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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風타고 南行 千里
一 松 韓 吉 洙
1993년12월부터 鍾住會(종로구청 주택과 근무자들의 모임)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 모임을 지속한지 춘풍추우 강산이 두 번하고도 반이나 바뀐 장장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우리 모임에서는 25년 만에 나름대로 단안을 내려 辛宗漢 회원이 낙향하여 거주하고 있는 전남 곡성지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이 친구는 곡성으로 내려가서 대대로 물려받은 농토를 일구면서 세월을 낚던 중 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산삼을 발견한 듯 횡재한격으로 건강도 챙기고 재물창고도 탄탄해 졌다고 한다. 우리들은 신종한 회원을 만나 저간의 지나온 발자국을 더듬으며 말 못할 고충이나 자랑스러운 사연을 들어 보고 격려를 해 주자는 의지를 모아 벼르고 별렀던 남행천리 길에 시동을 걸었다.
우리 모임의 총무를 맡고 있는 막내둥이 任舜晩의 차에 필자를 위시하여 주요택, 이재덕이 승차하였는데 편의상 이를 1호차라 하고 2호 차인 목동에 사는 김성범의 차에는 회장인 조방혁, 김평국이 승차하여 각각 바람을 갈랐다.
오늘의 행사에 그렇게 뜸을 많이 드렸는데도 같이 하지 못한 회원이 있으니 김상국 청장님을 위시해서 정동석, 선유원, 김승호 등 4명이나 된다.
우리 1호차는 필자의 아파트에서 출발하여 테크노마트 앞에서 두 회원을 태우고 서 하남을 거쳐 판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를 달리다가 안성휴게소에 들려 아침식사를 거의 마쳤는데 그때서야 2호차가 도착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일로 남쪽을 향하여 달리고 또 달리며 논산평야를 지나고 있다. 논산평야를 지나면서 필자가 논산평야에 얽힌 기막힌 역사의 뒷이야기를 전해 준바 있다.
호남고속도로 논산을 비껴서니 필자의 태를 묻은 곳 전북 익산 땅이다. 갑오년에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하려고 모여들어 기세를 높였던 땅 三禮가 우리들에게 예를 갖추는데 만경강을 건너면 강암 송성용 剛庵 宋成鏞 선생이 쓴 <湖南 第一門>이 우리들을 맞이하니 옛 전라 감영全羅監營 全州다.
全州는 206.22km²의 면적에 65만 명이 거주하는 호남의 웅부雄府이다. 이곳은 馬韓이래 湖南地方의 큰 마을로 全州라는 지명은 통일신라시대인 757년(新羅 경덕왕 16년)에 행정구역 명칭을 개혁하면서 完山州를 全州로 고쳐 불렀으며 백제시대에는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하였다.
全州는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武珍州(光州)에서 올라와 이곳에 後百濟를 建國하여 王建에게 멸망하던 936년까지 후백제의 수도였던 곳이다. 高麗는 後三國을 통일한 후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했다. 1005년에는 全州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었으며 1022년에는 全州牧을 설치하여 전국 12목의 하나가 되었는데 1388년에 축성된 全州府城은 허물어지고 현재는 豐南門만 남아있다.
朝鮮王朝의 先代인 전주이씨의 본향이라는 이유로 1392년에 全州 유수부留守府가 설치되었으며 全羅道 觀察使가 있어 현재의 광주 직할시와 전라남북도는 물론 제주도까지 관할하던 때가 있었다.
豐南門(보물 제308호)은 全州를 상징하는 문으로 원래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高麗 恭讓王 때 설치하였다가 朝鮮 英祖 때 소실되었기 門樓를 보수하여 南門을 豐南門으로 西門을 패서문沛西門이라 개칭하였다.
풍패豊沛란 건국시조의 고향을 이르는 말로 漢나라 劉邦의 고향이 패군 풍현이었음으로 全州가 李氏 朝鮮 李成桂 선조의 출생지여서 豊沛를 각각 성문의 머리글자로 사용했던 것이다.
全州 客舍(보물 제583호)는 일명 豊沛館이라고도 하는 조선시대의 건물인데 明나라 사신 주지번이 豊沛之館이라는 편액을 썼다. 客舍는 빈객을 접대하고 숙박시키는 곳이지만 전패殿牌를 모시고 國王에 대하여 예를 행하던 곳이며 朝廷의 칙사勅使가 오면 이곳에 유숙하면서 교지를 전하기도 하고 地方高官이 부임하면 먼저 이곳에 들려 王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禮를 올렸던 곳이다. 이 건물은 全北大學校 초창기 法政大學의 校舍로 사용하였기에 筆者도 이곳에서 수학한바 있다.
全州 慶基殿(사적 제339호)은 朝鮮 太宗 10년에 太祖의 영정影幀(보물 931)을 奉安하기위하여 세운 殿閣이다. 壬辰倭亂 때 御眞은 妙香山 普賢寺로 옮겨 화를 피했으나 전각은 소실燒失되어 光海君 6년(1614년)에 重建하였다.
全州 韓屋마을은 校洞과 豊南洞 일대의 도심지에 650여 채의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곳으로 2017년 기준 연 1.1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전통술 박물관에선 韓國에서 생산되는 傳統酒를 접할 수 있고, 전주 전통 한지원에선 닥나무로 韓紙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혼불]의 작가 최명희 기념관, 전통문화센터, 한옥생활체험관, 공예품 전시관, 한방문화센터, 전통찻집 등 문화공간이 고루 갖추어져있다.
殿洞 聖堂(사적 제228호)은 1791년 5월에 금산 옆 진산사람으로 천주교를 신봉한다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윤지충이 사형당한 현장이다. 이 건물은 경기전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벽돌 건물로 1914년에 준공되었다. 건축면적은 624㎡이며 湖南地域의 서양식 근대건축물로서는 가장 오래된 建築物인데 프랑스 神父가 시무했던 곳인데 이 프랑스 신부가 필자의 재학 중에 불어를 강의한 일이 있다.
조경단肇慶壇(도 기념물 제3호)은 德津에서 약 1km 들어간 全北大學校 옆 乾止山에 있다. 전주 이씨 시조 사공 공 이한司空公 李翰의 묘소가 失傳되었기 光武 3년(1899년) 5월에 이곳에 壇을 쌓고 碑를 세워 祭祀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전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요지에 全州 梧木臺가 자리하고 있다. 왜구를 무찌른 황산전투를 통해 명성을 얻은 이성계는 개경으로 개선하다가 전주에 있는 오목대에 들려 지역의 종친들을 만나 승전잔치를 베풀었다. 이성계는 이때 크게 기뻐하며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때 부른 노래는 漢高祖의 大風歌로서 이 노래에는 넌지시 역성혁명을 통한 새로운 왕조 개창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때마침 이 자리에는 종사관으로 따라온 포은 정몽주가 함께 있었는데 이성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서 홀로 말을 채찍질하여 남천을 건너 지금의 남고산 만경대에 올라갔다고 한다. 만경대 벼랑에서 정몽주는 멀리 북쪽 하늘을 우러르면서 쓰러져가는 왕조의 한을 석벽제영石壁題詠이란 시에 담아 읊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오목대와 그 이웃에 있는 이성계의 5대조 목조가 살았던 李木臺는 전주 이 씨인 이성계에게는 새로운 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전주를 자리매김하는 유적지로서 그 상징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전주 한옥마을을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기 도 한다.
全州 비빔밥은 우리나라 3대 음식 중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대한민국 대표음식으로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국음식 BEST 1 이다.
우리는 섬진강 상류인 옥정호를 지나 순창읍내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는데 옥정호 밑에 있는 임실군 강진면은 필자의 낙수첩 제7집[사랑의 송가]의 당사자인 0양의 고향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순창 동 고등학교 정문 앞에 우리를 마중 나온 신종한 회원 차와 1. 2호차가 만나 순창군 적성면 화탄천변에 있는 알곡 매운탕 집으로 가서 매기매운탕으로 점심을 들었는데 식대는 주요택 회원이 부담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곡성군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오산면 봉동의 신종한 생가에 들려 배낭 등을 내려놓고 주변 텃밭을 구경하였다. 매실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는데 너무나 많은 매실이 열려 있어 이를 솎아줘야 한다고 한다. 매실나무 밑에는 상추 아욱 근대 등 반찬거리를 심어놓았기에 즉석에서 식사하여도 좋을 신선하고 풍성한 찬거리가 잘 자라고 있었다.
이슬비가 오는 중에도 담양지방으로 관광길에 나섰는데 창평 마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창평은 함평, 남평과 함께 3평 고을로 인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다. 창평이란 고을 이름부터가 공자가 태어난 산동성 곡부현에 있는 고을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창평이 1914년 담양군에 합병되어 1개면으로 격하되었지만 역사상 인물들이 우수수 쏟아진 인물의 백과사전이라 이르는 곳이다. 송광사에서 조계종을 일으킨 고려 때 스님 지눌知訥(1158∼210)이 이곳 청원사에서 대각을 이뤘으며 조선조에 84명의 문과급제자와 94명의 무과급제자를 내어 이름을 떨쳤다. 특히 임란 후 많은 인재를 배출한 高씨들의 터가 되어 본관이 장흥이면서도 ‘창평 고씨’라는 별칭을 얻었던 곳이기도 하다.창평에 처음 뿌리 내린 장흥 고 씨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의 둘째 아들 인후因厚(1561∼592)의 자질들이다. 고경명의 장남인 종후는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고 인후는 의병에 참가했다가 금산전투에서 아버지인 고경명과 함께 순절하였기에 그곳에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규장각 직각을 지낸 고정주(1863∼1933)는 창평에 ‘창흥의숙’이란 서당을 세운다. 여기서 영어 수학에 능통한 이표라는 선생으로부터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91∼1955),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89∼1945),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 등 3걸이 배웠으니 이곳 창평을 한국인재의 산실이라고 말할 만 하다.이들이 공부한 곳은 창평 상월정上月亭이다. 이곳에는 대자암大慈庵이란 절이 있었으나 조선조에 폐사가 되었다. 1457년 강원도 감사를 지내다 창평에 와서 살게 된 김응교金應敎가 상월정을 지었는데 1500년대 손자사위인 이경에게 넘어갔다가 손이 끊기면서 외손인 고 씨들이 관리해 왔다. 이곳이 창흥 의숙으로 쓰인 연대는 고정주가 직각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1905년부터 1908년 사이로 여겨진다. 이곳에서 영어를 가르쳤기에 ‘창평 영 의숙’이라고도 한다. 이는 서울의 양정 휘문의숙과 같은 시기이며, 광주 서석의 전신인 광주보통학교가 사구동에 문을 연 것이 1906년이고, 중학 과정 영어를 가르친 숭일학교가 1907년에 개교한 것을 감안 할 때 창평의숙은 전남교육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창평에는 고 씨들이 많이 산다. 창평의 고 씨들은 호남 4대 명문 집안 중 하나이다. 호남의 원로들이 꼽는 4대 명문집안이라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60)를 배출한 울산 김씨,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72)을 배출한 행주 기씨,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92)을 배출한 장흥 고 씨,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93)을 배출한 연일(지실) 정 씨 등이다.
호남에서 인물들이 배출된 지역을 거명한다면 4군데인데 ‘광·나·장·창’ 지역이다. 광주 나주 장성 창평을 지칭한다. 창평이 이 4군데에 포함되는 배경에는 창평 고 씨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에도 이 창평 고 씨들 가운데 저명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고재욱高在旭 전 동아일보 사장 고재필高在珌, 전 보사부 장관 고재청高在淸, 전 국회부의장 고재호高在鎬, 전 대법관 고재량高在亮, 전 광주고법 부장판사 고중석高重錫, 헌법재판관 고윤석高允錫, 서울대 부총장 고문석高文錫, 전 한양대 법대학장 고명승高明昇, 전 육군 대장 등이다. 이 가운데 고재청 고재호 고재량은 친형제 간이다. 헌법재판관을 지낸 고윤석은 고재호의 조카다. 전 대법원장인 최종영이 고재호의 사위다. 그 뿐만 아니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90~1945)·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1887~1964)· 근촌芹村 백관수白寬洙, (1889~납북)와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창평 고 씨들과 깊은 관계에 있다. 일제 말부터 19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 우파 진영을 이끌었던 인물들의 출발은 창평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고 씨 집안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고 연기설을 주장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창평 고 씨 집안의 역사와 인맥은 일개 집안이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호남의 인물사, 더 나아가 한국의 근세정치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흥미로운 자료가 되는 것이다.암울했던 왜정 시절. 서울에는 유명한 사랑채가 하나 있었다. 서울 계동에 있던 인촌 김성수의 사랑방이었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던 우국지사들이 계동 사랑방에 많이 모였다. 아무나 사랑방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명한 사랑방을 운영하기 위한 조건은 재력 식견 덕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인사들이 모여든다. 돈만 있고 식견이 없으면 밤새워 이야기 할 거리가 없으니 범속凡俗에 빠진다. 돈만 있고 덕성이 없으면 인색해서 베풀 줄 모른다. 그래서 이 모두를 겸비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인촌은 돈을 쓸 줄 알았던 사람이다.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어려워 쓰는 법을 따로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는 써야 할 곳에 제대로 썼다. 그러니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계동 사랑방은 이 3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일급 살롱이었다. 평일에도 보통 머무르는 손님들이 30~40명은 되었다고 전한다. 현관에는 항상 신발이 수북하였다. 그 식객들을 수발하고 밥을 해대느라 이 집 안주인과 며느리들은 손이 거칠어져 시장 아주머니 손 같았다고 한다. 계동 사랑방의 단골 멤버들은 사랑방 주인인 김성수를 비롯하여 김병로 송진우 백관수 김도연 김준연 장덕수 현상윤 조병옥 등이었다. 다들 한 가락씩 하던 인물들이다. 해방정국을 이끌었던 민족주의 우파의 거물들은 거의 계동 사랑방 단골손님이었다. 한국의 우파, 그러니까 양심적인 우파의 태동은 계동 사랑방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계동 사랑방의 연원淵源을 소급해 올라가면 창평의 上月亭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어렸을 때부터 상월정에서 함께 놀고 공부하던 친구들이 장성해서는 계동 사랑방으로 옮겨갔고 그 사랑방 멤버들이 해방 이후 한국의 정계를 이끄는 인물들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강의 발원지를 찾아 수 백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강원도 태백의 검용소라는 조그마한 물웅덩이가 나오듯 민족주의 우파의 발원지는 전남 창평의 상월정이라는 조그마한 집이었다는 사실이다.창평에서 2.5km 정도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상월정이 나오는데 월봉산月峰山(272m)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상월정은 전망을 즐기며 풍월을 읊는 곳이 아닌 숲 속에 있는 아담한 4칸 겹집 한옥이다. 방이 4개이고 마루가 있어서 보통 8~9명이 거주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부방이었다.
창평昌平이라는 이름은 고려 초부터 불리어져 지금에 이르고 그동안 文武百官을 많이 배출한 선비고을로 충 효 예와 신의를 지켜온 고장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대장 제봉 고경명 선생의 둘째아들 학봉 고인후와 그의 11대 孫인 구한말 녹천 고광순 등 의병대장이 태어난 의로운 고장이며 현대에는 1906년 4월1일 사립 창흥학교가 창설 개교하니 신학문을 교육한 춘강 고정주, 국무총리 서리인 이한기 박사 국회부의장, 각부장관 그리고 법조계의 인맥을 이어온 대법관과 언론계의 거목 고재욱, 최초의 공학박사 이승기, 최초의 여성 농업박사 김사순(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의 모친)을 배출한 고장이다. 조선시대에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유명했던 창평 쌀엿과 한과,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죽염 죽염된장 전통 떡갈비 등은 우리의 전통식품으로 지금도 창평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우리들이 우중에 들린 곳은 담양 소쇄원이다.
이 곳은 4,958.7m²의 공간에 중종(1530년대)대에 양산보가 지은 정원이다.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기묘사화로 인하여 화순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는 기별을 듣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溪園 그리고 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內園으로 되어 있다.
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溪園은 송시열이 쓴 五曲門이라는 현판 옆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內園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堂과 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다. 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 한식이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 「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있으며, 1755년(영조 31) 목판에 새긴「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하서 김인후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고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에 들린 곳이 한국가사문학의 고향이요, 산실인 담양군 남면에 위치한 한국가사문학관이다.
전라남도 북쪽에 위치한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존 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 받은 조선시대 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落南(남쪽으로 낙향)하여 이곳 담양 일원에 樓와 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 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이들은 수신과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는 충성하고 국난이 있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구국에도 앞장섰다. 조선시대 漢文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담양 지역을 일명 한국 가사문학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경치 좋은 자연이 우리 국토 방방곡곡에 자리하였고 멋을 아는 선비가 담양으로만 모여 있지는 않았겠지만 소쇄원 식영정 송강정 면앙정 환벽당 창계천 자미탄 등 남아 있는 누각과 정자 건물만도 수없이 많고 끝없이 펼쳐지는 호남의 비옥한 땅을 이루는 계곡과 산천의 아름다움은 권력과 재물의 욕심보다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구하고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가장 큰 소명으로 삼았던 선비들의 은신처로 오랜 시간 사랑받았다. 2000년에 세워진 가사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과 영상실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1전시실에는 면앙정 송순 송강 정철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에는 소쇄원 전경 역대가사 필사본을 전시 했으며 제3전시실에는 석천 임억령 소쇄처사 양산보 하서 김인후 서하당 김성원 미암 유희춘 제봉 고경명의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이곳은 선비정신을 상징하듯 정자와 연못이 함께 있는 건물로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 「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 「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 「초당춘수곡」 「사친곡」 「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 「민농가」 및 작자미상의 「효자가」 등 이 고장이 전하는 18편의 가사문학을 중심으로 한 유물들을 전시하는 멋진 공간이다.
담양군에서는 담양의 가사문학관련 문화유산의 전승 보전과 현대적 계승 발전을 위하여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전시품으로는 가사문학 자료를 비롯하여 송순의 면앙집俛仰集과 정철의 송강집松江集및 친필 유묵 등 귀중한 유물이 있다.
문학관 가까이에 있는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송강정 면앙정 등은 호남시단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으며 이는 한국 가사문학 창작의 밑바탕이 되어 면면히 그 전통을 오늘에 잇게 하고 있다.한옥 형 본관과 기획전시실(갤러리) 자미정 세심정 토산품전시장 전통찻집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요 전시물은 가사문학 관련 서화 및 유물 11,461점, 담양권 가사 18편과 관계문헌 그리고 가사 관련 도서 약 15,000권 등이 있다.
다음은 가사문학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식영정息影亭에 올랐다.
명승 57호로 면적 28.039m2인 식영정은 성산별곡의 고향으로서 조선 명종 때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그의 장인 石川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 사미인곡 등 식영정 20영을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으로 남겨 송강 문학의 산실이 되었고 우리나라 고전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 역사적 문화적 문학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식영정은 주변 무등산과 광주호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조화미가 뛰어나고 주변의 500년은 됨직한 소나무 고목과 배롱나무 등이 있어 아름다운 경승지에 보탬이 되고 있다.
오늘 휘나레를 장식하려는 곳은 화순에 있는 물염적벽이었으나 종일 비가 내리고 그곳까지의 왕래하려면 시간이 너무 늦을 듯하여 그냥 신종한 회원의 집으로 되돌아 와서 막걸리 타령에 들어갔다. 一杯一杯 復一杯라. 권커니 잣커니 하다 보니 저녁식사시간이 되었다. 토종닭을 잡아서 칙사 대접을 하는데 필자는 닭다리 1개를 들고 이를 뜯다 보니 저녁식사는 당기지 아니하여 밥숟갈은 들지 아니했다.
식사를 마치고 차 1잔을 들고부터는 묶어놓았던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져서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이때 필자가 준비한 낙수첩 제7집 [사랑의 송가]를 받을 자의 성함을 써서 1권씩 나누어 주었더니 모두들 좋아하였다. 모두가 박수를 치더니 모임의 공금에서 금일봉을 건네주면서 다음 8집 출판에 보태라는 부탁이다.
한국 사람은 한 사람일 때는 낮잠을 자고 둘이 모이면 싸우고 셋이 모이면 당을 만들고 넷이 모이면 노름을 한다더니 일행 중 수덕이 있는 회원 4명이 모여 고스톱 판을 벌리더니 11시경에 끝이 났는데 모두가 돈을 잃었다는 사람만 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쉬지도 않고 흘러가는지라 이제 서둘러서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2018년 5월 13일
날이 밝았다. 우선 비가 오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였으나 오늘은 깨끗이 개어서 새로 화장한 신부 같은 날씨이다. 그래서 기분부터 업 되었다. 그 중에도 부지런한 회원들은 아침 산책을 갔다가 오고 있다. 아침식사는 닭죽을 내놓았다. 늦게까지 술 마시며 화투장과 씨름했던 회원들의 속이 확 풀렸을 것이다.
신종한 회원은 장가를 아주 잘 들었다고 칭찬 해 주었다. 이는 괜히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실제가 그렇다. 시골 농촌이라고 호기심을 가진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처럼 한번 찾아가지만 당하는 당사자는 그것이 아니다. 이 집에도 며칠 후에는 또 어느 모임에서 찾아오기로 약속이 되었다고 하는데 손님을 치르는 입장에서는 몸살 나는 경우일 수 도 있다. 어제도 보니 거실마루 하나에 방이 두 칸인데 큰방에는 고스톱을 즐기지 않는 회원들이 누워있었고 거실에서는 고스톱 판이 벌어져 있고 작은 방에는 회원 중에 T,V연속극을 좋아하는 회원이 그걸 본다고 차지하고 있으니 안주인은 어디 가서 숨을 쉬고 다리를 뻗고 쉬어야 하느냐 이 말이다. 그런데도 전연 그런 내색이 없이 흔연한 밝은 얼굴과 미소로 일관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더구나 우리들이 나들이 하면서 먹으라고 달걀을 한 20개 정도를 삶아서 싸주고 노란 콩을 2kg정도씩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시골선물이라고 각자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이 고마운 정을 받다보니 시각은 10;00경이 되었다. 우리들은 다른 곳으로 나서야 할 시간이 되었다. 다음 행선지는 순천에 있는 갯벌과 순천만 국가정원이라는 말을 듣고 필자가 신종한 부부에게 부탁했다. 이 좋은 날 일부러 구경도 가는데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같이 순천에 가서 구경하다가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고 두 분이 사이좋게 오시라는 권유를 했으나 집안에 할 일이 많아서 못 간다고 사양하기에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우리끼리 남쪽을 향해 길을 나섰다.
맨 처음 도착한 곳은 순천만 국가정원이었는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2018년 4.6-5.22까지 [봄꽃 축제]기간이어서 그랬는지 엄청 많은 인파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순천만 국가정원은 순천시 풍덕동 오천동 일원 1백112천m2(34만평)에 걸쳐 펼쳐진 세계 5대 연안습지인 순천만 습지의 항구적인 보전을 위하여 정원을 조성하고 2013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장소이다. 그 이후 제1호 국가정원으로 지정됨으로서 대한민국 정원문화 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세계정원 13개소 테마정원 12개소 참여정원 34개소로 나뉘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를 다 둘러보려면 2일도 모자랄 것 같아 중요한 엑기스만 골라서 보기로 했다.
동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하여 장미정원 흑두루미 미로정원을 지나 일행은 봉화언덕의 나선형 길을 걷는다고 갔는데 필자를 보살피느라 구경도 못하고 임순만 총무는 나를 안내하여 난봉언덕을 지나 관람 차 타는 곳에서 관람차를 타고 메타세콰이어 길-네덜란드 정원-중국 정원-도시 숲-꿈틀 정원으로 돌아와서 일행들과 만나 프랑스 정원을 둘러보고 동문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들은 덤을 만났다. 가재잡고 도랑치 던 날인지라 플라워 파티 퍼레이드 쇼를 구경했다. 외국 배우들이 각기 고유의 의상을 입고 벌리는 K-POP 댄스, 코믹 마술, 그리고 마칭 밴드 등을 재수 좋게 구경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13;00가 되었다. 우리들은 순천만 갯벌을 보면서 달리다가 도착한곳이 강변 장어집이다. 이 식당에서 장어를 굽고 짱뚱어 찌개를 끓여 점심을 들고 완주-순천 간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일로 상경 길에 올랐다. 노령산맥을 이용하여 뚫린 도로여서 기분 좋게 달리다가 그 많은 터널 중에 오수 휴게소를 지난 어떤 터널 안에서 차선변경을 했다고 이동 순찰경찰에게 적발되어 벌금 3만 원짜리 딱지를 끊은 것이 옥의 티로 남아 있다.
차가 우리 아파트 옆까지 왔는데 시간은 17;00경이 되었다. 이번에 2일간 운전을 하느라고 너무나 수고가 많은 임순만 총무와 김성범 회원에게 이 난을 빌려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신종한 회원에게 너무나 큰 신세를 져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치하를 하고 끝으로 장가를 잘 들었다는 이야기를 유선으로 다시 되풀이해 주었으나 그 말을 며칠을 되풀이 한다고 해도 그 걸로는 무언가 미진한 듯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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