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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論> 초원을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漢의 傭兵으로 참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을 침략하다가 토벌 당하여 部族의 존망마져 위태롭기도 하고 曹魏의 관구검에게는 숙신의 경계 까지 도주해야 했으며 고국원왕은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전사 당하여 다시 戎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않되엇던 북쪽의 수많은 흉노 부족들 중 하나에 불과 했던 흉노 5部의 나라 고구리. 나라라기 보다는 이때의 고구리는 部族에 불과 했다. 같은 흉노 계열의 慕容燕에게는 丸都城이 불타고 멸망직전에서 겨우 살아 남는 고구리. 그 어렵고 힘들엇던 시절 고구리와 운명을 같이 햇던 부족이 拓跋鮮卑族이라 불리우는 北魏다. 북위 역시 고구리와 아주 비슷한 환경속에서 북쪽 초원을 이리 저리 쫓겨 나니던 부족이다. 漢이 분열하고 위촉오 삼국이 다투던 와중에도 고구리는 曹魏와 협력하기도 하고 토벌당하기도 한다. 위촉오 3국 시대가 西晉에 의해 통일되엇지만 서진이 분열하며 와해 되자 동아시아는 소위 五胡十六國 時代를 맞이 하면서 고구리와 北魏에게 동아시아를 제패할 수 있는 기회가 찿아 온다. 그러나 그 기회를 먼저 잡은 것은 고구리 엿다. 故國原王이 전사하고 고구리는 戎에서 힘을 길러 고담덕에 의해 다시 요동으로 돌아 오는 것이며 혼란스러운 중원은 고담덕의 征服戰에 속절없이 무너져 갔으며 고담덕은 거칠 것이 없엇다. 초원민족들은 그들 가운데 강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바로 그 부족을 중심으로 뭉쳐서 정복전에 함께 동참한다는 묘한 역사가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흉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동아시아를 제패 햇으며 단석괴 단군이 짧은 기간에 삼한을 건설하는 과정. 그리고 우리는 믿지 않지만 고구리가 징기스 칸의 영토에 버금가는 영토를 구축하는 과정. 거란과 징기스 칸의 몽골, 그리고 다이칭 구룬(청)의 정복 전쟁이 그들 단일 부족으로 엄청난 정복 전쟁이 완성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엄청난 영토를 소유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같은 북방 부족들이 항상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구리 역시 마찬 가지엿다. 저항하는 부족은 몰살시키고 항복하는 부족은 함께 하는 것이며 특히 北魏는 어렵고 힘들엇던 시절 부터 生死苦樂을 함께한 동족의 부족이엇다. 고담덕은 大帝國 고구리의 기틀을 마련하는 군주 였으며 그의 아들 "連"은 대제국을 완성하는 군주이며 훗날 <宋書>와 역사의 勝者인 唐朝에 의해 폄훼된 역사속에서 北魏에게 조공을 바치던 군주로 묘사 되엇지만 璉은 진정한 대제국 고구리를 완성한 군주라는 것을 의심하면 안된다. 璉이라는 이름의 글자는 "잇다"라는 의미 이외에는 다른 뜻이 없는 글자이며, 君主를 뜻하는 "王"과 "잇다"라는 의미의 "連"이 조합된 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로도 璉은 그이 아버지 영락제(광개토태왕)가 이룩한 제국의 최고 통치를 이엇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璉은 年號를 "建興"이라 햇으며 이 때문에 그를 "建興帝"라 부름이 마땅하다. 훗날 역사의 기록자들이 건흥제를 오래 살앗던 군주라 하여 "長壽王"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지만 건흥제는 대제국 고구리의 절대 군주 엿으며 그 시기 아시아는 건흥제가 모두 통치한 시기임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五胡十六國 시대를 약간 지난 南北朝 시대의 南朝의 나라 엿다는 宋과 고구리의 관계를 기록한 <宋書>를 바탕으로 일단 南朝인 宋과의 관계를 찿아 보자. 이때의 北朝는 北魏를 말하는 것이다. 南北朝 時代 위 지도는 소위 南北朝 時代의 지도다. 중국 역사의 가장 큰 특징은 春秋筆法에 의한 과대한 역사 확대에 있다는 것이다. 위 지도를 보면 北魏는 중원을 모두 차지한 것 처럼 보이며 황하의 남쪽 모두가 宋의 영토 처럼 그려 넣고 있다. 필자는 北魏 역시 고구리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로 보기 때문에 고구리를 기록과 관계 없이 과한 점수를 주는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북위를 폄훼하여 말하지도 않음을 밝힌다. 이 시대는 최소한 백제가 대륙에 전성기는 조금 지낫지만 상당한 세력으로 남아 있던 때 였으나 백제는 지워져 있는 것이다. 이때의 송을 훗날 五代十國을 평정하고 세워진 宋과 구분하기 위해 "劉宋"이라 하는 것이며 劉裕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劉宋이라 하는 것이다. 즉 송이라는 이름은 나라 이름이라는 뜻 이외에는 다른 뜻으로는 쓸수 없는 글자이며 정통 漢族들의 나라라는 의미만을 간직한 나라인 것이다. 즉 劉宋은 漢族들이 뭉쳐서 만든 나라인 것이며 한조가 멸망하자 이때 까지 미 개발 지역이었던 江南으로 급히 세운 망명 정부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北魏다. 劉宋은 北魏를 索虜라 부르며 북위가 흉노 오랑캐라는 것을 분명히 하며 얕잡아 부른다. 北魏는 탁발선비족이 만든 나라이며 그 종족적 뿌리와 언어 문화는 고구리와 같다.
북위가 南朝를 평정하고 隨를 건국 하는 것이며 북위와 유송이 남북으로 나뉘는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漢族과는 이질적인 북위를 중국의 정통 계보를 잇는 나라로 설정을 하는 것은 북위가 아니라면 중국의 역사는 그 명맥이 단절 되는 것이며 수와 당의 정책은 胡限融合 즉 東胡와 漢族의 융합 정책으로 숫적으로 적은 탁발선비가 漢族으로 同化 되었던 것이다. 훗날 거란은 趙宋과의 전쟁에서 송의 인구가 급감할 정도로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하는 이유가 같은 종족인 탁발선비의 호한유합 정책으로 한족들을 우대해 주엇음에도 唐 멸망한 후 오대십국 시기와 오대 십국 시기를 평정하고 송을 세운 宋朝가 북방민족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것에 대한 보복이었으며 이후 아이신구룬(금), 몽골, 청의 왕조들에 의해 漢族들의 인구가 급감하는 처절한 살육을 하게 하는 빌미가 되는 것이다. 거란은 宇文鮮卑의 후예다. 南北朝와 고구리 南北朝時代는 420년~589년 사이 즉 隨가 南北朝를 통일 하는 그 싯점 까지를 말한다. 420년이라면 고구리의 최전성기인 建興帝 때이다. 건흥제는 광개토태왕의 뒤를 이어 고구리의 가장 강력한 시기를 지나는 때이다. 만약 우리 국사가 주장하는 대로 고구리가 만주에 위치해 있엇다고 믿어 보자. 고구리와 송 사이에 북위가 버티고 있는데 <宋書>의 기록은 마치 고구리가 송에게 조공을 하고 송으로 부터 작위를 받는듯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송서> 고구리와 劉宋의 關係 列傳第五十七 高句驪國 東夷<高句驪國>, 今治<漢>之<遼東郡>. 동이 고구리는 현재 한나라 때의 요동군을 다스린다. 伯夷인 고구리를 東夷라고 적시하여 기록한 이유는 이때의 고구리는 요동을 확실하게 장악한 상태라는 의미이다. 요동은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그 영역이 다르다. 漢代의 요동군이란 지금의 山西省과 河北省 그리고 河南省의 北部를 말하는 것이다. <高句驪王><高璉>, < 晉安帝><義熙>九年, 遣長史<高翼>奉表獻 白馬. 고구려왕인 '고련'은 진 안제 의희 구년에 장사 '고익'을 보내어 표를 받들어 백마를 받쳤다. 고련은 건흥제 즉, 장수왕의 이름이다. 以<璉>爲使持節〈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 '련'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 송은 련을 영주제군사 도독으로 삼았다는 것이며 오호십육국 시대의 영주의 위치를 지금의 중국은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营州 (十六国),五胡十六国时段部设置的州,在今河北省境 즉 영주의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경이라는 것이다. 樂浪의 위치 그런데 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樂浪이라는 이름은 정말 종잡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아마도 "낙랑국공"이라는 최초의 타이틀이 붙는 군주가 建興帝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건흥제에게 낙랑국공이라는 타이틀이 붙는걸까? 고구리는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융으로 돌아 갔고 그의 손자인 광개토태왕 시기에 강성해져서 다시 돌아 온다. 아마도 광개토태왕 시기에는 낙랑을 영토화 하지 못햇거나 그 영토가 국제적으로 공인된 고구리의 영토가 아니엇다는 것일 것이다. 아마도 광개토태왕은 산서성 또는 요동의 일부를 영토화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이 영토화 하지 못한 지역에 낙랑이 존재 햇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필자는 낙랑의 위치를 두곳으로 추정 한다. 그 하나는 태행산맥 하단부의 황하와 지금의 미산호 북쪽이 그것이다. 아마도 태행 산맥 하단부라면 이미 광개토태왕에 의해 고구리 영토가 되었을 것이나 하남의 미산호는 광개토태왕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미산호가 낙랑이라면 미산호의 북쪽에 왕험성이 존재해야 하며 고구리의 평양성이 존재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산호는 백제의 핵심 영역이다. 그렇다면 백제왕에게도 樂浪國公이라는 작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백제의 어느 왕에게도 낙랑국공이라는 칭호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통일 신라의 무열왕에게는 없던 "樂浪郡公"이라는 치호가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대왕661~681) 부터 신라왕에게 낙랑군공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문무대왕은 백제 멸망 다음해인 661년에 즉위를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 멸망과 낙랑이라는 이름의 관련성으로 볼때 낙랑은 백제 영토엿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고구리 멸망후 신라가 고구리 영토의 일부를 지배 햇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낙랑은 660년 까지는 백제의 영토엿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낙랑은 미산호인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필자는 낙랑은 미산호일 것이라는대 2/8의 무게를 둔다. 다만 미산호를 낙랑이라고 한다면 왕검성/평양성과 미산호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 高祖>踐 ,詔曰:[使持節〈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驪王>·<樂浪公><璉>, 使持節】 <고조>가 보위에 오르자, 고하여 말하길,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왕 낙랑공 련, 사지절 <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映>, 執義海外, 遠修貢職. 도독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 영은 함께 바다 밖에서 의를 지키니, 멀지만 공직을 내린다. 백제왕 "영"은 아신왕의 아들인 백제 18대왕 전지왕(405~420)이다. 따라서 이 기록의 시점은 420년 以前의 기록이며 소위 남조가 완성 되기도 전의 기록인 것이며 허약한 망명 왕조의 나라 劉宋 高祖가 최전성기 고구리의 련과 백제의 영에게 가당치 않은 공직을 내린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海가 어디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위 지도를 믿는다면 여기서의 海는 黃河다. 惟新告始, 宜荷國休, 새로이 생각하여 그 근원을 알리니, 나라를 쉬고 은혜를 받음이 마땅하다. <璉>可征東大將軍, <映>可鎭東大將軍. 持節〈督·王·公如故.] '련'은 가히 정동대장군이고, '영'은 가히 진동대장군이니, 사절 도독왕 공의 옛날과 같다. 三年, 加<璉>散騎常侍, 增督<平州>諸軍事. 삼년 '련'에게 산기상시를 더하고, 도독 평주제군사를 보태었다. < 少帝><景平>二年, <璉>遣長史<馬婁>等詣闕獻方物, 遣使慰勞之, '소제경평' 이년 '련'이 장사 마루등을 파견하여 궐에 이르러 방물을 받치니, 사자를 위로하여 보내었다. 曰:[皇帝問使持節·散騎常侍〈督<營><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句驪王>·<樂浪公>, 纂戎東服, 庸績繼軌, 厥惠旣彰, 款誠亦著, 踰<遼>越海, 納貢本朝. 말하길, 황제가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 영평이주 제군사 정동대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에게 묻노니 戎을 잇고 동쪽을 다스리니, 공을 이어 길을 내니 그 은혜는 이미 뚜렸하고, 정성 또한 분명하여, 먼 요 바다를 건너, 공물을 받치며 알현을 한다. 이때의 고구리 영토는 지금의 山西省과 河北省이 그 중심이다. 따라서 먼 遼海란 바로 황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遼河란 바로 황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다. 朕以不德, 承鴻緖, 永懷先 , 思覃遺澤. 짐이 부덕하여 국가의 대사를 받듬이 민망한데, 먼저 영원한 정으로 찾아오니 생각이 미치고, 은덕을 남긴다. 今遣謁者<朱邵伯>·副謁者<王邵子>等, 宣旨慰勞. 지금 알현하는자 '주소백'과 부알현하는자 '왕소자'등을 보내지 내 뜻을 배풀어 위로한다. 其茂康惠政, 永隆厥功, 式昭往命, 稱朕意焉.] 번성하고, 편안하고, 은혜로 정사를 보며, 영원하고 큰 그 공을 치하하니, 법규를 밝히어 명으로 가니, 짐의 뜻임을 알린다.
지역 영주의 작위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고구리가 만주에 존재 하고 백제가 한반도 서부에 존재를 했다면 멀고 먼 나라들인 고구리와 백제가 뭐가 아쉬워서 송 고조에게 작위를 받는 것일까? 그리고 유송의 지도가 마치 황하 남쪽 모두로 그려 넣고 있지만 장강 남쪽은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발이 시작 되는 곳이다. 남조란 自生的 國家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호십육국의 북방계 나라들에 밀려 남쪽으로 급히 피난간 일종의 망명 왕조들인 것이다. 그런데 고구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시기를 지나는 건흥제 시기에 고구리가 유송에게 조공을 하고 작위를 받았다는 춘추필법의 기록의 실체를 좀더 살펴 보자. 다음을 보자.
이보다 먼저 '선비족 모용보'가 '중산'을 다스렸는데, '색노(노란색) 를 깨뜨리자 동쪽 '황룡'으로 달아났다. 중산:지금의 山西省 남쪽 하남 북쪽 < 義熙>初, <寶>弟<熙>爲其下<馮跋>所殺, <跋>自立爲王, 自號<燕王>, 以其治<黃龍城>, 故謂之<黃龍國>. '의희'초 '보'의 동생 '희'가 '풍발'의 아랫사람을 죽였는데, '발'이 자립하여 왕이라 하고 스스로 '연왕'이라 하며 '황룡성'을 다스렸다. 고로 이를 '황룡국'이라 하였다. 모용보는 後燕의 군주다. <跋>死, 子<弘>立,/$<馮弘>爲<馮跋>之弟, 見《晉書》[載記], 子當作弟, 蓋<沈約>承 國傳聞而誤.$/ 屢爲<索虜>所攻, 不能下. '발'이 죽자 아들 '홍'이 섰다.['풍홍'은 '풍발'의 동생이라고도 한다. '진서' 제기를 보면 자는 다땅히 제로 적어야 한다. '심약이 이웃나라의 말을 잘못 전해들은 것이다.] 자주 '색노'를 공격하였는데, 능히 정복할 수가 없었다. 남조 국가들은 북방족족인 북위를 索虜라느 표현으로 오랑캐라는 의미로 부르는 것이다. 북위는 拓跋鮮卑族이다. 그런데 "跋"이라는 글자에 탁발 선비족과 고구리의 관계를 알수 있는 단서가 존재 한다. "跋"이라는 글자는 足과 戎이 결합된 글자이다. 고구리는 "戎"이다, <太祖>世, 每歲遣使獻方物. '태조'때에 매해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받쳤다. <元嘉>十二年(436년), 賜加除授. 十五年, 復爲<索虜>所攻, < 弘>敗走, 奔<高驪><北豊城>, 表求迎接. '원가' 십이년 제수를 더하여 하사하고, 십오년 다시 '색노'를 공격하였으나, '홍'이 패하여 도주하여 '고려 북풍성'으로 도망하여 고구리의 도움을 받았다. 유송이 색노(북위)를 공격하자 북위의 홍이 도망하여 고구리의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만약 위의 지도와 같이 거대한 北魏 였다면 북위의 황제가 고구리로 도망을 하여 고구리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것이 春秋筆法에 의한 중국 역사의 모습인 것이다. 이 시기의 북위는 고구리의 속국 또는 고구리의 비호를 받앗다는 무수한 기록의 증거가 존재 한다. 북위는 部族國家 시절 부터 고구리와 그 운명을 함께 햇던 나라이며 건흥제 시기에는 북위 조정이 모두 고구리 귀족들에 의해 점령된 것을 알 수 있다. 北魏의 선무제 어머니인 문소황후 고조용은 고구리 귀족 가문 출신이다. 435년, 북연왕 풍홍이 고구리에 밀사를 보내 망명을 요청하였으며, 건흥제는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 北燕이 북위에 의해 멸망당할 때 군대를 보내 풍홍 및 그 일족들을 구출하였다. 高句麗로 망명 온 풍홍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행패를 부렸으며 이에 건흥제는 풍홍의 태자를 인질로 잡고 시중드는 인원도 몰수하였다. 이에 풍홍은 宋에 망명을 요청하였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건흥제는 군대를 보내 풍홍을 살해하였다. <太祖>遣使<王白駒>·<趙次興>迎之, 幷令<高驪>料理資遣 , <璉>不欲使<弘>南, '태조'가 '왕백구' '조차흥'을 보내 고구리의 사신을 맞이하고, 아울러 고구리에 예물을 보냈지만 듣지 않앗다. 윗 기록처럼 유송의 황제가 고구리로 부터 조공을 받고 작위를 받는 나라라면 감히 유송의 황제가 왕백구와 조차홍이라는 대신을 보내 고구리의 사신을 맞이 하고 고구리에 예물을 보냇지만 고구리의 분노를 잠재우지 못했다는 말 아닌가? 또한 위와 같은 지도의 국가 위치로는 위와 같은 기록이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위 기록은 고구리와 송의 국경이 맞닿아 있지 않다면 존재할 수 없는 기록인 것이다. 乃遣將<孫漱>·<高仇>等襲殺之. 이에 '손수', '고구'등을 장수를 보내어 습격하여 이들을 죽였다. 이때 송의 사신 왕백구가 군사를 이끌고 高句麗군을 공격하여 고구리 장수 고구가 죽고 손수가 생포되었는데, 건흥제는 다시 왕백구를 붙잡아 송으로 압송하였다. < 白駒>等率所領七千餘人掩討<漱>等, 生禽<漱>, 殺<高仇>等二人. '백구'등이 칠천여명으로 '손수'등을 쳤는데, '손수'를 생포했지만, '고구'등 두명이 죽었다. 송태조가 보낸 장수는 백구라는 말이며 백구는 고구리 사신인 소수는 생포했지만 고구등 2명은 죽이고 말았다는 말이다. < 璉>以<白駒>等專殺, 遣使執送之, 上以遠國, 不欲違其意, <白駒>等下獄, 見原. 련(건흥제)가 '백구'등을 반드시 죽이고자 하고, 사신을 보내어 백구와 포로를 돌려달라고 하자, 고구리의 그 뜻을 어길수 없어, '백구'등을 하옥시켰다가, 용서를 받았다. 이 기록은 이 시기의 고구리가 어떤 위치에 있엇는지를 말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건흥제는 宋나라 太祖의 신하이자 무장인 백구를 송환 할 것을 명령하엿고 이에 송 태조는 건흥제의 말을 거역 할 수 없어 자신의 신하인 백구를 하옥 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외교적으로 건흥제를 설득하여 백구를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 기록의 이중성은 중국 역사의 허풍적 허구성과 이때의 고구리 건흥제의 위상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나타내는 결정적인 기록이다. 이 시기의 고구리는 동아시아 전체가 고구리의 속국적 위치에 있엇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인 것이다. 북방민족의 통치 스타일은 정복한 국가를 직접 통치하지 않앗다. 너무 넓은 영토와 적은 인구로 숫적으로 많은 漢族을 직접 통치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묵돌선우의 삼한, 조선 삼한, 단석괴 삼한, 징기스 칸의 사한이 그 단적이 예다. 하지만 같은 민족 계통의 강력한 위에 거론한 나라가 있었음에도 발해와 거란 그리고 고려가 무슨 이유로 "고구리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 해야 한다. 고구리는 명실상부 하게 징기스 칸의 영역과 통치 프레임을 먼저 실현한 나라인 것이며 그 시기는 건흥제 때이며 아시아는 모두 건흥제의 지배를 받던 시기를 증명하는 기록이 <宋書>인 것이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믿지 않는 것이다. "설마"라는 생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