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124. 묵상글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말씀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 등 )
----------------------------------------------------
24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말씀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씨 뿌리는 이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씨 뿌리는 분이시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씨 뿌리는 사람이라면’이란 생각을 문득 해봤습니다.
내가 씨 뿌리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뿌렸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주님께서 씨 뿌리신 것을 묵상한 것입니다.
저는 아무 데나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말을 합니다.
내 말을 들을 사람에게만 말을 합니다.
제 말이 하나도 길바닥의 씨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제 말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거나 씨부렁거리지 않는 편입니다.
제 말을 제가 무척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또 말을 빨리하지도 않고
강의할 때는 적당한 말을 찾다 보면 많이 더듬습니다.
잘 알아들으실 수 있게들 하려는 마음 곧 사랑이기도 하지만
제 말이 하나도 길바닥의 씨처럼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데 다시 말해서 하찮기 이를 데 없는 말인데도
하나도 길바닥의 씨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아끼는데
주님은 당신의 그 귀한 말씀을 아끼지 않고 길바닥에도 뿌리시는 분이십니다.
낭비입니까?
사랑입니까?
사랑이지요.
사랑하는 엄마들이 잔소리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같은 부모여도 아비는 잔소리하지 않는 편이고요.
길바닥에도 뿌리시고 돌밭에도 뿌리시고 가시덤불에도 뿌리시는 사랑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같이 비와 빛을 주셔도 악인은 반기지 않고 선인은 반기는 것이 차이라면,
같이 비와 빛을 주셔도 열매를 많이 내는 사람은 선인이고,
아무 열매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악인이지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인가?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인가?
이것이 선인과 악인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 말씀을 반기는가 반기지 않는가, 이것이 선인 악인의 기준이요,
열매를 많이 맺는가 맺지 못하는가가 기준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
24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20)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20)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선사된 것’(datum)이요, ‘먼저 베풀어진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열매를 맺는 권능 곧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선물인 ‘말씀의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고, 우리의 소명은 그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자신이 죽어야 맺는 일이요, 또한 그 열매는 자신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열매’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게 됩니다. 곧 형제들과의 관계가 열매를 맺는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가 됩니다. 그러니 내 형제, 내 공동체, 내 나라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아를르의 체사리오는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한편,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일구어집니다. 사실, 그 땅은 씨앗이 없다면 쓸모없는 땅인 것입니다. 단지 황무지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밭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씨앗이 거룩하고 씨앗으로 말미암아 밭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먼저 알아야 할 일은 밭에 씨앗이 선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의 존재를, 그 가치를 깨닫는 일이요, 그 베풀어진 씨앗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땅을 지배하려들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밭에서 일할 줄 알며, 땅의 노래를 하늘과 함께 부르는 사람이요, 동시에 하늘의 노래를 땅과 함께 부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갈라놓거나 파헤치지 않으며, 땅을 매만지며 피땀 흘려 자신의 지문을 새기는 사랑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주님의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요,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소서!
말씀이 지금 여기, 내 형제와 더불어 내 공동체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르 4,20)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땅을 지배하지도 윽박지르지도 않으며
하늘을 쳐다보며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씨앗의 소명을 도와주며 열매를 맺어가는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런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
24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의 열매
어떤 열매이든 얻으려면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가꾸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습니다. 혹 씨를 뿌리더라도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더욱 햇볕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안배가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살지 않으면 구원의 열매는 맺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희망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은들 그 씨앗이 떨어진 토양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한 토양이 좋다고 해도 씨앗이 좋지 않으면 역시 기대하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풍요롭고 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좋은 씨앗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토양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더없이 좋은 밭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풍성히 맺어지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부와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 나눔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방식이 전혀 스며들지 못함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 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말씀 안에 꾸준히 머무르면서 그 말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다른 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수능이나 혼사 등 여러 일이 다가올 때 성당을 찾지 않고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밖의 여러 가지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온갖 종류의 가시덤불, 진학, 결혼, 명예, 더 좋은 것, 미래에 대한 여러 걱정 등 욕심의 가시덤불은 말씀을 따르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때만 좋은 것으로 인정될 뿐입니다. 가시덤불은 걱정과 욕심,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지니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늘 최우선에 두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 희망,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등경 위의 등불처럼 세상을 환히 비추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자신과 다른 이에게 유익을 줍니다.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이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결코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7가지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거두려면 먼저 씨를 뿌려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씨가 뿌리를 내리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과 제공시기 및 방법을 파악하라.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곧바로 거둘 수 없다. 제공 했다고 해서 즉각 그 결과를 기대하지 마라.
4. 뿌린 씨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10개를 뿌렸다고 10개 모두를 수확할 수는 없다. 모든 일에 성공만 있기를 기대하지 마라.
5. 뿌린 것보다 더 많이 거둔다. 모든 씨앗에서 수확을 못해도 결국 뿌린 것보다 많아 거둔다. 너무 이해타산에 급급하지 마라.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손해를, 이익을 주면 이익을 얻는다. 심는 대로 거둔다.
7. 종자는 남겨 두어야 한다. 수확한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 두어야 한다. 받았으면 다시 되갚아라. 유비무환, 고진감래!
----------------------------------------------------
24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성지미사를 많이 봉헌했습니다. 여행사와 현지 안내를 맡은 분이 매일 미사가 봉헌되는 성당을 미리 예약하였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가 많았습니다. 성당은 규모만큼이나 이야기도 많이 간직하였습니다. 그 성당에서 살던 분들이 성인이 되었고, 그 성당에서 기도하였을 때 많은 치유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성지순례에 함께 한 교우들은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순례의 의미를 돌아보았습니다. 순례 중에 예기치 못하게 성당이 아닌 곳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버스 안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버스가 성전이 되었고, 버스의 좌석이 신자석이 되었고, 운전석 옆에 임시로 세워든 박스는 제단이 되었습니다. 해가 지는 오후에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광야에 있던 바위가 제단이 되었습니다. 햇살을 머금은 언덕은 감실의 등이 되었습니다. 시나이 산의 정상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어둠을 밝히며 떠오르는 태양은 제단을 환하게 비추는 성당의 조명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주님의 사랑은 미사가 봉헌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정성과 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의 진심이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은 곳에 투자하면 높은 수익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몫이 좋은 노른자 땅에 투자를 하면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노른자 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개발계획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맹지에 투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수익이 떨어지게 됩니다. 싼 맛에 손님이 없는 가게를 인수하면 더 큰 손해를 감수하고 되팔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였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의 수가 늘어나면 좋은 씨가 뿌려져 열매 맺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은 성당 분할계획을 발표하기도 하고, 성전 신축을 잘 하는 사제를 능력 있는 사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붉은 빛의 십자가와 예배드리고 나오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교구장님은 ‘2020’을 선포하기도 하셨습니다. 2020년에는 인구대비 신자비율이 20%가 되게 하자는 취지의 말씀이셨습니다. 본당 사제의 인수인계에도 숫자는 중요합니다. 영성체 수, 세례자 수, 교우 수, 교무금, 헌금, 본당 재정도 모두 숫자로 표기됩니다. 많으면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고인이 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예수님의 비유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문제는 신자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기에 위기가 생기고, 기도와 전례에 대한 미지근한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선교를 등한시 합니다. 참된 개혁은 내적인 각성, 불타오르는 마음에 관한 문제로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일은 그리스도께 대해 확실히 깨닫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의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가 각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가 늘어나는 것은 밀물과 썰물처럼 변하기 마련입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어서 교회가 사라진 것 같이 보였지만 말씀에 변화된 사람들이 있을 때는 교회는 다시 세워지고, 공동체는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계몽주의와 자본주의가 우리 시대를 압도할지라도 말씀에 변화된 사람들이 있을 때는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해서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변하면 그만큼 세상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
24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묵상을 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에 떨어진 씨앗도 참으로 안됐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도 참 안됐다. 가시덤불이 떨어진 씨앗도 참 안됐다. 좋은 땅에 떨어지고 싶었을 텐데….
주인도 참 그렇습니다. 기왕 뿌릴 거면 길이 아닌 곳에 뿌리고 돌밭 아닌 곳에 뿌리고 가시덤불 아닌 곳에 뿌리면 안 됐을까.
씨앗의 주인이 조금 더 신경 써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가끔 엉뚱하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물론 오늘 복음은 씨를 뿌리는 주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씨앗을 받는 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밭에 좋은 씨앗을 뿌리시는데 우리 밭의 모양이 다들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밭에는 길도 있고 돌밭도 있고 가시덤불도 있습니다. 길은 세상적인 곳입니다. 세상에 물들어 있는 것을 표현합니다. 돌밭은 중간마다 굳어 있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말랑한 곳도 있지만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우리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덤불은 그 상처와 아픔이 분노와 미움이 되어 누군가에게 나와 같은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우리 모습입니다.
이곳에 씨앗이 떨어지면 모두 금방 죽어버립니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씨앗을 길이 아닌, 돌밭이 아닌, 가시덤불이 아닌, 말랑하고 포근하고 따뜻한 마음 밭에서 키워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는 좋은 밭도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
눈에서 빛이 나는 사람
얼마 전 오랜만에 선배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간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현재의 일들도 이야기했습니다.
그 모든 순간순간 선배 신부님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살아있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삶의 행복을 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곳에 머무르고 계셨습니다.
잠시 저를 제가 바라봅니다.
주님을 담아내고 있는지,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채우고 있는지 말입니다.
----------------------------------------------------
24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의사소통이 힘들어집니다. 물론 손짓과 발짓, 그림을 그리거나 몸짓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표현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하겠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잘 맞는 부부도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부부보다도 금실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니까요.”
이 부부에게 언어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사랑의 언어로는 일치했던 것입니다. 사실 맞지 않는 이유를 계속해서 찾았던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상대와 맞는 이유만을 찾으며, 또 이 안에서 상대에게 감사를 자주 표현합니다. 단순히 지금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의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일치와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같은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용하셨던 아람어를 우리도 써야 할까요?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써야 할까요? 그런 언어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 주셨던 사랑의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셔서, 당신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언어를 우리 역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비유로 자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깊은 뜻을 쉬운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면서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길에 떨어진 씨앗, 돌밭에 떨어진 씨앗,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있습니다. 모두 좋은 씨앗이지만, 어떤 땅에 떨어지는가가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이라는 좋은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려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좋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언어를 쓰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가 되어야,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들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일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과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었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니까요.”
-------------------
오늘의 명언: 사랑은 파도보다 위대하고 두려움보다 강하다. 나는 팔이 두 개일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인생도 서핑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파도 밑에 처박혀도 곧바로 일어나야 한다. 파도 너머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믿음이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베서니 해밀턴)
----------------------------------------------------
24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내 삶의 성경 ‘렉시오 디비나’하기-
결국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대서사시인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의 궁극목표는 오늘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입니다. 어떻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명실공히 믿는이들의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은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둠의 혼란 중에 길을, 희망을 잃고 방황할 것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홈페이지에서 읽은 영어 한 문장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Christ is password for a happy life”
(그리스도는 행복한 삶의 암호이다)
하느님은, 예수님은 행복한 삶의 암호, 즉 열쇠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없이, 예수님 없이 참 행복은 없다는 것이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오늘 사무엘 하권의 다윗과 복음의 예수님에게, 그리고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로에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배우게 됩니다. 전쟁으로 찢겨진 세상에서 ‘기도는 믿음의 호흡(Prayer is breath of faith)’ 이라는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위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 삶의 좌표이자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은 성인들의 삶을 대하면 늘 감동하게 됩니다. 성인들의 삶 역시 한결같이 모두가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말그대로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한평생 순교적 삶을 산 성인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55세로 뇌졸중으로 선종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마지막 임종어 역시 감동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예수, 나의 하느님, 나의 모든 것!”
임종어가 성인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했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다윗의 삶에 주인공은 자신임을 밝히며 그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을 통해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렉시오 디비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장의 주어가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그 문장의 일부만 인용합니다.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말하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결코 믿는 이들의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서 하느님이 해주신 섭리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참된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해주면서 다윗의 무지를 밝혀주시는 나탄입니다.
우리 역시 내가 원해서 요셉 수도원에 온 듯 하지만 하느님 친히 인도해 주신 하나하나 수도형제들이 하느님 섭리의 역사임을, 모두가 대체 불가능한 “신(神)의 한 수(手)” 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요셉수도공동체요, 믿는 모든 이들 역시 깊이 들여다 보면 이와 똑같이 신의 한수같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비유의 해설은 늘 읽어도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삶을 엿볼수 있을뿐 아니라 우리에게 삶의 길을 환히 밝혀주십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을 들어라.” 외치시며 깊이 경청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앞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그대로 예수님의 한결같은 삶의 자세를 밝혀줍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명언도 생각납니다. 환경이든, 누구든 탓하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신망애(信望愛) 삶의 자세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우보천리(牛步千里) 한결같이, 묵묵히 씨뿌리는 삶에 전력해온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보여주는 예수님입니다. 말그대로 정주영성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결국은 어떻습니까? 짧은 안목으로 실패인 듯 하지만 주님의 긴 안목으로보면 성공인생임을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을 들어라.”
저 역시 날마다 묵묵히 말씀을 씨뿌리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참 많이도 뿌렸네요.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내고 수확될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날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때 어디선가, 언젠가는 열매를 낼 것이며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좌절함이, 절망함이 없이 항구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씨뿌리는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절망은 없다!”입니다. 지성이며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느자를 돕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후반부 내용은 우의적 해설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말씀이 아니라 토양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밭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과연 길바닥 같은 마음밭입니까, 혹은 돌밭, 가시덤불 같는 마음밭입니까? 이런 마음밭들이라면 오늘 복음의 후반부 해설에서 보는 것처럼 좋은 수확은 어불성설입니다. 참으로 “말씀의 평생 학인”이 되어 말씀수행과 실천에 항구했던 참 좋은땅의 마음밭을 지닌자들의 수확은 얼마나 경이로운지요!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말씀을 받아들여, 어떤이는 서른배, 어떤이는 예순배, 어떤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정말 이런 이들이 렉시오디비나의 달인들이자 대가들이요, 예수님을 위시한 성인들이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특히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공부하면서 저는 놀랐습니다. 17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인들중 가장 위대한 최고의 성인이라 합니다.
‘온유함의 성인’, ‘신사성인’이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탁월한 평온과 온유는 본래 타고난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온화함과 밝은 마음, 그리고 친절함이 일상적 행동 양식이 되기까지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고의 수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인은 “나는 내 과격한 성격을 극복하는데 20년이 걸렸다” 고백하는데, 말그대로 은총에 협력하여 지칠줄 모르는 항구한 노력으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척박한 마음밭을 20년동안의 노력으로 옥토의 마음밭으로 바꿨다는 것이니 정주영성을 사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경청해야할 성인의 삶입니다.
그의 불후의 작품이 ‘신심생활 입문’, ‘신애론’, ‘영적담화’중 평신도들을 위한 신심생활입문은 수도자들이 애독했던 준주성범과 쌍벽을 이룬 작품이라 합니다. 성인은 무엇보다 성성에의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습니다. 모든 이가 성인으로 불리었다는 보편적 성소는 400년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천명됩니다. 성인의 영적 가르침이 참 유익하고 심오합니다.
첫째는 애덕입니다.
완덕에 이르는 최고의 길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며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사랑입니다.
둘째는 온유의 덕입니다.
성인은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마디로 남겨주신 중요한 교훈을 잊지 마십시오.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본받으시오. 이것이 모두입니다. 이웃에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며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는 경건한 생활입니다.
참된 신심은, 영성은 비상한 은총이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이들은 준엄한 생활을, 절식을, 자선을, 묵상기도를 덕행이라 생각하고, 어떤이들은 수동적이고 탁월한 관상기도에, 무상으로 받은 특은을 덕행이라 하는데 이들은 모두 결과를 원인으로, 개울을 샘으로, 가지를 뿌리로 그림자를 실물로 착각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것 말고는 다른 완덕을 알지 못한다.”
넷째는 영성의 다양성입니다.
영성의 다양성이 신심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완덕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고 하느님께 가는 길도 여러 가지라 했습니다.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세상을 떠난 수덕하는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달성해야할 목표임을 강조했습니다.
다섯째, 성인은 감정을 다시 일깨움으로 지성에 치우친 신심행위가 좀더 따뜻한 정감을 되찾도록 노력했습니다.
여섯째, 경건한 인문주의 신심운동의 고취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실재에 대하여 과도한 엄격함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엄격함을 서로 조화시키면서 영적발전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성대가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요 성인의 영성을 계승한 요한 돈 보스코 성인이 설립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수도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인들처럼 하느님 중심의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
24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의 하느님 하느님의 우리>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 4,3)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마르 4,8)
열매를 거두려면
땅을 믿고
씨를 뿌려야지요
열매를 거두기까지
땅을 믿고
씨를 뿌리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이가
좋은 농부랍니다
말씀을 뿌리시는
우리의 하느님은
늘 좋은 농부시지요
열매를 맺으려면
농부를 믿고
씨를 품어야지요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를 믿고
씨를 품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땅이
좋은 땅이랍니다
말씀을 품는
하느님의 우리는
늘 좋은 땅인지요
----------------------------------------------------
24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 4,3)
씨 뿌리러 나가다
이 비유의 뜻은무 엇입니까?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고 합니다.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곳을 채우고 계신 그분이 어디에서 ‘나갔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나가셨습니까? 장소로 나가신 것이 아니라, 삶 안으로 나가셨고, 우리를 구원하신 역사적 섭리 안으로 나가셨으며,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시기 위하여 육체를 받아들이셨다는 말입니다. 죄가 문을 가로막는 바람에 우리가 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분께서 우리에게 나오신 것입니다. 왜 나오셨습니까? 가시 무성한 땅을 파괴하시려는 것이었습니까? 농부들을 벌주시려는 것이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밭을 일구고 돌보기 위해 나오셨고, 믿음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여기서 당신 가르침은 ‘씨’요, 인간의 영혼은 ‘밭’이며, 당신 자신은 ‘씨 뿌리는 사람’이라 일컬으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말씀을 선포하시오(2티모 4,2).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몸의 지체는 저마다 독특한 기능을 하면서 이중의 목적을 알고 있습니다. 지체가 자기 나름의 기능을 하면서 추구하는 첫째 목적은 온 힘을 다하여 몸을 섬기는 것입니다. 둘째, 각 지체는 저마다 자신을 섬깁니다. 지체는 자신의 기능 속에서 다른 지체보다 자신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는 법이 없습니다. 하물며 은총의 왕국에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사랑을 위한 규칙과 토대는 하느님이어야만 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사랑은 순전히 하느님께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의 사랑은 여러분 자신은 물론이고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맞추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여러분을 위하여 지복(至福)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단지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은 여러분의 순수한 사랑의 대상이 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요컨대, 여러분이 베드로 사도와 바울로 사도 안에 있던 지복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은 지복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천사들의 행복을 여러분 안에 있는 행복으로 삼아 사랑한다면, 여러분이 성모 마리아를 여러분 자신만큼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그녀가 누린 것과 똑같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행복은 그녀의 것이기도 하고 여러분의 것이기도 합니다. 어느 지혜서에서 “주님은 그에게 성인의 반열에 끼는 영광을 주셨다”(집회 45,2)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107)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2절: 그레고리오 개혁과 성직 서임권 논쟁
성직 서임권 투쟁:
하인리히 4세 및 그레고리오 7세(1073∼1085)와 더불어 두 개의 대립된 견해를 대표하여 싸움을 끝낼 인물들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 젊은 국왕은 아직도 완전히 오토 • 잘리에르의 “제국신학”에 의히여 형성된 교계적인 교회 안에, 아니 그 꼭대기에 자리가 있는 신성하고 거의 성직자적인 왕권 관념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왕이요 사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힐데브란트라는 이름의 젊은 부제로서 1046년에 폐위된 그레고리오 6세 교황을 따라 그의 추방지인 콸른으로 갔고, 교황의 사망 후에는 클뤼니의 수도자가 되었다. 레오 9세 교황은 1050년에 그를 다시 로마로 불렀다. 이후 그는 개혁을 위하여 활약하였고, 홈베르트 추기경의 사망(+1061) 후에는 교황청 개혁파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사제의 결혼, 성직 매매, 특히 속인에 의한 성직 서임에 대한 투쟁은 그의 계획의 중심이었다. 이 싸움에서 그에게는 왕도 교회의 다른 모든 평신도와 마찬가지로 일개 평신도에 지나지 않았다. 즉, 왕도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교회에 종속되고, 복종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 시대정신에서 왕권의 비신성화를 의마하였다. 교황이 되자마자 그레고리오는 「교황 훈령」(1075)을 발표하여, 교황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고의 우두머리라는 자신의 원리를 정식화하였다. 교황은 주교들의 권리에 간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상위 권한에 근거하여 제왕를보다 위에 있으며, 또 종교적 • 윤리적 이유에서 필요하게 여겨질 경우에는 그들을 폐위까지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들은 처음에는 다만 교회적 • 종교적으로 의도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정치적인 사정 거리는 뻔한 것이었다.(20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