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교 란 ?
불교(佛敎, Buddhism)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
불교라는 말은 부처(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이런 의미에서 釋敎라고도 한다) 부처가 되
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佛:불타)이
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
트 ·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
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이며, 기원 전후에 인도 ·스리랑
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
(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
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로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
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세력이 약화
되었으나, 아직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티베트에서 몽골에 걸친 지역,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으며, 그리스
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타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②‘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③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④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⑤ 모든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⑥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入寂) 후 불신(佛身)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身).
·3신 등의 논, 또는 과거불 ·미래불, 또는 타방세계(他方世界)의
불, 보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多神敎的)으로 되었다.
1. 인도
1) 원시불교
창시기(創始期)의 불교를 말하며, 경전들은 석가의 생애 중의
가르침을 스승이 죽은 후에 제자들이 수집 ·정리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 석가가 직접 설한 교법을 판별하기는 곤란하다.
교단도 이미 발족 되어 석가 입적 후 약 100년 동안은 완전한
통일이 유지되었다. 불(佛) ·법(法) ·승(僧)의 3보(寶)는
불교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인데, 승(僧:敎團)은 출가신자
(出家信者)인 비구 ·비구니와 재가신자(在家信者)인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로 이루어져 계율(戒律)로
규제되며 부처를 중심으로 모여 그법을 실천한다.
이 재가신자는 단가제도(檀家制度)에서의 신자와는 달리
3보에의 귀의(歸依)를 서약할 뿐 아무런 속박도 없으며 그 대신
출가신자에 대한 의식(衣食)의 재정적 지원을 맡았다.
석가는 태자(太子) 시절의 물질적으로 풍족하던 생활에서도,
출가 후의 고행(苦行)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고뇌하였으나,
그 두 극단의 고뇌를 버림으로써 중도(中道)를 깨닫고 불타가
될 수 있었다.
도란 일체 편견(偏見)에 구애되지 않는 자세이며, 올바른 견해
·결심 ·언어 ·행위 ·생활 ·노력 ·사념(思念) ·명상(瞑想)의
팔정도(八正道)를 말한다. 5온(蘊)의 일체는 고(苦:苦諦),의
그 고의 기원(起原:集諦),고 초극(超克:滅諦), 초극에 이르는 길,
즉 도제(道諦)라는 4개의 진리(四諦)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
팔정도이지만, 그 중 도제의 내용이야말로 팔정도 바로 그것이며
그 실천에 의해서만 중도가 얻어진다.
‘일체는 개고이다(一切皆苦)’라는 말에서 생각해 보아도 5온의
이합(離合)은 항상 변천(變遷)하는 것이며(諸行無常), 존재하는
것에는 상일(常一) 주재(主宰)하는 입장은 없는 것으로(諸法無我),
전변(轉變) 무상한 세계에서 상(常)을 구하기때문에 고가 생기는데,
팔정도의 실천에서 각성이 열리고 열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도
설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원시불교의 사상이다.
2) 부파불교
불멸(佛滅)후 100년까지 교단은 착실하게 확대 ·발전을 이루어,
BC 3세기에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阿育王]이 귀의하여 불교는
거의 인도 전체에 퍼져 교세는 비약적으로 커졌다. 그러나 교단의
확대에 따라 내부에 의견의 대립이 나타나 불멸 후 100년이 지난
무렵부터 교단은 보 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혁신 적인 대중부
(大衆部)의 두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또한 불멸 후 200년 무렵에는
대중부 속에서 재분열이 일어나, 먼저 일설부(一
說部) ·설출세부(說出世部) ·계
윤부(鷄胤部)로 갈리고, 이어서 다문부(多聞部) ·설
가부(說假部)가, 또 제다산부
(制多山部) ·서산주부(西山住部) ·북산주부(北山住部) 등으로
분파되었다. 한편상좌부도 불멸 후 300년 무렵부터 분열이 시작되어
먼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설산부(雪山部)로 갈리고,
설일체유부에서 독자부(犢子部)가, 독자부에서 법상부(法上部)
·현주부(賢胄部) ·정량부(正量部) ·밀림산부(密林山部)가
분출(分出)되고, 또 설일체유부에서 화지부(化地部)가, 화지부에서
법장부(法藏部)가, 다시 설일체유부에서 음광부(飮光部)가, 이어서
경량부(經量部)가 분출되었다.
이들 20개의 부파는 소승 20부(小乘二十部)라고도 부르며 이들을
총칭하여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한다. 상좌부 ·대중부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는 별로 없으나 혁신적인 대중부에는 후일 대승불교
(大乘佛敎)로 발전할 기미가 엿보인다. 또한상좌부 불교는
남방불교로서 오늘에 전한다.
〈대승불교〉 출가신자(승려) 중심인 종래의 불교에 대항하여 기원
전후부터 재가신자를 포함하는 신앙으로의 탈피를 원하는
대승(大乘)의 운동이 인도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 밖에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 불탑에 예배함으로써 불타에 대한 신앙을 높이는
재가신자의 집단인 보살단(菩薩團)이 있어, 이것도 대중운동에
합체하여 초기 대승불교가 성립되었다.
BC 1세기부터 AD 2세기에 걸쳐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유마경(維摩經)》 《화엄경(華嚴經)》 《무량수경(無量壽經)》 등의
대승경전이 차례로 성립되어, 이것들은 3세기 전후에 나가르주나
(Ngrjuna:龍樹)에 의해 이론적 근거가 부여되면서 대승불교의 확립을
보았다.용수는 《중론(中論)》에서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는
것으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일은 없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진공중도
(眞空中道)의 정관(正觀)을 얻을 수 있다는 반야공관(般若空觀)을
설하였는데, 이 설에 기초를 둔 학파를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또 미륵(彌勒)이 시작하고 무착(無着) ·세친(世親) 등이전개시킨
학파를 유가파(瑜伽派) 또는 유식파(唯識派)라고 한다.
이 학파는 용수의 반야공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관상(觀想) 등에 의한
수행(修行)인 유가행(瑜伽行), 외계(外界)의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다만 심식(心識)의 투영이며, 심식만이 실재한다는 유식설(唯識說),
불성(佛性)은 중생도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것으로 중생 모두가
여래(如來)가 될 수 있다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등을 설하고 있다.
이 두 학파가 중기 대승불교를 형성하였으며 그후 세친의 학통을 이은
진나(陳那) 등에 의하여 인명(因明:불교논리학)이 확립되었다.
후기 대승불교에 이르면 인도교 등의 영향을 받아 다라니(陀羅尼)나
진언(眞言)을 중심으로 하는 밀교(密敎)가 주류를 이루어 점차 타락의
길을 걷다가 이슬람교의 인도 침입으로 13세기에 쇠멸하기 시작했다.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은 모든 존재에 실체(實體) ·아(我)와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공(空)’의 사상이다. 또 보살(각성을 구하는 사람)의
실천윤리덕목으로서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내세우는데,
그 첫째가 보시로 되어 있어 이타행위(利他行爲)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는 주로 북쪽으로 퍼져 중국과 한국 ·일본 등에 전해졌다.
2. 남방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 동남아시아에 전파된 불교를 남방불교라 한다.
이 지역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기지가 된 곳은 스리랑카이며 BC 3세기
중엽, 아소카왕의 왕자 마힌다(Mahinda)가 파견되어 상좌부 불교를 전한
것이 효시가 된다. 이불교는 팔리어(語) 경전을 믿기 때문에 팔리불교
라고도 한다. 5세기에는 불음(佛音)이 인도로부터 건너와 팔리어 경전의
주석(注釋)을 집대성함으로써 상좌부 불교의 기초가 굳어지고 활기를
미얀마와 타이에는 이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졌다. 5세기에
미얀마로건너간 상좌부 불교는 그 후 밀교[大乘]로 바뀌었다가 11세기
파간조(朝)의 전(全)국토통일과 함께 재흥되었고, 후에 본가인
스리랑카불교가 쇠퇴하자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로 역수입되었다.
한편 타이에는 8세기 무렵에 밀교가 전해져 번창하다가 후에 미얀마
부터 상좌부 불교가 진출하였고, 13세기 말에는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그 후 왕조의 보호 밑에 발전하여 지금은 이 지역
제1의 불교국이 되었다. 자바에는 8세기경 인도로부터 밀교가 전해져
번창하였으나 후에 이슬람권으로 바뀌었다.
캄보디아 ·라오스는 13세기 말부터 타이족의 침입으로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오늘에 이른다. 인도차이나반도의 또 하나의 지역인베트남은
옛날부터 중국과의 교섭으로 6∼7세기경 대승불교가 전해져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3. 티베트 ·몽골
티베트 ·몽골의 불교는 라마교라고도 한다. 티베트에는 일찍이
네팔 등의 불교가 들어온 것으로 생각되는데 토속적 샤머니즘인
분교(敎)가 성행하여 교세를 넓히지 못하였다. 6∼7세기 인도에서
공식적으로불교가 들어왔고, 8세기경에는 다시 인도로부터 밀교와
중관계(中觀系) 대승불교가 전해졌고, 경전의 티베트어 번역도
진척되면서 불교는 널리 전파되었다. 10세기에 한때 쇠퇴하였으나
11세기에 다시 일어나 밀교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5세기 초 종객파(宗喀巴)가 나와 종풍(宗風)을 쇄신, 교세를 크게
높였으며, 이후 그 법계(法系)는 대대로 다라이라마
(‘큰 라마’라는 뜻)가 되어 종교와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한편
몽골에는 13세기 파스파(’Pags-pa:八思巴)가 티베트불교를
원(元)나라 조정으로 전해왔고, 그 후 각지로 퍼져 청(淸)나라 때
전성기를맞이하였다.
4. 중국
처음 불교가 전해진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1세기 중엽 한(漢)나라 때 서역(西域:티베트)지방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역 지방은 옛날부터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요로에있어 양쪽 문화의 접촉장소가
되어왔으므로 인도의 불교가 재빨리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서역지방에도 독특한 불교문화가 개화하였는데,
그 서역불교의 발자취는 둔황[敦煌]을 비롯한 여러 곳의 유적에서
엿볼 수 있다. 초전기(初傳期)에서 4세기까지를 중국불교의 제1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시대에는 서역방면으로부터의내입승(來入僧)의
활약이 눈에 띈다. 즉 안세고(安世高) ·지루가참(支婁迦懺) ·
축법호(竺法護) ·불도징(佛圖澄) 등이며 그들은 대승 ·소승의
경전을 번역하여 불교에 대한 중국인의 이해를 넓히는 데 노력하였다.
중국인 불도(佛徒)로 주사행(朱士行) ·도안(道安) ·혜원(慧遠) 등이
나왔고, 특히 도안 ·혜원 등은 학문적이고 이론적이었던 불교를
실천으로써 이해시키는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불교가 무조건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며 고래의 사상과의
유사점 때문에받아들여지는 일도 있었다. 불타가 황제(黃帝) ·
노자(老子)와 나란히 제향되는예가 그것이며, 4세기 무렵부터는
불교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로 해석하려는
격의불교(格義佛敎)도 생겨났다. 401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장안(長安)
에 들어와 대승경전의 번역을 시작한 때부터 중국불교는 제2기에
들어선다. 구 마라습은 여러 경전의 뛰어난 한역(漢譯)을 행하여,
그 한문경전에 의한 불교 본래의 교리연구가 진행되었고, 중국인의
불교에 대한 이해도 넓어져, 이후 중국불교의 사상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그 문하생은 3,000여 명이라 하며그 계통은 일대 교세를
이루고 제2기 불교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구마라습 외에도 각현(覺賢)
담무참(曇無讖) ·보리류지[菩提流支]·진제(眞諦) 등이 도래하여경전의
한역을 행하고, 그 경전 연구에 따라 삼론(三論) ·사론(四論) ·
성실(成實) ·법화(法華) 등 많은 학파가 발생하였다.
또 우발적으로 전래된 여러 경전을 본래의 역사적발전의 순서로 정리하고
체계를 세우기 위한 교판(敎判:敎相判釋)도 성행하게 되어 교학연구는
더욱 진전하였다. 수(隋) ·당(唐)시대에는 전대의 교학연구를 기초로
소의(所依)의 경론(經論)에 의한 종파가 확립되어 국민의 올바른 이해와
실천에 입각한 불교의 성립을 보았으며, 이 시대는 중국불교의 황금시대가
되었다. 수나라 때는 우선 지의(智)가 《법화경》에 의하여 천태종
(天台宗)을 개종(開宗)하고, 이어서 길장(吉藏)은 용수의 삼론(三論)에
의한 삼론종(三論宗)을 확립시켰다. 당대(唐代)에는화엄종 ·선종(禪宗)
·정토종(淨土宗) ·법상종(法相宗) ·율종(律宗) ·밀교의 각 파
가 성립하였다.
화엄종은 《화엄경》 소의(所依)의 종파로 법장(法藏)이 그 교학의 대성자
이며,선종은 이전부터 달마(達磨)에 의하여 전해져 오다가 5조(祖)
홍인(弘忍)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고, 다시 그 제자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에 의하여 남종 ·북종의 2대 분파가 생겼다. 특히 남종파는
임제(臨濟) ·위앙(仰) ·조동(曹洞) ·운문(雲門) ·법안(法眼)과
임제에서 분파된 양기(楊岐) ·황룡(黃龍) 등 이른바 5가(家) 7종(宗)이
나와 크게 번영하였다. 정토종은 담란(曇鸞) ·도작(道綽) ·선도(善導)
등에 의하여 확립되었는데, 부처의 명호(名號)를 외우며 오로지 아미타에
불에 귀의하라는 간단한 교의(敎義)로써 민중 사이 널리 퍼졌다.
법상종은 현장(玄)이 인도에서 가져온 유식론(唯識論) 관계의 경전을
기초로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개종하였고, 율종에서는 도선(道宣)의
계통, 즉 남산종(南山宗)이 번창하였다. 밀교도 선무외(善無畏) ·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 등에의하여 인도에서 전래되었다. 수 ·
당의 황금기를 지난 중국불교는 그 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몇 차례의
파불(破佛)을 겪고 또 명(明)나라 때는 중앙에서 통제가가해지는 등,
활발한 불교활동은 차차 자취를 감추고 다만 선종과 정토종만이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의 중국 본토에서는불교활동이 거의 자취를 감추
었다.
5. 일본
일본의 불교는 538년 백제 성왕(聖王) 때 도장(道藏)이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성실종(成實宗)의 개조가 된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백제는 일본과의 접촉이 빈번하여 관륵(觀勒)은 역법(曆法) ·
천문 ·지리 ·술수(術數) 등을 일본에 전하였고, 혜총(惠聰) ·
도림(道琳) ·담혜(曇慧) ·혜미(慧彌) 등 많은 고승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와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일본에 전해진 불교는 여러 호족(豪族)들의 지지를 얻어 마침내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불교장려책을 쓰게 됨으로써 공식적인 지위를
굳혔다. 나라[奈良]시대에는 불교가 국가와의 연대는 중국불교가
황금시대를 이룬 때였으므로 그들의 여러 종지(宗旨)가 차례로 건너와
삼론(三論) ·법상 ·성실 ·구사(俱舍) ·율 ·화엄 등 이른바 남부
6종(宗)이 성립하였다. 헤이안[平安] 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천태(天台)
·진언(眞言)의 2종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천태종의 사이초[最澄],
진언종의 구카이[空海] 등은 모두 입당(入唐)하여 새로운 불법을 구한
개조들이다. 남부6종은 이들 2개 종파의 발전에 따라 점차로 그 세력을
잃게 되었고, 특히 사이초가 대승계 단(大乘戒壇)을 개설하고 그가
죽자 이것이 국가의공인을 얻음으로써 남부6종의 몰락은 결정적으로
되었다. 또 헤이안불교는 귀족들의 열성적인 귀의와 보호를 받아
귀족불교라 일컬어졌는데, 귀족들은 조정의 본을 떠 조사(造寺) ·
조탑(造塔)에 힘쓰는 한편 기도(祈禱)와 법회를 자주 열어 그 권세를
자랑하였다.
한편 이렇게 귀족들과 깊은 관련을 갖게 된 승려들은 세속적 권위와
결탁하게 되었고, 절은 귀족으로부터 기부받은 토지를 지키기 위하여
승병(僧兵)을 두게 됨으로써 많은 폐단을 낳게 되는 근원이 되었다.
일본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가마쿠라[鎌倉] 시대이다.
말법사상(末法思想)을 배경으로 일어난 정토종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는 일만이정토왕생(淨土往生)의 정정업(正定業)이라고 설하면서
급속히 교세를 넓히다가 기성종파의 반감을 사고 박해를 받게 되었다.
정토종을 확립한 겐쿠[源空:法然]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 여러
종파로 분립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정토진종
(淨土眞宗)을 개설한 신란[親鸞]이다. 그도 스승과 마찬가지로 유형에
처해졌으나 그는 유형지에서 저술과 포교에 주력하였다. 한편
에이사이[榮西] ·도겐[道元] 등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선종(禪宗)은 계율에 엄격한 수양의 교법으로서 무사계급과 결부되어
발전하였다. 가마쿠라불교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니치렌종[日蓮宗]이다
니치렌은 처음 진언밀교(眞言密敎)를 배우고 이어 천태(天台)를 배워
《법화경》의 진리를 깨닫고 니치렌종을 개종하였다.
이 종파는 천태 이외의 종파를 부정하는 도전적인언동 때문에 자주
법난(法難)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민중들 사이에 교세가 확장되어
지금은 진종(眞宗)과 나란히 대종파를 이루고 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 이후 불교는 점차 쇠퇴하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하를 통일하자 완전히 교세가
꺾였으며, 에도[江戶] 시대에는 정권의 도구로 타락하였다.
이렇게 침체 ·부패한 불교에 대하여 비난 ·배척의운동도 자주
일어났으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뜻있는 불제자들에 의하여
혁신의 기운도 높아지고 여러 종파의 부흥운동도 추진되어 근대적
종교로서의 불교발전이 이룩되었다.
6. 한국
1) 삼국시대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6월 진(秦)나라의 순도
(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肖門寺)·
이불란사(伊弗蘭寺) 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시초이다.
이들의 설법과 전도를 공허(公許)한 고구려에서는 그후 평양(平壤)
9사(寺)와 반룡사영탑(盤龍寺靈塔) 등을 짓는 한편 불교 전파에도
힘써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고, 열반종(涅槃宗)·삼론종(三論宗)·
천태종(天台宗)·살바다종(薩婆多宗) 등의 종파가 이루어졌다.
의연(義淵)은 불교역사 연구를 통하여 많은 업적을남겼고,
혜자(惠慈)·운총(雲聰)·혜편법사(惠便法師)·담징(曇徵)·
법정(法定) 등은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고,도림(道琳)·덕창(德昌)·
혜량(惠亮)·신성(信誠) 등은 호국불교를 위한 실력배양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입국, 왕의 우대를 받고 궁중에 머물다가
이듬해 남한산(南漢山)에 절을 짓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후 왕흥사(王興寺)·미륵사(彌勒寺)·한산불사(漢山佛寺)·
경복사(景福寺)·수덕사(修德寺) 등 많은 사찰이 건조되고 교파도
삼론종·계율종·성실종(成實宗)의 세종파가 성립되었다. 백제불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많은 고승들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
전파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일본 성실종의 개조가 된 도장(道藏)을
비롯하여 혜총(惠聰)·도림(道琳)·혜미(惠彌)·도흔(道欣)·
담혜(曇慧)·도령(道寧)·상휘(常輝)·의각(義覺)·방제(放濟)·
다상(多常)등이 있다. 이 밖에도 백제멸망 후 그 재건을 위해
궐기하였던 승장(僧將) 도침(道琛), 인도에 유학하고 귀국 후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한 겸익(謙益)등도 유명하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가 가장 늦게 전파된 나라로 527년
(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후 비로소 공인되었는데
그후 급속히 발전하여 국가적종교로 존숭되고 승려와 사원이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많은 구법승(求法僧)이 인도와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당나라의 13종(十三宗:成實宗·三論宗·
俱舍宗·地論宗·攝論宗·天台宗·法相宗·涅槃宗·念佛宗·密宗·
禪宗·華嚴宗·律宗)이 도입되어 발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선종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분파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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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안태(安泰)와 왕실의번영을 비는 호국불교로서의 신라불교는
사상·정치·문화·외교·국민생활에까지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건축·공예 방면에도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다.
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봉성사(奉聖寺)
·감은사(感恩寺)·봉덕사(奉德寺)·망덕사(望德寺)·법주사(法住寺)·
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월정사(月精寺)·부석사(浮石寺)·
불국사(佛國寺)·장안사(長安寺)·해인사(海印寺)·보현사(普賢寺)·
범어사(梵魚寺)·쌍계사(雙磎寺) 등 명찰을 창건하였고, 탑·종·
불상 등의 공예가 발달하여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정혜사(淨惠寺)
의 13층탑, 화엄사 쌍탑, 감은사 쌍탑, 무량사탑(無量寺塔),
동화사(桐華寺) 쌍탑, 금산사(金山寺)의석탑 및 6각다보탑, 화엄사
사리탑 등을 비롯하여 석굴암 석불, 황룡사 장륙금상(丈六金像),
봉덕사 종, 금산사 부도(浮屠), 감산사(甘山寺)의 2불상, 백률사
(栢栗寺)의 약사상(藥師像), 사천왕사의 사천왕상, 화엄사 석등 등은
귀중한 문화재로서 전승된다. 한편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어,
원광(圓光)과 같은 대학승(大學僧)은 세속5계(世俗五戒)로 국민도의를
확립하였고, 자장(慈藏)은 문물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의상(義湘)은
실천적인 수행(修行)과 사찰의 건립을 통하여 화엄의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학승을 양성하였고, 원효(元曉)는 80여 부의
논소(論疏)를 지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는 한편 통일불교 창조에
정력을 쏟았다. 의상과 원효는 그 학통이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원측(圓測)은 유식설(唯識說)에 통달하여 독특한 견해를
가졌고, 그때문에 중국의 법상종 정통파에게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저술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티베트어로번역되어 전한다.
혜초(慧超)는 인도에 건너가 불적(佛蹟)을 순례하고 육로로중앙아시아
를 거쳐 귀국한 다음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그 밖에 신라시대의 고승들로는 도증(道證)·경흥(憬興)·지통(智通)·
표훈(表訓)·명랑(明朗)·승전(勝詮)·대현(大賢)·도의(道義)·신행
(信行)·체징(體澄)·지증(智證)·혜소(慧昭)·현욱(玄昱)·개청(開淸)
·낭공(朗空)·범일(梵日)·무염(無染)·원랑(圓郞)·진경(眞鏡)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당나라와 일본까지 이름이 알졌다.
2) 고려시대
고려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宋)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
적인 발달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僧
科)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다.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 등을 연중
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
에 걸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
주가 되었다. 당시에 건립된 사찰로는 개성의 왕륜
사(王輪寺)·법왕사(法王寺)를
비롯한 16사(寺)와 봉은사(奉恩寺)·진관사(津寬寺)·
부석사(浮石寺)·관음사(觀音
寺)·숭교사(崇敎寺)·석왕사(釋王寺)·영명사(永明寺)
등이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관촉사(灌燭寺) 석등, 부석사 조사전벽화(祖師殿壁
畵), 대흥사(大興寺)의 종 등
우수한 예술품을 낳았다.
특히 문종(文宗) 연대에는 고려판 팔만대장경(八萬
大藏經)을 간행하여 한국불
교문화의 대표작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음에도 이름난 고승은 많
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 체관(諦觀)은 천
태종을 재흥시켰고, 대각국사
(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아들로 일찍이 11
세 때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
유학한 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속장경(續
藏經) 4,740여 권을 간행한 것
은 특기할 만하며, 또 문하생이 1,000명이 넘었다
고 한다.
그 밖에 중기에 이르러 지눌(知訥)·수기(守其)·균여
(均如), 말기의 나옹(懶翁)·보
우(普愚)·보조(普照)·백운(白雲) 등은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었다. 고려의 불교종
파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되었다가 말기에 다소 분
화되어 조계종(曹溪宗)·천태법
사종(天台法師宗)·천태소자종(天台疏子宗)·화엄종·
총남종(摠南宗)·자은종(慈恩
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도문종(道門宗)·
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
宗)의 11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 화엄·자은·총남·
중신·시흥의 5종을 5교(敎), 조
계·천태의 2종을 양종(兩宗)이라 하여 5교 양종의
종파를 이루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정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
책으로 인하여 불교는 미증유
의 수난기(受難期)를 맞이하였으니 도첩제(度牒制)
를 실시하는 한편, 함부로 승
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사전(寺田)에도 과세를 하
였으며 승려의 궁중출입과 도
성(都城) 내 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연산군 때는 승
과(僧科)를 폐지하고, 삼각산
의 여러 절의 승려를 몰아내어 그곳을 놀이터로 삼
았으며 원각사(圓覺寺)의 불
상을 옮기고 그곳을 기관(妓館)으로 삼는가 하면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덕(興
德) ·흥천(興天) 두 절을 없애고 여승은 궁중의 노
비(奴婢)로 삼고 승려들도 모
두 환속(還俗)시켰다. 중종(中宗)은 경주(慶州)의 동
불상(銅佛像)을 녹여 병기
(兵器)를 만들고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은 민가를
짓는 데 나누어 주었다. 그러
나 이러한 강압에도 불구하고 불교신앙 자체를 말
살하지는 못하였으며, 특히 상
류층 부인의 신앙을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역대왕 중에는 호법왕(護法王)도 있었으니,
태조는 석왕사 ·태고사 ·해인
사 등에 비판(婢板)을 하사하였고, 세종 ·세조 때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불경을 간행하였다. 특히 세종은 불교종파의 정비
를 단행하여 조계 ·천태 ·총남
의 3종을 선종(禪宗)으로, 화엄 ·자은 ·시흥 ·중신의
4종을 교종(敎宗)으로 통합
하여 선 ·교 양종을 성립시켰다. 이름 높은 명승도
많이 배출되어 무학(無學) ·함허(涵虛) ·보우(普雨)
등과 임진왜란 때의 승장 서산(西山) ·사명(四溟) ·
처영(處英) ·영규(靈圭)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 후
한국불교는 일제강점기에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31개
본사와 1,200개의 말사(末寺)로구분되었고, 3 ·1운동
때는 많은 승려가 가담하였으며, 한용운(韓龍雲)
·백용성(白龍成) 등은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8·15광복 후 전국불교대회를 열어교구제(敎區制)를 정하고
중앙에는총무원, 각 도에는 교무원을 설치, 종헌(宗憲)에
따라 조직을 강화하였다.
6·25전쟁 후에는 파괴된 100여 개의 사찰을 수축
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전개하였고, 고아원의 설립, 동국대학 ·해인대
학 ·경기대학과 해동(海東) ·용인(龍仁) 등
10여 고등학교 및 20여 개의 중학교를
운영, 문화사업에도 기여하고있다.
1954년 이래 비구(比丘) ·대처(帶妻) 두 파의
분쟁으로 분열된 후 여러 개
의 종단으로 갈라졌다. 현재 교육부에 등록된 종파
는 조계종을 비롯하여 태고종
(太古宗) ·법화종(法華宗) ·미륵종(彌勒宗) ·법상종 ·
보문종(普門宗) ·일승종(一
乘宗) ·용화종(龍華宗) ·불입종(佛入宗) ·원효종(元
曉宗) ·천태종 ·화엄종 ·정토
종(淨土宗) ·진각종(眞覺宗) ·총화종(總和宗) ·진언
종(眞言宗) ·천화불교(天華佛
敎) ·한국불교법화종 등 18개 종파가 있다. 사찰수
는 5,700여 개소이며, 승려가
2만여 명, 신도수 1,300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
다. 《불교신문》을 비롯하여 각
종파 ·단체들에서 정기간행물도 30여 종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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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夏之節에..! 光德(松百) 심상집 옮겨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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