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이희탁, 강삭철도(인크라인) 옛터
강삭철도(鋼索鐵道, Cable-Railway)
1. 통리 고개
태백산맥 굽이마다
흐르는 바람결도
심포리서 통리고개
통리에서 심포리길
도도한
태백준령을
다시 한 번 만났다
삼척, 도계, 심포리를
거쳐 온 숨찬 기차
급경사 통리고개
더 이상은 가지 못해
아득한
산기슭에선
주저앉고 싶어했다
「통리 고개 - 영동선의 긴 봄날 51」전문

‘영동선의 긴 봄날 51~60’은 강삭철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포리․통리 구간에는 국내 유일의 강삭철도(鋼索鐵道, Cable-Railway)였던 로프형철도가 있었다. 스위치백 철로보다도 더 경사가 많이 진 경우에 만든 것이다. 강삭철도(鋼索鐵道;Cable Railway)는 레일 위에 설치된 차량을 밧줄을 통해 견인하여 운행하는 철도를 의미한다. 즉 물체가 매우 큰 경우 차량을 운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로프에 차량을 팽팽하게 연결하고 권양기를 이용하여 화차를 쇠줄로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종종 인클라인 철도(Incline Railway) 또는 케이블카(Cable Car)로 불리기도 한다. 이 케이블 철도를 인크라인(Incline)이라 불렀는데, 당시 사람들은 '강색선' 또는 '마끼'라고 불렀다. 이런 시설은 1877년 스위스에서 처음 건설돼 등산이나 관광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심포리와 통리 1.1Km 구간은 1940년에 강삭철도가 설치되어 1963년 5월 20일까지 운행되었다.
강삭철도는 두레박식과 순환식이 있는데, 통리~심포리 구간에는 두레박식이 이용됐다. 통리와 심포리에 소규모의 조차장이 조성되어, 도착한 화물 열차를 한 량씩 분할하여, 전용의 강삭차에 한 량씩 연결하여 올려보내거나 내려보내고, 이를 다시 조성하여 운행하였다고 한다. 인크라인은 450마력과 750마력의 전동기 2대로서 강삭차(鋼索車) 를 이용하여 화차 1량씩 수송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복선에 15도 45분의 구배선(265/1000)에다 강삭을 감아 오르내리는 것이며 최대로 감아 올리는 중량이 56톤인데 이중 강삭차가 11톤 공차자중 12톤 와이어로프 중량12톤으로 그것을 제외하면 최대화물 적재중량은 21톤이 된다. 최대 감아내리는 중량은 83톤인데 자중을 제외하면 화물은 40톤이 된다. 이로 인해 하루에 취급하는 화물 처리량은 최대 745톤으로 수송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고 한다. 강삭속도는 최대 250M/min, 평균 240M/min이었고, 운전시간은 780초(기동시간 60초, 전속시간 480초, 감속시간 60초, 정지시간 180초), 운전구간은 약 1,080m였고, 최극구배는 265/1000(15도 45분)이었다고 한다. (철도동호회 자료에 의한 것임)
1963년 5월 20일 10시에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통리역(해발700m)에서 주로 터널로 이루어진 8.5Km의 황지본선(심포리~통리)이 개통되면서 강삭철도는 사라졌다. 당시 황지본선 공사비는 378,310,000원, 화약은 81톤, 레일 725톤, 시멘트251,000포, 공사기간은 1961년 8월 8일부터 1963년 5월 15일까지라고 한다.
국내 유일 로프형인/ 강삭철도 설치되어//
두레박식 쇠줄로써/ 끌어 올린 화물열차//
수직의/ 가파른 길을/ 사람들은 걸어갔다//
지정석도 없었기에/ 사람들은 서둘렀다//
뜀박질로 가야지만/ 좌석이 확보되던//
거기도/ 자리쟁탈전/ 늘 생존은 치열했다//
「강삭철도 - 영동선의 긴 봄날 52」전문
화물열차는 인크라인에 의해 한 번에 한 차량씩 끌어올렸지만 여객열차는 무거워 끌어올릴 수 없었다. 때문에 영주 쪽에서 오는 영동선 여객열차는 통리역이 종착역이었고, 북평(현재는 동해) 쪽에서 오는 여객열차는 심포리역이 종착역이 되었다. 승객들은 통리역이나 심포리역에 내려서 다음역인 심포리역이나 통리역까지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 오르고 걸어 내려서 대기하고 있던 열차를 타야했다. 지정석이 없었기 때문에 여객열차가 정차하자마자 내려 다음 역을 향해 가파른 언덕길을 내달려야만 했다. 이들을 위해 짐꾼들인 지게꾼이 등장하게 되었고, 한창때 150 여명의 짐꾼이 승객들과 함께 고개 오르내리기를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짐꾼들은 짐삯 받고/ 무거운 짐을 지고//
때로는 어린애도,/ 허약한 노인들도//
지게에/ 얹어져 가는/ 진풍경도 있었다//
통리서 짐 받아 싣고/ 심포리로 내렸다가//
다시 또 짐 받아서/ 통리 고개 올라가는//
하루의/ 두 번 왕래길/ 뻐근했던 삶이었다//
「강삭철도 짐꾼들 - 영동선의 긴 봄날 53」전문

출처: 이희탁(삼척문화위원) 인크라인 옛터
겨울철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고, 걸어내려 오려면 눈이라도 오는 날은 아주 미끄러웠다. 그럴 경우에는 신발 밑창에 네 개의 징을 박아 만든 지금의 아이젠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신발인, 싸카를 역전에서 대여해 주곤 하였다. 그리고 그 손님들과 함께 올라가서 그것을 회수하여 가지고 다시 그 역전에서 기차를 기다렸다가 손님에게 대여해 주고 함께 내려와서 회수하는 방법을 썼다. 이것도 빌릴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신발에 새끼줄 등을 감아 덜 미끄럽게 하여 언덕길을 오르거나 내렸다.
철판을 구해다가/ 신발 크기로 자르고//
뾰족한 징 네 개 박고/ 좌우에는 끈을 달아//
신발의/ 밑창에 대어/ 좌우끈을 묶었다//
「싸카 - 영동선의 긴 봄날 56」첫째 수
기차를 바꿔 타며/ 기다리는 한, 두 시간//
야바위에 빠진 사람/ 색시에게 홀린 사람//
몇 차례/ 탑승 방송에도/ 아랑곳이 없었다//
「강삭철도 주변 - 영동선의 긴 봄날 55」둘째 수
통리역전은 늘 시끌벅적했는데 직접 농사지은 것들과 삼척, 묵호에서 올라온 생선을 팔기 위한 임시장이 서곤 했고, 소매치기들도 있었는데 대바우촌이란 사창가의 폭력조직이었던 흰장갑과 빨간마후라 등이 유명했으며 이들이 마을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고 한다. 또 기차가 정차했다가 출발하기까지는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그 동안 사람들은 통리에서 심포리로, 심포리에서 통리로 옮겨서 기차를 타고 시간이 남으면 술도 한 잔씩 하다가 계속 마시든가, 아니면 노름의 일종인 야바위에 빠져 그것을 계속 하느라 기차시간을 놓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올라가는 통리선과/ 내려오는 심포선이//
햇빛과 바람 속을/ 통과하고 있을 때//
양편엔/ 식당과 술집/ 한 시대를 풍미했다//
몇 개의 긴 터널로/ 사라져간 강삭철도//
그 한 때 화려하던/ 까마득한 언덕길엔//
추억만/ 잡풀로 자라/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풍경 - 영동선의 긴 봄날 60」전문
1963년 강삭철도(인크라인)가 사라지면서 주변의 여러 풍경도 함께 사라졌다. 식당과 술집도 없어지고, 짐꾼들도 사라지고, 싸카를 빌려주던 풍경도 사라졌다. 지금은 강삭철도가 운행되던 공간만 남아 잡풀들이 자라고 있어, 역사의 현장을 희미하게 알려줄 뿐이다.
첫댓글 오타가 있는 듯 싶습니다. 같은 15도 45분인데 어떤곳은 265퍼밀, 그 아래의 줄엔 282퍼밀이라고 되어있네요.. 265퍼밀이 맞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또한 앞의 건물 중 일부가 아마 구.심포리역의 관사일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 부분을 고쳤습니다.
나중에 사진 더 보완해서 올리겠습니다.
근데 저기는 열차가 다니나요???
아, 저도 헷갈리네요. 다니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 길하고 조금 다른 것 같아서...언제적 사진인지 정확하게 알아보지 않았어요. 아시는 분 있으면 답을... 아니면 제가 고향분들에게 알아봐야겠군요.
아, 아직은 기차가 다니는 길이 분명해요. 2012년까지는 기차가 다니겠지요. 2014년에는 스위치백과 강삭철도 구간이 관광지가 된다고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