(龍骨大)의 혼비백산
인조 십년 임신년(壬申年)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승하하자 만주국에서는
특사를 보내어 조문하였다. 조정의 척화(斥和)하는 일파에서는 만주국의
특사를 거절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도 없어 받기는 하면서도 그
대접을 소홀히 하였다. 인조는 환후를 이유삼아 끝내 특사를 한 번도 접견
하지 않았고 접반하는 관원도 이름 모를 미관에게 내맡겼다.
이런 일을 저쪽 사신이 알 까닭이 없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홍
립과 한윤이 투항한 이후로 저들은 조선 사정을 세밀하게 알 뿐만 아니라
특사의 통역으로 따라온 고마아(古馬兒)란 자가 비록 만주의 성명을 갖고
그들의 의복까지 입고는 있으나 실상은 평안도 은산(殷山)의 관노(官奴)로
있다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적군에 사로잡혀 투항했던 자인 것이다. 그
의 본명은 정명수(鄭命壽)라 했다.
이 정명수가 만주국의 장수 용골대(龍骨大)의 막하에 들게 된 후부터 용골
대는 만주국 유일의 조선통이 되어 홍타시의 신임을 받아서 조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가 참견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번 인목대비 승하 때에도 그가 조문사(吊問使)로 뽑혀서 나왔
던 것이다. 용골대는 매우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
아갔다. 그러다가 삼년 후인 을해년(乙亥年)에 이르러 인렬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가 또 승하하였다. 이번에도 용골대가 마보대(馬保大)를 데리
고 조문을 왔다.
이때는 벌써 만주국이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황제국으로서 승격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칭할 때이다.
용골대와 마보대는 청나라 군사 백여명과 몽고 군사 구십여명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황제국의 사신으로서 나타났다. 우선 조정에서는 예의상 접
반사와 통사를 보내서 마중을 했다.
용골대는 홍타시의 친서(親書) 외에도 다른 두통의 봉서를 내놓았다. 접반
사가 나중 내놓은 두통의 봉서를 보니 한 장은 만주국 팔기대신(八旗大臣)
이라 쓰고, 또 한 장은 몽고제왕자(蒙古諸王子)라 쓰고 그 앞면에다가는
봉조선국왕(奉朝鮮國王)이라 쓴 것이었다.
이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접반사는 어찌해서 너희 나라 대신과 몽고
왕자가 무엄하게 우리 상감께 글을 바치느냐 탄하니 용골대는
"그게 무슨 말이요. 우리 한(汗)의 성업이 혁혁하여 안으로 팔기대신과 밖
으로 항복한 몽고 왕자들이 우리 한을 추대하여 황제위(皇帝位)에 나가시
게 했소. 귀국은 우리와 형제의 나라라 이 소식을 들으면 대단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 안 받겠다는 거요?"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접반사는 하도 엄청난 이 말에
'허허, 이런 변괴가 있나. 오랑캐놈이 천자라니...'
혼자 입안의 소리로 중얼대며 국서(國書)와 편지도 받지 않은 채 용골대를
흘겨보고, 빨리 말을 몰아 조정에 이 사유를 복명했다.
접반사의 복명을 받은 조정에서는 물의가 분분했다. 대사간 정온(鄭蘊)은
여전히 반대하며, 몽고 왕자의 사신을 물리치라고 했다. 그리고 홍익한
(洪翼漢) 등 척화신(斥和臣)들도 여기에 반대하여
"오랑캐 사신을 붙들어 목을 베어서 당당히 법을 알리는 게 옳은 줄로 아
뢰오."
하고 엄중하게 배척했다.
다만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만이
"이번 금나라 사신의 서신은 응당 받아야 하고 그를 불러 보신다 하여도
무관한 줄 아뢰오. 다만 보고 안 보고 할 것은 몽고 왕자 뿐이외다. 몽고
왕자도 반드시 꼭 박대할 것은 없으며, 엄하게 물리칠 것은 그들의 패서
(悖書) 뿐이옵니다."
하고 척화론에 반대 의견을 토했다.
이렇게 의론이 분분한 중에 날짜만 자꾸 끌던 중, 용골대 일행이 서울에
당도한지 사흘 만에야 조정에서느 다시 접반사를 보내 한(汗)의 조문만은
받는다는 기별을 했다.
어차피 한(汗)하고는 정묘년에 형제지국의 의를 맺었으니 조상마저 받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될터이니, 황제로 추대한다는 팔기대신과 몽고 왕자의
글은 받지 말고 조상만 받되, 이번 한(汗)의 사신이 전과 달라 백여명이
요, 그 중에는 무기를 가진 자들도 있으니 절대로 전례대로 대궐 안에서
조상을 받지 말고 따로이 대궐 앞 금천교(禁川橋)에 군막을 치고 이것들의
조상을 받는 게 옳다고 조정의 의론이 낙착된 까닭이다.
용골대 일행이 금천교에 새로 마련한 혼전(魂殿)에 이르러 허위(虛位)에
대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릴 때, 용골대의 가슴 속에는 부쩍 불안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동안 정탐군의 기별로는 조선 조정이 발끈 뒤집혀
서 금나라 사신의 목을 잘라 버리자고 임금께 우긴다더니 이제는 이 다리
옆의 군막이다. 또 왕궁에서 알현(謁見)을 허락하기커녕 왕궁의 그림자조
차도 구경시키지 않는다. 무슨 비밀한 계획이 있는 것 같이만 느껴졌다.
의심이 버쩍 난 용골대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사방을 둘러볼 때이다. 별안
간 바람이 홱! 일어나더니 군막이 푸르르 날렸다. 군막 뒤에는 호위하는
조선 군사들이 무장을 하고 둘러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용골대는
순간, 앗! 소리를 치며 그대로 뛰기를 시작했다.
뒤미처 마보대도 몽고 왕자들도 뛰었다. 나머지 백여명이 영문도 모르고
눈이 뒤집혀서 헐레벌떡 용골대의 뒤를 따라서 뛰었다.
좌우 옆 길가에 빽빽이 늘어서서 구경하던 백성들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놈들이 모두 달아나니 나라에서 이들을 붙잡는 줄만 알았다.
"오랑캐가 달아난다. 붙잡아라!"
우뢰같이 일어나며 백성들은 앞을 다투어 용골대를 뒤쫓았다. 그럴수록 용
골대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겨우 모화관 근처에 이르러 아무 집에나
뛰어 들어가서 마굿간에 있는 말을 집어타고 무악재 고개를 향해 치달아났
다.
원래 조정에서는 용골대가 전례없이 일백 수십명이나 군사를 데리고 더구
나 팔기대신과 몽고 왕자의 편지를 가지고 왔으니, 혹시 무슨 불우의 변란
이 있을까 해서 금천교 다리 밑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군막 뒤와 옆에 파수
를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바람이 펄럭하고 군막을 젖히
는 바람에 파수병이 용골대 눈에 띄어, 그는 영락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일은 매우 공교롭게 되어버렸다.
어쨌든 용골대가 달아나자 조정에서는 통사 박난영(朴蘭英)을 벽제관까지
쫓아보내서 다시 돌아가자고 청하니 용골대가 이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
고개를 가로 흔들고 그냥 말을 몰아 달아나 버렸다.
평화의 사신이 달아났으니 싸움은 목전에 닥치게 되었다. 위에서는 곧 팔
도에 통문을 돌려 군사를 모으게 했다.
병자년(丙子年) 겨울에 접어들자, 북방에서의 군사의 이동이 심해지며, 마
보대가 의주까지 와서 부윤 임경업(林慶業)에게
"너의 나라가 대신이나 왕자를 보내 강화를 맺지 않으면 치러 가겠다."
는 말까지 건네어 왔다.
그래도 완고한 척화론자들은
"이번에 오랑캐 사신이 오면 목을 베이시오."
"미리 평양가지 나가 싸움을 준비해야 하오."
이런 말로써 똥폼만 내고 있었다.
드디어 섣달 열이튿 날, 의주부윤 임경업의 급한 장계(狀啓)가 서울에 올
라왔다.
"이달 초아흐렛날 적병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옵니다."
그 이튿날, 즉 열사흗날 낮에는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장계가 올라왔
다.
"적병이 벌써 안주(安州)까지 왔습니다."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를 채 묘당에 돌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적병이 벌써 평양에 들어왔소!"
하는 평양감사의 장계가 올라왔다.
평양은 서울서 불과 오백여리. 사흘 동안에 압록강에서 평양까지 왔으니
기막힌 노릇이다. 조정은 발칵 뒤접히고 온 장안이 슬렁거렸다. 재빠른
사람들은 벌써 보따리를 싸들고 남부여대하여 피난들을 가느라고 남대문
밖이 꽉 메워졌다.
조정에서도 우선 영의정 김유의 아들 김경징(金慶徵)으로 강화 도검찰사
(都檢察使)를 시켜 강화를 지키게 하고, 윤방과 김상용(金尙容)으로 종묘
사직의 신주와 빈궁(嬪宮), 원손(元孫) 이하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
군(麟平大君)을 모시어 가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