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21 - 일러 우호의언덕에서 니시도마리 해수욕장에 가서 울릉도를 생각하다!
2024년 1월 27일 이즈하라의 지온(祈園) 호텔에서 일본 가정식으로 아침을 먹고는 렌터카를 타고
어제 우리가 들른 면세점 다이렉스 미쓰시마를 지나고 가네다성터로 가는 길을 지나니
만제키운하가 보이고 붉은 다리 만제키바시(万關橋) 를 거쳐 단풍가도라 불리는 숲길을 지납니다.
히타카츠(比田勝) 에 도착했는데 렌터카 반납 시간이 남은지라 북쪽으로 7~8분을 달려 어제 본 미우다
(三宇田) 해수욕장에 도착해 오른쪽 길로 언덕을 올라가니 바다쪽에 큰 비가 하나 서 있는데.....
이름은 日露友好の丘(일로우호의구) 이니 쓰시마 해전에서 포로가 된 러시아 병사들의 상륙지 입니다.
1905년 5월 27일 새벽에 일본 경순양함 시나노마루(信濃丸) 는 대마도 남쪽 해역에서 발트 함대의
병원선 '오룔호' 가 짙은 안개 속에서 켠 등불을 발견하고는 은밀히 관측하던 중에..... 새벽
4시에 대규모 러시아 함대를 확인하니 조선의 진해에서 대기중이던 도고의 일본함대는 출격을 합니다.
오후 1시 55분, 도고는 기함 미카사에 전투개시를 알리며, Z기를 게양했으니 바로 전투가 시작
되는데 그 유명한 T자 전술을 결행해 집중포화로 러시아 함대를 격침했으니.... 대승리를
거두었는데.... 몇 년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면서 탱크에 Z기를 그린게 인상적입니다.
5월 28일 추격전이 시작되었으니 전함 6척등 21척이 격침되고 7척이 나포되었으며 러시아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를 비롯해 6천명이 넘는 러시아 해군 장병들이 포로로잡혔는데.... 추격을
뿌리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함정은 순양함 1척과 어뢰정 2척뿐이니 해전사상 대참패 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톡으로 달아나다가 일본 해군의 추격을 받자 도피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울릉도 연안에서 배를 자침시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인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에 러시아군의 군자금인 금화가 잔뜩 실려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113년 세월이 흐른 2018년 7월 한국의 모 투자회사가 침몰한 돈스코이함의 선체를 해저에서
발견했다면서 대규모 투자 사기를 쳤는데..... 증거 자료나 화면은 모두 타이타닉 같은
영화의 장면들을 교모히 짜집기한 것에 불과했다니 그럼 저 한국인들의 배짱이 놀랍습니다?
"신일그룹 자료에 따르면, 1932년 11월 28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침몰한 배의 금을 사냥
하는 일본' 이란 제목으로, 돈스코이 함에는 영국 소버린 금화 5,000파운드 상자
5,500개를 싣고 있었으며, 무게 200톤으로 5,300만 달러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본답니다.
1980년 일본 해양개발주식회사는 나히모프 함 보물 인양 작업을 벌였는데 백금괴로 추정되던
쇳덩어리 17개를 인양했지만 백금괴가 아닌 배의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 평형수 개념으로
배에 넣은 납덩어리로 밝혀졌으며... 금화는 찾지 못했고 소련과 소유권 분쟁으로 중단됐습니다.
저 보물이 침몰 직전 돈스코이 함으로 옮겨졌다는 가설에 따라 1999년 8월 동아건설과 해양수산부
산하 국책연구기관 해양연구원이 탐사를 시작했다가 2003년 5월 20일 한국해양탐사
연구소는 울릉도 저동 앞바다 수심 400m 지점에서 돈스코이 함을 발견했지만 소득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렌터카를 타고 왔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니 아름다운 해안
과 섬을 지나 여기도 해수욕장이 보이면서 드디어 니시도마리해수욕장
(西泊 海水浴場) 이 나타나는데...... 시간만 있으면 여기도 한번 걸을만 한 곳입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돈스코이함이 자침한 동해 울릉도가 떠오르는데.... 우산국 (于山國)은 6세기초
까지 울릉도를 지배했던 고대왕국으로 일본 삼대실록에는 세라국 (細羅國) 이라는 이름으로도 나옵니다.
세라국(우산국) 의 주민들은 먼저 우산 토착민과 동예 또는 옥저 에서 건너온 예맥계 유민이나 삼한계
유민들로 추정되며 일본인들과는 간단한 한자 필담을 제외하면 말과 글이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구려에 속해 있던 말갈족은 훗날 여진족 으로 불리니 고구려시대 이전 오래전 부터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함경도에 대를 이어 거주했는데.... 11세기에 이 함경도의 여진족 해적
들이 강원도 동해안과 일본 서해안 에 해적질 을 다녔으니, 일본 기록에는 1019년 3월
도이인(刀伊人 여진족) 들이 50척의 배를 타고 쓰시마(대마도對馬島) 에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여진족 해적들이 중도에 반드시 울릉도에 들르는 지라.... 일본을 약탈하러 가던길인 1018년에
울릉도에서 무자비한 약탈 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후, 1022년에는 남아있던 우릉성주
와 아들 부어잉다랑등 주민들 이 모두 고려로 귀부하니 우산국은 완전히 멸망 했고,
조선초인 태종 때에는 공도령(空島令) 으로 주민 쇄환 정책을 펼쳐 무인도 상태로 있었습니다.
고려 공민왕때 왜구는 경상, 전라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와 평안도에 출몰하며 황해도에 상륙해 개경을
노리니 수도를 한양이나 철원등 내륙으로 천도 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는데.... 24년간 100회
가 넘는 침입으로 고려는 쑥대밭 이 되었으며, 우왕 때에는 15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무려 370회 에 달했으니..... 1년에 25회 꼴로 38년간 왜구가 무려 470회나 고려를 침략한 것입니다.
강화가 함락되고 수도 개경이 위협당해 계엄령이 선포 되었고 수도를 내륙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고려 강산은 산산히 찢어져 피로 얼룩지니, 섬과 해안은 사람의 자취는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 으로
변해 황폐화 되었는데, 왜구 침탈은 횟수도 많고 병력도 대규모에 이른 것은 요시노의 남조 조정이
교토의 북조와 전쟁군비를 확보하기 위해 대거 왜구의 대열에 참가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조선조 들어서도 왜구침탈 이 끊이지 않자 태종과 세종 임금은 울릉도에 공도령(空島令)을
내리는데.... 왜구의 피해가 심한지라 울릉도에 관리를 보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주민들을 육지 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게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으로, 섬에 숨어
들어간 백성이 없는지 확인해서 잡아오거나 일본 어부를 쫓아내기 위해 순시선 을 보냅니다.
조선 태종이 공도령(空島令) 을 내려 울릉도가 빈 섬이 되자 1407년 대마도주 종정무 는 평도전(平道全) 을
보내 무릉도(울릉도) 에 왜인들이 이주 하기를 청원합니다. “종정무가 무릉도에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살고자 하므로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이 반인(叛人)을 불러 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 하니,
남재(南在)가 대답하길 “왜인의 풍속은 반(叛) 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해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광해군 1614년에 2차 청원 을 하는데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울릉도에 왜노의 왕래를 금지하라는 뜻으로
예조의 서계 가운데 사리에 근거하여 회유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마도의 왜인이 아직도 울릉도에 와서
살고 싶다고 또 서계를 보내었으니 놀랍습니다. 본도가 우리나라에 소속 되었음은 여지승람(輿地勝覽)
에 기록되어 있는데.... 방물을 거두기도 하고 도민을 조사 정리하기도 한 전고 (典故) 가 명확히 있습니다.”
조선 조정은 처음에는 3년 마다 울릉도 섬의 상태를 확인할 관리를 순시선에 태워 파견하였으나 점차 느슨해
져서 중종 이후로는 아예 파견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숙종 때인 1693년 부산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에 고기잡으러 갔다가 왜인들이 섬에 거주하며 고기잡는 것을 보고 항의하다 일본으로 잡혀갔다 돌아옵니다.
이후 일본 막부에서는 도해금지령 을 내리는데, 한국측은 울릉도와 독도 두 섬 모두 가지 말랬다고
해석하고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선령인 울릉도에만 가지 말라고 했다고 서로 다르게 해석 합니다.
왜인들에게 잡혀서 오키 隱岐 섬을 거쳐 돗토리번 요나고 로 끌려왔으면서도, 요나고 관리들에 이어
돗토리성의 태수(번주) 호키슈에게 불려가서도 울릉도가 조선땅 이라고 주장합니다. 울릉도가
조선땅 이라는 대답을 듣고 나가사키와 대마도 를 통하여 귀국하던 안용복 은 대마도 에서 잡힙니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는 물론이고 그후 귀국해서도 동래부 에서 "곤장 100대를 맞는 중형" 에 처해
집니다. 그러고도 안용복은 3년 후인 1696년에 다시 일행을 규합해서 돗토리현 요나고 에
이르러서는 일행들이 조선 관복을 입고 조선의 고위 관리를 사칭 해 같은 주장을 하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대마도가 개입하니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가 현감에게 구금된후 탈출해
부산으로 도주했다가 잡혀 서울로 압송돼 월경죄에 관리사칭죄 로 국문을 받는데, 노론은 사형을
주장했으나 김구만등 소론 에 의해 간신히 사형만은 면해 유배형 에 처해졌으니 이후 벽촌에
묻혀 숨죽이고 살다가 죽었으니.... 세종대왕 때 죽도록 매를 맞고 쫃겨난 장영실의 처지 와 같네요?
놀란 조선 조정은 안용복에게 월경죄와 관리 사칭죄를 물어 곤장을 치고 감옥 에 가두고는 장한상을
울릉도에 파견하는등 다시 정기적 사찰 을 하다가 고종 때인 1881년에 순시선을 보냈더니,
조선인 60인과 왜인 120인이 섬에 거주 하는지라 쫓아내고는.... 1883년에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 20호를 이주시키니 현재 울릉도 주민들의 조상으로..... 이주 역사는 140년 쯤 되는가 봅니다?
조선이 울릉도에 조선인을 살지 못하게 한 때문인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어느정도 준 가야나
삼한들의 속국으로 살아남아 인지도가 있는 탐라국에 비해, 울릉도는 인지도는 물론 기록조차
거의 없다시피한 실정이며... 그나마 언급되는 기록은 신라 지증왕 대 펼쳐진 이사부의
공격과 여진족 해적들의 침탈로 인해 멸망 한후 우산국의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한 것뿐 입니다.
1989년에는 신라인 도래인의 후예 임을 주장하는 동해(일본해)에 자리한 시마네 島根(도근)현 의원
들이 선조들의 옛 고향인 경상북도를 방문하여 같은 "신라인의 후예라며 자매결연" 을 맺은
바가 있는데..... 1905년 2월 독도(다케시마) 를 일본 제국 시마네현으로 편입고시한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3월 16일 시마네현은 "다케시마의 날" (일본어: 竹島の日) 을 지정합니다.
1618년 일본 에도 막부에서 “竹島(독도, 다케시마) 도해봉서” 를 발급한 것은 돗토리현
요나고시의 오오야가(大谷家) 와 무라카와가 (村川家) 인데 왜 시마네현 으로 했을라나?
그건 아마도 고대에 바다를 건너온 신라인들이 정착한 곳이, 일본에서 아마테라스신을 모신
이세신사 에 이어 두번째로 크며 스사노오신을 모신 이즈모대사가 있는 시마네현의
이즈모 라... 그런 연유로 시마네현으로 편입 했고 기념일 까지 제정한 것으로 짐작 됩니다?
우리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인들이 지금도 다케시마 라고 부르며 자기 영토라고 우기는 것은
1618년 다케시마 도해면허, 1660년 마쓰시마 도해면허, 1836년 하치에몽에 대한
판결문 등..... 일본 어부들이 지난 수백년간 독도에서 조업해 온 실적을 근거 로 내세웁니다?
조선 태종과 세종이 울릉도에 공도령 (空島令) 을 내리고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철수 시키니
“울릉도가 빈 섬” 이라..... 일본 정부의 허가를 얻어 독도에 조업하러 간 일본 어부들이
독도와 “울릉도에 상륙해서 움막” 을 짓고 어업과 산림 벌채를 했기 때문으로 보지만.... 억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