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10
9월11일[연중 제2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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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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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8HGOb_Ifo8
(박원구 라파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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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보다 자주 하느님을 향해 손을 뻗으십시오!>
유다인들은 그야말로 철두철미하게, 글자 한자 한자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율법, 특히 안식일 법을 준수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자부심을 지니는 안식일 법규는 주로 ‘~하라!’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나열되고 있습니다.
안식일 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세칙들을 제시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습니다. ‘장로들의 전승’에 따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대표적인 노동 행위는 탈곡 작업이었습니다.
또한 응급환자가 아니고서는 병자에 대한 치료 행위도 엄하게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아파도 안식일을 피해 아파야 하니, 참으로 야박하고 비인간적인 안식일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혜성처럼 나타난 민족의 영도자,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기회 닿을 때 마다, 자신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안식일 법을 보란듯이 침해하고 파기하니, 유다인들의 느꼈던 좌절감과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자연스레 예수님을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설교를 마치신 다음,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매의 눈으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존경과 흠모의 시선이 아니라 여차하면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어떻게 하면 그분을 올가미에 옭아맬 수 있을까 고민고민하며,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악한 마음을 즉시 파악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 율법 학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그 말씀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원래 유다인들에게 안식일은 손가락 하나 꼼짝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안식일은 쉬는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업적과 자비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선행을 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축제의 날이고 잔치를 벌이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안식일의 의미가 아주 소극적인 형태로 희석되고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누리는 날, 자신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한 주간 동안 행한 일에 기뻐하는 날, 사랑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날입니다. 이런 안식일에 고통받고 있는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는 더 없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손을 뻗어라.’ 성한 손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손이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자주 손을 뻗으십시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으십시오. 이웃을 돕고, 과부를 보호하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이가 해를 입지 않도록 빼내주기 위해 손을 뻗으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으십시오. 손을 내밀어 뻗으면 고침받습니다. 예로보암은 우상을 숭배했다가 손이 굳었지만, 하느님께 간청하자 다시 펴졌습니다.”(암부로시우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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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4SPjslMD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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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은 반드시 이 두 범주 안에 속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당 한 가운데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그를 일어나 가운데 서라고 명하십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러나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을 치유해주십니다. 아이들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쯤은 압니다. 그런데 왜 많이 배운 사람들이 그 쉬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까요? 그들의 의도와 감정이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제나라 때의 일입니다. 대낮에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와서 금을 훔쳐 달아나다가 즉각 포졸에게 붙잡혔습니다. 포졸은 그를 끌고 가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금을 훔치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금을 잡을 때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욕구는 우리 눈을 멀게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욕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들처럼 눈이 멀어 멸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모를 때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자신에게 질문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하려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삼국지』에서 유비는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한 왕국의 황제가 되기까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한 인물입니다. 유비가 잘했던 것은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특별히 관우와 장비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입니다.
위, 촉, 오, 이렇게 세 나라가 힘의 균형을 맞추며 서로 티격태격할 때였습니다. 이미 상당한 위치에 올라간 관우는 전쟁에서 패하고 손권에게 붙잡힙니다. 손권은 관우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으나 관우는 유비만을 섬기겠다면 죽음을 택합니다.
그런데 복수를 하고 싶어도 힘의 우위 상 유비의 촉나라는 손권의 오나라를 칠 여력이 안 되었습니다. 남의 나라를 빼앗으려면 적어도 병력이 두 배는 되어야 하는데 촉나라는 오나라의 반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의형제의 복수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유비에게 장비가 찾아옵니다. 장비는 어떻게 의형제가 죽었는데 가만히 있느냐며 유비가 안 가면 자신 혼자서라도 오나라로 쳐들어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겁이 난 부하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유비도 더는 버틸 수 없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의형제로 자신을 위해 죽은 관우와 장비를 그냥 모르는 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비는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직접 오나라로 쳐들어갑니다. 오나라 장수는 유비의 교만함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 계속 패전하는 척하며 뒤로 후퇴합니다. 그러자 유비의 진영은 하나로 뭉친 것이 아니라 길게 늘어서는 꼴이 되었습니다.
오나라는 이때다 싶어 약하게 된 진영에 불화살을 퍼부어 전멸시켜버립니다. 나라의 거의 모든 군인을 데려가서 몰살당한 상태이기에 유비도 마음의 병이 들어 그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습니다.
황창현 신부님에게 100억을 기부한 할머니의 사연은 놀랍습니다. 강도들이 할머니를 납치해 며칠 동안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돈을 빼서 썼는데 할머니를 죽이자, 혹은 살리자는 의견으로 갈렸다고 합니다. 이때 그들이 차에 넣어져 있는 황 신부님의 CD를 듣고는 살려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죽이든지, 살리든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고민하다가 주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만나면 제대로 판단할 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오로지 살리려는 마음밖에 없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어떤 마음일까요? 살리려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이치는 살리려는 마음입니다. 죽이려는 마음이 아니라 살리려는 마음만 있다면 하늘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비와 관우와 장비는 살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명분 때문에 다 죽었습니다. 그나마 나라까지 세운 상황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관우는 자신과 아들의 목숨까지 명분을 위해 바쳤고 장비는 부하들의 마음을 무시하고 원수를 갚으려다 부하들 손에 죽었으며 유비도 그 명분 때문에 자신과 수많은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과연 그 명분이 이렇게 많은 이들을 죽게 한다면 꼭 지켜야 할 필요한 명분이었을까요? 명분도 눈을 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살리려는 마음이 아니라 죽이려는 마음 때문에 눈이 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이것만을 물으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 죽이는 일인지. 우리도 살면서 판단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어봅시다. 내가 내린 결정이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려는 것인지, 내가 살려고 이웃을 죽이려는 것인지.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이 두 범주 안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모기 아니면 예수의 결정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고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라면 하늘의 이치에 맞는 것이고 그만큼 하늘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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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6-11: 손이 오그라든 병자의 치유
예수님은 항상 인간이 현재보다 더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을 우선으로 하신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앞에 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9절) 이는 사람을 제도라는 법에 묶어놓으려고 하는 그들을 공박하시는 말씀이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참뜻을 행하기보다는 인간적인 규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관례와 규칙보다 사람의 생명을 돕는 일과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을 자비와 동정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저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지혜로운 질문이다. 만일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에 금지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비난하는 자들이 된다. “어찌하여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을 가지고 나에게 화를 내느냐?”(요한 7,23) 그분은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따기 위해 내밀었던 손(창세 3,6)을 선행의 건강한 힘으로 회복시켜주셨다. 범죄를 저질러 마비된 손이 선행으로 치유되었다.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오그라든 손을 뻗게 해 달라고 청하여야 한다.
“손을 뻗어라.”(10절) 손을 뻗는다는 것은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이다. 이제는 손을 뻗어야 한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고, 이웃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사람이 해를 입지 않도록 손을 뻗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어야 한다(이사 1,15.17 참조). 손을 내밀어 뻗으면 치유를 받는다. 손을 뻗는다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진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지금 오늘을 사는 나도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죽이는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즉 하느님의 모습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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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공항에 도착했는데 출발이 지연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신문홍보로 LA에 갔을 때입니다. 7시에 출발하는 비행기가 8시 30분에 출발한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1시간 30분이 주어졌습니다. 묵주기도는 했기에 무엇을 할까 잠시 고민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니 컴퓨터 작업을 하는 사람, 핸드폰을 보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잠시 눈을 감고 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도 컴퓨터를 꺼내서 ‘선순환과 악순환’이라는 주제로 강론을 준비하였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원망과 불평으로 채운다면 그 시간은 쓰레기통이 됩니다. 주어진 시간을 소중한 것과 중요한 것으로 채운다면 그 시간은 보석상자가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 공항에 왔기에 강론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는데 하느님께서 제게 특별히 시간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그의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소중한 일과 중요한 일을 먼저 한다고 하였습니다. 소중한 일은 가족을 돌보는 것입니다. 건강을 돌보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은 내게 주어진 업무입니다. 제게 중요한 일은 신문사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관직에 있을 때도 업적을 남겼지만 유배지에서 ‘불후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에서 소중한 일과 중요한 일을 하였습니다.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들들에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가족들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정약용 선생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정약용 선생의 대표작은 ‘목민심서’입니다. 관직에 임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를 기록하였습니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원망과 분노로 시간을 채우지 않았습니다.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로 시간을 채웠습니다. 신영복 선생도 오랜 시간 감옥에 있었습니다. 좌절과 원망으로 시간을 채울 수 있었지만 오히려 사색과 독서로 시간을 채웠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그 시간을 채우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보물을 채우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쓰레기로 채우는 사람은 헛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선택은 역시 각자의 몫입니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주교님께서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늘 이렇게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 어려움도, 갈등도, 아픔도 다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제 앞에 어떤 일이 생기면, 먼저 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제 판단의 기준은 ‘양보, 용서, 이해와 협력’이기보다는 저 자신의 욕심을 먼저 따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양보하고, 용서하며, 이해하셨을 것들을, 저는 자존심과 이기심 그리고 분노와 원망을 앞세워 단죄하고 미워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신앙인은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세상 사람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으므로 간디는 신앙인을 보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존경하지 않는다.’ 이 말은 지금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체험했고, 예수님께서 모든 삶의 중심이 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그와 같은 체험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오지만, 우리 주변에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심과 명예 때문에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오그라든 마음을 바르게 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지혜와 보물을 알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다른 어떤 법과 질서보다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주님과 함께 오그라든 나의 마음을 활짝 펼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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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교, 신앙생활>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루카 6,6-11)
이 이야기는 ‘안식일의 근본정신’에 관한 가르침인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에 관한 가르침이고, 더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종교와 신앙생활의 목적과 이유’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찾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참된 자유와 해방과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죽은 다음에 내세에서나 자유, 해방, 구원,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것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세의 행복을 미리 체험하는 생활이고, 그 행복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신앙인들에게 그 행복을 체험하게 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종교가 여러 가지 규정들로 사람들을 억압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신앙생활이 멍에가 되고 족쇄가 되어버린다면, 신앙생활을 할 이유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계명들과 율법들을 내려주신 것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신명 4,1) <여기서 “살 수 있다.”는 신약시대의 기준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다.”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땅”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 11,27) <여기서 “복”은 내세에서만의 복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누리는 복, 즉 신앙생활을 통해서 체험하게 되는 평화, 자유, 구원 등도 포함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계명들과 율법들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들입니다. <‘구원을 위한 은총’인 계명들을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시키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내세우면서도,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을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사람들을 억압하고 압박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그냥 ‘폭력’일 뿐입니다. 그 폭력이 두려워서 억지로 하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온갖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루카 4,18) 그 해방에는 당연히 율법주의에서 해방되는 것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라는 말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어떤 장애자를 일부러 회당에 데려다 놓았음을 나타냅니다. 그자들은 그 장애자의 처지나 심정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예수님을 고발하고 제거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장애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이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이유로 장애자를 데리고 온 것도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는 말씀은,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안식일뿐만 아니라 ‘모든 날’에 적용되는 가르침이고, 종교의 기본정신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종교가 좋은 일(선행, 사랑)을 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모의를 하였다.”라는 뜻입니다.(마태 12,14)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했고, 그 방법을 의논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이 어떤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주일미사 참례를 하는 것만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만 하면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선행을 할 ‘기회가 생기면’ 그것을 하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기회가 생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가? 우리는 기회가 생기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면 안 되고,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선행과 사랑은 ‘능동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남을 살리는 것은 곧 내가 사는 일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곧 사랑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신앙생활 자체가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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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회당 한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여기서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것’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는 행위를 가리키고, ‘남을 해치는 일’과 ‘죽이는 것’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이라서 그를 고쳐 주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이는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해치고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들에도 좋은 일을 하는데, 거룩한 안식일에는 더더욱 그러한 일, 곧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사람의 안식, 휴식을 위한 날로 제정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지나친 노동에 시달릴 수 있는 이들의 딱한 처지를 고려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 쉬셨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휴식할 수 있는 날을 따로 마련하여 주신 것입니다.(탈출 20,10-11 참조) 엄격한 규정으로 사람들이 정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하는 것이 안식일 법의 본디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이나 생명을 구할 기회가 생기면, 그것을 하는 것이 오히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손을 뻗어라.”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 안에도 그 나름의 규정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규를 잘 지키려는 의지와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한 규정의 취지나 목적을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그 규정을 올바로 지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였던 율법 학자들처럼, 단순히 규칙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모습, 또는 규칙이니 무조건 따르라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모습은 경계하여야 합니다. 혹시 맹목적인 ‘율법주의’가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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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일,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복음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배웁니다. 많은 이가 예수님께 찾아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하였습니다.
그 수가 오천 명이 넘는 때도 있었고, 길을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몰려들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아이가 봉헌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꺼이 받으시고 당신을 찾아온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요한 복음 6장 1절-15절 참조)
또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올라가 당신을 바라보는 세관장 자캐오를 찾아내시고, 그와 그의 집안에 구원을 선사하셨습니다. 이에 자캐오는 가난한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하여, 그들을 현실의 어려움에서 구해 줍니다.(루카 복음 19장 1절-10절 참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쉽게 지나쳐 버리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당신을 고발할 구실을 찾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도,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 병자는 오그라든 손으로 말미암아 오그라든 마음까지 치유받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실천할 때, 우리는 진리로 나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금 이 자리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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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신비이심>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루카 복음 6장 8절)
안식일 회당 안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그를 미끼로 예수님을 걸려넘어지게 하려는 이들이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당신의 영으로 이 상황 전체를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복음 6장 9절)
예수님 질문 안에는 안식일의 본질, 즉 사람에게 쉼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자기본위적으로 완고해진 인간들이 그 마음 읽기를 중단하고 메뉴얼화, 도식화해 버린 문자적 규범 안에 숨겨진 진짜 정신입니다.
안식일에 경제 행위나 노동 등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이유는 그것을 하지 않는 대신 해야 할 좋은 것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찾는 일이고, 그분 마음을 헤아려 함께 움직이는 것이겠지요.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일"이고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손을 뻗어라."(루카 복음 6장 10절)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이를 가운데로 불러 세우신 뒤 손을 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오직 말씀으로만 치유를 일으키십니다. 그분의 말씀과, 참으로 곤혹스럽고 난감하면서도 예수님 말씀에 따라 움직인 환자의 용기가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셨지요. 그저 말씀을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눈에 띄는 불법 치료 행위를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법에 회당에서 말을 하지 말라는 조항은 없으니까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을 못 잡은 그들은 예수님께 "골이 잔뜩 나서" 모의를 하게 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의논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사실을 그들이 인정했기 때문일 겁니다.
놀랍고도 경외로운 신비를 눈앞에서 체험한 것이지요. 어떤 물리적 의료행위 없이 앓는 이를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니까요. 하지만 완고하게 오그라든 마음은 신비 앞에서도 눈을 멀게 만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신비이심을 고백합니다.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콜로새서 1장 26절-27절)
하느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 표징을 요구하고 문자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로서는 알 길 없는 하느님의 신비, 사랑과 겸손과 자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그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열쇠는 믿음이지요.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새서 1장 2절-3절)
사도는 자신이 "교회의 일꾼"으로서 헌신하고 노력하는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그분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분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과 함께 사랑이 되도록 돕는 것. 이것이 말씀을 선포하는 모든 이들의 지향점입니다.
"손을 뻗어라."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신 말씀께서 우리 존재의 오그라들고 접힌 부분, 취약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힘껏 내뻗으라고 이르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신비에 온 존재를 맡겨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은 그래서 신비이시니, 그저 믿는 이만이 그 신비를 은혜로이 입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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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을 펴라>
아직은 덥지만,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가을을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을 통해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카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카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시길 희망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해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예수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으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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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마음과 몸은 통합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생각과 감정은 몸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는 반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의 움직임은 마음가짐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미소 짓거나 인상을 찌푸리면 또는 친절한 표정이나 화난 표정을 지을 때 감정이 이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연구 대상자들이 화난 사람의 표정을 흉내 내자 심박수와 피부 온도가 올라갔고 기분이 나빠졌다고 밝혔습니다.
얼굴뿐 아니라 우리 몸 전체가 기분을 바꾸는 데 쓸 수 있습니다. 플로리다 애틀랜틱 대학교 심리학자 세라 스노드그래스는 연구 참여자를 두 그룹으로 나눈 후, 각 그룹에 3분간 특정한 자세로 걸으라고 요청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팔을 앞뒤로 흔들며 큰 보톡으로 걷게 했습니다. 자신감과 낙관적인 기분을 외부로 드러내는 걸음걸이였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발을 끌며 작은 보폭으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낙담한 채로 생각에 잠긴 상태일 때의 걸음걸입니다. 이 두 그룹 중에서 3분간 ‘행복한’ 산책을 한 그룹이 다른 그룹보다 더 기분이 좋아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음과 몸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몸을 튼튼하게 할 수 있으며, 몸의 움직임만으로도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몸도 마음도 다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강하게 비판합니다. 율법을 모독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과연 튼튼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튼튼할 수 없었고,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면 당연히 고발된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마음이 오그라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온유한 마음을 갖고서 사랑 실천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야 마음을 활짝 펼 수 있고, 이에 따라 몸도 마음도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랑이신 주님을 받아들여서 오그라든 마음을 쫙 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오그라든 그 모든 것을 활짝 펴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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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일>
2023. 09. 11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루카 6,6-11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주일>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루카 6,8)
주님께서 주신
기쁨 가득한
주님의 날
주일은
내 언저리에
밀어놓았던
잊고 있던
고운님들
내 가운데로
모시는 날
늘 그렇게
함께 계시나
나 느끼지 못한
하느님과
주님께서
몸소 맡기신
내 눈길 밖의
작은 벗님들과
주님 닮게
지음 받은
내 사랑 못 받던
내 자신을
내 가운데에
품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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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고통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그러니만큼 인간은 누구나 이 문제를 풀어야 하고, 그래서 사람마다 또 종교마다 대처하는 법이 다릅니다.
가장 흔한 태도랄까 대처는 고통을 무척 싫어하고 더 나아가 두려워하여 일단 도망치고 보는 회피형입니다.
사실 고통이란 것이 본래 내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면 고통이 아니고 즐거움이 되겠지요.
노래는 즐겁다고 하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즐거움이지 너무도 싫어하고 지겨워하는 사람에게 노래는 고통일 뿐이겠지요. 그런데 어린이나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사람은 무조건 도망칩니다.
두 번째 유형은 어쩌면 정반대인데 함몰형입니다. 고통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 하고 고통에 빠진 다음엔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형입니다.
그래서 고통만 보고 고통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고통 밖에 그러니까 고통 말고 다른 것이 많아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마라톤을 뛸 때 처음에는 제가 이러했습니다.
한 20km 구간까지는 비교적 마라톤을 즐기며 뛰고, 같이 뛰는 사람도 보고 주위 풍경도 보며 뛰는데 25km를 넘으면 서서히 고통에 사로잡히게 되고, 35km를 넘어 나머지까지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오로지 고통과 싸웁니다.
그러다가 몇 차례 뛰고 난 뒤 ‘마라톤 성찰’을 합니다.
우리 인생이 마라톤과 같다고. 그러니 우리 인생을 이렇게 고통밖에 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귀중한 인생 마치면 되겠는가 하는 성찰입니다.
그래서 마라톤을 뛰며 고통만 보지 말고 다른 것들도 보고 의미를 보자고 생각이랄까 자세를 바꾸는데 그렇게 한 10여 차례 뛰고 난 뒤에는 그 고통을 주님의 고통이나 그때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을 위해 봉헌하며 뜁니다.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고, 고통을 봉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며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주님의 고통에 동참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제’라는 표현을 씁니다. 전에는 안 그랬었는데 이제 고통을 기쁘게 겪는다는 것이고, 이웃을 위해 주님처럼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떤 단계인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비추어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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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하신 목자 예수님>
- 주님과 만남과 치유의 여정 -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희망이 오나니.
내 영혼아, 그분을 고요히 기다려라.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시편62,6-7)
화답송 시편에 위로를 받습니다. 어제 주일 복음에 대한 교황님의 삼종기도후 강론중 한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형제적 교정은 사랑의 최고의 형태들중 하나요, 가장 필요한 것들 중의 하나다.” 정말 공감합니다. 칭찬하기는 쉬워도 형제의 결점을 지적하기는 참 힘들며 할 수 있다면 정말 용기있는 참 사랑의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라가 있고 종교가 있으며, 정치를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정치는 공기와 같습니다. 싫든 좋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치를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그러나 좋은 정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래서 구약의 무수한 예언자들이 등장했고 오늘날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입니다. 정치와 종교는 구별될 수 있을지 몰라도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의(義)롭고 선(善)한 정치가의 등장을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기상하여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예수님 십자고상 아래 태극기를 보며 십자성호와 영광송 기도후 만세육창을 한후 하루를 시작합니다. 흡사 독립운동가의 하루 일정을 연상케 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의 만세육창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 예수님 사랑에 이어 “애국(愛國), 나라 사랑”을 환기시키며 고백성사후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을 써드린후 애국가 1절을 부르도록 합니다. 사랑할 때 마음이 순화되어 깨끗한 마음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가를 부를 때 역시 정화되는 마음입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 성체강복후 퇴장시 부른 성가 55장, “착하신 목자”가 생각납니다.
“착하신 목자 우리 주님 양들을 위해 목숨 바치니,
영원한 생명 얻게 하여 우리를 살게 하시도다.
착하신 목자 우리 주님 영원한 생명 주시었네
끝없이 푸른목장에로 모든 양들 인도하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착하신 목자 예수님-주님과 만남과 치유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착한 목자일뿐 아니라 인도자요 치유자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착한목자이자 치유자로서의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당신을 예의주시하며 고발할 구실을 찾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주님은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줍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마치 미사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명령하시며, 주시하는 이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한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한가? 또는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한가? 죽이는 것이 합당한가? 이미 질문안에 답이 있기에 이들을 답을 못합니다. 판단의 잣대는 안식일법이 아니라 치유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절박한 인간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주위를 모두 둘러 보신후 추호도 지체함이 없이 그를 치유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그가 그렇게 하자 손은 다시 성해지니 참 통쾌한 치유 장면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지는 느낌입니다. 오그라든 손이 펴짐과 동시에 오르라든, 쪼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졌을 병자입니다. 적대자들은 골이 잔뜩나서 예수님께 보복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골에 해당되는 그리스 말은 “비이성”, “무의미한 분노”를 뜻합니다. 역시 무지에 눈먼 분노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구원자이자 치유자이신 착한 목자 예수님과의 만남과 치유의 여정을 통해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관계와 더불어 온전해 지는 사람들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주님과 만남과 치유를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봅니다. 아마도 평생 주님과의 내적 관계도 날로 깊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어찌 주님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착한 목자 주님과의 만남은 한두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평생 주님과 만남과 치유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이런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요 우리가 꿈꾸는 참나의 실현, 온전한 인간상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참내가 되어가는 예닮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매일미사은총이 그리도 고맙습니다. 우리가 그리며 꿈꾸는 예수님의 실상을 바오로 사도가 참 멋지게 표현합니다.
“그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가르칩니다. 나는 여러분이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얻어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오로의 말씀이 얼마나 멋지고 풍요롭습니까? 우리의 인도자이시며 치유자이신 착한 목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신비, 하느님의 지혜이시며 온갖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는 살아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 공부(工夫)와 탐구(探究)를 통해 예수님을 닮아감은 우리의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과의 만남과 치유의 내적 여정중에 주님을 닮아 날로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참나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주셨듯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주십니다.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이시다.”(시편6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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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손을 뻗어라."(루카6,10)
<예수님의 사랑!>
오늘 복음(루카6,6-11)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틀을 뛰어넘는 '확장성 사랑'입니다. 곧 어떠한 틀이 없고 경계가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특히 죄인들과 병자들에게 열려있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사랑과의 충돌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율법이라는 틀(규정)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틀 안에 갇혀 있는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과 충돌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 6,7)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러고 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손을 뻗어라."(루카 6,10)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이 율법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자신들의 사랑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충돌했고,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았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은 없는지? 그래서 하느님도 그 틀 안에 가두어 버리고, 너를 또한 가두어 버린 그 틀이 내 안에 없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하느님과 너를 그 틀 안에 가두어 놓고 판단하고 단죄한 죄가 있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합시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오늘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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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0dSMpUYkC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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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손을 뻗어라."(루카 6, 10)
우리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은
우리자신이다.
너무 많은
것들을
움켜쥐어서
두 손이 아프게
오그라들었다.
손이 펴져야
손을
흔들수도 있고
눈물을 닦아줄수도
있다.
손을 펴고
손을 뻗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순리이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나면
자유롭고
홀가분하다.
움켜쥐고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나
손을 뻗어
손을 내밀면
손 잡아주시는
하느님을
향하게된다.
움켜잡고
있는 것을
놓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손을 뻗어보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손을 뻗어
함께 나눠야 할
소중한 순간이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이란
오그라드는
삶이 아닌
일어나 가운데에
설 수 있는 용기이며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다시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십니다.
오그라들었기에
손을 뻗는
간절한 이기쁨을
맛보게 된다.
은총과 치유는
손을 펴고
손을 뻗는
믿음에 있다.
다시 서로를
위하는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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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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