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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동네(Kkottongnae) !
표어 |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
결성 | 1980년 8월 |
설립자 | 오웅진 |
목적 | 복지, 교육 |
본부 | 충청북도 음성군 |
형태 | 비영리 재단법인 |
웹사이트 | http://www.kkot.or.kr/ |
이념 | 로마 가톨릭 |
초대 수장 | 오웅진 |
찬미예수! 사랑 합니다 !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1976년 주머니돈 1300원으로 시작한 꽃동네가 오늘날 이렇게 우람한 사랑의 숲으로 성장했습니다. 인간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사랑)으로 사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시냇물이 모여 큰 강을 이루듯이 우리들의 사랑과 정성과 희생이 모이며 넉넉히 사랑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더 많은 성원과 사랑을 더해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재단법인 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 이사장 오웅진
꽃동네(Kkottongnae)는 비영리 재단법인 '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과 재단이 운영하는 한국 천주교의 복지, 교육 기관들을 말한다. 1976년 11월 충청북도 음성군의 무극천주교회 성당에 새로 부임한 오웅진 신부가 노인 최귀동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目次(목차)
契機(계기)
최귀동은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 돼 병자가 되어 돌아온 자였다.
그러나 30여 년 동안 오히려 움막에 사는 다른 거지와 장애인들을 위해 밥을 얻어다 먹이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웅진은 성당에서 만난 최귀동을 뒤따라 갔다가 이를 목격하고 감명을 받는다.
이에 이들 18명을 위한 '사랑의 집'을 짓는다. 이후 1983년 9월 8일 본격적으로 370평 규모의 꽃동네 요양원을 준공한다. 최귀동은 1986년에도 한국가톨릭대상을 수상하며 받은 수상금 120만원을 꽃동네에 기부하여 '임종의 집'이 세워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施設(시설)
대표적 장소인 충청북도 음성군의 '음성 꽃동네'는 부지가 2만 2500㎡이며 수용 인원은 3,000명이다. 시설 현황은 정신요양원 · 부랑인요양원(1983년 9월 준공), 애덕의 집(1986년 10월 준공), 환희의 집(1985년 10월 준공), 서울시 중랑구의 신내노인요양원(1987년 10월 준공), 충청북도 옥천군의 옥천꽃동네성모노인요양원, 알코올중독요양원·인곡자애병원(1988년 10월 준공), 결핵요양원·심신장애인요양원(1990년 5월 준공), 성빈첸시오 천사의 집(1994년 5월 준공), 사랑의 연수원(1997년 5월 개원)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VkVg1jxNYU
https://www.youtube.com/watch?v=OK8ufRVI048
敎育(교육)
1999년 3월 충청북도 청주시에 '꽃동네대학교'를 개교하였다. 꽃동네대학교는 가톨릭 이념과 꽃동네의 인간존중 사상을 바탕으로한 인재 양성을 위해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시켜 운영중이다. 2011년 7월 12일에는 긴 교명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고자 교명을 변경해 현재에 이르고있다. 학과는 사회복지학전공, 상담심리학전공과 간호학과가 존재한다. 2001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에 '꽃동네학교'를 개교시켰다. 꽃동네학교는 지적장애아와 신체장애아를 위한 사립 특수학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ZJiGIvlODQQ
https://www.youtube.com/watch?v=txDyRGGdstk
施設(시설) 目錄(목록)
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 : 서울시 중구 음성 꽃동네 : 충청북도 음성군, 1976년 개원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 · 자매회 인곡자애병원 가평 꽃동네 : 경기도 가평군, 1989년 개원 요양원 평화의 집 · 온유의 집 노체리안드리 자애병원 강화 꽃동네 : 인천시 강화군 강화꽃동네노인요양원 | 신내노인요양원 : 서울시 중랑구, 1987년 개원 서울꽃동네사랑의집 : 서울시 종로구 옥천꽃동네성모노인요양원 : 충청북도 옥천군 꽃동네학교 : 충청북도 음성군 꽃동네대학교 : 충청북도 청주시 |
論難(논란)
1998년 꽃동네와 설립자 오웅진에 대한 토지의 불법 사유화 논란이 일었다. 이에 횡령, 배임 혐의로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2003년에 6개월 동안 이뤄진 수사에서 꽃동네 관련 부동산이 312만 평이라는 점이 들어나기도 했다. 계속된 법정 공방 끝에 2007년 이 사건은 '무죄' 판결을 받는다.
교황에 방한 시점을 전후로 지하철 광화문역의 지하 통로 한 켠에는 꽃동네 광화문 농성장이 몇달째 상설로 운영되고 있었다. 꽃동네에서 누릴 수 없었던 외부 사회로의 불편한 접근성 보완, 존중받지 못하는 개인적인 일상 생활의 개선이 장애우들에 요구 사항이었다. 결국 2014년 8월 31일 KBS 2TV의 시사교양프로그램 추적 60분에서 오웅진 신부의 꽃동네 유한회사를 통한 횡령, 배임 의혹과 운영상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였다.
같이 보기
脚注(각주)
↑ 손혁재. “역사속 오늘 9/12, 1976 ‘꽃동네’ 오웅진 신부-최귀동 할아버지 첫 만남·2003 태풍 ‘매미’로 119명 사망·2007 아베 총리 사임”. 《아시아엔》.
↑ “프란치스코 교황, 꽃동네에서 받은 선물은?”. 《한국일보》. 2014년 8월 16일.
↑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 '꽃동네대학교'로 변경김을지《세계일보》2011-07-12
↑ 장민혜 (2014년 8월 30일). “‘추적 60분’ 꽃동네, 누구를 위한 왕국인가”. 《뉴스인사이드》.
외부 링크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단체 | |
단체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천주교서울대교구우리농본부 |
비정부 기구 | 천주교 인권위원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
복지 | 꽃동네 ·성 라자로 마을 |
매체 | |
수도원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
교구 | 단체 | 성지 | 병원 | 고등학교 | 대학 |
꽃동네
‘품바축제’를 앞둔 충북 음성군은 ‘제12회 음성 품바축제’ 포스터와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부제는 ‘LOVE 품바 페스티벌’. ‘음성 꽃동네’가 자리 잡은 품바의 고장은 사랑과 구원이 충만한 곳임을 알리고 있었다. 26일 설성공원 개막식을 시작으로 29일 막을 내리는 올해 품바축제는 꽃동네 초청으로 서울·경기 수도권지역 노숙인 1000여명과 영구 귀국한 사할린동포 1000여명이 참가해 행사 규모가 커졌다. 10여군데의 사회적 기업에서 노숙자 등의 건강관리와 인성교육, 일자리상담 등을 맡고 있다. 품바축제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제징용에 의해 폐질환자로 만신창이가 돼 귀국, 40여년간 동냥을 하며 자기보다 못한 걸인들을 보살핀 최귀동 할아버지의 정신을 기리는 사랑의 축제다. 꽃동네 창설자 오웅진(67) 요한 신부는 1976년 9월12일 무극천주교회 주임시절 최 할아버지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오 신부는 젊은 시절부터 그가 꿈꾸어오던, ‘대한민국에 거지가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에 의지할 곳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 길가에서 다리 밑에서 아무 말 없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구원의 공동체 ‘꽃동네’의 벽돌을 쌓기 시작한다.
24일 오후 용담산 기슭 꽃동네 정문 앞에는 ‘대륙광업 채굴 반대’ 팻말이 붙어 있었다. 2007년 12월27일 대법원은 업무상 횡령과 사기 등의 혐의에 대해 오 신부 측의 무죄판결을 확정했다. 인근 광산을 상대로 한 광업권 설정허가 및 채광인가 취소 행정 소송에서도 고등법원의 원심판결을 뒤집는 대법원의 원고 승소판결을 받아낸 지 3년 반이 지났다. 8년 남짓 오 신부와 꽃동네에 혹독한 시련을 안겨준 ‘꽃동네·맹동면 주민’ 대 광산업체와의 8년 송사 중 형사소송은 끝났지만 민사소송은 아직도 진행형이었다. 꽃동네와 주민들에게 가해진 고통과 시련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66만㎡(20만평)에 이르는 꽃동네를 박마테오 수사와 둘러봤다. 수도자와 자원봉사자, 심신장애인, 미혼모, 입양아까지 4000여명이 거주하는 꽃동네는 ‘사랑의 연수원’과 노인요양원, 천사의 집, 인곡자애병원과 현도사회복지대학 등을 차로 제대로 둘러보는 데만 한나절을 넘길 넓은 공간이었다. 요양원 식구들은 긴 고통 끝에 비로소 안식을 얻은 듯 평화로워 보였다.
갈색 수도복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한 오 신부는 그가 걸어온 역사들, 어머니 양육순 여사에서부터 김수환 추기경과 오기선 신부, 그리고 최귀동 할아버지 등 꽃동네 설립과 그의 인생에 영향을 준 인물들과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에게 영감을 준 지혜와 깨달음, 구원의 목소리에 대해 긴 얘기를 들려주었다.
―8년 남짓의 법정분쟁으로 신부님과 꽃동네 전체가 큰 고초를 겪었습니다. 꽃동네에서 이 같은 불행한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요.
“정확히 2000년 10월12일 음성군 행사인 설성문화제에 갔다가 음성군수와 점심을 같이 한 것이 시작이었어요. 당시 음성군수가 광산채굴 결재를 광산업체 측에 해줬다며 꽃동네 쪽으로 굴착공사를 할 계획이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요. 일제가 우리 자원을 침탈하기 위해 100년 전 만든 광산법 탓에 지하 30m 아래 굴을 팔 수 있는 권한이 광업권자에게 있도록 돼 있었어요. 당시 광산업자가 꽃동네 전체와 맹동면 일대 등 1320만㎡(400만평)에 채광 허가가 있었고 4×4m 폭으로 옆으로 굴진 공사를 해 금을 캘 계획이었죠. 당시 지하 100~300m 아래 관정의 지하수는 꽃동네의 생명수였는데 꽃동네와 맹동면 주민에 대한 어떤 이주대책도 없이 수조원대의 금이 매장됐다는 소문을 흘리기에 주민들하고 뜻을 모아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동석한 윤시몬 수녀는 “이 모든 갈등의 원천은 광업법으로, 이 법의 맹점이 너무 많아 법이 악용돼 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지금도 광산 탓에 주민들은 지쳐 있고 정신적으로 피폐해 있지요. 압류 손해배상 청구한다고 하고, 재산압류로 겁을 주고 해 소송에서 빠지는 주민들도 있습니다. 광산업체 측에서 조금만 더 파면 금맥이 보인다며 월리 6%로 투자자를 유치해 소액투자자가 많습니다. 이곳 금은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대한광업진흥공사 조사결과 판명이 났는데도 말입니다. 맹동면 일대 마사토와 화강암 암질이 좋아 모래와 돌만 팔아도 장사가 된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굴을 파면 다 메우도록 하는데, 우리는 15m 정도 물막이만 하면 돼, 집 앞마당 땅이 꺼지는 사례도 생기고 있습니다. 꽃동네 땅밑까지 파내겠다고 하는데, 지하수 맥이 사람 핏줄과 같아서 몸에 칼을 대면 피가 나는 것처럼 땅속 굴을 파면 지하수맥이 끊길 게 뻔합니다. 이곳 미네랄이 풍부한 지하수는 꽃동네 사람들에게 생명수나 다름없습니다.”
광산업체 측과의 분쟁 전까지 사랑의 마을로 알려졌던 꽃동네는 ‘비리의 온상’으로 추락했고, 막사이사이상을 받으며 한때 우리 시대 성자로 존경받았던 오 신부는 추악한 도둑놈, 사기꾼으로 매도됐다.
꽃동네 송사를 대서특필한 언론이 대법원 판결을 한 두 토막 단신으로 보도하자 오 신부가 “입을 대로 입은 상처를 어떻게 회복하느냐”며 한탄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방송국 총국장을 지낸 자원봉사자 한 분이 상대방을 무고죄로 고발하면 언론에 보도될 것이라고 건의하자 오 신부는 “신부가 어떻게 사람을 고발합니까”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정의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입니다. 재판은 정의이고 종교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그걸 합니까.” 그 자원봉사자는 더 이상 고발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고 한다. 고난의 기간을 견디게 한 힘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마태복음 5장 11절에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은 하늘에 마련돼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나는 이 말씀을 갖고 살았지요. 재판받을 때 항상 이 성경책을 갖고 다녔어요.”
오 신부는 “재판받으면서 성경책을 가지고 다닌다고 기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가 ‘재판받는 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말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공금횡령 건은 어떻게 된 것인가요.
“1977년 어머니 회갑이 있었는데 나는 돈이 없어 개인 통장을 만들 수 없었어요. 어머니 혼자 고생 많이 했다고 형제들이 정진석 당시 주교님 모시고 회갑 잔치해 드리자고 했지요. 사람들이 모이니까 점심 대접을 해야겠기에 처음으로 통장을 만들어 3만3000원을 입금했지요. 신자 한 사람이 밤중에 와서 새벽 2시까지 안가고 내일 꼭 필요하니 그 돈을 빌려달라고 해 통장하고 도장을 준 적이 있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중에 성경책을 보니 나보다 너희 엄마를 더 사랑하면 안 된다는 구절이 있었어요. ‘부모나 형제,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안된다’는 구절 말입니다. 그때부터 반성하고, 통장 없이 양말 한 켤레 자동차 하나 사 본적이 없어요. 재판 아무리 해도, 몇백명씩 데려와도 오 신부 횡령해 먹고, 사기 친 것이 나타날 리가 없어요. 나는 소유 개념이 아닌 관리 개념으로 살았지, 내가 그걸 소유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무죄가 된 것이지요.”
오 신부는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일을 하다 광산업체 사람들과 부딪힌 것이고 맹동면 주민들과 꽃동네는 채광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고, 저들은 채광을 꼭 해야겠다고 했다”며 “저들은 오 신부만 거꾸러뜨리면 된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기횡령죄로 300여명을 데려다 증인으로 내세웠지만 놀랍게도 재판은 증거제일주의라 우리가 승소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광산업체 측과의 재판 전에 회원 100만명을 넘던 꽃동네는 8년 만에 회비를 내는 회원이 10만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재판과정에서 많은 회원이 떨어져 나갔지만 당시에도 꽃동네의 진실을 아는 사람들이 회비를 자발적으로 올렸다. 재판 전 회원 성금이 120억원에서 이후 80억원까지 떨어졌으나 재판판결 후 100억원까지 회복됐다. “꽃동네의 진실을 믿는 회원들에 의해 퇴락을 멈추고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할 수 있었고 최귀동 할아버지가 물려준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요.”
―올해가 설립 35년째인데 앞으로 꽃동네가 걸어가야 할 길은.
“꽃동네 브랜드는 생명의 메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요. 두 팔을 머리에 올려 하트를 그리며 ‘사랑합니다’고 제가 처음 외쳤습니다. 이제 온국민에게 전해졌지요. 꽃동네가 가진 콘텐츠, 꽃동네가 추구하는 사랑의 교육 프로그램을 세계화하고 있습니다. 꽃동네는 행복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행복이란 만족한 삶’이며 만족이란 욕구가 충족된 상태입니다. 사랑의 욕구로 만족하게 되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위해 만든 꽃동네 사랑의 연구소는 ‘내가 죄가 있든 없든 나는 너만을 사랑한다. 네가 죄가 있든 없든 내가 너만을 사랑하듯 네가 만나는 사람이 죄가 있든 없든 사랑하라. 내 사랑을 만인에게 배워주고 가르쳐주고 체험시켜 주어라’는 말씀을 영혼에 새겨놓을 것을 가르친다. “진정한 사랑은 베푸는 것입니다. 나누는 것은 자기 것의 일부를 주는 것이지만 베푸는 것은 모든 것을 주기 때문이죠. 많이 베풀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인격자가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 가장 아끼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으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습니다. 꽃동네 사랑의 연수원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고, 이를 통해 행복한 개인 가정 국가 인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유수의 신학대학 등에서 꽃동네를 찾고 있고 전세계 40명이 러브인 액션스쿨에 입소하는 등 사랑의 메카로 자리 잡고 있다.
“전국 경찰이 순찰하면서 행려병자나 미아를 데려온다”는 오 신부가 마지막으로 기자를 안내한 곳은 입양시설에서도 버림받아 오갈 데 없게 된 65명의 어린 천사가 있는 ‘천사의 집’이었다. 한 달에 우윳값만 1000만원이 들지만 현재 정부 보조도 없는 형편이다. “우리나라에 12개 입양기관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정부가 해외입양을 지양하는 취지에서 쿼터제를 만들어 1개 시설에서 15명 이상을 받을 수 없도록 했지요. 입양시설이 속속 문을 닫다 보니 이 갓난아기를 받아줄 데가 없어 꽃동네 천사의 집으로 최근 두 달 동안 50명이 들어왔어요. 우리가 준비하지 않으면 생명문화가 크게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생명 문화의 현주소입니다.”
오 신부는 “꽃동네가 꿈꾸는 세상은 한 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같이 우러름을 받는 세상,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세상”이라며 “꽃동네는 약소하지만 이 일을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賞勳(상훈)
2010 | 한국에이즈예방재단 이사장 | |
2009 | 전국사회복지 전진대회본상(한국사회복지협의회) | |
유일한상(유한재단) | ||
사회통합위원회 | ||
2004 | 올해를 빛낸 한국인상(알리안츠 제일생명) | |
2002 | (학)꽃동네현도학원 이사장 | |
1996 | 자랑스런 충북도민상(충청북도) | |
막사이사이상(필리핀 막사이사이재단) | ||
1991 | 국민훈장 동백장(대한민국) | |
1987 | 인촌상(동아일보, 인촌기념회) | |
1984 | MBC 문화시민상(MBC) |
學歷(학력)및 學位(학위)
2002 | 명예철학박사(대구대학교) | |
1992 | 명예문학박사(서강대학교) | |
1976 | 광주가톨릭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 | |
1974 | 광주가톨릭신학대학교 졸업 |
經歷(경력)
2006 | 재단법인 설립 및 (재)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 이사장 | |
2000 | 꽃동네학교(특수학교 유치부, 초등부) 설립 | |
1999 |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초대총장 | |
1998 |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설립 | |
1996 | 국민교육장 꽃동네사랑의연수원 설립 | |
1992 | 가평꽃동네 설립 | |
1981 | 꽃동네회 조직 | |
1979 | 수도회(예수의꽃동네형제회·자매회) 설립 | |
1976 | 꽃동네 설립(충북 음성군) | |
사제서품(청주교구) 및 무극천주교회 주임신부 |
‘꽃동네’ 오웅진 신부 어머니 양육순 여사 15일 선산 안장
아들을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 고 양육순 여사. 오 신부는 “나는 어머니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어머니는 내가 갖지 못한 지혜와 유머를 지니신 ‘사랑의 도사’였다”고 추모했다.
사진 제공 꽃동네
‘기도의 어머니’ 사랑 실천 기리며
전국 신부-수녀 330명 장례 도와
꽃동네 설립자인 오웅진 신부의 어머니 고 양육순여사(89ㆍ세례명 안나)는 성모 마리아가 한 평생 예수를 뒷바라지 한 것처럼, 신부 아들을 위해 잠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기도의 어머니'였다. 330여 명의 신부 수사 수녀들이 자신의 어머니처럼 장례를 거들었고, 닷새 동안 전국각지에서 5000여 명의 문상객이 찾아 왔다. 평소 사망 후 자신의 안구를 세상의 눈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해 기증하겠다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별세 직후 안구가 기증됐다.
이명박 대통령, 한승수 국무총리내외, 정진석추기경,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장관, 오명 건국대총장, 이수성 전 국무총리,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정몽구 현대ㆍ기아자동차회장, 김승연 한화그룹회장, 정우택 충북지사, 이기용 충북교육감, 김문수 경기도지사,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 등은 조화를 보내거나 직접 문상을 왔다. 꽃동네에 살고 있는 전 서울역 일대 노숙자 150여 명은 단체로 십시일반 모은 조의금을 보내와 유족들을 뭉클하게 했다. 고인의 유해는 15일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의 집전으로 장례 미사를 드린 뒤 이날 오후 선영에 안장된다.
3ㆍ1 만세 운동이 나던 해인 1919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6세 때 처녀 공출을 피해 충북 청원군 현도면 상삼리 빈농인 오덕만(1957년 작고)씨에게 시집 와 4남 2녀를 낳았다.
시집오기 전 이미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뗄 정도로 총명했던 육순은 3남 웅진을 잉태할 당시 영웅을 제압하는 태몽을 꿨다. 그래서 해방 전 해인 1944년 12개월 만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영웅 웅(雄)'자에 '진압할 진(鎭)'자를 붙여 '웅진'이라고 지었다.
1957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뜨자 어머니는 손톱이 닳을 정도로 농사를 지었고, 겨울이면 산에 나무를 해다가 20리가량 떨어진 장에 내다 팔며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1958년 어느 날 우연히 나무를 팔고 오다가 종소리에 이끌려 인근 성당에 들어갔다가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게 돼 천주교 신자가 됐다. 그러면서도 선대의 제사와 조상의 시제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효부(孝婦)였다.
정치가를 꿈꿨던 아들 웅진은 어머니의 기도에 이끌려 16세 때인 1960년 가톨릭에 입교했다. 1976년 5월 청주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오 신부는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이들의 보금자리인 꽃동네를 창립해 오늘날 4000여 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사랑의 대부'가 됐다. 꽃동네 식구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 아들은 병석의 모친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으나 어머니는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또 "조상을 잘 섬긴 덕에 43명의 자손을 잘 키웠다"며 늘 제사를 잘 모시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2000년 들어 오신부가 각종 모함과 송사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아들의 결백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 신부의 무죄가 입증될 때 까지 결코 내가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신부 아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덕이었을까. 오 신부는 8년 만인 올 해 대법원 최종심에서 형사, 행정, 민사소송 모두 무죄 및 승소판결을 받았다.
비로소 마음이 놓인 어머니는 평소 가고 싶었던 속리산 정2품 소나무를 둘러보고 11월 마지막 시제를 올린 뒤 용돈을 아껴 모아 둔 통장을 막내며느리에게 맡기며 공소(公所)를 짓는데 보태달라는 등 신변정리에 들어갔다. 올 2월부터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서 생활해 온 어머니는 11일 아침에도 묵주기도를 하던 중에 의식을 잃었고, 신부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사망 전날 한 밤중에 간호하던 손녀딸이 오 신부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하자 "고단하게 자는 신부를 깨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고 한다.
오웅진 신부는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하면 반드시 끝까지 하라'는 것 이었다"고 회고했다. 때론 '독재자'라는 소리도 듣곤 하는 오 신부의 뚝심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기도 가운데 하느님이 들어주시지 않은 단 한 가지는 "신부 아들의 당뇨병을 낫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기도의 어머니'는 천상에서도 아들과 꽃동네를 위한 기도를 놓지 않으실 것이다.
꽃동네 오웅진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 특별 알현
성녀 마르타의 집(Domus Sanctae Marthae) 교황 숙소동에서
기사입력: 2013/08/04 [08:21] 최종편집:
꽃동네 오웅진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 특별 알현 !
충북 음성군 맹동면 꽃동네 설립자인 오웅진 신부가 8월 3일 오전 0시(현지시간 2일 오후 5시) 로마교황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했다.
꽃동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장으로 있을 때 꽃동네를 알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오는 것을 환영한다고 약속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 신부 일행에게 알현 기회를 특별히 허락하면서 이뤄졌다 밝혔다.
이날 교황 알현은 일반 알현과 달리 성녀 마르타의 집(Domus Sanctae Marthae) 교황 숙소동에서 40여 분간 이뤄졌다.
오 신부는 접견실에서 아무 격식 없이 원탁 테이블에 마주 앉아 프란치스코 교황과 담화를 나눴다.
이날 예수의꽃동네형제회 원장 신상현 수사와 자매회 원장 박정남 수녀, 재단 상임이사인 윤숙자 수녀, 통역 담당 박형지 수녀 등이 함께 교황을 알현했다.
오 신부는 교황에게 접견 허락에 감사 인사를 하고 자신이 초등학교 시절 6·25 전쟁 때 죽어가는 피난민 부녀의 비참함을 목격하고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실천해 꽃동네를 만들었음을 설명했다.
오 신부는 "한국에서 124위 시복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교황께서 한국 가톨릭교회와 정부 협조 아래 새 복자들의 시복식을 거행하고 꽃동네도 방문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프란시스코 교황은 "한국은 사제 없이 평신도들이 교회를 이룬 나라로 그 힘의 원동력은 세례성사였다"며 오 신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어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꽃동네에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보이면서 세 가지 조언을 했다.
겸손, 용기, 기도를 통해 가난한 이들을 계속 사랑할 것으로 당부했다.
오 신부는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을 주님의 은총입니다'란 글을 새긴 도자기와 꽃동네 가족으로 13년 전에 온몸이 마비가 돼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주련 환자가 그린 교황 초상화를 선물했다.
교황은 오 신부와 꽃동네 인사인 '사랑합니다'의 하트 모양으로 기념 촬영했고 알현한 수도자들에게 교황 묵주를 선사했다.
오웅진 신부가 일군 꽃동네 설립 40돌
충북 음성 꽃동네를 설립한 오웅진 신부(오른쪽)가 8일 오후 ‘꽃동네낙원 묘원’에서 열린 꽃동네 설립 40주년 기념행사에서 박명숙 수녀의 안내를 받으며 기념사를 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76년 방 5칸 '사랑의 집'으로 시작
노인·장애인 등 2000여 명 생활
충북 음성군의 꽃동네를 설립한 오웅진(72) 신부는 8일 꽃동네 설립 40주년을 맞아 ‘거지 성자’로 불렸던 고 최귀동(?~1990)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는 꽃동네 설립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이다. 최 할아버지는 음성군 금왕읍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일제 때 강제 징용에 끌려갔다 병든 몸으로 고향에 돌아와 음성 무극천 다리 밑에서 걸인 생활을 했다.
오 신부가 그를 만난 건 1976년 9월 무극천주교회에 부임하고 나서다. 오 신부는 “깨진 유리조각과 고철을 챙기고 깡통에 밥을 한 가득 담아 다리 밑 움막으로 향하는 최 할아버지를 따라가 보니 자신보다 불편한 18명의 걸인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며 “당시 1300원이란 작은 돈으로 무극리 용담산 기슭에 방 다섯 칸짜리 ‘사랑의 집’을 지어 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작은 콘크리트 건물에서 출발한 꽃동네는 현재 국내 최대 사회복지시설로 성장했다. 82년 3만2000여 ㎡의 부지를 매입하고 그해 익명의 독지가로부터 임야 6만6000㎡를 기증받으면서 지금의 꽃동네 모습을 갖췄다. 꽃동네에는 장애인·노인·어린이 등 사회에서 소외된 이웃 200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350명으로 구성된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 자매회’ 소속 수도자와 800여 명의 꽃동네 직원들이 이들을 돌본다. 국내외 봉사자들도 연간 30만 명이나 다녀간다. 이같은 모델은 해외에도 수출돼 93년 중국에 꽃동네가 만들어진 데 이어 필리핀·방글라데시·인도·우간다·아이티 등 해외 12개국에도 설립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방한 때 꽃동네를 찾았다. 오 신부는 “교황께서 ‘나는 꽃동네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며 “꽃동네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작은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나누는 보금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꽃동네는 지금까지 5400여 명의 장례식을 치러 ‘꽃동네낙원(꽃동네 법인묘지) 묘원’을 조성했다. 이곳에는 설립 40년을 맞아 꽃동네 가족과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봉안 시설이 신축되고 있다. 시설의 이름은 ‘추기경 정진석 센터’로 하고 건물 안에서 예배를 할 수 있는 ‘성 니콜라 오 경당’도 만든다.
이날 오후 꽃동네낙원에서 진행된 설립 40주년 기념행사에는 장봉훈 천주교 청주교구 주교, 오스발도 파딜리아 주한 교황청 대사와 전국 꽃동네 회원 및 시설 가족 등 5000여 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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