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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운동(1894.4)은 평등사회의 구현을 이상(理想)으로 삼았으나
외세를 배격하는 민족 종교적인 성격으로 인해 크리스토교와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또 본래 의도와 달리 청일전쟁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수난을 낳고 말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피해를 많이 본 서북지역이 특히 눈부셨다.
전쟁의 두려움과 상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소래의 매켄지, 평양의 홀 등 선교사들이 보여준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삶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끄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이 지역 선교사들은 그 어느 곳보다도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는 이들이었으며
곁에는 동족을 향한 애끓는 마음으로 그 길을 함께 한 한국인 조력자들이 있었다.
사랑과 희생의 정신으로― 매켄지
매켄지는 캐나다 출신의 독립선교사였다.
그는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2년 동안 북극 래브라도의 작은 섬들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만큼 열정적인 전도자였다.
선배 선교사들의 전기를 읽고 한국선교의 뜻을 품은 뒤에는 의학을 공부하고
기금을 모으는 등 오랫동안 준비에 힘썼다.
그러나 캐나다(장로)교회는 선교 여건이 되지 않았으므로 매켄지는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홀로 한국선교의 길에 올랐다(27세).
이때 그가 배 안에서 쓴 일기 일부를 옮긴다.
혹한의 겨울, 제물포에 도착한 매켄지는 다시 서울까지 7시간을 걸었다(1893.12).
미끄러운 길을 걷느라 기진했고 팔다리가 얼어 녹초가 되었으나
서울 주재 선교사들의 환대는 그날의 고생을 보상해 주고도 남았다.
이듬해 2월, 매켄지는 황해도 장연군의 소래교회로 부임했다.
소래교회의 중심은 ‘온유의 사람’ 서경조였는데,
그는 마침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남부지방 전도여행을 떠났다가 알 수 없이
‘집으로 오고만 싶은 마음’에 모두의 간절한 만류를 뿌리치고 돌아와 있던 참이었다.
매켄지는 서경조에게 한글을 배우면서 한국인의 생활양식에 따라 살기 시작했다.
초가집 흙바닥에 멍석을 깔고 앉아 끼니마다 한국 음식을 먹었다.
동네 아이들과 축구하고 청년들과 씨름도 하면서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두 사람은 뜻이 맞았다.
매켄지는 아침마다 시간 반씩 성경을 정독하는 말씀의 사람이었고 교회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봄이 되자 동학운동이 일었다.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살인적 행위와 보복 행위가 자행’되었다.
‘송천(소래)에 양인과 서경조를 죽인다는 소리가 하루도 끊이지 아니하며 그 위험함을 견딜 수 없는’ 가운데
수십명이 서경조의 사랑채에 모여 예배드렸다.
실제로 두번이나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매켄지는 서경조와 죽음을 각오했고 ‘죽기로 각오한후에는 두려움 없이 담대히 전도’하기 시작했다.
찾아오는 동학군들에게 크리스토의 온유와 관용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진영(陣營)을 방문하여 부상자들을 치료해주었다.
매켄지의 삶은 희생과 봉사와 헌신 그 자체여서 일반인은 물론 동학도들까지 변화시켰다.
그해 12월. 매켄지는 높은 깃대를 세우고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를 그린 깃발을 게양했다.
교회가 거룩한장소임을 알리려는 조치로, 매켄지는 이때의 상황을 편지에 적어 마펫에게 보냈다.
또 다른 편지에는,
‘세 명의 동학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집에서 크리스토교 교리를 공부하고, 교회에 헌금도 했고,
이미 학교가 시작되었으며, 새로 부임한 지방 관리와 동학 지도자와 면담도 확보해 놓았다’ 고 했다.
소래 지역은 인근에서는 드물게 보호되었다.
서경조의 말을 빌리자면, ‘십자가 깃발이 나붙고 두 난리를 다 피한 송천은 극락세계가 되었다.
핍박자인 동학도와 박해받는 민중, 가진 자와 없는 자가 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학에 유명한 자들이 송천을 피난처로 알고 많이 모여드니
매 주일 팔십여 명이 예배’ 드렸는데 ‘사랑이 좁아서 예배하기가 심히 곤란’했다.
새로운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1895.3).
교회 건축은 교인, 주민, 심지어 동학도들의 헌신적인 지원 속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를테면 교회 터는 회심한 무당이 헌납했다.
그곳은 원래 마을 제사를 지내던 사당 자리였다.
누구는 산의 나무를 기부했고 누구는 그 나무를 잘라 운반해 왔다
. 누구는 양식을 냈고 누구는 돈을 냈다. 한국 최초의 자립교회였다.
그해 5월, 매켄지는 ‘전도차 장연읍과 각처를 순행하고’ 돌아온 뒤 말라리아에 걸렸다.
격무와 과로, 영양결핍으로 쇠약해져 있던 그는
고열과 구토, 극심한 두통에 두 발짝도 걷지 못했다.
결국 교회가 완공되고 두 주일이 채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1895.6.23).
1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의 사역이었으나 그의 노고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앉을 곳이 없을 만큼 신자가 늘어’ 일 년 뒤에 교회를 증축했다.
소래의 60여 가구 중 두 집을 제외하고 모두 예수를 믿었다.
크리스토를 모르는 마을에 전도대를 보내 7개 읍에 교회 수십처를 세웠다.
언더우드는 소래교회에 관한 전도보고서에
‘실제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사역은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하다’고 썼다.
매켄지가 편지에 언급한 ‘학교’는
국내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인 김세학당(해서제일학교 전신)으로,
초급이지만 천문학 과목까지 있었다.
성경만큼은 서경조가 ‘철저히’ 가르쳤고 교인들은 수시로 땅을 기부하여
학교운영기금을 마련했다.
한편, 매켄지의 영향으로 캐나다(장로)교회는 한국선교를 공식결정했다.
이후 2백 명 가까운 선교사가 한국을 찾았는데,
그중에는 매켄지의 약혼녀로 원산에 여자신학교를 설립한 루이스 맥컬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의 소돔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마펫과 한석진
토마스 목사의 순교 이래
‘한국의 소돔’ ‘한국의 사악한 도성’이라 불린 평양은
여전히 반크리스토교적인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
주민들이 외국인을 의심하고 크리스토교 문서들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극소수의 신자들이 기회 닿는 대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으며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의 발길 역시 끊이지 않고 있었다.
26세의 마펫은 입국(1890.1.25) 이후
4년 새 여덟 차례 방문할 만큼 평양 선교에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 여행때 마펫이 평양에서 체류한
객주(여관)는 토마스 선교사와 관련이 있는 장소였다.
토마스가 대동강 변에서 순교할 때
성경을 챙겨 간 이들 중에 최치량이 있었다.
12세 소년이었던 그는 성경 소지죄로 문책당할 것이 두려워
영문(營門)주사 박영식에게 자진 신고했고
박영식은 성경을 낱장으로 풀어 자기 집 벽지로 썼다.
최치량은 나중에 이 집을 사들여 객주로 만들었는데,
마펫이 찾아와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예배도 드렸던 것이었다.
말씀으로 도배했던 집은 그렇게 해서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의 전신이 되었다.
선교사역은 조사(助士) 한석진이 파송되어 오면서 활기를 띠었다.
몇 달 전 매매한 집이 거래가 취소되는 등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펫은 대동문 근처의 한옥 한 채를 어렵사리 구매했다(1893.5).
명의는 한석진이었고 실제 거주자도 한석진이었다. 마펫은 계속 객줏집에서 묵었다.
두 사람은 ‘교외로 많이 걸어 다녔고,
큰 마을로 나갔고 큰 나무 밑에서, 복음서적을 돌리며 전도했다’.
구도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마펫을 집으로 초대하고 매일 여관으로 찾아와 복음에 관해 물었다.
그러나 관원들이 두려워 입교를 꺼리는 상황이었다.
주일에는 약 20명이 한석진의 집에 ‘조용히’ 모여 마펫의 설교를 들었다.
마펫이 없는 동안에는 한석진이 교인들을 지도했다.
‘한 씨와 같은 좋은 조사를 발견해서 진실로 감사하다는 마펫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한석진은 평양 사역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해 10월에 22명을 대상으로 학습반을 조직했다.
그중에는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전해 받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일 예배 참석자 수가 증가했다.
이들은 경멸과 조롱의 대상, 주의할 인물이 되었다.
제사를 포기했으므로 불효자라 낙인찍혔다.
예전의 천주교인들처럼 참수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러나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당히 잘 견뎠다.
마펫은 세례문답을 철저하게 실시하여 통과한 여덟명에게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베풀었다(1894.1.7).
다음은 그가 선교회에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이다.
최치량도 그날 세례와 성찬을 받았다.
예수 믿기 이전의 그는 대단한 술고래이며 노름꾼이었지만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크리스토인이 되자 온갖 놀림과 조롱과 욕설이 그에게 쏟아졌다.
이전 친구들이 유혹했고 의리가 없다고 윽박질렀다.
그는 여러 번 실족했으나 잘 이겨내고 확고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개종을 통해 복음의 소식이 널리 퍼졌다.
평양의 성자, 닥터 홀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 평양의 문이 아직 열리지 않은 19892년의 여름.
상동 시병원의 의료선교사 홀(30세)이 평양 사역에 합류했다.
작은 조랑말에 의약품과 책자들을 싣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3백Km를 오가며 환자들을 돌보던 그는
결혼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역시 의료 선교사인 아내 로제타를 서울에 둔 채
단신으로 내려온 터였다.
그가 시내에 셋방 하나를 얻어 진료를 시작하면서 선교사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매일 수십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헌신적인 의료 사역은
강퍅한 민중과 지방 행정관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팔매를 던지는 이도 있었으나 적지 않은 이들이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보수적 유학자인 평양감사 민병석도 감동을 받아,
서양인을 쫓아내 달라고 청원하는 자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그 외국인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신사다.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
서울에서도 여기에서처럼 병을 고쳐주고 있다.
누구든지 그를 방해하거나 말썽을 일으키면 관청으로 잡혀 올 것이다.”
사실 ‘닥터 홀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설교’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구세주를 더 잘 알게’ 되고
‘어떤 목적으로 그에게 왔든 떠날 때는 참으로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간직하고 돌아갔다.
의료 사역과 함께 이처럼 성자다운 그의 성품이 ‘크리스토의 향기’가 되어
평양 사람들의 심령을 옥토로 만들었던 것이다.
홀은 조사(助士) 김창식을 통해 주택 두 채를 사들여, 예배와 함께 교육 사역을 시작했다(1893.3). 13명의 학생을 받아 소학교를 열었고 아침저녁에는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김창식은 물론 어학선생 항정모, 영어교사 노병선 등 신실한 평신도 동역자들이
홀 옆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홀은 감사와 감격에 겨워 서울의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곳에도 아침을 밝혀 줄 새벽이 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듬해인 1894년 4월. 동학운동이 발생했다.
5월 7일. 홀의 아내 로제타가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주했다.
그녀가 5개월 된 아기 셔우드를 안고 도착했을 때 1천5백 명의 평양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서양 여인과 아기가 정말 귀신같이 생겼는지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평양 기독인 박해사건’이 터졌다.
잇따르는 시련 속에서
5월 9일 수요일 늦은 밤.
마펫의 조사 한석진과 최치량 등 널다리골 교회의 세례교인들은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새벽 1시가 되자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닥쳐 이들을 때리고 오라에 묶어 관아로 끌고 갔다.
홀의 조사 김창식 등도 같은 곤경에 처했다.
이들은 곤장을 맞고 배교를 강요당했다.
옥에 갇혀 사형의 위협까지 받았다.
마펫의 분석에 따라 사건의 진상을 간략히 밝히자면,
아전 김호영은 자신의 집을 김창식에게 비싼 값에 팔려다 실패한 일로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홀의 가족이 도착하자,
예방(禮房) 신덕균에게 선교사를 쫓아내고 돈을 뜯어낼 계책을 밝혔다.
그리고 이에 동조한 신덕균이 평양감사 민병석을 찾아가
“양인들이 이교를 수입하여 양민들을 협잡배로 만드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말로
승인을 받아낸 것이었다.
마펫이 서울에 가고 없어 홀 혼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홀의 전보를 받은 마펫과 스크랜턴, 언더우드는 영국과 미국 공사관으로 달려갔다.
영미 공사관의 항의를 이기지 못한
조선의 외교부(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가 평양감사에게 석방을 지시했으나 이행되지 않았다.
마펫과 매켄지가 평양으로 달려왔다.
‘조선 선교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선교사들이 서울에 모여 기도했다.’
마침내 교인들이 풀려나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폭도들이 돌팔매를 던졌다.
김창식은 이때 중상을 입고 석 달 치료를 받은 후에 소생되었다.
동학혁명이 확산되고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잇달아 들려오고 있었다.
6월 1일.
스크랜턴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홀의 가족이 평양에서 철수했다.
마펫은 남아 교인들을 돌보았다.
그러자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 마펫을 서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했다. 청, 일 양국이 군대를 파송했다.
7월 23일. 서울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홀 등은 밀려드는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9월 15일에는 평양이 전쟁터로 변했다.
10월 1일, 그 소식을 들은 홀과 마펫이 평양으로 돌아왔다.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홀은 밤낮없이 환자들과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그뿐 아니라 교인들을 보살피고 남학교 재건에 힘쓰고, 저녁마다 예배를 인도했다.
안타깝게도 홀은 과로와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이송했으나 11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들 셔우드 홀은 그때 갓 돌을 지난 나이였다.
평양 주민들은 식량과 필수품들을 보급해 주는 등,
박해와 전쟁 속에서도 변함없는 우정과 사랑을 보여준 선교사들에 감동되었다.
가난할 대로 가난해진 이들의 심령 속에 복음이 확산되었다.
선교사역은 매우 분주해졌다.
순회전도 여행이 이루어졌고, 크리스토교 문서들이 보급되었으며,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되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 복음에 대한 열정, 희생적인 봉사 정신을 갖춘 탁월한
선교사들이 평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홀이 없는 평양에서 김창식은 1년여 동안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다.
후임 선교사가 부임한 뒤에도 그의 ‘희생과 헌신’적인 사역은 계속되었다.
1896년에 신자 수 51명이었던 평양(감리)교회는
8개월 만에 263 명, 다음 해에는 525명으로 불어났다.
새 교회당을 건축했으나 곧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완전한 크리스토인’만 따져도 7,8백 명이었다.
신자 수 12명이었던 널다리골교회는 주일학교를 다섯 번 운영할 만큼 성장했다(1897).
이 시기에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 1권을 습득한 20세의 여인 이신행은 평양 최초의 여성 크리스토교 신자가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를 직접 참수한 것으로 알려진 군관 박춘권은
스스로 교회를 찾아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장대현에 새 예배당과 함께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다(1901).
준공식은 1천 4백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마펫은 1934년 귀국할 때까지, 평양을 중심으로
3백 리 안에 신자 한 사람도 없던 곳에 1천여 교회를 세워 10만여 교인을 얻었다.
3백여 소학교와 많은 크리스토학교를 세웠다.
마펫의 든든한 동역자가 된 최치량도 사재(私財)를 들여 경신학교를 세우고
마을 두 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홀의 조사였던 김창식은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미감리교회 선교회 발간)으며(1901) 48개의 교회를 세우는 등
한국교회의 존경받는 목사가 되었다.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한편 백두대간 동쪽의 항구도시 원산에서는 두 명의 여 선교사가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중국 의화단 사건이 계기가 된 이 작은 기도회는 이제 민족 대부흥 운동의 불씨 역할을 할 것이었다. 그 무렵 들려온 웨일즈와 인도를 휩쓴 교회 부흥의 소식은 한국교회를 더욱 각성시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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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존 멕켄지 선교사(1861~1895)는 캐나다 장로교의 밀알이 된 선교사이다.
독립 선교사로 내한하여 황해도 소래에서 한국인과 똑같이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일사병에 걸려 내한한 지 1년 6개월 만에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로 인해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는 100여 명의 선교사를 한국을 파송하고
그의 정신을 계승했다.그는 캐나다 동부 노바 스코티아 주의 케이프 브레튼 섬에서 태어났다.
달하우지 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캐나다 북쪽 벨섬(인디언 지역)에 가서 1년 반 동안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 후 1891년 할리팍스의 파인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조선 선교사의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아 조선 선교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에서는 재정 문제로 정식 선교사 파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 선교사로서 1893년 12월 32세의 나이로 조선에 왔다.
그의 모교회인 찰머스 교회 및 브라가 선교회(약혼녀 맥컬리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선교회)가 모금한 후원금을 가지고 조선에 온 것이다.
찰머스 교회에서는 맥켄지 순교 이후 휴 밀러 등 많은 조선 선교사를 파견한다.
그는 조선에 도착해서 한글을 배우고 기존 선교사와 교제하면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4년 2월부터 황해도 소래에 거주하면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소래교회는 1886년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가 세운 한국인 최초 교회이다.
멕켄지는 외국인 거주 지역에서 거주하며 선교하는 일반적인 선교 방식에서 벗어나,
조선인처럼 살면서 조선 문화와 동화하는 전도 방법을 택한다.
초가집에 거주하고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매일 인근 농촌을 다니며 전도했고,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1895년 2월 그의 집에서 김세학당(남녀공학의 최초)을 세워 성경 말씀 및 언문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그의 순교 기부금으로 해서 제일학교로 발전하였다.
1895년 6월에는 8칸의 기와집으로 예배당을 증축하여
더 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동학군에게 사랑을 베풀어 복음을 전하였다.
처음에 맥켄지를 적대시하던 동학군들도
생명이 위급한 동학군을 치료하고 돕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지역 전도활동을 강행하여 일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근처 장연읍 지역을 전도하였는데 열 시간 이상 태양빛 아래 걸어서 다닌 이유였다.
당시 그는 예배당 부속실에 홀로 거주하였는데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5일간 고열에 시달리다 정신착란 현상이 발생하여 스스로 권총으로 자신을 쏜 것이다.
1895년 7월 그는 하나님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6월 23일 그의 일기장에 기록한 마지막 글이 심금을 울린다.
<나의 마음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다,
예수는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고통이 심해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이 아니길 바란다.
내가 조선인과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 때문이다.
내가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예수님 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어머니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픕니다. 어머니>
그의 희생적인 삶을 본 소래지역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소래에 묻혔으며, 그의 약혼녀 맥컬리 양이 세운 비석에는 <주의 말씀에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가 많다 함이 옳도다, 소래교회는 조선의 처음 열매요 목사의 몸은 여기 자도다>로 기록되어 있다.
멕켄지의 죽음을 듣고 언더우드와 웰즈 선교사가 소래로 와서
장례를 치르고 그곳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때 세례 받은 사람 중에는 제1회 세브란스 의대 졸업자
김필순과 여동생 김필례(한국 교회 여성 지도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멕켄지가 죽은 후 서경조 목사를 포함한 주민 일동은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선교사를 요청하게 된다.
그 결과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는 조선 선교를 결정하게 되고,
1898년 5명의 선교사(그리어슨 부부, 푸트 부부, 멕레)의 파견을 시작으로
100여 명의 선교사가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약혼녀 루이스 맥컬리는 조선으로 오다가 맥켄지의 비보를 접하게 된다.
그녀는 소래에 와서 멕켄지의 비석을 세우고 유산을 정리하여 3천 불을 소래교회에 헌금하였다. 그녀도 1900년 조선 선교사로 와서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원산과 함흥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한국 최초 여자 신학교인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교를 설립하고,
여 전도회를 창설하는 등 여성 선교 및 교육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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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가장 어두웠던 시기, 절망 속에서 복음이 들어왔다.
청일전쟁 직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후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며 식민지로 전락해간다.
민족의 주권이 흔들리는 그 시기에 복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을 깨우는 각성이었고, 진리를 붙드는 자들의 믿음이었다.
일본은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선교사들은 이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많은 크리스토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안중근, 유관순, 서재필과 같은 인물들이 모두 신앙을 지녔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민족의 자유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세워지길 원했던 이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고난 중에 기뻐하라고 한 것처럼,
우리 민족도 고난 가운데 소망을 품었다.
로마서 5장 3절에서 5절은 말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
우리 민족의 독립은 단순히 외교적 성과가 아니라,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 없이는 이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난다.
경기 광주 출신의 양반 구연영은 의병 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간다.
그는 2년간 공부하고 세례를 받아 전도사가 되었으며, 20여 개의 교회를 관리했다.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높임말을 썼으며, 머리를 자르고 삶의 방식을 바꾸었다.
그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외면받았지만
그는 일진회의 부패를 규탄하는 대회를 열고 민중을 각성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결국 일제에 체포되어 아들과 함께 순국하게 된다.
한국 교회사 최초의 성직자 순국자다.
1911년에는 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105명을 기소한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는데,
그것은 상동교회의 헐버트 선교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그 일로 인해 조선에서 추방당했다.
이처럼 선교사들과 크리스토교인은 단순한 외부인이 아니라, 민족의 고통에 함께한 동역자였다.
하나님은 가장 어두운 시기에 영적 부흥을 일으켰다.
1903년 원산 대부흥, 1907년 평양 대부흥이 그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빛은 꺼지지 않았다.
이 영적 각성은 단순한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나라를 살리는 힘이었다.
1900년대 초 강화도에도 복음이 들어갔다. 정미의병운동은 강화 수비대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이동휘는 “나라를 구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며 마을마다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강화도의 바울’이라 불린 그는 복음을 통해 민족을 일으키고자 했다.
김동수 권사는 '강화의 아브라함'이라 불렸고,
그는 더리미 해변에서 사촌동생 두 명과 함께 순교를 당했다.
그 이후 강화도에는 5,000명 이상의 교인이 생겨났고,
미국 교계에선 “이 부흥은 피의 세례의 결과”라고 발표되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은 선교사들의 피 덕분이다.”
이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믿음이 이 땅에 뿌리내린 방식이었다.
환난 가운데서 소망을 본다는 것이 믿음이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면서도 노래하였다.
“우리를 돌이키시면 옛적같이 회복되리이다.”
지금 우리가 어려움에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시기를 구할 때다.
우리를 돌이키시면 회복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둠 가운데서도 길을 내시며,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심으시는 분이다.
조선이 가장 고통스럽던 시절, 절망이 짙게 드리운 땅 위에 기도가 피어났다.
1906년, 이화학당의 페인 교장은 미국 본부에 편지를 보낸다.
“학생들에게 기도의 목적을 물었더니, 하나같이 ‘나라를 위해서’라고 답했습니다.”
매일 정오, 어린 여학생들이 한결같이 기도하는 모습을 본 부모들은 충격을 받았고,
신앙이 가정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상동교회를 중심으로도 구국기도회가 일어났다.
민영환의 순절 이후,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기도회가 이어졌고, 매일신보에는 기도문이 실렸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처럼 엎드려, “이 민족이 다시 독립국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 아래 있게 하소서”라는 간절한 기도가 울려 퍼졌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젊은이들의 절규는 ‘도끼 상소 사건’으로 터져 나온다.
상동교회 청년들이 도끼를 들고 고종에게 상소하기 위해 나섰고,
그 사건 이후 스크랜턴 부인은 청년회를 해체한다.
목적만큼이나 수단도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녀는 ‘비겁한 비폭력’이 아니라 ‘용기 있는 비폭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간디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지만 네 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믿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복음의 정신을 따라 비폭력 행진을 이어갔다.
그런 비폭력은 연약함이 아니라 힘이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이유는, 인내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모루 위에 놓인 쇳덩이를 생각해보라.
두들겨질 때마다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반드시 써야 할 귀한 도구이기 때문에 수고를 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의 긴 밤 속에서도 끝까지 소망을 붙들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비바람을 맞아본 자만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
십자가는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다. 지름길은 없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말했다.
“십자가를 질질 끌지 말고, 꽉 껴안고 가라. 그러면 십자가가 오히려 너를 안고 갈 것이다.”
이승훈 선생은 옥중에서 “감옥이란 이상한 곳”이라며,
신약성경을 백 번 읽고 더 많이 기도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감옥에서의 시간을 헛되이 여기지 않았다.
고난을 피하는 것은 비겁이다.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자만이 고난을 넘어설 수 있다.
믿음의 조상들은 고난을 삶에서 도려내지 않았다. 오히려 마주했고, 견뎌냈다.
목사님의 아들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며 “고생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신앙은 편안한 길을 구하지 않는다. 고난을 피할 것이냐, 통과할 것이냐.
초대 선교사 존 맥켄지, 캐나다에서 자비량으로 파송된 그는
황해도에서 1년 6개월간 복음을 전하다 일사병으로 순교하였다.
그는 조선인처럼 먹고 자며, 같은 옷을 입었다. 죽기 전,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평안합니다.”
그의 약혼자는 직접 시신을 수습하고 묘비에 이렇게 새겼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었더니, 많은 열매를 맺었도다.”
이후 1895년 단 다섯 명이었던 캐나다 선교사는 1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그의 약혼자는 전 재산을 소래교회에 헌금하며 평생 이 땅을 위해 헌신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기까지, 수많은 기도와 눈물과 피가 흘러야 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와 이 땅의 성도들에게 소망을 맡기셨다.
지금도 그 소망은, 고난을 이겨낸 자들의 손 위에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