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호) [세월호 고(考) - 부산 노래방화재 유족들]
15~6년전 부산의 지하 노래방에 불이 낫어요. 노래를 즐기던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사망자들 중 10여명이 일본인이었습니다.
부산과 후쿠오카는 서로 저녁에 떠나서 아침에 도착하는 페리가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인들이 많이 가지만 10여년전에는 일본인들이 부산으로 많이 왔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도착해 하루 놀다가 밤 페리를 타고 돌아갔습니다. 동경으로 여행가는 것 보다 경비도 덜 들고 이국(異國)의 정취도 느낄 수 있어서 규슈의 하층민들이 많이 왔습니다.
노래방에서 사망한 일본인들이 바로 50 안팍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위 하층민들이 가진 작은 행복, 해외여행을 한다는 작은 행복을 가진 사람들이 마이크 잡고 엔카를 구성지게 부르다가 가스에 질식해 죽은 겁니다.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그들의 유족이 시신을 운구하려고 왔습니다. 워낙 큰 사건이라 한국방송과 일본 방송이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유족들의 행색은 아주 검소했으나 깨끗해서 초라하진 않았습니다. 양복입은 사람은 안 보이고 거의 점퍼 차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족들이 보인 행동이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뒷통수를 강하게 맞은 느낌이었어요. 그들 중 대표격인 분이 벌떼같이 덤벼드는 기자들 앞에서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한 첫마디가 “한국인들게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였습니다. 그분과 같이 20여명의 유족 그 누구도 눈물은 흘렸으나 통곡하지 않았고, 고개 숙여 두 손을 떨었으나 주저앉아 땅바닥을 치며 “내남편 살려내라”고 울부짓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의 그 절제된 모습을 보며 우리가 일본을 이기는 것은 백년으로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여년전 후쿠오카의 스모 경기장에서 관중이 퇴장한 자리엔 떨어진 종이 한 장 없고, 관중이 앉았던 방석 한 장 흐트러짐이 없이 줄 맞춰져 있는 모습을 보고 받은 충격을.. 부산 노래방 피해자들의 유족들에게 또 받았습니다.
그들은 일용노동자였고 청소부였고 찰떡가게 점원이었던 하층민들이 사는 빈촌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유족은 한국의 고귀한 상류층도 보이지 않을 절제와 배려를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한국 기자들은 그들의 보인 그 아름답지만 지극히 슬픈 행동을 <독한 민족>이란 사팔뜨기 눈길로 기사를 쓰더군요.
오늘이 세월호란 배의 소위 침몰 5주기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지금도 죽은 이들과 유족을 진심으로 위로했을 마음을.. 그 순수한 마음을, 좌빨 양아치들이 5년간 깽판치며 깡그리 앗아갔습니다. 양아치들은 그걸 기화로 나라까지 찬탈하여 개판을 만들었습니다.
그 양아치들이 얼마나 끈질기고 극악스럽게 우리에게 슬픔을 강요해 대는지, 이제는 노란 리본을 보면 고개를 돌리고 세월호란 단어만 들어도 지겹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여행 가던 소년소녀들이 참으로 억을하게 죽었는데도, 그 소년소녀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조차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추모는 그들만의 위선적인 추모입니다. 결코 우리 몫이 아니게 됐습니다.
# 사족; 부산 노래방 유족들은 얼마 되지도 않은 보험사의 보상금을 받고 그 돈을 모아 산 깊은 어느 절에다 위령탑을 세웠다는 보도를 봤습니다. 나는 그들이 세운 위령탑을 신문의 사진으로만 봤지만, 광화문에 떡 벌어지게 세운 어느 배의 추모관보다 분명히 훨씬 숭고하고 경건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