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일까? 제가 적고서도 의문이 드네요^^
글의 주인공은 자신이 하는 일에 의문과
회의만 갖나봐요. 사실은 일상과 자신이
원하는 이상과의 갈등이 아닐까요.
무심히 잡고 시간때울 수 있는 만화책이지만 이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제법 고생을 한다. 만화
한 컷마다 완성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은, 직접 그려보지 않는 이상 고된 작업이라 쉽게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적당한 아침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지만 나같은 만화가 어시스던트는
불규칙한 일거리에 맞추어 수면 시간이 달라진다. 오늘은 늦은 오전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마
감을 끝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마음이 풀어져 낮잠아닌 낮잠을 자게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이
른 오후에 잠에서 깨어났다.
많은 날들과 비슷하게 화장실 창가에 들어있는 밝은 달을 옆에 두고 세수를 하면서 거울을 살
펴 보았다. 가끔씩 의식을 차리고 거울을 볼 때면 내 얼굴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화장실에 누구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세수하고 있어."
"정선 누나야?"
"알면 이름부르지마라..."
한 달만 있으면 군대로 갈 녀석이 여타 군대를 가는 남자들처럼 긴장하는 내색없이 묵묵히 화
실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는 것 같아 신기했었지만 요즘따라 그림을 그리다 말고 수시로 밖으
로 나가 담배를 피고 온다. 군대가는 것을 앞두고 답답한 것은 여자인 나로선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이미 익숙해져 버린 한 사람을 떠나보낸다니 섭섭한 마음이 든다.
"누나 빨리 나와"
"이봐. 제군. 나오긴 했다만 이렇게 예쁜 누나가 피부 정리를 하는데 그렇게 재촉해야겠어"
"베~~~~~ 누난 아줌마야. 옷도 아무렇게 입고 언제나 멍하니 표정관리도 잘 안 되잖아"
"화장실 거울에 비춘 외모를 보고 반성해야 할 사람은 너야! 어서 들어가서 반성해!"
오늘은 9월 30일 금요일. 매달 말 일을 기해 마감 전쟁이 시작된다. 만화를 만드는 것이, 미리
미리 일하면서 마감을 대비하는 작업이 아니라서 마감이란 것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된다.
개인적인 공모전 만화를 그릴 여유도 없이 언제나 다른 만화 작가 컷컷에 배경을 그려주
는 것도 3년째다. 고등학교 만화 동아리 시절과 개인적인 아마추어 기간 까지 합치면 만화라
는 열정에 투신한 기간이 제법 길다. 이제 내 나이 25살. 내 또래 애들처럼 대학가서 재밌을
것 같은 연애도 몇 번 못하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내 만화만 그렸다. 스스로 정한
선택이라 사람들에게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는 나의 모습.
오늘 마감이 끝난 기념으로 내일 토요일부터 일요일은 휴가다. 금요일 오늘을 같이 지내 줄
친구들은 없나? 웃고 떠들면서 지내는 사이지만 잠시동안 무심하게 지낸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다들 잘 지내고 자기 일에 충실한 듯한 말들을 했다. 그러던 한 친구와의 대화는 꽤나
오래 이어졌다.
"나야 정선이. 오랜만이네 성권! 그동안 잘 지냈어?"
"그래. 연락에 무관심한 건 나였지만 네 전화를 피한 건 아니다. 뭘."
"이번에 관객이 500명이나 들었다고. 그거 기록이네 기록"
"그리고. 또! 엉"
"성권이 너한테 꽃다발까지 준 사람이 있다고. 정말! 너한테. 야 부럽다. 그럴 때가 연기하면
서 가장 즐거울 때가 아닐까. 남들이 인정해 준단 사실말야."
"그런데 네가 주인공이라서 의무적으로 꽃다발을 준 건 아닐까."
"뭐라고. 너의 연기에 반하고 쭉 지켜보았대. 하하하."
"그나저나. 지금 뭐하니? 오랜만에 만날래?"
"아...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술마시고 있다고. 그렇지... 오늘 작품 끝냈으니까."
"어!! 내일은 시간이 있어."
"내일도 극단에서 연습하지?"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게. 오랜만에 사람들 얼굴도 보고 싶다."
"알았어. 내일 보자구. 오랜만에 얘기해서 즐거웠어."
"응. 오랜만이 무슨 얘기냐구... 몰라. 내일 만나기나 하자구. 이 바보야."
오늘은 마감까지 같이 고생한 우리 동료들이랑 밖에 나가야겠다.
"마감도 끝났고 다들 이제 뭐할 건가요~ 다들. 나가자. 남자들도 화실에서 자거나 게임
할 생각말고 오랜만에 나가서 얘기라도 하자!! 마감땜에 대화끊긴지도 오래 되었잖아."
어제 많은 술을 마셨지만 아침 잠에서 깨어나는덴 무리가 없었다. 오랜만
에 보통 사람들같이 오전에 일어났다. 밝은 태양을 등지고 잠에서 일어나니 왠지 어색
하고 새삼스러웠지만 커튼을 열고 아침 햇빛을 가득 맞이 하면서 학교에 가는 아이
들을 쳐다보니 아침의 냄새가 맡아진다. 어제 만화그리는 동료들과
밤늦도록 술을 마셔 몸은 망가졌지만 젊음의 혈기로 피곤을 이겨내는 건 문
제가 없겠지... 오랜만에 내가 사는 집으로 들어와 엄마가 차린 아침 식사를 먹을 준비를
하였다. 전엔 언제나 집안 식구 모두 내가 하는 일의 폐해를 지적했지만 가족들의
의견이 바를수록 나는 고집스럽게 나의 의견을 관철했고 오늘같은 나의 이런 모습이 몇 년 째
지속되니 식구들의 표정도 그려려니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오고 가는 대화는 긍정
적으로 질문하고 답해주었다.
"이젠 '오정선' 이름을 내걸은 만화를 볼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응. 아빠. 조금만 기다리면 내 만화볼 수 있어."
"엄만 네가 그렇게 생활하다 결혼 시기만 놓칠까 걱정이다"
"엄마도~~ 예술가는 오로지 혼자뿐. 난 결혼하지 않고 가족들이랑만 살거야."
"당신도 뭘.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요즘 젊은 사람들 문화에 우리가 낄 자리가 있나!
정선아. 지금 하는 일이 힘들어도 꾸준히! 포기하지 말고! 알았지."
"그럼요 다들 좀 만 기다려요. 음... 2년만 기다리면 나도 누구처럼 큰 작가가 될 거라고"
말이라도 크게 치지 않는다면 내 직업적인 어렵고 피곤한 상황에서 내 의지를 빼았길 것만 같
다. 어릴 때부터 배우고 실천한 것이 만화뿐이라 당장 다른 적성을 살려 살아가기도 솔직히
겁이 난다.
"마감도 끝났고 화실에서 돈도 좀 받았으니 오랜만에 가족들 선물 사줄게.
다들 뭐 가지고 싶어"
"오빤 디지털 카메라가 갖고 싶다."
"이녀석이 여태 아무 말 없다가 이럴 때만 말을 꺼내네. 넌 밥 먹여주는 것도
큰 선물이라고 생각해."
속은 알 수 없지만 겉은 여유로운 오빤 엉뚱한 면이 많다.
"디지털 카메라는 농담이고 얼마동안 일해서 번 돈으로 네가 쓸 만화 재료사서
멋있는 판타지 만화 하나 그려줘."
"이녀석이! 집구석 백수 주제에. 한 달 내로 취직하지 못하면 알아서 해!"
"당신도 그만하고 너희들도 빨리 밥먹어라. 밥식겠다."
내 나이 25살에 언제나 겉만 뻔지르르한 소리를 친다면 난 아직 철
이 덜 들은 것일까? 오늘같이 여유로운 날에 이런 생각따윈 집어 치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아침밥을 빨리 먹고 방으로 들어가 빨리 자야할 것 같다.
내 방 침대에 누웠지만 여러가지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는다. 요즘 화실 동료들 모두 전같
지 않게 말수가 줄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라 서로간에 말할 이유
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오랜 기간 지속되는 만화계의 불황을 타파할
사람들은 누굴까?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일한만큼 돈받는 사람들만 고생이다.
열의 아홉이 일상적인 사회 활동을 하고 나머지 하나는 나같이 실제로 꿈을 쫓는 사람들일
까? 확실한 건 꿈을 쫓는 사람들 수 천 수 만 명 중 몇 사람만이 주목을 받는다. 이런 사실이
나를 궁지로 몰아 넣는다.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내가 누구처럼 확실한 실력으로 주변을 깜
짝 놀라게 만들 실력의 만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요즘따라 일의 대한 열성보단 회의
만 늘어나는 것을 보면 사회에서 내가 서 있는 역할에 정체가 보인다.
내 나이 25살.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면 26살이다.
기분좋은 날씨의 가을 오후. 약속 시간에 맞추어 친구가 몸담고 있는 극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예전 내가 만화를 하다 잠시 눈길을 돌려 1년 동안 지낸 곳이 지금 가는 극단이다.
3개월 정도 무대 보조를 봐주다가 남은 기간동안 연기를 하였다. 그때는 온 몸으로
외치는 표현이 너무나 강렬하여 힘든 일이 있어도 요즘같이 답답하게 지내진 않았다.
지금 만나는 친구는 내가 극단에 몸담고 있을 때 들어 왔던 동갑 나이를 가진 이성이다.
엉뚱한 행동으로 날 질리게 만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였지만 특유의 통찰력과
괜찮은 연기력으로 나를 매료시킨 녀석이니 봐주기로 하고 마음을 열고 친해진 사이다.
극단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한창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습하고 있던 뮤지컬은 내가 현역으로 몸담고 있을 당시 주인공을 맡았던 프로그램이다.
좁은 연습실에 많은 사람들이 연기와 춤을 구사하니 무더운 열기같은 것이 느껴졌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끝날 분위기가 아니라 밖으로 나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운 약속 시간을 잡아내기로 했다. 상대는 연습 중이고 금방끝나니 조금만 기다리라는데,
지루함이 느껴질 것 같아 연습실 안으로 몰래 들어가 연습을 지켜보고 감독하는 선배와
친구에게 인사를 하였다. 친구 녀석의 감독하는 표정에서 내 얼굴을 보면서 기가 찬 듯 조용
히 웃는 표정의 변화가 재미있었다. 모두들 시끄러운 음악에 춤 연습으로 정신없어 보인다.
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리를 잡고 그들과 같은 동작으로 움직였다.
'손을 위로. 머릴 위로. 리듬에 맞추어 위 아래로.
계속 위로. 내키는대로. 니 마음가는 그대로.
이젠 뒤로. 담엔 앞으로. 흥에 겨워 너의 필이 가는데로.
전후좌우 상관말고 몸이 가는데로 사방으로.
몸을 어떻게 할 줄 난 몰라. 뻘쭘하게 한 손엔 콜라.
들고 두리번 거리며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아직도 예전 움직임 모두 기억하고 있네. 게다가 즐거워 보이고... 그러면서 뭐하러
일은 그만둔거냐. 단원들 관리하는 건 나보단 네가 적성이 맞을 것 같은데"
오랜만에 한껏 몸을 움직이고 친구에게 칭찬까지 들으니 묵은 마음이 날라가는 기분이 상쾌
하다.
"성권. 그동안 잘 있었지. 헉~ 헉..."
"물론."
"그런데 성권아. 단원들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친구는 남의 사정에 간섭하는 나에게 눈짓만 주고 선배와 몇마디 나누었다.
"선배 약속대로 저 먼저 가볼게요. 다들. 저 먼저 가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밖에서 오랜만에 이성과 친한 듯이 걸으니까 평소의 다른 남녀들이 부럽지 않은 것 같다.
"오랜만이야. 이성권. 근데 다른 선배들은 다들 그만둔거야?"
"이유없는 감정 싸움으로 나가고, 집안 사정으로 연기 그만두고 사회 활동을 하는 사
람이 대부분이고... 모두들 아쉬운 이유로 그만두었지. 그리고 넌 재능의 한계를 느
끼고 자폭했고."
자신은 원하지만 사회가 원하지 않는 일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힘들게 사는 것
같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길이 외롭다.
"어째~ 연기 그만두고 그림 그리는 건 잘 되가는 지 궁금하네?"
비꼬는 말이지만 당연한 듯이, 관심갖아 주는 어감이 싫지는 않다.
"뭐야! 내 그림보고 '이 그림이면 프로로 뛰어도 되겠네' 하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
그 말 믿고 그만둔거니까 넌 나한테 할 말 없음!"
"정선이. 너보다 세 달 일찍 극단에 들어와 일했지. 그때가 재밌었어. 마음통하는 사람도
많았고."
카페에 들어가 1년 전, 같이 일할 당시의 많은 얘기를 잠시 나누었다. 후배 주제에 숫기가
없는 내 모습을 격려하고 도와 주어 무대에 설 수 있는 자신감을 키워 준 친구.
1년만에 보니 참 반갑다.
"당시 뒤늦게 들었지만 넌 원래 만화를 그렸다며, 다시 만화계로 들어가서 잘 돼가는 거야?"
"황폐한 노동자처럼 일하고 주인이 던져 주는 건 늙어지는 시간뿐이지..."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뱉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봐"
"아니야. 공모전에 들어갈 내 캐릭터의 대사야. 넌 어떻게 잘 지내? 아까 보니까 네가
모든 걸 앞서 지휘하던데. 그리고~ 1년 밖에 안 되었는데 내가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는 게 아쉽더라."
"아까 잠시 얘기했지만 나이많은 선배들은 생활고에 지쳐 자기 살 길 찾으러 갔고,
열정만 있는 선배들은 우리 극단의 수준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한탄하고 다른 극단으
로 나가버렸고, 새로 들어 온 젊은 애들은 자기 끼 마냥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그만두고.
남은 건 나랑 몇 사람이 있지만 전같이 즐겁진 않아. 전엔 관심갖아 주는 관객도 많고
즐거웠는데... 요즘엔 극단 경제 사정도 많이 기울었어."
친구의 얘기를 들으니 모두들 힘든 것 같다. 자신들의 꿈을 만들어 가는 동시에 타인
들의 마음을 적셔 주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인데 관심 갖아주는 이들 없으니
얼마나 외로울까...
"다들 방황하는구나... 그래도 너 하나만은 극단에 남아 있는 거 같아!"
"뭐야... 선배들이 이룬 일들을 나 혼자 짊어지고 나가란 얘기야. 하하하. 난 사양이다."
"정선아. 커피만 마시는 것 같네. 담배도 피우고. 전과 비교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는데..."
"음 커피... 허구헌 날 커피만 마시는데 오늘같이 쉬는 날도 커피네. 난 커피에 중독된 것
같아"
"커피보단 나에게 중독되는 게 어때?"
전과 바뀐 거 없는 농담에 그만 나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림그리는 데 바쁜 거 보니까 역시 연기보단 그림에 소질이 있군."
"뭐야~~ 무대에 서면 항상 꽃다발을 받는 건 누구였지"
"그거야 네가 여자면서 남자 주인공 행세하니까 여자 관객들이 이상하게 반해
일어난 일이니까 무효가 아닐까~"
친구는 얘기를 계속 이었다.
"계속 얘기하니 전과 비교해 바뀐 건 별로 없구만. 계속 얘기할수록 너의 1년 전 모습이
나오기 시작해. 이 이상 얘기하다간 늘상 하던 버릇처럼 카페 안에서 발로 날 걷어 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시끄럽고 움직이기 좋아하는 네가 가만히 앉아 그림만 그린다는 것
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음... 내 커피에 설탕을 너무 타버렸나? 너무 달아..."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린지가 언제였을까? 돈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부턴
언제나 작가가 원하고 대중들이 원하는 그림만 그린 것 같다. 이거야... 그림그리는 일꾼이군.
"정선아... 또 무슨 생각이야. 그나저나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고 하다니... 웬일이야. 전엔
만나기는 커녕 전화할 시간도 없다고 말하던 네가."
"어제 마감끝났다. 월급도 받고, 휴일도 이틀이고, 극단다니기 전의 동네
그림쟁이 실력이 아니라 이제는 나름대로 그림그리는데 자신도 생겼고...
마음의 여유도 있어. 직업적으로 여유도 생겼으니 소중한 사람들도 다시
찾아야지... 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가."
" '잊혀진 사람들...' 야. 이제 그만 마시고 나가자. 너 커피만 세 잔 리필이야."
"그럼 남은 커피 원샷! 이제 나갈까."
여기 대학로는 내 맘에 꼭 든다. 어떤 내적인 표현을 해도 모두가 날 반길 것 같단 느낌으로
가득한 곳이다. 희귀한 옷차림으로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러도 모두들 흥미있는 눈빛으
로 나를 바라보아줄까? 아니지. 나라면 길 한 가운데다 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의 초상
화를 그려주는 것이 더욱 어울릴 법 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이 남자는 내가 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기 위해 온 몸으로 광고를 하는 것이다.
"정선아!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혼자서 열심히 해? 실례아닌가~"
"네가 나 좋다고 허우적 거릴 때를 기억했어"
"그런 기억은 빼도 돼. 그리고 난 지금 여자 친구가 있지. 같은 곳에서 일하는 내 후배!"
"으이~~~ 징그러워.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아. 아무 여자나 좋다고 멋대로 말하고 헤어
지면 또 같은 행동의 반복..."
"쳇! 너한테만은 진실이였어."
나도 당시 그걸 알았으면 좋았을까? 하지만 당시엔 서로가 진지하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였
고 사적으로 좌충우돌하는 시기였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한테는 거짓말인가? 다 이른다."
"음??? 말이 그렇게 되는 것인가. 그만해 안 되겠어. 단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오
해하지마."
둘은 동대문에 갔다. 나는 외국 서적 코너에 가서 그림 자료감을 찾고 싶었고 친구는
가을 옷을 고른다니 결정된 장소이다. 우선 난 그림에 자료가 될만한 서적들을 고
르고 있었다. 그런데 성권이는 책에는 통 관심이 없는 듯 외국 패션 잡지들을 성의
없이 여기 저기 막 뒤져 보다가 주인 아저씨한테 혼이 났다. 오랜만에 만나서 내 일거
리만 찾는 것이 우스워져 동대문 종합 상가 멀티샵으로 들어가 새로 들어온
스니커즈나 가을옷들을 같이 구경했다. 동대문 주변 사람들이 연출한 해괴한 머리나 옷차
림도 정말 재밌었다. 오랜만에 오는 곳이고 나보단 친구 녀석이 즐거워 하는 것 같아
친구 얘기를 듣고 따라 움직였다. 그는 악세사리 파는 곳 앞에 멈추어 나를 세워 놓
았다. 긴 시간 자신만 따라오며 많은 말들을 받아주는 내게 미안하다며,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악세사리를 사 준다고 말했다. 단골인 악세사리 매장인지 내
가 물건을 고르는 동안 친구는 주인과 많은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인이 새로운 손
님과 맞이하자 친구는 진열된 물건들을 여기저기 둘러보다 내 물건을 대신 골라주었다.
"자, 이 목걸이 어때?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야~ 뭐야. 내가 고를 거란 말야."
"가만히 있어 봐. 너한테 어울리는 물건을 내가 더 잘 알지도
모르잖아. 자! 이거 어때? 우타다 히카루의 뮤직 비디오를 보니까
이렇게 목을 조이듯이 두르는 목걸이 밑으로 늘어지는 보통의 목걸이
두 개를 더 차고 나왔더라. 너도 그렇게 차면 잘 어울릴 것 같아."
"치. 뭐야. 남들 하는 거 따라하긴 싫네."
하지만 거울에 비춰진 나와 목걸이의 조화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목걸이를 맘에
들어 하는 걸 눈치챘는지 주인과 친구는 '잘 어울린다며' 나를 몰아세웠다.
"잠깐! 뭐...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목걸이 세 개 사면 값이 비싸잖아. 난 하나만
있어도 괜찮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정도도 못하냐. 그리고 이건 내가 정선이 너에게 선물한 사실이란 거
잊지 말아라."
여자 친구도 있다는 녀석이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저럴까. 예전부터 제멋대로인 괴짜임
에 아직까지 이의를 달지 않아야겠다.
이이서 우리는 발 길 닫는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넓은 공간의 많은 사람 가득 메운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토요일 저녁시간이라 포장마차 안의 자리를 메운 사람들은 직업
이 그대로 보이는 옷차림과 말투로 여기저기 시끄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런 곳이
라면 상대에게 극단을 그만두고 나서 화실에서 일어난 줄거운 일들과 힘든
일들을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힘든 일이 더 많았으니 할 얘기를 찾고 싶진 않다.
어제 마신 술기운도 잠시라는 듯이 기분내키는 대로 술을 마셨다.
"앞에 사람 놔두고 혼자만 술마시기냐. 안주도 적당히 들면서 마시지 그래..."
상대는 받아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답답한 말을 순간적으로 꺼내려니 아무 말도 하기 싫어
졌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나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앞에서 나를
위해 뭔가를 생각해 주는 친구를 위해서라도 무슨 말은 꺼내야 할 것 같았다. 한참있다...
"넌 네가 하고 있는 일이 즐겁니?"
"극단 일 말하는 거야?"
"그래.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사람도 얼마 없고 있단들 말뿐인 칭찬들. 개뿔 멋있긴
뭐가 멋있어. 진실로 인정하면 지들도 하면 되잖아 근데 왜 안 해... 하고 싶은
애들이라곤 멋모르고 놀기 좋아하는 양아치들이고...... 언제나 연습, 홍보, 연기모두 너나
단원들 스스로하잖아. 그래서 연기 공부 할 시간이라도 있겠어? 그리고 고작
혼자서 한 달 간신히 먹고 살만한 쥐꼬리만한 돈들..."
내 입에서 왜 맘에도 없는 말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술기운을 빌어 말하기엔 상대
에겐 가슴아픈 얘기들. 사실은 이득없이 지내는 지금의 내 모습을 상대를 통해 보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야. 연기... 시작한 건 아직 2년이지만 나는 이대로 즐기
고 연습하면서 내가 원하는 연기관련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이름도 없는 극단에서 배우고 익혀서 속도없이 보기 좋게만 진열되어 있는
연기과 대학에 가신다고. 니가 보고 좋아하는 배우들은 너같이 순수한 사람들의
꿈을 짓밟고 비정상적으로 키워진 스타뿐이라고."
"난 스타가 되고 싶은 게 아니고... 그만하자. 네가 술을 많이 마신 것 같다. "
"그만하긴... 너는 좀 잘 생긴 얼굴이지만 널린 게 너같은 얼굴이고 요즘
연기자의 기준으론 나이도 너무 많아. 나이가 벌써 25살아니냐?"
이랬던가... 내가 이런 말을 할 사람이였나. 나 자신에게 실망하면서 상대에게 독설만
퍼붇는 내 자신이 미워 그만 눈물이 나왔다. 힘든 건 친구가 아니라 울고 있는 나인 것 같다.
집으로 돌아 오는 버스 안에서 친구에게 휴대폰으로 사과 문자를 보냈다. 나와 함께
일할 때도 언제나 성숙한 어른인 척 하는 녀석이 맘에 들지 않았고 그런 나는
그에게 날카로운 말과 시선만 보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언제나 내 행동에 별다른 반
응이 없었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귀엽다는 듯이 말상대를 하거나 놀려 주었다.
아까 친구가 말한, 자신의 역할을 사랑하는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러니 '나같은 건 신
경도 쓰지 않았겠지...' 난 당시 이런 마음을 가졌고 나를 좋아한단 상대의 말도
진지하게 생각했다. 결국엔 이런 남자를 사귀면 내 장래에 도움될 건 없다고 단정짓고
상대의 인격을 깍아 버리면서 상대를 무시했다. 언제나 나 좋을대로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니 아침엔 보이지 않은 언니가 방에 있어 화장을 지우고 있는 언니 뒤를
반갑게 꼭 껴앉았다.
"언니야~"
"정선아... 지금 술취했니. 일도 일이지만 집에 얼굴도 좀 비추어야지. 가끔 온다고
하지만 언제나 술에 취해 있거나 잠든 상태니 언니랑 얘기할 시간도 없잖아."
"오~~~홍 언니가 언제 내 걱정을 그렇게 했다고 그러셔."
"얘! 말이 뭐 그래. 지금 내 말 비꼬는 것도 아니고"
"비꼬는 거면 어쩔 건데. 한 번 더 말해 봐."
언니는 그동안 내 자유분방한 태도에 누구보다 불만스러워 했다.
"언니는 모르겠지만 엄마랑 아빠는 날 믿어. 웃기지 않는 소리 좀 하지마."
"언제나 네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니 엄마 아빠 두 분 다 널 부정하는 것보다 긍정하는
것이 났지 않았을까."
"뭐라고!"
"네가 어른이라면 적당히 포기라는 것도 알았으면 해. 네가 만화 일이 나쁜
일이여서도 아냐. 앉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오랜 날 잠도 자지 못하고 많은 밤을
뜬 눈으로 버티잖아. 그렇다고 미래가 보장된 일도 아니고..."
"그런 언니도 잠깐이지만 나랑 같이 만화그렸잖아. 그리고 날 이쪽으로 이끈 게
누군데. 먼저 그림 포기하고 자기 좋아하는 남자만나고, 옷사고, 먹으러 다니는 게
누군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간섭이야!"
잠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있었다. 아까 술 자리에서 벌인 실수를 반복하는 것 같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자신이 싫다.
언니는 조용히 화장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목걸이 예쁘다. 세 개를 동시에 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텐데... 그런데
잘 어울려. 그리고 평소에 네 말대로 네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길 원할게. 그리고
아까 큰소리친 거 미안해..."
'미안해라니' 나에게 미안할 거 하나 없는데, 어떻게 보면 내 형편을 돌아봐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안해라니. 날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누군진 모르지만 소중히 여겨 주는 언니였다면, 언니를 실망 시켰을까. 이렇게 마음 약한
내가 사람들의 편견을 이기고 내가 원하던 일에서 스스로 만족할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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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휴일의 내 모습
빛과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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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9.09 17:4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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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머 우리 오빠들 만화광이였는데...아버지 몰래 밤새워 만화보다가 아버지께 들켜서 만화책이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곤 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반갑습니다. 빛과 소금님 멋진 직업을 가지셨어요. 선녀는 참 부럽답니다. 우리에게도 살짝 선 보여주세요. 보고싶어요.
지금은 꿈을 향한 노력이 2년간 멈추어진 상태예요. 지금은 유쾌한 인터넷 항해사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