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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네 삶 속에 때로 결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마음은 아직도 이팔청춘인데, 어느덧 세월에 흐르고 흘러버렸습니다. 그래도 제 혈관 속에는 살레시안의 푸른 피가 뛰고 있기에, 청소년 사목자로서 아이들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지만, 그게 참 여의치 않습니다.
정년이 지나면서는 청소년 시설이나 청소년 사목 현장에 남아 있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남아 있는다 치더라도 세월의 간극, 문화적 차이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좌절감이랄까 우울감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청소년 사목자로서 반드시 아이들 앞에 서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본격적인 청소년 사목터에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다른 형식으로 청소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일종의 사목적 회심이라고나 할까요. 찾아오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것, 아주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환한 얼굴로 인사하고, 환대하는 것도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예초를 하고, 꽃나무를 심는 것도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예초기를 돌리면서, 돈가스를 튀기면서, 안전 요원으로 보트를 운행하면서,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도시를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 21-22)
회개라는 것은 사도 바오로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처럼 아주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삶의 전환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의 회개도 있습니다.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되풀이해야 할 일상 안에서의 회개입니다. 우리가 매일 행하는 수많은 일들, 사건들, 만남들은 일상적인 회개를 위한 좋은 계기입니다.
오늘도 저는 신나게 예초기를 돌리면서 또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초기를 등에 지고 허리춤보다 높은 잡풀들을 시원시원 날리다 보니, 기분이 좋았지만,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습니다. 한 시간쯤 돌리다 보니, 더위와 갈증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다 벗어놓고 야외 식당 그늘에 잠깐 앉았습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맥주 하나를 꺼내 땄습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던지 원샷으로 끝냈습니다. 그 순간은 일종의 작은 천국 체험이었습니다. 모든 세포, 모든 기관과 장기를 통해 시원함을 받아들이는 그 맛이란...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몰려왔습니다. 우리네 삶 속에 때로 결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결핍을 느껴봐야 풍요로움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때로 갈증과 허기가 있어야 삶이 더 단단해집니다. 큰 병고를 겪으면서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가 회심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이사야 7,1-9 마태오 11,20-24
은총이 많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
어떠한 판단을 내릴 때, 배가 부를 때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배고플 때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배가 부르면 교만해져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판단을 할 때 될 수 있으면 배가 고플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세상은 이전보다 많이 배가 부른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하는 선택들 때문에 결국 자멸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남태평양의 이스터섬이 있습니다.
비교적 높은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던 이스터섬은 1,200년을 전후해 인구가 2만 명에 이를 만큼 번창했었습니다.
그러나 1722년 이들을 처음 본 네덜란드인들은 이스터섬이 황량한 모래로 가득 차 있었으며
3,000명 정도의 원주민들만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왜 풍요롭기만 했던 이들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일까요?
바로 높이가 20미터에 이르고 무게가 90톤이 되는 정교하게 조각된 거대 석상인 모아이를 운반하기 위해 수많은 나무를 베어 숲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사라지자 섬이 황폐해졌고 겨울엔 땔감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더 문제였던 것은 나무가 없으니 물고기를 잡을 카누도 만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풍요로울 때 거대한 석상들을 만들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 했고 그것이 멸망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나라나 모든 개인은 이런 식으로 망합니다.
인간은 배부를 때 어리석은 생각을 많이 합니다.
동식물이나 자연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오쩌둥은 1949년 정권을 잡았을 때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당시 중국은 보건 문제가 심각하여 콜레라, 흑사병,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그래서 ‘제사해 운동’을 시작합니다.
모기와 쥐, 파리와 참새를 박멸하려는 노력입니다.
모기는 말라리아를 퍼뜨리고, 쥐는 흑사병을, 파리는 성가시니까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새는 한 마리당 곡식을 4.5킬로그램이나 먹어치웠습니다.
전쟁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쥐 15억 마리, 모기 1,100만 킬로그램, 파리 1억 킬로그램, 참새 10억 마리가 소탕된 것입니다.
그런데 참새 10억 마리가 먹어야 할 해충들이
득실거리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메뚜기 떼가 구름처럼 중국의 곡식들을 싹쓸이하였습니다.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중국에 대기근의 큰 원인이 이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1,500만 명, 많게는 3,0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교만해지면서 자연을 마구 훼손하게 되었고 그렇게 자신도 피해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능력이 향상돼서 자연을 좌지우지하게 될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인간이 잘살게 된 것은 많은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 바로 뒤에는 멸망이 따라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은총이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은총은 죄에서 벗어나라고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선물들을 받으면서도 더 큰 죄로 빠져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를 꾸중하십니다.
당신께서 많은 은총을 부어주셨음에도 그들은 더욱 악한 길로 빠져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소돔’ 이야기를 하십니다.
소돔도 당시 있었던 도시 중에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동네입니다.
먹고 살 걱정이 없었고 심지어 두 천사가 다른 동네엔 안 들어가도 그 동네엔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 충만의 바로 뒤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은총이 충만할수록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합니다.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배고플 때 나쁜 짓 하는 것보다 배부를 때 더 많이 하고 더 크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은총을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은총을 주시면서도 그 결말이 안 좋을 것을 아시고 지금도 경고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더 잘살게 될수록 더 악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은총이 많은 시대에 멸망이 아닌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돔 꼴을 당합니다.
은총을 부여잡고 롯처럼 이 어리석음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카파르나움, 코라진, 벳사이다도 풍족한 동네였지만 지금은 돌무더기만 남아있습니다.
은총이 많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우리는 은총이 충만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언제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배부를 때를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1,20-24: 회개하라
오늘 복음에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았지만 믿음도 회개도 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애태우는 슬픔이 서린 탄식의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지방은 띠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많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거절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게 된다면, 우리도 유다인들과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이렇게 참으로 중요하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23절). 예수님의 자비와 기적과 행적으로 하늘까지 들어 올려지는 특혜를 받았건만, 그들은 믿지 않았기에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회개했더라면 이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 나아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일어났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들의 사악함을 드러낸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24절). 이 고을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언어장애인들이 목소리를 찾아 주님을 찬양하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걸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났지만, 그처럼 놀라운 기적들로도 믿음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티로와 시돈에서도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발견된다.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주님께서 몸소 그곳에 가셨는데도 그분을 믿지 않았지만, 티로와 시돈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었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 예수께서 소돔에 대해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소돔에 빗대 이 고을들의 죄를 강하게 따져 묻기 위해서이다. 이 고을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시어 오래 머무신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회개로 부르시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러기에 올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지 못하면, 주님께서는 이 고을들에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먼저,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7/15)부터 27일까지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장소는 튀르퀴에, 그리스 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분의 열정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래서 새벽묵상글이 순례 일정 때문에 불규칙적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7월 28일 주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새벽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여기에 사과 4개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과 4개 있다는 것을 설명해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막막하실 것입니다. 사과가 그냥 4개 있을 뿐인데 여기에 무슨 설명을 할 수 있을까요? ‘사과 1개와 사과 3개가 모여서 4개가 된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과 반쪽 2개와 사과 3개가 모이면 4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수학적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숫자상으로는 5개의 사과가 아닐까요? 간단해 보이지만 설명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사과도 설명하기 힘든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설명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하느님 존재에 대해 우리는 그냥 아는 것일 뿐입니다. 증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증명하려 할수록 그 모호함에 갇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입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감으로 확인하고 지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느님을 믿겠다는 사람은 어떻게든 믿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많은 성인 성녀는 이 신 존재 증명에 대해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방법 없음’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분명히 공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공기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공기가 없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내가 숨 쉬고 있음이 공기가 있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음 자체가 하느님이 계신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서 많은 기적을 일으켰던 고을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적을 직접 보고 직접 체험했어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 모든 기적을 그저 자기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그 모습에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같이 있는 하느님을 느낄 수 없었고, 그 결과 하늘에 오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께서는 많은 사랑으로 함께하십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또 들리지 않는다고 주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과거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불행하여라.”라는 예수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의 삶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명언: 당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결심하는 그 순간이다(앤서니 라빈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마태11,20)
주님께서
은총을 많이 받은 이들을
꾸짖으시는 이유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은총이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문으로 이끄시는 데 필요한
회개의 권고이므로
은총으로
너무 들떠서
우쭐대기만 하다가는
닫힌 문 앞에서 슬퍼하게 된다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 24)
예수님의
지고한 가르침은
우리의
회개와 복음의
삶입니다.
우리자신의
회개가 있어야
복음은 생명력을
다시 얻습니다.
지극한 주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이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며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기적의 삶이란
다름 아닌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의 삶은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삶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삶의 변화입니다.
회개할 줄 아는
삶의 변화는
생활 속에서의
올바른
실천입니다.
회개는 겸손을
겸손은 배려를
배려는 공동체의
행복을 불러옵니다.
회개를 통해
다시 행복해진
우리들이길
바라십니다.
복음을 향한
발걸음은
회개의
발걸음입니다.
지나간 시간의
아픈 반성은
다시
살아갈 시간의
절박한 다짐과
새로운 변화로
이어집니다.
사람의 변화는
공간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삶이
심판이 아닌
하느님의
축복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회개를 청하는
오늘입니다.
우리의 회개가
하느님의
가장 큰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소돔의 디딤돌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축복의
디딤돌 위에
서 있는
우리들입니다.
마음을 고쳐먹는
지극한
오늘입니다.
오늘이
하느님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오늘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마태11,20)
'돌아와라!'
오늘 복음(마태11,20-24)은 '회개하지 않은 고을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그 고을들이 예수님을 통해 은총을 충만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판관기를 필사 중입니다. 작년에 신.구약 성경을 완필하고, 지금은 다시 두번째 신.구약 성경을 필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약성경을 먼저 필사하고, 그리고 이어서 구약성경을 필사합니다. 주로 자투리 시간들을 이용해서 필사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말합니다. '성경필사 중독증'도 있다고. 그래서 한번 완필 하면 계속 필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매일 조금씩 성경을 필사해 봅시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 전하고 있는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나면 죽음이고, 돌아와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되면 살게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73권의 성경 전체가 반복적으로 전하고 있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가장 큰 기쁨'은 '몸과 마음으로 떠나있었던 하느님의 자녀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를 벗어버리고, 죄스러운 상태를 벗어버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 중에 복음', '기쁜 소식 중에 기쁜 소식'이라고 불리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탕자의 비유)'가 이를 전하고 있습니다. 집 나간 작은 아들이 돌아오니 큰잔치가 벌어집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15,21.23-24ㄱ)
힘을 내어봅시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도록 힘을 내어봅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7,1-9
1 우찌야의 손자이며 요탐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아람 임금 르친과 르말야의 아들인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2 아람이 에프라임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
3 그러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마전장이 밭’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나가서
아하즈를 만나, 4 그에게 말하여라.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5 아람이 에프라임과 르말야의 아들과 함께
너를 해칠 계획을 꾸미고 말하였다.
6 ′우리가 유다로 쳐 올라가 유다를 질겁하게 하고 우리 것으로 빼앗아
그곳에다 타브알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자.′
7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8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9 에프라임의 우두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우두머리는 르말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