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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은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얼굴에 간단한 로션만 바르고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렸는데 그녀의 핸드폰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뭐하는 짓이지?>
진혁이었다. 그녀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럼 만나자 마자 헤어지자고 해요?”
<그랬어야지. 형이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던데? 그새 또 꼬신건가?>
혜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진혁에게 말했다.
“그럼 마음에 준비라고 하고 있게 미리 도착한다고 메시지라도 주지 그랬어요?”
<이 삽사리푸들이.. 잘못해 놓고 어디다 화를 내고 있어? 말 했지. 당신이랑 키스라도 하다가 칼 맞으면 어떻게 책임질 건데!>
그가 크게 말하지 못하고 속삭이면서도 목소리에 화를 담아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괜찮은 시나리오가 안 떠오른다구요. 상처주고 싶지 않고.. 헤어지고 싶지도 않고..”
<그럼 당신 때문에 형이 잘못되어도 괜찮다는 뜻이야? 그래?>
“그건.. 물론 그건 아니에요.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까.. 시간을 좀 줘요.”
<빨리 해. 늦으면 늦을수록 위험부담은 커진다는 걸 잊지마.>
“그런데 내가 왜 삽사리푸들이에요?”
<몰라서 물어? 거울을 보면 알거 아니야. 선물은 고마워. 내 선물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아무한테나 선물 안 하니까.>
“기대 안 해요.”
<어디 있나 한참 찾았네.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어.. 형. 그럼 되도록 빨리 해결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진혁이 전화를 끊었다.
“머리 아파..”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냉수를 꺼냈다. 벌컥벌컥 마시고 욕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했다. 문득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성질을 냈다.
“내가 어딜 봐서 삽사리푸들이라는 거야? 지는.. 꼭 기생오라비.. 딱 봐도 양아치던데 뭐..”
그녀는 진혁이 왜 그러는지 알기에 그렇게 그가 싫지 않았다. 단지.. 얄미웠다. 오히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그녀는 간단한 샤워를 하고 침대에 쏙 들어갔
다. 이불을 끌어 당겨 어깨까지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지.. 그리고 그 타투는.. 언니.. 잘 있나..?”
그녀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고개를 약간 돌려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미수에게서 받은 선물을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 어색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은 도혁의 모습이 보였다.
“표정 봐.. 후후..”
그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생각보다 금세 잠이 들었다.
“내가 애기야? 내 선물이 왜 이 모양이야?”
진혁이 집에 돌아와 혜영에게 받은 선물을 보고는 화를 냈다. 도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진혁의 손에는 새로 나온 게임기였다.
“네가 딱 좋아할 만한 선물로 잘 골랐구만, 뭘..”
진혁이 “진짜? 진짜 그렇게 생각해?” 라며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이며 삐딱하게 말했다.
“형은 뭐 받았는데?”
진혁이 다가와 소파에 앉아 선물을 보고 있는 도혁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책이랑 카드? 이게 무슨 애인한테 주는 선물이래?”
“시끄러워.. 난 올라간다.”
도혁이 그를 지나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메리크리스마스, 내 동생.”
“형도 메리크리스마스.”
그가 미소 지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준비한 선물은 희귀본
고서와 장문의 카드였다. 카드에는 암호 숫자로 가득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엎드려
책을 펼치고 그녀가 하고자 자는 말을 확인했다.
<향수는 안 될 것 같고, 액세서리도 안 될 것 같고, 좋은 옷은 이미 갖고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내가 선택한 첫 선물은 이거에요. 내 영혼의 유일한 사랑은.. 영원히 당신만 가질 수 있어요.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몸이 원하는 대로.. 메리크리스마스..>
그가 책에서 시선을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쩌라는 거야.. 지금.. 오라는 거야..?”
그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지어졌다.
눈을 번쩍 뜬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카드.. 카드..”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오지 않겠지..? 아~~.”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면서 뒤로 넘어갔다.
아침이 되자 도혁이 내려왔다.
“일찍 일어났네?”
“안 잔거거든?”
“그래? 왜?”
진혁에게 다가간 도혁은 피식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재미있냐?”
“뭐.. 그럭저럭. 어디 나가?”
“응.”
“올 때 맛있는 거 사 와.”
“그래.”
도혁이 밖으로 나가고 나서 진혁이 뒤로 벌러덩 쓰러지며 집안이 울리도록 말했다.
“젠장! 왜 안 깨지냐고..”
그가 벌떡 일어나 게임을 시작했다.
“오호~. 간만에 머리 좀 쓰겠는데? 오늘 안에 내가 널 철저히 분해해 주겠어~.”
도혁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페도라를 들고 내렸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서 페도라를
썼다. 백화점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주얼리 매장에서 고개를 숙여 살펴보고 있는데 같은
매장에 있던 누군가 그에게 다가오는 걸 감지했다. 그가 향기만으로도 누군지를 알고 눈을 감
았다가 떴다.
“저기.. 혹시 그 분 아니세요?”
그가 고개를 들어 다진을 바라보았다.
“누구신지..”
“저 혜영이 회사친구 윤다진이라고 해요. 영국에서 언제 오셨어요?”
“혜영.. 누구요?”
그가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 에반스 윌리엄씨 아니세요?”
그가 싸늘하게 미소지었다.
“사람 잘 못 보셨습니다.”
“나. 사람 잘 못 보지 않는데..”
“그럼. 내가 영국에서 날아 온 에반스 윌리엄이라는 겁니까? 이름 하고는..”
“모자 좀 벗어주시겠어요?”
다진이 손을 들어 그의 모자를 잡으려고 하자 도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뒤쪽에는
지난 밤을 함께 보낸 듯한 분위기의 남자가 다가오려다가 도혁과 눈이 마주치자 멈칫 했다.
도혁이 다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적당히 비싼 거 사달라고 해요. 당신 어젯밤에 대한 댓가인 것 같은데..”
다진이 인상을 찡그리며 얼굴을 붉혔다.
“뭐라고요?”
“남자한테 가슴 적당히 흔들면서 다가와 가식적인 미소 지으면 누구나 당신에게 반할 거라고 각하는 건 어디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신지? 미안하지만 당신같은 여자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네요.”
“처음부터 말했는데.. 에반스 윌리엄이라.. 흠! 작업하기엔 너무 빈약한 이름 아닌가?”
다진이 불쾌하다는 듯 그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쭈뼛거리며 다진에게 다가오자 그녀가 그에게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내가 당하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어? 다시는 연락하지 마.”
“미안해. 하지만 상대가 너무 세 보여서..”
“웃기시네..”
“미안해.”
도혁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둘러보고 올게요.”
그는 그 주얼리 샵을 나왔다. 결국 그는 다른 곳으로 차를 몰고 출발했다.
****
여자가 어둠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손과 발은 의자에 묶여 있었고, 눈은 가려져 있었
다. 그녀는 애인과 만나러 가려고 길을 건너려다 검은 차량에서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내려
와 끌고 왔다. 그녀의 마지막 영상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애인의 절규..
“여보세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질문에 대답하면 언제든 보내줄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 그녀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질문인데요?”
“어깨에 타투 했지? 별과 별 안에 꽃으로 가득한..”
“그건 요즘 누구나..”
“시끄러워!”
여자가 움찔했다.
“죄.. 죄송해요.”
“누가 해 줬지?”
여자가 가만히 있자 바닥을 뭔가로 세게 내리쳤다. 그 때 옆방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흘리며 여자가 말했다.
“어딘지 가게를 알아요. 가게 이름 말하면 보내주실 건가요?”
“그래.”
그녀가 순순히 가게 이름을 말해줬다. 잠시 후 남자가 손에 든 손수건을 여자 입에 대자 여가자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의 고개가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소진이 들어왔다.
“내 비명 소리 괜찮았어?”
“네.”
“알아냈어?”
“네.”
“그럼 보내 줘. 지난번처럼 목숨가지고 장난치면 내 손에 죽어.”
“네.”
“어디 찾으러 가 볼까?”
소진이 밖으로 나가고 남자요원이 들어와 여자를 의자에서 풀고 어깨에 들쳐 업고 방을 나왔다.
경찰서에 한 남자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시죠?”
“제 여자친구가 괴한들에게 납치되었어요.”
“정확히 몇 시에,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납치되셨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눈을 뜬 혜영이 기지개를 켰다.
“으~~~.”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친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물을 올려놓고 커피를 꺼냈다. 인스턴트 원두커피 봉지를 흔들며 한 숨을 내쉬었다.
“아.. 어떻게 하냐고..”
봉지를 뜯어 머그컵에 넣고 데워진 물을 부었다. 그 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가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을 들었다.
“이 자식은 시간을 좀 달라니까..”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이거 뭐야?>
그 역시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가 뭐에요?”
<당연히 게임이지, 게임.>
“아.. 선물로 준 게임 말이에요? 그거 아직 못 깼어요?”
<못 깨긴.. 지금 시작하려고 하는 중이야.>
“그럼 해 봐요.”
<해 본 적 있나?>
“친구 추천으로 한 번?”
<몇 시간 만에 깼는데?>
“창피하게 그걸 왜 물어요?”
<아, 몇 시간!>
“세 시간이요.”
진혁이 전화기를 막고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젠장’을 외쳤다. 그리고 다시 전화기를 귀에
댔다.
“그거 제법 할 만해요. 제 친구는 2시간 50분 만에 깼는데 그 친구도 괜찮다고 했었어요. 그런 종류 좋아하실 것 같아서 선택한 건데.. 해 보시면 몇 시간 정도 재미있으실 거예요.”
<알았어.>
“저기요..”
하지만 그는 자기 할 만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끊어진 전화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뭘 알았어.. 참내.. 자기 할 만만 하고.. 그 사람 뭐하나 물어보려고 했더니..”
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입에 댔다. 그러다 문득 핸드폰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직 못 깼다는 뜻이네~. 흥! 내 머리 아프게 해 놓고 쌤통이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진혁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삽사리푸들이 3시간, 그 친구는 2시간 50분. 난.. 난.. 이게 뭐냐고.. 뭐가 잘 못 됐나?”
그가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찬모가 잠들어 있는 규린을 깨웠다.
“일어나. 지금 가야 해.”
규린이 침대에서 내려와 준비 해 놓은 가방을 맸다. 그리고 활과 화살을 챙겨 찬모와 함께 가게 뒷문으로 나가면서 바닥에 놓인 버튼을 밟았다. 그들이 나가고 정확히 10초 후에 가게 안에 불이 붙어 안의 모든 것을 삼키기 시작했다.
소진과 몇 명의 요원들이 타투가게를 찾았다.
“어떻게 알았지?”
“모르겠습니다.”
“이 가게 주인과 직원.. 여기에 관련된 모든 것을 조사해.”
“네.”
소진이 몸을 돌려 차로 걸어갔다.
도혁이 혜영에게 가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2번 울리고 멈추자 진혁의 컴퓨터에 메시지가 뜨기 시작했다.
<**지역에서 별과 꽃 타투를 한 25세 여성이 괴한들에게 납치. 12시간 만에 다시 찾았다. 그녀의 진술에 의하면 타투를 해 준 자를 말하고 다시 정신을 차리니 공터에 있었다고 한다. 즉시 가서 조사하도록.>
진혁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위치는 **지역 23번가. 가게 명의는 곽찬모. 나이 33세. 음.. 특별할 건 없는데. 왜 남자를
찾는 거지? 잡혔다가 풀려난 여자의 진술서를 보면.. 괴한 남자들.. 눈을 가리고 있었다는 건
아무것도 못 봤다는 뜻이고, 다른 방에서 여자의 비명소리.. 누가 타투 해 줬냐고 물어봤고,
타투를 한 가게를 말했고, 여자.. 가 해 줬다고 써 있는데? 직원이었을까? 이름이나 뭐.. 확인
할 게 없는데.. 아! 방금 전에 119에 신고 접수됐어. 가게가 불타고 있다는데? 그들이 불에
타서 죽은 걸까?”
“가봐야 알겠지. 잠깐 다녀와야겠다.”
“같이 가.”
“조사만 하고 오는 거니까. 혼자 다녀올게. 넌.. 할 일이 있잖아.”
도혁이 미소를 짓자 진혁이 인상을 찡그렸다.
“조심해서 다녀 와.”
“그래.”
도혁이 2층으로 올라가 가방을 챙겼다.
혜영이 아침에 눈을 떴는데 창문에 뭐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비볐다. 하지만 헛것이 아니라 바구니처럼 보이는 것이 매달려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
위로 올라가 창문을 열었다. 바구니가 옥상에서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고개를 빼서 위를
보았지만 뭐가 보이진 않았다. 그녀가 바구니 안을 살펴보았다. 안에는 아침으로 먹을 수 있
는 샌드위치와 주스가 들어 있었고, 선물 상자가 들어있었다. 그녀는 바구니를 고정시킨 끈을
풀어 바구니를 갖고 집안으로 들어와 창문을 닫았다. 책상에 걸터앉은 채 선물 상자를 풀어보
았다. 그 안에 메모지가 있었다. 메모지 안에는 숫자들이 가득했다.
“못 살아.. 어떤 책인데요..”
마지막에 힌트가 적혀 있었다..
E1.
“이건 <아덴소즌> 1권이라는 소린데..”
그녀는 이게 누구한테서 온 것인지 몰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일단 뒤를 돌아 커튼을 쳤다.
그리고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고 <아덴소즌> 1권을 갖고 와서 펼친 후 메모지와 번갈아 바라
보았다.
<놀랐어? 언니한테 온 줄 알았지?>
여기까지 읽은 그녀가 한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급하게 조사를 하러 가야해서. 연말 파티 전까지는 돌아오도록 노력해 볼게. 사랑해. 늦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파티 때 하고 가.>
그녀가 메모를 가슴에 안고 눈을 감은 채 숨을 내쉬었다. 상자를 꺼내 풀어보았다. 안에는 금색 줄에 큐빅과 그 아래 진주가 달린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였다.
“예쁘다.. 봐 줄 것도 아니면서 뭐하러 이렇게 예쁜걸..”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다시 상자를 덮고 샌드위치와 주스를 꺼냈다. 봉지를 벗긴 후 샌드위치를 한 입 먹고 거의 다 씹은 후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행복하다..”
그녀가 눈물을 참느라 코맹맹이 소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며칠 뒤 진혁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자꾸 전화를 하는 거예요?”
<지금쯤은 그럴 듯한 시나리오가 나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혜영이 분을 삭이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생각이 나는 줄 알아요?”
<빨리 해야지~!>
“알았어요. 조만간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재촉해요.”
그녀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녀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어디야?>
“알아서 뭐하게요?”
<어디냐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왜요!”
<알았어.>
그가 또 먼저 전화를 끊었다. 혜영이 이를 악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다진이한테서도 느껴보지 못한 뭔가 엄청 검은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라니까.. 후우~.”
그녀가 심호흡을 하고 걸음을 다시 걸었다. 집에 가까워졌을 때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차에서 내려 그녀를 바라보더니 자신을 알아본 그녀를 향해 손을 들
었다가 어색하게 내렸다.
“뭐하자는 거야..”
그녀가 걸음을 걸으며 그를 가늘게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왜 왔어요? 시나리오 검토해 주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연말 파티 끝나면 바람처럼 사라질 테니까.”
“그건.. 그건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연락.. 왔었어요?”
“응. 쉽게 오지 못할 건 가봐.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가는 건데..”
그녀는 자신에겐 연락도 없는 사람이 그에겐 했다는 생각에 질투가 생겨 더욱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이렇게 귀찮게 하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혜영이 고개를 저으며 그를 지나쳐 건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가 따라오는 것 같았다. 혜영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무.. 뭐에요?”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같이 좀 가자고.”
“어.. 어딜요?”
“..집.”
그가 턱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내 집이요? 미쳤어요?”
“뭐야. 설마 내가 삽사리푸들한테 관심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아?”
“꿈도 꾸지 마요. 웃겨, 진짜..”
혜영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진혁을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뒤에서 그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가 몸을 홱 돌렸다.
“자꾸 그러면.. 나 당신 형한테서 절대로 안 떨어질 거예요. 껌딱지처럼 딱 달라붙어서 안 떨
어질 거라구요.”
“아 씨.. 그럼 어떻게 해!”
“뭘요~.”
“게임이 이상해. 불량을 사다 줬나봐.”
혜영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거 끝내는 법 알려달라고 지금 이러는 거예요? 열심히.. 아주 열심히 해 보세요.”
“열심히 안 했는줄 알아?”
“그럼 게임이 불량인가 보죠. 가서 교환하세요. 영수증 드려요?”
“네가 한 번 해 보면 알지 않을까? 너도 못 깨면 불량인거지. 어떻게 생각해.”
“좋아요. 그럼 게임 주세요. 제가 집에서 혼자 해 보고요. 전화 드릴게요.”
“어떻게 믿어?”
“그럼 말던가요. 하여간 내 집에 한 발자국도 못 들어올 줄 알아요. 알았어요?”
그녀는 뒤를 돌아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서 중얼거렸다,
“괜히 사줬어. 기계를 잘 다룬다고 해서 일부러 한 단계 높은 걸로 사줬건만.. 저렇게 승부욕 과잉일 줄 알았으면 아주 쉬운 걸로 사줬을 텐데.”
“그럼 다른 곳은 괜찮아?”
“당신이랑 단 둘이는 싫어요. 그 어디든.”
“영감네서 하면 어때?”
“다른 사람한테까지 피해를 주면서.. 그게 그렇게 깨고 싶어요?”
그가 자존심 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알았어. 어차피 쓸모없는 건 버리면 그만이야.”
그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주먹을 쥐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확히 딱 3시간이에요.”
그가 고개를 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나라고 뭐.. 이런 거 너랑 같이 하고 싶은 줄 알아?”
“몇 살인데 자꾸 반말에 너라고 불러요? 한성씨도 그렇게 안 부르는데..”
“형이랑 나는 원래 달라.”
“네~. 그런 것 같네요. 가요.”
그녀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차를 타고 풀문에 도착해서 그들은 원성과 미수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게임을 갖고 두 사람이 앉았다.
“너무 가깝잖아요.”
혜영이 고개를 빼고 그녀의 손에 들린 게임기를 바라보는 진혁을 인상을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알았어.”
그가 조금 뒤로 물러서는 듯 해서 혜영이 고개를 숙이니까 다시 전등빛에 그의 머리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저기요..”
“응.”
그가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정확히 2시간 50분 만에 게임을 끝냈다. 그녀가 뻐근해진 몸을 기지개를 켜며 비틀었다.
“뭐야.. 불량이 아니었고.. 아까 숲에서 말야. 왜 거기에서 그렇게 가는 건데?”
“원래 그렇게 가는 게 맞아요. 아~. 반대로 갔구나? 이제 됐죠? 벌써..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저 먼저 일어나요.”
혜영이 일어나면서 앓는 소리를 했다.
“쯧. 늙었어.”
혜영이 진혁을 흘겨보았다.
“화장실도 못가고, 저녁도 못 먹고 3시간 가까이 한 자세로 있었는데 그럼 몸이 괜찮겠어요?”
피곤해진 그녀가 하품을 했다.
“데려다 줄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당장 해 보고 싶으면서.. 갈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며 몸을 돌려 1층으로 내려가는데 그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말 못해. 몸에 뭐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서. 귀찮게 해서... 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려고?”
“네.”
“귀찮지 않았어?”
혜영이 고개를 저으며 “죄송했어요. 다음에 봬요.” 라고 말하며 가게를 나갔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린애 같아.. 쬐끔. 아주 쬐끔 귀엽네.. 아~~함. 그런데 힘들다.. 아고.. 허리야.. 그런데 한
성씨는 왜 안 오는 거야.. 전화도 없고.. 나쁜 사람.. 얼른 와요. 나.. 조금 있으면 볼 수 없는
곳으로 간단 말이에요..”
그녀는 잠에 취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도혁은 다 타고 잔해만 남은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네. 불에 타도록 하도 도주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조사 해 보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가 몸을 돌려 오토바이에 몸을 올랐다.
혜영은 솔희와 미용실에 와 있었다.
“이렇게까지 필요할까?”
“필요하지. 필요하고말고. 넌 파트너 누구 데려올 건데?”
“혼자 갈 거야. 그 사람은.. 아직도 출장중이니까.”
“그런 남자를 도대체.. 아직도 안 잘리는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
혜영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너 혼자 있는다고? 작년이랑 뭐가 다른데? 심지어 올해는 다진이랑 내기도 있잖아.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나 혼자여도 괜찮아. 어차피 여기저기 신경 쓰느라 정신없이 지낼 텐데.. 파트너 있으면 미안해서 어떻게 하니?”
“그 자식은 같은 주최자면서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모르지..”
“언니. 우리 오늘 예쁘게 해 주세요.”
“네.”
두 사람이 화장과 머리를 하기 시작했다. 2시간 후 변신한 그녀들이 드레스를 입으려고 하는데 여자직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 선물 도착하셨는데요.”
“선물..이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상자와 동그란 상자 각각 2개씩 그녀들에게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어보았다.
“어머~! 이게 뭐야? 드레스? 그럼 이건..”
솔희가 둥근 기둥 모양 상자를 열었다.
“구두잖아? 누가 보낸 거래요?”
“에반스 윌리엄씨요. 외국 분이시네요.”
“아~. 영국 신사분이세요. 제 친구의 애독자. 너 진짜 신데렐라가 따로 없다. 응? 외국에서 살아서 그런지 아주.. 드라마틱 한데? 그럼 이건 내건가? 그렇네.. 여기 이름 써 있다.”
상자 위에 영어로 그녀들의 이니셜이 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혜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았다.
“아.. 안되는데.. 눈 화장 지워지는데..”
“못 살아.. 하긴 나도 감동적이면서.. 로맨틱하다~. 야.. 싸가지 좀 없으면 어때~. 그냥.. 에반스 물어. 응?”
솔희의 오버하는 목소리에 혜영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이 드레스들은 무슨 컨셉이지? 동화 속 주인공 중에 누구같아?”
“글세..”
“웨딩드레스 같은데요?”
여자직원의 말에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굉장히 유명한 디자이너 분의 웨딩드레스에요.”
“너.. 결혼하니?”
“아니..”
“에반스가 한국에 오니?”
“..아니..”
“그럼.. 뭐야?”
“몰라.”
“나는 왜 웨딩드레스를.. 아~. 너 혼자 입으면 너무 튀어 보일까봐~라기 보다는 친구라서 신경써 준거구나? 멋진 남자 같으니라구.. 야.. 입자.”
여자직원이 다가와 혜영의 화장을 고쳐주고 그녀들이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구두까지 신은 그녀들이 거울 앞에 섰다.
“예쁘다.. 내 친구.”
“여신이네..”
“에반스 덕분이지 뭐..”
솔희는 로맨틱하게 올린 머리에 왼쪽 귀 위쪽으로 하얀색 망사로 만들어진 예쁜 꽃 장식을 달
았고, 끈으로 어깨에 고정되어 가슴 아래에 넓은 꽃이 들어간 띠로 장식된 후 무릎까지 달라
붙었다가 그 아래에서 확 퍼지는 인어공주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긴 팔과 다리를 가진 그녀는
그렇게 입고 있으니 여신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혜영은 오픈 숄더에 가슴부터 허리 약간 아
래까지 실버장식들로 꾸며지고 그 아래로 확 퍼지는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갑옷을 입고 있는
듯 조금은 강인해 보이는 공주풍 드레스였다. 긴 웨이브 펌 가발을 쓰고 반업 스타일로 고정
한 후 그 위에 은색 별모양 안에 큐빅이 촘촘히 박힌 머리띠를 했다.
“그런데.. 옷도 옷이지만 구두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지?”
“글세..”
“여자 선수인가? 네 사이즈야 만났으니까 안다지만.. 난? 좀.. 그렇다.. 우리는 모르는데 그
사람은 우리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아서. 하지만 뭐.. 예쁘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만. 이
이상 이상한 행동하면 삼촌들에게 연락 하겠어~.”
“그래. 가자. 호진씨 기다리시겠다. 그나저나 이 옷 입고 왔다갔다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누구 구두에 밟히는 거 아니야?”
“살짝 들어야지. 공주니까.. 가자.”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오자 호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공주님들에 비해 너무 소박한 거 아니야?”
“좀.. 그렇네?”
“아니에요. 멋지세요.”
그가 두 사람에게 흰색 털 숄을 어깨에 둘러주었다.
“가시죠. 공주님.”
호진이 팔을 내밀었다.
“혜영이 있는데..”
“괜찮아. 내 두 손은 드레스 들어 올리느라 바빠. 가요.”
솔희가 호진의 팔짱을 끼우고 차로 걸음을 옮기고 그 뒤를 혜영이 뒤따랐다. 그녀는 차에 올
라 창밖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었다. 사실 그녀는 오늘 오전에 짐을 이삿짐
센터에 맡겼다.
“일단은 보관해 주세요. 이사할 곳이 정해지는 대로 전화 드릴게요.”
“네.”
자신의 짐을 실은 이삿짐 트럭이 멀어져 가는 걸 보며 기분이 우울해진 그녀가 집으로 들어왔
다. 휑해진 집안을 둘러보다 그녀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창턱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 가슴에
끌어안고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겨우 진정한 그녀는 현관에 간단한 짐
이 들어있는 캐리어를 두고 밖으로 나와 솔희와 만난 것이었다.
‘오늘만.. 오늘만..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는 당신의 여자가 될게요. 미안해요..’
창밖을 보고 있던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려고 하자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파티장에 도착한 혜영은 솔희와 호진이 파티용 가면을 고르자 자리에 안내하고 바쁘게 파티에 관련된 것들을 플래너와 점검했다.
“오늘 정말 사랑스러우세요.”
파티플래너가 그녀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점검은 다 된 것 같네요. 마지막까지 힘내주세요.”
“네.”
어제부터 이삿짐을 정리하고 입맛도 떨어져 잘 못 먹은 혜영은 갑자기 기운이 떨어져 근처에
놓인 의자에 손을 올려놓고 조금 기대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입구에서 사
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눈을 뜨고 입구로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고, 입구에서 여러 가지 가면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안내자들을 따라
각자의 네임카드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진이 유빈씨와 함께 차에서 내려 걸음을 옮
겼다. 다진은 화려한 장식이 달린 금색 드레스였다. 오픈숄더에 가슴이 한껏 강조된 스타일에
가느다란 허리 아래에서 확 퍼지는 스타일의 드레스였다. 로맨틱 올림 머리위엔 티아라를 썼
는데 그녀는 흡사 신데렐라 같이 보였다. 늘씬한 몸에 어울리는 드레스였다. 무엇이 들어가긴
할까 생각되는 큐빅 미니가방을 들고 화려한 팔찌와 목걸이, 귀걸이까지 세트로 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화려해서 보고 있으면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가 혜영
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혜영은 들었지만 못들은 척 하고 유빈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멋진 턱시도를 입은 프린스 차밍의 모습을 한 유빈이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화장을 왜 안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네요. 오늘.. 굉장히 아름다워요.”
“감사합니다.”
유빈의 팔을 다진이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가 다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무슨 소원을 말할지.. 기대 해.”
“응.”
혜영도 억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도 마음에 드는 가면을 고른 후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거의 오신 것 같거든요. 혹시 늦는 분을 위해 입구에 한 분만 남고 다른 분들은 안에서 도와주세요.”
그녀가 다른 도움을 주시는 분들과 함께 홀 안으로 들어갔다. 사회자가 앞에 나와 진행을 시
작했다. 혜영은 중간 중간 벽에 걸린 아름다운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가 아름다워서 보는
건 물론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점점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파티 중반이 되자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그녀는 부족한 음식이 없는지 살피고 즉시 채워 놓았다.
파티 중반 쯤 되어 어느 정도 술기운이 돌자 다들 부드러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무리는 저희가 할 테니까 좀 즐기세요.”
파티플래너가 그녀에게 말했다.
“네.”
그녀가 시계를 바라보다 한 숨을 내쉬고 마지막 남은 가면을 손에 들고 접시를 집어 간단한
과일을 담아 근처에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과일을 집에 입에 넣었다. 그리
고 고개를 돌려 가면을 쓰고 아름다운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춤을 추는 사람들을 바라보았
다. 문득..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와 함께 좁은 그녀의 거실에서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잔에서 살짝 입을 떼었다가 다시 잔을 들어 와인을 다 비웠다. 그녀는 입맛
을 잃고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다른 사람의 와인잔을 들어 비웠다. 그녀가 입
술에 묻은 와인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마실 와인을 찾아 몸을 돌렸다. 2개 떨어진 자리에 아
예 와인 병이 담겨진 통이 보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기증이 돌아 어지러웠다. 눈
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천천히 와인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
고 빙글 돌렸다. 갑자기 빙글 돌아 어지러운 그녀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얼굴이 혼란
스러웠다.
“배.. 백훈씨..?”
이백훈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일이 있어서..”
“제가.. 초대했던 가요?”
“혜영씨가 아니라..”
백훈이 시선을 돌려 멀리에서 그들을 보고 손을 흔드는 솔희를 바라보았다. 혜영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당황스러워 혀로 입술을 축였다.
“저기..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오해요..?”
“죄송해요. 제가 오늘 파티 주최자라서요.”
“그럼 춤 한 곡 추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그건 안 되겠는데?”
백훈과 그녀가 고개를 움직여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혜영은 웃음을 터트리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군지 아세요?”
백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는데요?”
혜영이 웃음을 감추고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춤추러 가실가요?”
백훈이 그녀의 손을 자신의 팔에 올리려고 하자 진혁이 가짜칼을 들어 그의 어깨에 댔다.
“내 여자야. 비켜.”
“뭐라고요? 혜영씨가 모른다고 했잖아요. 당신.. 누구야?”
“몰라? 쾌걸조로.”
혜영이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죄송해요. 아는 사람이에요.”
“아.. 설마..”
“그 사람은 아니구요. 그 사람 동생이에요. 지금 출장중인데 제가 다른 남자랑 춤을 출까봐 동생을 보냈나봐요. 죄송해요. 대신 근사한 여성 분을 소개시켜 드릴게요.”
그녀가 백훈의 팔짱을 끼우고 걸어가며 고개를 돌려 진혁에게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요. 미스터 Z..”
혜영은 백훈을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착실하고 귀여운 이은선이라는 아가씨에게 소개시켜주고 진혁에게 다시 돌아왔다.
“뭐에요? 왜 왔어요? 그것보다.. 엄청 튀는 거 알아요?”
“초대장 보고 코스프레 파티인 줄 알았지.”
“그 칼은 뭐에요?”
“응. 장난감 칼인데 진짜 같지?”
혜영이 피식 웃었다.
“다들 쳐다보는 것 같은데.. 뭘 하면 돼?”
그녀가 가면을 쓰면서 말했다.
“춤 출래요?”
“너랑?”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도 싫어요.”
“쯧.. 뭐.. 춤추면서 대화를 하도록 하지.”
그가 팔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자 혜영이 그의 팔위에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이 홀 중앙으로 걸
음을 옮겼다. 사람들 틈에 서서 춤을 출 자세를 잡았다. 칼이 걸리적거리자 그가 벨트에서 칼
을 분리해서 가까운 곳에 던졌다. 혜영이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이 다시 다가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럼 다시 이야기를 해 볼까?”
“그래요.”
“내가 형한테서 떨어지라고 했지, 그 새 바람피우라고 했나? 이런 여자를 뭐가 걱정이라고 나보고 꼭 가라고 신신당부하고.. 형이 바보지.. 쯧.”
“그 사람은..”
“못 온대.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왜 당신한테는 연락하면서..”
“당연한 거 아니야? 난 동생이야. 물론.. 피를 나눈 건 아니지만.. 여하튼 우린 가족이고, 너는 헤어지면 그만인 남이고.”
“질투나게..”
“언제 사라질 건데?”
“오늘 오전에 이삿짐센터에 짐 맡겼어요. 오늘 밤.. 얼굴 보고 내일 사라질 생각이었는데..”
“형이 안 오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룻밤 같이 보내고 사라질건가?”
그의 노골적인 질문에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래~. 누가 보면 내가 이상한 말 한 줄 알거 아니야.”
“이상한 말 했잖아요.”
“내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돼요?”
“안 돼.”
그녀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네가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그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그는 닭살스런 말을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알아요.”
“알아? 네가.. 뭘 알아?”
“복잡한 거 아니에요?”
“복잡..하지..?”
“일단은.. 나와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이 주위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위험해서 나를 떼어내려고 했고.”
“그렇지.”
“형을 나한테 빼앗긴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했고.”
“인정하기 싫지만.. 그래. 형이 나를 인지하지 못하고 칼을 들고 나왔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알아?”
“알아요.”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긴..”
“왜냐하면.. 나도 당신이 부럽고, 질투 나는 걸요?”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당신은 그 사람과 같은 집에서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어디 가면 따라갈 수도 있고, 그리고 지금처럼.. 멀리 있을 땐 연락하잖아요. 가족인 당신이.. 너무 부러워요.”
진혁이 마른 침을 삼키며 그녀를 조금 가까이 당겨 춤을 추었다.
“게임 잘하는 여자.. 좋아.”
그녀가 키득거렸다.
“아이같이 승부욕 만땅인 당신은.. 쪼금 귀여워요.”
“머리가 원래 좋았나?”
“어렸을 때부터 좋았던 것 같아요.”
“성적은 중상위 정도던데..”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게 싫어서 그랬어요. 중상위 정도면 무난하거든요.”
“그 게임 2시간 50분 만에 깬 친구가 저 친구 인가?”
진혁의 시선을 따라 가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을 바라보며 호진과 춤을 추고 있는 솔희가 있었다.
“맞아요. 저 친구도 머리 좋거든요.”
“그렇군.”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뭘.. 형이 부탁해서 온 것 뿐이야.”
그녀가 발을 옮겨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만약.. 내일 내가 사라진 후에 그 사람이 힘들어 해도.. 당신이 나에게 뭐라고 했다고는 말하지 말아요.”
“왜?”
“당신이 말하기 전엔 몰랐었어요. 그게 그 사람에게 얼마나 위험한 지.. 고맙게 생각해요.”
“농담해? 난 당신을 형한테서 멀어지라고 한 사람인데 고마워?”
“그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잖아요. 나도.. 당신과 한 마음이에요. 그를 사랑하니까.. 당신처럼.”
그가 그녀를 조금 더 끌어당기자 그녀의 이마가 그의 가슴께에 닿았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제발.. 이러지 말라고..”
“조.. 조금만요..”
그녀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아 진짜.. 닭살스런 말 못하는 것보다 더 끔직한 게 바로 우는 여자랑 같이 있는 거야.”
“흑..”
“후우.. 이러지 마.. 이런다고 내가 가지 말라고 할 것 같아?”
“흐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에 달고 있는 붉은 색 손수건을 빼서 그녀에게 내밀
었다. 손수건을 받아 든 그녀가 가면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어때요? 화장.. 번졌어요?”
진혁이 고개를 내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작고 마른 그녀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
고, 오늘 가발까지 쓰고 여성스런 웨딩드레스까지 입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정말 순진한 공
주같아 보였다. 진혁이 마른 침을 삼켰다.
“괘.. 괜찮은데?”
“그래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코를 훌쩍였다.
“다시 들어 봐.”
“왜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콧잔등과 입술이 더욱 붉은 색을 띄는 듯 했다.
“다시 숙여.”
그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뭐에요~.”
“뭐긴 뭐야.. 놀리는 거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여자들이 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야?”
혜영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자 여자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세요..”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독특한 당신 의상이 한 몫하는 것 같은데요?”
“그래?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죠. 그만 들어가요. 다들 몰려들기 전에.”
“그러지.”
그의 팔을 잡고 그들이 현관으로 향했다.
“여길 정리하고 가야해요. 먼저 가세요.”
“기..다릴까..?”
“언제 끝날지 몰라요.”
“알았어. 혹시.. 도혁이.. 형이랑, 영감이랑, 형수한테.. 전할 말 있어?”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야 하잖아요. 그냥.. 당신도 모르는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인데.. 절대로 싫어서 그런 건..”
“알아요.”
“미안.”
“건강하게 잘 지내요. 그 사람..도..”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혜영은 심호흡을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다.
“누구야?”
“아는 사람.”
“누구?”
“있어. 나는 알고, 너는 모르는 사람. 회사 사람이 아니거든.”
“그래? 진짜 독특하다. 가면 벗으면 잘생겼어?”
“음~. 글세.. 양아치같아. 들어가자.”
“응.”
혜영은 솔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카운트다운을 하겠습니다. 홀 중앙으로 모여주세요.”
다들 시끌벅적하게 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수고했어.”
“정말 근사했어.”
다들 그녀에게 칭찬의 말을 하고 파트너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칭찬은 받고 가네..”
그녀는 뒤쪽에 벽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너는 매해 벽에 붙어 있더니 올해도 그러니?”
혜영이 피식 웃었다.
“오늘은 누가 이긴 거지?”
다진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네가 윈(Win)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아는 사람.”
“그래? 다정한 분위기던데?”
“좋은 사람이야. 귀엽고, 착하고..”
“사귀는 사이야?”
혜영이 고개를 저었다.
“다진아.”
“왜?”
“더 예뻐져라.”
“무슨 소리야. 난 늘 예쁘고, 또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가지.”
유빈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투표결과는 볼 것도 없이 내기에서는 내가 이겼으니까 휴일 지나고 회사에서 봐. 내가 무슨 소원을 말할지.”
“기대할게.”
다진이 새초롬하게 미소 짓고는 유빈과 함께 홀 중앙으로 걸어갔다.
“얼굴처럼 마음도.. 예뻐지길 바래.”
솔희가 다가왔다.
“같이 가자.”
“피곤해서.. 여기에 기대고 있을 게. 갔다 와.”
“그럼 금방 다녀올게.”
솔희와 호진이 종종 뛰어갔다.
“너도.. 호진씨랑 행복하게 지내고, 건강하게.. 지내. 다시 만나러 올게.”
그녀가 아무도 없는 현관쪽을 바라보았다.
“진혁씨.. 고마워요. 그 사람.. 이름 알려줘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방울되어 떨어졌다.
“자.. 앞으로 3분 후에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겠습니다. 앞에 전광판 시계를 봐 주세요.”
혜영이 눈을 감았다.
진혁이 달려와 그녀 앞에 섰다. 혜영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왔어요?”
“가지 마.”
“네?”
“가지.. 말라고..”
“이제 와서 왜 이래요..”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까.”
“짐도 벌써 옮겼어요. 집도 벌써 다른 사람이랑 계약이 끝나서 돈까지 받았다고요.”
“그거야 다시 구하면 되고.”
“내 눈물에 마음 약해진 거예요?”
진혁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약해질 필요 없어요. 그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난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도.. 후회하지 말아요.”
진혁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 혜영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첫댓글 잘보고가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