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에 우리나라에 통일국가였던 통일신라는 국가 최대의 전성기를 이루었지만, 귀족과의 갈등 등 내부 반란 등으로 인하여 완권은 쇠약해지고 정국은 혼란에 빠지면서 통일신라는 바람잘 날 없는 난국으로 이어졌다. 결국 국세가 약해져 있던 통일신라는 국방이 어렵고 기울어 졌던 경순왕은 고려 완건에게 대사를 본 항복을 받아 들이며 경순왕은 전쟁 없이 순수하게 나르를 넘기기에 이르렀다. 이때가 서기 992년.
훗날 왕건은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과 결혼시켰고, 경순완 사촌누이는 왕건과 결혼하여 4부인 신성왕후김씨이다. 그리하여 경순왕은 왕건의 사위가 되었으며 고려 3대 정종과 4대 광종이 모두 낙랑공주와 친 남매간이니 처남매부지간인 것이다.
신라 경주를 벗어난 유일한 왕릉인 경순왕릉은 경기도 서북쪽 접적지역인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소재하고 있다. 올리는 이는 수 년 전 경순왕릉을 일반인에게 공개한다기에 아내와 함께 견학을 간 적이 있고 서울에서도 거리가 멀지 않아 교회성도나 지인 몇 명이서 주말 나드리 코스로 자주 다녀 오곤 했다.
위치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2에 소재하고 있으며 서부지역은 자유로나 통일로를 거쳐 적성면에서 우회전 하면 되고, 서울이나 근교에서는 이정부를 거쳐 새로 난 확장된 국도를 이용해 설마리를 경유 적성으로 들어오면 쉽게 접근 할 수 있다. 경순왕릉은 지리적으로 비무장지대 안에 있지만, 민간인 통제는 하지 않는다. 입장료는 없으며 나들이 객이 많이 오면 간단하게 나마 파주시에서 나와 왕릉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인근에 가볼 만한 곳으로는 일전에 소개한 감악산과 감악산 출렁다리도 갈 수 있다. 승용차로 1분 거리다. 또한 적성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가면 아무래도 접적지역이라 관광지라기 보다는 안보적인 면에서 보아야 하겠다. 연천방향으로 가다 보면 군에서 관리하는 태풍전망대와 열쇠 전망대를 가볼 수 있으며, 북으로 향했던 경원선 열차역인 연천역과 대광리역, 그리고 신망리역 다음 최종역인 백마고지 역이 역사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고대산 정상에선 북한지역인 평강고원이 보인다.
귀부한지 43년 만인 978년(고려 경종3년), 왕건보다 35년을 더 살고 경순왕이 승하하니 소식을 접한 신라 유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었으며 경순왕의 운구를 모시고 장례를 치르러 경주로 가려는 행렬이거리를 가득 메웠지만 이쉽게도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운구행렬은 정지된다.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계기로 혹여나 신라 유민들이ㅗㅇ요하거나 민중 봉기가 있을까 우려한 고려 조정은 "왕의 구(시신)는 도성에서100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국법이라며 운구행렬을 멈춰 세우니 그 장소가 지금의 임진강 고랑포 못미쳐이며 결국 경순왕은 더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근처 나지막한 언덕에 모셔졌다. -자료-
이렇게 생각지 못한 곳에 묻히게 된경순왕릉은 임진왜란 이후 실전(失傳)되고 말았는데 1727년(영조3년)에 후손이 "경순대왕장지"라는 6자가 새겨진 지석을 발견하고 상소를 올려 왕명으로 릉(陵)을 정비하고, 장단부(長湍府)에서 제향(祭香)을 올리도록 했다.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다시 잊혀졌는데 왕릉이 위치한 이곳에 휴전선과 가까운 민간인통제선 안에 위치한 까닭에 사람들의 발길이 멀어졌던 까닭이다. -자료-
79년 경순왕 릉 앞에서 군복무할 땐 왕릉 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했지요 1년에 한번 시사철이나 돼야 사람 구경을 하던 민통선 달랑 표석 하나 뿐이었는데 ~ 작년에 다녀와 보니 사진 처럼 잘 꾸며져 있더군요 출입 금지란 표시가 있지만 수십년 만에 찾아갔으니 경계를 넘어서 예를 올리고 온적 있답니다
첫댓글 6.25전쟁때 격전지였는지 비석에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이곳에 주둔하며 근무했던 1973년 어느 중대장에 의해 발견 되어
잘 보존 관리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귀부한지 43년 만인 978년(고려 경종3년), 왕건보다 35년을 더 살고 경순왕이 승하하니 소식을 접한 신라 유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었으며 경순왕의 운구를 모시고 장례를 치르러 경주로 가려는 행렬이거리를 가득 메웠지만 이쉽게도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운구행렬은 정지된다. 마지막 임금의 죽음을 계기로 혹여나 신라 유민들이ㅗㅇ요하거나 민중 봉기가 있을까 우려한 고려 조정은 "왕의 구(시신)는 도성에서100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국법이라며 운구행렬을 멈춰 세우니 그 장소가 지금의 임진강 고랑포 못미쳐이며 결국 경순왕은 더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근처 나지막한 언덕에 모셔졌다. -자료-
이렇게 생각지 못한 곳에 묻히게 된경순왕릉은 임진왜란 이후 실전(失傳)되고 말았는데 1727년(영조3년)에 후손이 "경순대왕장지"라는 6자가 새겨진 지석을 발견하고 상소를 올려 왕명으로 릉(陵)을 정비하고, 장단부(長湍府)에서 제향(祭香)을 올리도록 했다.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다시 잊혀졌는데 왕릉이 위치한 이곳에 휴전선과 가까운 민간인통제선 안에 위치한 까닭에 사람들의 발길이 멀어졌던 까닭이다. -자료-
왕릉치고 규모도 작고 초라한 능이라 몰락한 신라를 느낄수 있는 곳입니다.
허께비님! 안녕하세요.
돌풍으로 우당탕 난리치는 하루였습니다. 돌품으로 오는 봄을 시샘하더군요.
역대 신랑 왕릉에 비하면 작은 규모죠. 근데 아담한 모습이더군요.
나라가 몰락해 갔던 당시에 모습을 느낄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연천군에서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따뜻하기 시작하면 관광버스도 오면서 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더군요. 맹호
경순왈릉에대한이야기 잘보고갑니다 3월이 시작되엇지만 찬바람이부네요
좋은 3월달맞이하세요
봄의 소식 함께 기다리며
좋은 일 만 기대합니다. 맹호
예. 놀부짱님. 안녕하세요.
비룡부대 철책 근무 하셨어요?
작지만
차분하게 잘 관리되고 있더군요.
관광객들도 적당히 오고,
봄엔 파릇파릇 잔디에 청량함도 있구요
79년 경순왕 릉 앞에서 군복무할 땐
왕릉 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했지요
1년에 한번 시사철이나 돼야 사람 구경을 하던 민통선
달랑 표석 하나 뿐이었는데 ~
작년에 다녀와 보니 사진 처럼 잘 꾸며져 있더군요
출입 금지란 표시가 있지만 수십년 만에 찾아갔으니
경계를 넘어서 예를 올리고 온적 있답니다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