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명 ( 正命 )
우리의 육체는, 인생 항로를 건너는 배이며,
이 배의 지배자는 의식, 즉 혼이다.
이 혼은, 신불의 자식으로서의 본성이며,
우리는 신의 몸속에 있는 것이다.
이 현상계에 있어서,
영원한 전생 윤회 속에서 만들어 온 <업>의 상념은,
우리의 의식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신의 자식으로서 올바른 상념에 의해 조화하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업(業) 상념이란,
우리가 항상 마음속에 상상하고 있는 부조화한 자기 보존, 자아아욕의 모습이며,
과거세에서도 계속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행위로 연결되어 가는 것인데,
자신이 반성하는 것에 의해 찾아내는 것이 가능한 결점이다.
또 조화도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에 의해 미혹된다.
과거세의 악업(惡業)의 씨도, 그러한 미혹으로부터 일어난다.
마음은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의식의 중심으로서,
자기 자신에게는 절대적으로 충실하며,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은, 타인에게는 형편이 나쁘면 거짓말을 한다.
그러한 자기 보존에 의해, 보다 큰 업을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인 겉모습만으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올바르게 보는 마음의 수행,
그러한 자세로 정확한 판단을 하고,
중도의 사고로부터 나온 조화의 마음에 의해,
결론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
가령 남의 수군거림을 들어도,
자기 자신이 그 원인과 결론을 판단하는 생활이 필요하고,
육체의 오관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육체적인 여러 현상만으로는,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올바른 신리에 맞는,
각인의 마음의 깨달음이 사회집단을 구성하고,
그 속으로부터 조화된 상호관계가 생기는 것이다.
올바른 생활 속에서,
타인에 대한 조소, 원망, 질투, 비난, 노여움 등의 생각은 사라져 간다.
대자연의 무한의 자비에 대해서의 보은의 마음과 행위가,
평화로운 안심의 빛을, 사람들 위에 현상화하여 가는 것이다.
신불은 만생만물을,
이미 인류 수행의 장으로 부여해 주었으므로,
기도보다는, 감사의 생활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자기 자신의 혼이,
실천 행위에 의한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신리에 맞는 수행은 불가능하다.
즉 수행은,
1초 1초 연속되는 올바른 생활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사, 불각에 가서, 신불에게 기도하는 것이,
신앙은 아닌 것이다.
기도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가지는 것이 진짜 신심이며,
신불의 마음을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해서 생활하는 가운데에서
비로소 그 마음의 존엄을 깨닫고,
마음의 눈이 열려, 관자재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과학자가 과학을 통해서, 예술가가 예술을 통해서,
문학자가 문학을 통해서, 스포츠맨이 스포츠를 통해서,
얻은 신리(神理)도, 신(神)으로 통하는 것이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 인간답게 조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짜의 신리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학문화된 철학적 종교는 실천이 부족하다.
신리를 깨닫지 못하고 좌선을 해도,
번뇌를 멸하기 위한 육체 고행을 해도, 무의미하다.
신리를 깨달아 실천하는 가운데에 진짜의 생활이 있다.
그 신리는, 자기 자신의 생활환경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 자세야말로 진짜의 신심(信心)이다.
생활과 결부되지 않은 신앙은,
모두 종교로서의 존재가치는 없다.
그것은 정법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고,
생활의 부조화가 초래한 것이며,
책임은 남에게는 없다.
그 원인을 찾아서, 그 뿌리를 제거하는,
마음의 반성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매일의 생활이 조화되면,
언제나 신불의 빛에 의해, 보호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불행은
오지 않는다.
행복은 올바른 생활의 실천 가운데, 쌓여가는 것이다.
(주; 팔정도는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설법하신 것,
고집멸도 ; 고통을 멸하는 도(道))는 팔정도이다.
다시 말하면 잘못 생각하여 생기는 괴로움, 고뇌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정사(正思)로써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가르침이지요.
만약 고집멸도의 고(苦)는 무엇인가요, 하고 부처님께 묻는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실까요.
이 세상에, 괴로운 고(苦)는 사람 머릿수만큼 많다.
사람마다 괴로움이 다르지 않느냐..
나는 괴로운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고,
괴로운 것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주러 왔으니,
너의 괴로움은 무엇이냐,
올바른 팔정도의 길을 찾아라라고 하실 것입니다.)
원문 : 다카하시신지님의실천!팔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