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원불사(源佛寺) 원문보기 글쓴이: 단현
꾸살라와 아꾸살라, 뿐냐와 빠빠는 어떻게 다른가
악의 품
1. 선한 일에 서두르고 악으로부터 마음을 지켜라. 공덕 있는 일에 게으르면, 마음은 악한 것을 즐긴다.(116)
2. 비록 악을 저질렀어도,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 탐욕을 여의어야 하리. 악이 쌓이면 고통스럽다.(117)
3. 선한 일을 행했으면, 더욱 더 거듭해야 한다. 그 의욕을 돋우어야 하리. 공덕이 쌓이면 행복하다.(118)
4.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자도 행운을 누린다. 악의 열매가 익으면, 그때 악인은 죄악을 받는다.(119)
5.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선한 자도 고통을 겪는다. 선한 열매가 익으면, 그때 선인은 공덕을 누린다.(120)
6. ‘그것이 내게 닥치지 않는다.’라고 악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리.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면 물단지가 가득 차듯, 어리석은 자는 조금씩 조금씩 모운 악으로 가득 찬다.(121)
7. ‘그것이 내게 닥치지 않는다.’라고 선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리.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면 물단지가 가득 차듯, 슬기로운 자는 조금씩 조금씩 모운 선으로 가득 찬다.(122)
8. 작은 카라반을 거느렸으나 재보가 많은 상인이 위험한 길을 피하듯, 살고자 하는 사람은 독을 피하듯, 악을 피해야 한다.(123)
9. 손에 상처가 전혀 없으면, 손으로 독을 만질 수 있다. 상처 없는 님에게 독이 미치지 못하듯, 악을 짓지 않는 님을 악이 해치지 못한다.(124)
10. 죄악이 없고 청정하여 허물이 없는 님에게 해를 끼치면, 티끌이 바람 앞에 던져진 것처럼, 악의 과보가 어리석은 그에게 돌아간다.(125)
11. 어떤 자들은 모태에 태어나고 악은 저지른 자들은 지옥에 나고 선행자는 천상계로 가고 번뇌를 여읜 님들은 열반에 든다.(126)
12. 악업을 피할 수 있는 곳은 공중에도 바다 한 가운데도 없고 산의 협곡에 들어가도 없으니,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127)
13. 죽음이 닥치지 않는 곳은 공중에도 바다 한 가운데도 없고 산의 협곡에 들어가도 없으니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128)
(법구경, 9 악의 품 Pāpavagga, 전재성님역)
선과 악
법구경 ‘악의 품’의 빠알리 명칭은 ‘빠빠왁가(Pāpavagga)’이다. 여기서 ‘빠빠(Pāpa)’라는 말은 ‘악’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렇다면 이 빠빠와 반대 되는 술어는 무엇일까. 법구경 악의 품에서는 ‘뿐냐(Puñña)’로 쓰였다.
뿐냐의 의미는 공덕의 의미이지만 ‘악행’을 의미하는 빠빠와 반대 되는 술어로서 ‘선행’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빠빠와 뿐냐는 선과 악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법구경 악의 품 게송에서는 빠빠(악)와 뿐냐(선)가 대비 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빠알리어에 선과 악이라는 말에 ‘꾸살라(kusala)’와 ‘아꾸살라 (akusala)’라는 말이 있다.
꾸살라와 아꾸살라, 그리고 뿐냐와 빠빠는 어떻게 다를까
그렇다면 꾸살라와 아꾸살라, 그리고 뿐냐와 빠빠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먼저 마성스님이 번역한 위라라트네(W.G. Weeraratne) 가 지은 ‘선과 악의 기준’이라는 논문에 실려 있는 비교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몸으로 짓는 행위(kayika kamma, 身業)·입으로 짓는 행위(vacasika kamma, 口業)·뜻으로 짓는 행위(manasika kamma, 意業)가 그것이다.
인간의 세 가지 행위는 윤회에 헤매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선행은 이 세상에서 궁극의 진리를 실현시키는 이익(samparayahita)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을 기쁨과 행복으로 만들어 준다(ditthadhammasukha, 現法樂). 그리고 그 반대로 가는 모든 행위는 악이다.
꾸살라(kusala)와 아꾸살라(akusala)
불교에 있어서 선과 악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여러 가지 술어들이 있다.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된 술어는 꾸살라(kusala)와 아꾸살라(akusala)이다.
꾸살라(kusala)라는 단어는 '능숙한', '현명한', '유능한', '노련한'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아꾸살라(akusala)는 그와는 반대를 나타낸다. 주석자(註釋者) 담마빨라(Dhammapala, 法護)는 이 술어가 '악을 몰아낸다는 의미에서 꾸살라(Kusala)라고 불렀다.'(kucchita salama atthena kusalam)라고 정의를 내린다.
불교에서 선과 악을 나타내는 이들 두 술어의 선정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악을 행하거나 삶을 자기본위로 사는 것은 매우 쉽다.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자연적인 성향이라고 부른다. 집착과 증오는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가져오고, 무지는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편견 없이 사물을 바라보고, 우호적으로 느끼고, 집착을 극복하는 길은 매우 어렵고, 약간의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매우 중요한 것은 탐욕, 성냄 및 어리석음[無明]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하는 모든 행동은 꾸살라(kusala, 善)이고, 그 반대는 아꾸살라(akusala, 惡)라는 것이다.
뿐냐(punna, 福)와 빠빠(papa, 惡)
선과 악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두 가지 다른 술어는 뿐냐(punna, 福)와 빠빠(papa, 惡)이다. 이것들은 간혹 공덕(功德, merit)과 죄(罪, sin)로 번역되기도 했다.
주석자 담마빨라(Dhammapala)는 뿐냐(punna)를 '마음을 정화하고 가득 차게 한 것'(santanam punati, visodheti)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이 술어를 다룬 팔리성전협회(PTS) 사전에서 뿐냐(punna)는 언제나 천상의 재생과 미래의 축복 받는 상태의 기초와 조건, 과거생에 쌓여진 공덕에 의존하여 즐김과 지속기간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빠빠(papa)는 '불행의 상태에서의 고통의 기초와 조건'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선과 악의 기준 , 위라라트네(W.G. Weeraratne) 지음/ 마성 옮김)
선과 악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일반적인 술어는 꾸살라(kusala, 善)와 아꾸살라(akusala, 惡)라 한다. 이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삼독심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 삼독심을 약화시키는 것은 꾸살라(선)이고, 그 반대로 강화시키는 것이 아꾸살라(악)이라 한다.
뿐냐(福)의 의미로 표현된 게송
뿐냐와 빠빠의 경우 공덕과 죄의 의미로 번역된다고 한다. 그래서 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나고, 죄업을 많이 지으면 악처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법구경 악의 품의 게송에서 볼 수 있다.
뿐냐(福)의 의미로 표현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Puññaṃ ce puriso kayirā, 뿐냥 쩨 뿌리소 까리야 ~ kayirāthetaṃ punappunaṃ, 까이라테땅 뿌납뿌낭 ~ sukho puññassa uccayo. 수코 뿐냣사 웃짜요
선한 일을 행했으면, 더욱 더 거듭해야 한다. 그 의욕을 돋우어야 하리. 공덕이 쌓이면 행복하다. (Dhp118)
첫 구절에서 선한 일을 한 것이 공덕을 쌓는 것인데, 이때 뿐냐(Puñña)라는 용어를 쓴 것을 알 수 있다. 또 마지막 구절에서 공덕을 쌓으면 행복할 것이라 하였는데, 역시 뿐냐라는 용어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공덕이나 선행을 하는 것이 뿐냐임을 알 수 있다.
빠빠(惡)의 의미로 표현된 게송
다음으로 악의 의미로 쓰이는 빠빠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Pāpaṃ ce puriso kayirā, 빠빵 쩨 뿌리소 까리야 ~ na taṃ kayirā punappunaṃ, 나 땅 까이라 뿌납뿌낭 ~ dukkho pāpassa uccayo. 둑코 빠빳사 웃짜요
비록 악을 저질렀어도,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 탐욕을 여의어야 하리. 악이 쌓이면 고통스럽다. (Dhp117)
첫 구절에 악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악행을 말한다. 그래서 빠빠(Pāpa)라는 말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 악이 쌓이면 고통스럽다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악행을 말한다. 그래서 역시 빠빠(pāpa)라는 말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뿐냐와 빠빠는 공덕과 악행의 의미로 주로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상가 교수의 강의에서
선과 악을 표현 하는데 있어서 꾸살라와 아꾸살라, 뿐냐와 빠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더 자세한 설명이 있다. 불교TV 사이트에 실려 있는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의 강의 내용이다. 참고로 이 글은 지난 가 지난 2010년 ‘부처나 아라한은 왜 공덕을 짓지 않을까, 아상가교수의 ‘업과 재생(rebirth)’강의를 듣고’라는 제목으로 올린바 있다. 그 중 ‘꾸살라와 아꾸살라, 뿐냐와 빠빠’에 대한 것만 보면 다음과 같다.
꾸살라(Kusala)와 아꾸살라(Akusala)
부처님의 가르침에 두 가지 구분이 있어요. 그 중요한 두 가지는 ‘건전한것과 건전하지 못한것’ 또는 ‘지혜로운것과 지혜롭지 못한것’ 입니다.
이 두 가지 행위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빨리어 경전에서는 건전하지 못한 행위는 ‘Akusala(아꾸살라)이고, 건전한 행위는 ‘Kusala(꾸살라)라 합니다. 그러니까 kusala가 건전하고 지혜로운 것(wholesome, skillful)이고, Akusala는 건전치도 지혜롭지도 못한(unwholesome, unskillful)겁니다.
어떤 행동은 ‘건전하고 지혜롭다’ 하고 어떤 행동은 ‘불건전하고 지혜롭지 못하다’ 하지요. 그런 구분은 마음이 어떤 상태냐에 달렸어요.
어떤 행동을 ‘탐진치’로 행할 때는 불건전하고 지혜롭지 못하게 됩니다. 탐(lobha)은 ‘집착과 갈애’를 말하고, 진(dosa)은 ‘분노와 혐오’, 치(moha)는 ‘어리석음 미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집착(attachment)’ ‘어리석음(delusion)’ ‘분노(aversion)’를 가지고 행동할 때 그 행동은 건전하지 못해요.
불교적 분석에 의하면 평범한 사람의 마음은 이런 탐진치에 매어 있어요. 불교 가르침에 의하면 누군가 마음 속에 이런 것들이 없다면 그는 해탈한 사람이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물론 우리가 성취하려는 것이 그 것이지만 평범한 마음의 상태에는 이런 것들이 존재해요. 선<Kusala>과 악<Akusala> 이런 구분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가르침에서 자주 사용하는 구분법을 소개하지요.
아꾸살라와 꾸살라
뿐냐(Puñña)와 빠빠(Pāpa)
뿐냐(Puñña)와 빠빠(Pāpa)가 있는데요. 빠빠는 악행(evil action)을 의미하고 뿐냐는 선행을 또는 불교용어로 ‘공덕행(meritorious deeds)’을 의미해요. 그래서 뿐냐와 빠빠 선행과 악행의 분류는 기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차이도 있지요.
뿐냐 즉 선행을 말할 때는 중생의 윤회(samsara)적 삶 속에서 우리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좋은 일은 중생의 삶 안에서 이해해야 해요.
예를 들면 제가 스님들께 공양을 대접하면서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길 기대합니다. 잘 살펴 보면 이 행위 자체는 ‘무집착’에서 나오죠. 무엇을 보시하든 그 것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을 남에게 주고 나면 내가 그만큼 희생하고 내게서 없어지는 거니까요. 그 만큼의 너그러움과 무집착이 있는 거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베푸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천국에 태어나리라는 더 좋은 곳에 태어나리라”는 큰 기대를 하죠. 그 것이 다시 집착의 한 측면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집착이라는 맥락 안에서 우리는 ‘약간의’ 선행을 하는 겁니다. 직접적 행동은 보시에 의해 이루어지죠. 하지만 그 보시에는 모종의 ‘장기적 기대’가 있어요.
사람들은 흔히 많은 선행을 합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선행을 했다는 것을 인정받으려고 해요. 보상을 원하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운동에 큰 돈을 기부하면 비록 그 것이 자신의 돈을 내어놓는 무집착을 요한다 해도 선행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반면 그 정치가가 권력을 잡으면 우리는 그에게 상당한 것을 보답으로 기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것은 보시가 아닙니다.
하지만 종교적 행위는 달라요. 제가 내생에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희망으로 승가에 공양할 때 그 것은 평범한 방식으로 우리의 부를 사용하거나 낭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행동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Kusala행’과 ‘뿐냐행’을 구분해요. Kusala행은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탐진치가 없이 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뿐냐 행은 궁극적으로 윤회하는 중생의 삶이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생적 삶 안에서 애쓰는 거지만 중생의 삶을 편안하게 하려면 무언가 필요해요.
빠빠는 물론 악행이지만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고 큰 차이는 없어요. 빠빠를 행할 때마다 마음이 이런 선하지 못한 것들에 사로잡히지요. 그래서 빠빠와 Akusala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뿐냐와 Kusala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어요. 이런 차이점을 더 잘 알기 위해 우리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나 아라한의 행동은 Kusala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빠빠와 뿐냐
부처나 아라한은 왜 공덕을 짓지 않을까
부처나 아라한의 전체 행동은 탐진치가 하나도 없고 그들은 이런 ‘뿐냐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비롭겠지만 그들의 행동은 중생적 삶을 위해 절대 공덕을 짓지 않습니다. 그들은 좋은 일을 하겠지만 어떤 기대도 없이 Kusala행동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도 때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익명으로 좋은 일을 하기도 하니까요. 그런 경지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우리가 모든 욕망을 다 끊었다는 의미는 될 수 없어요.
물론 우리는 어떤 행동들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아무 것도 세상에 기대하지 않고 어떤 인정을 받으려는 의도도 없이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일관성’ 있게 하진 않지요.
반면 깨달은 사람을 보면 그의 행동은 온전히 ‘Kusala행’이에요. 그의 행동이 Akusala행인 경우는 없어요. 당연히 빠빠는 없고 심지어 뿐냐도 없어요. 동일한 행동을 보통 사람이 했다면 당연히 뿐냐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깨달은 사람의 행동은 뿐냐의 범주에 해당될 수가 없어요. 즉 우리가 뿐냐를 행할 때 우리는 여전히 중생의 삶 안에 있고 그 삶이 매우 편안합니다.
그런데 Kusala행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중생의 삶에서 해방시킵니다. 그런 행동은 중생의 삶을 연장시키지 않아요. 때로 이 것은 ‘감옥’에 있는 것에 비유됩니다. 우리는 그 감옥을 장식하거나 편안하게 만들려 애씁니다. 하지만 모든 행위는 감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죠.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아무리 그 곳을 편안하게 만들려 애쓴다 해도 뿐냐는 그런 것과도 같아요.
뿐냐와 꾸살라
여러분은 윤회의 감옥 안에 있어요. 물론 뿐냐와 함께 그 삶은 편안하지요. 하지만 Kusala행은 여러분이 윤회를 넘어 해탈로 가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이 Akusala와 빠빠 라는 이 두 가지를 불교전통에서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해요. 우리의 모든 Akusala행은 물론 빠빠 행이고 빠빠행은 Akusala행이니까요. 그러므로 차이는 Kusala와 뿐냐에만 있어요.
뿐냐는 궁극적으로 ‘장기적 욕망’ 등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 것이 의미예요. 자 이 것이 업에 대한 불교적 생각이고 윤리적 행위에서 분석되는 방식입니다.
(아상가교수, 불교 TV,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윤회하는 삶속에서 이해 되는 뿐냐(공덕행)와 빠빠(악행)
표는 아상가교수의 강의를 요약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강의에서 아상가 교수는 꾸살라와 아꾸살라, 뿐냐와 빠빠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며 설명하고 있다. 꾸살라와 아꾸살라의 경우 탐진치와 관계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표에 요약한 바와 같이 탐진치로 행할 때 아꾸살라(악)가 되고, 탐진치로 행하지 않을 때 꾸살라(선)임을 알 수 있다.
뿐냐와 빠바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매우 생소한 용어이지만 공덕행과 악행으로 설명하였다. 뿐냐의 경우 보시 등 공덕행을 하면 천상에 난다는 것인데 이는 윤회하는 삶속에서 이해 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보시라도 대가를 바라는 보시의 경우 빠빠(악행)라 한다. 대표적으로 정치헌금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아상가 교수는 꾸살라와 뿐냐와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표대로 꾸살라행은 부처나 아라한 등 깨달은 자들의 행위라 하고, 뿐냐행은 윤회의 삶속에 있는 중생들의 행위라 한다."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면
법구경 ‘악의 품’ 게송에는 주로 뿐냐와 빠빠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 되어 있다. 즉 윤회하는 삶속에 있는 중생들의 선행과 악행에 대한 이야기 이다. 그래서 선행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나고, 악행을 하면 악처에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그런 선행과 악행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누적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게송이다.
Māpamaññetha pāpassa ~ “na maṃ taṃ 2 āgamissati”. ~ udakumbho pi pūrati, ~ thokathokam-pi ācinaṃ.
‘그것이 내게 닥치지 않는다.’라고 악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리.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면 물단지가 가득 차듯, 어리석은 자는 조금씩 조금씩 모운 악으로 가득 찬다. (Dhp121)
Māpamaññetha puññassa ~ “na maṃ taṃ āgamissati”. ~ udakumbho pi pūrati, ~ thokathokam-pi ācinaṃ.
‘그것이 내게 닥치지 않는다.’라고 선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리.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면 물단지가 가득 차듯, 슬기로운 자는 조금씩 조금씩 모운 선으로 가득 찬다. (122)
누적의 효과가 있다. 물방울이 방울 방울 떨어진 것을 양동에 모으면 어느 순간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매일 매일 조금씩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을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적의 효과가 단순히 합한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적과 복리의 효과
어떤 이가 매일 일정 금액을 매일 매달 저축 하였을 때 10년후의 금액은 얼마가 된까. 단순히 일정 금액을 합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이자에 이자가 붙어 ‘복리’로 계산된다. 그래서 단순히 합한 금액보다 훨씬 더 돈이 많이 블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누적과 복리의 효과는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매일 공부하는 사람이 하루에 5페이지 씩 보기로 하고 매일 책을 보았을 때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책을 한권 독파 하게 된다. 그때 단순히 책을 통한 지식만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지식이 쌓여 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피로가 누적 되면 피로가 쌓이고 쌓이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 중력이 쌓이고 쌓이면 블랙홀이 되면 마침내 모든 것을 빨아 들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누적의 효과는 항상 복리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행을 매일 자주 하게 되면 그 선행 이상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 그 선행에 대한 과보를 즉각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결국 받을 수 밖에 없는데, 법구경에서는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선한 자도 고통을 겪는다. 선한 열매가 익으면, 그때 선인은 공덕을 누린다.(Dhp120)”라고 표현하였다.
악행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지금 악행을 해도 표가 나지 않지만 악행을 멈추지 않았을 때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자도 행운을 누린다. 악의 열매가 익으면, 그때 악인은 죄악을 받는다.(Dhp 119)”라 하였다.
이렇게 공덕행(뿐냐)와 악행(빠빠)는 반드시 과보를 불러 오는데, 공덕을 쌓으면 내생에 천상에 나고 악행을 하면 악처에 난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만약 부처님이 여기까지 말씀 하셨다면 지구상에 출현한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하등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부처님은 공덕행을 너머 이야기 하셨다. 그것이 꾸살라이다. 표에서와 같이 꾸살라는 탐진치가 없는 행을 말한다. 이는 부처나 아라한과 같이 깨달은 자의 행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악의 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Gabbham-ekepapajjanti ~ nirayaṃ pāpakammino, Saggaṃ sugatino yanti ~ parinibbanti anāsavā.
어떤 자들은 모태에 태어나고 악은 저지른 자들은 지옥에 나고 선행자는 천상계로 가고 번뇌를 여읜 님들은 열반에 든다. (Dhp126)
윤회하는 삶속에서 뿐냐행도 말씀 하셨지만 궁극적으로 실현해야 될 것으로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이다. 이런 가르침이 지구상에 출현한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차별화 된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악의 품에서 이와 같은 게송이 없다면 이는 사성제에서 고성제와 집성제만 말하고 멸성제와 도성제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반드시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말씀 하였는데, 이런 형식은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라 하여 망갈라경(행복경, Sn 2.4)에서도 볼 수 있고, 또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라 하여 까라니야멧따경(자애경, Sn 1.8)에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초기경전 도처에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임을 알 수 있다.
2012-09-27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