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64]아름다운 사람(16)-가객歌客 장사익
친구가 어제 상계동 집근처 ‘벚꽃 음악회’에 출연한 가수 장사익의 공연장면을 동영상으로 보내왔다. 불쑥 그분이 보고 싶어 유튜브에서 그의 절창絶唱 <찔레꽃>을 몇 번 부르다 이 글을 쓴다. 내가 아는 분 중 ‘아름다운 사람’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가수. 흔히 ‘가객歌客’이라 불리는 장사익張思翼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조용필을 ‘가왕歌王’ 나훈아를 ‘가황歌皇’이라 하듯.
먼저 그와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된 게 언제였더라? 그가 써준 사인을 보니 2011년 봄이다. 벌써 13년 전. 성우 권희덕님이 “시로 세상을 아름답게”라는 슬로건으로 만든 <시세아>라는 월간 시전문지가 있었다. 가수 장사익을 만나 인터뷰기사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상명대학교 앞 자택을 찾아 그의 집에서 3시간 동안 단독 인터뷰를 해 졸문을 써 그 잡지에 실었건만, 원문을 찾을 수 없어 무척 유감이다. 어떻게 썼었을까? 잡지도, 내가 쓴 글도, 아름다운 시잡지를 만들던 권희덕(‘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최진실의 광고목소리를 흉내낸 성우. 영화 1천편도 넘게 더빙한, 세 살부터 여든살 할머니 목소리도 척척이었다. 2008년 겨울 나의 출판기념회에 와서도 꾀꼬리 목소리로 축하해주었으니, 문상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여인)도 세상에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튼, 단 둘이 3시간 수다를 떠는 인터뷰는 재밌었다. 심지어 그 앞에서 그의 노래도 불렀더니, ‘노래는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다’며 한 소절씩 따라부르게 하는 노래지도도 해주었으니. 1949년생, 나의 장형과 갑장이어서 “사익이형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니 “제발 그러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한참 일본이고 미국이고 해외공연을 할 때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63세, 나는 55세였으니 젊었다. 해외공연할 때마다 최소 5000만원에서 1억이 적자라고 했다. 스태프 36명의 항공료, 숙식비 등 모든 경비를 책임지니 표가 100% 팔려도 감당이 안된다는 것이다. “어쩔 생각이냐?”고 묻자 “고씨 매니저(그의 아내)가 알아서 하겠지요. 나중에 이 집을 팔든지”하여 웃었다.
그 외에도 두 번이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의 전속 사진작가는 그와 동갑인 동아일보 사진부기자로 친한 선배(김영만)였다. 어쩌면 두 분은 그렇게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성품이 닮았을까? 서로 늦게 만나 친하게 된 것을 아쉬워할 정도. 그의 <찔레꽃> 절창을 들어보셨으리라. <봄날이 간다>는 또 어떠한가? 그런 노래는 감히 따라부를 엄두가 안나지만, 친구들은 노래방만 가면 <찔레꽃>을 잘 부르게 생겼다면서 나에게 노래 일발을 장전하라고 쑤셔댄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처음 만나 사귄 사람들도 내가 그분의 노래를 잘 부를 거라고, 생활글을 잘 쓸 거라고 왜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늘 그게 궁금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말하면서 어떤 티도 내지 않는데도 말이다. 흐흐.
흔히 그의 노래는 ‘한恨이 서려 있는 것같다’고 말하고, 실제로 아줌마팬들을 몰고 다닌다. 감정을 들었다놓았다, 사람 울리는 ‘노래 선수’이다. 그의 공연을 세종문화회관, 전북대 삼성회관 등에서 5번쯤 보고 들었는데, 그의 노래는 뭔가 억장이 막힌 부분을 통쾌하게 씻어주는 카타르시스(정화淨化) 효과가 있는 듯하다. 2015년 성대결절로 절망에 사로잡혔으나 수술이 성공, 그해 가을 무대에 섰다. 세상에 나이 45살에 날라리(태평소) 하나로 가수로 데뷔하여, 30년 가까이 명성을 떨치기가 쉬운 일인가. 그의 충청도(홍성 출신) 사투리도 정겹고 하얀 두루마기 한복이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더구나 전공이 ‘우리의 소리’ 즉, 국악國樂이지 않은가. 혹자는 국악을 버려놓았다고 비난하기도 하나, 상관없는 일이다. 그를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돈 버는 것에는 지금도 별 관심없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는 자선음악회 등 언제나 간다. 유니세프 홍보대사 등 사회활동을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호주로 유학을 떠난 둘째아들이 장사익 레코드판을 7개나 몽땅 보내와 나를 울렸다. 그중에 마을회관에서 불러드리면 할머니들이 울어버리는 <꽃구경>이라는 노래를 아시는가? 노모를 지게에 태우고 산속으로‘고려장’시키려 가는데, 노모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아들이 돌아갈 때 길을 잃을까 걱정으로 솔잎을 따서 뿌리고 간다는 노랫말에 누군들 눈시울을 적시지 않겠는가? 그의 히트곡은 쌔고 쌨다. <봄비> <댄서의 순정> <목포의 눈물> 등 편곡도 많지만, 그가 실제로 시집이나 에세이집을 읽으며 영감靈感을 받아 지은 곡도 많다. 그는 음악공부를 하지 않아 오선지 ‘콩나물 대가리’를 실제로 모른다. 믿기 어렵겠지만 당연히 악보樂譜가 없다. 그는 또 캘리그래피식으로 한글 쓰기를 즐겨하다 전시회까지 했다고 한다.
그의 집, 그의 앞에서 필자가 부른 노래는 “순대 속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우리는 늘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등 기댈 벽조차 없다는 생각으로/……”라는 노래말의 <섬>과 박목월 시를 편곡한 <나그네>였다. 흐흐. 그의 이름도 독특하다. ‘생각할 사’ ‘날개 익’, 생각나는 날개라는 이름이 어디 흔할까? 그의 사인도 ‘푸른 하늘을 날고 싶다’며 나의 아들들에게 덕담을 써준 것이다. 성대 결절을 극복하여 정말 다행이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사람 좋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아름다운 사람임에 틀림없는 예인藝人이다. 이럴 때 '딴따라'는 좋은 의미이다. 그가 고백한 일상처럼, 공연 없는 날에는 뒷산도 오르며 방안에서 빈둥빈둥 이런저런 시집을 뒤적이며 기똥찬 노래들을 자기 식대로 만드는 날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빈다(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 등이 그것이다).
아래 링크에는 그의 휴먼스토리가 모두 담겨 있다. '나쁜 신문'이기는 하지만, 일독 강추.
[Why-한현우의 인간正讀] 장사익 “나도 45세때 데뷔했는데... 뭐가 그렇게 바뻐유”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