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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1필 로 올리고 있습니다.
내가 보관중인 성동공고 자동차과에서 사용했던 1959년에 처음 영어로
된 글을 번역한 자동차 전기계통의 이론 서적
왼쪽의 위는 GM[Chevrolet, Buick, Cadilac, Oldsmobile, Pontiac]발전기,
아래 것은 AMC[American Motors Corporation].
오른쪽은 냉각통풍이 잘되는 Chrysler, Dodge. Plymouse차에 사용.
지금은 전 세계에서 이것처럼 생긴것을 사용을 하는데 100암페어 이상이
되는 발전기에서는 열이 많이나니 통풍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대게의 차들은 14V교류로 발전을 해서 정류기[rectifier]를 거친 후면
단자에는 14V의 직류가 흐르는데 12V배터뤼는 12V로 항상충전이 된다.
정비사 자격증
내가 교통부 관할하는 제2회 자동차정비사 자격증을 교부 받는 날
까지 우여곡절이 있었기에 설명으로 연결 해보려 한다.
운전 면허시험에도 법규가 먼저이듯이 예비필기시험은 자동차과가
있던 서울의 동대문 옆에 있는 성동공고에서 치렀다.
시험 진행과정은 필기시험에 합격한 자만이 실기시험을 볼 자격이
부여되는데 내가 군에서3년 재대 후 1년이 지났는데 총 4년 동안에
걸쳐 실무를 하면서 틈틈이 이론을 공부했으니 달리는 호랑이에 날개를 단 셈이다.
그 당시로는 서울대 공대교수 김응서라는 분이 정비에 대한 책을
번역(초판 1959년)하여 나온 두꺼운 책이 있어서 정비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다른 정비사들은 괜히 헐뜯는 소리로
자동차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이 쓴 책이라 하여 불평들을
했지만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에 있듯이 어쨌든 내용 하나만은
미국사람이 쓴 것을 번역한 것 이어서 나에겐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는 딱히 자동차에 대해서 깊이 기술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외국차를 수입하는 형편이어서 자료가 부족할 때이니 영어를 잘하는
분의 번역서적 이외에는 다른 방법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는 2주후에 서울시청의 2층 바깥쪽 벽에 방(榜)이 나붙는다고 했다.
2주후에 가보니 넓이는 약 40cm, 길이는 약 10m나 되는 두루마리
종이를 옆으로 길게 수평으로 서울시청꼭대기의 지붕에 올라가 벽돌
벽 위쪽에 붙여 놓았는데 아직도 휑하니 기억해오는 나의 수험번호
384번은 빠져 있어서 순간적으로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토록 기다렸던 기대는 진흙 속에 파묻힌 종이 인형처럼 일그러져
버리고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버스를 타기 위하여 돌아오는
발걸음은 비척비척 무겁기만 했는데 정능행 버스를 타려고 시청 앞
종로쪽의 지하도를 걸어가는 도중에 의미와 목적에 대한 관념으로
순간적으로 머리를 탁 치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내가 쓴 답안지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상태인데도 불합격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뭔가 잘못 됐다는 생각이 언뜻 스친 것이다.
재빨리 발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시청의 2층에 위치한 자동차
시험 관계기관서기를 찾아가보았다.
담당 직원이 장부를 열고 보더니
“합격했으니 집에 가서 막걸리나 한잔하시오!”
라고 계면쩍게 말했다.
그의 설명으로는 정비사 합격발표는 이미 끝나고 지금 게시판에 붙은
그 방은 ‘5급 공무원 시험합격자 명단’ 이라 했다.
만약 수험생이 제주도에서 왔다면 육로와 해로로 교통수단을 여러
번 바꿔야 되는데 국가에서 행하는 일이고 수험비용을 받는 맥락이라면
합격 통지서 하나쯤이야 집으로 우송해 줄 수도 있을 수 있다는 내 생각이다.
하마터면 나의 생애에서 직진 하는 진로가 수직낙하,
절호의 기회포착을 놓쳐서 요절[夭折]날 뻔 했는데 기름이 떨어진
호롱불처럼 꺼질 뻔 했던 사건이 아닌가?
며칠 후 아현동의 고갯길 옆에 위치한 건물의 대진자동차정비학원에서
실시한 실기시험에서 4명이 한 그룹이 되는데 시험관은 4명을 일열횡대로
새워놓고 분해를 한 엔진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부속이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을 하는지등을 아는자는 대답을 하라며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품목마다 막히는 대목이 없으니 내 실기 기술을 알아주어
교통부에서 발급하는 3급 정비사 자격증을 교부받았다.
1년 후 이 자격증이 큰 역할을 했는데 한남고속버스 회사에서
실시하는 정비사 모집 조선일보 광고에는 자격은 고등학교 이상이며,
3급 정비사 자격증 소지자라야 한다니 나에겐 자격부합이다.
주관식 입사[入社]기시험에서 부속 명칭만은 군대에서 배웠던
원어(영어)로 기재를 했으니 남보다 더 많은 점수를 더 받을 수 있었다.
실기시험에서는 가마니를 땅에다가 깔고는 누워서 벤츠버스의 왼쪽
앞바퀴의 에어 브레이크 슈(shoes)의 간격을 조정하는 것이었는데
아래위가 붙은 정비복을 입은 선임 정비사가 시험 감독으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8명을 뽑는데 응시자 40명 중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내가 조정을 했으니 그가 놀라서 과장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뛰어 가는 것이 목격됐다.
그때 상황으로는 기술이 있는 사람은 혓바닥을 꼬부랑거리는 단어가 섞인
이론이 전혀 없고 학교를 다녀서 이론이 있는 사람은 차를 고쳐본 경험이
없으니 실기가 턱없이 부족할 때라 2가지를 다 겸비한 사람이 귀할 때이다.
봉급은 그 당시의 수입쌀이 없던 시절의 쌀값으로 8가마니에 해당이 되며
1년에 보너스가 4백 퍼센트이니 3개월을 일하면 1개월 치의 본봉현금을
공짜로 연갈색의 봉투에 넣어서 두툼하게 받았다.
몇 년 후 연로한 최고 상관이던 박x원 기술부장도 미국에 먼저 온 나의
회사동료인 우x현씨가 이민의 길을 열어주어 나보다 몇 년 늦게 미국으로
따라 들어오셨는데 하관이 상관에게 혜택을 준 셈이다.
그 기술부장님의 후일담으로 사장이 기술부장에게 정비사
봉급의 액수를 책정 하라는 지시가 있었단다.
기술부장은 먼저생긴 한국의 고위층이 소유주인 동양 고속버스 회사에
가서 정비사를 통해서 봉급 액을 안 후 적은 종이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임의로 사장에게 보고하여 책정한 것이 많은 돈이 되어 자연히 월급이 많았다.
그분이 들은 이야기로는 3번째로 생긴 고속버스 회사여서 돈이 많이
벌리는데 모두 현금으로 승차요금을 받으니 돈을 셀 시간이 없어
가마니에 돈을 그냥 넣어서 모았을 정도이었다니 정비사 대우 또한 최고로 좋았다.
곁들이는 이야기로 그 당시 파월기술자로 있다가 귀국한 동료정비사의
이야기가 압축공기(pneumatic)를 사용해서 나사를 조이는 임팩트 뤤치라는
공구는 힘도 들이지 않고 그냥 손으로 잡고 있으면 추럭 바퀴의 큰
나사가 큰 힘으로 자동으로 조여진다고 했다.
나의 생각에 드릴을 사용할 때 드릴 날이 꽉 끼여서 돌지를 않으면 드릴을 잡은
손이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니 손목을 다칠 수 있는데 나는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했다.
한 번도 들은 적도 본적도 없는 공구이어서 회사에서 청계천 공구상에서
중고품을 사와 사용해보았는데 이 기계로 고속버스 바퀴의 나사를
조인 후에도 팔 힘으로 더 조여지니 결국은 힘이 약하다는 결론인데
“무슨 놈의 미국제 연장이 그 모얭 이여? 팔심이 제일이여!”
라고 하며 모두들 조소를 머금었고 그 후 계속 팔 힘으로 조였다.
내가 미국에 온 후에 안 것은 그 때 산 것은 고장이나 버리는 것을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판 것이었다는 내 나름의 결론이 나왔는데
원래는 이 연장이 큰 나사를 빠르게 조이는 힘이란 엄청나서 사람에
비길 바가 못 되고 그 당시 미국정비사들은 모두들 1피트길이에
수백 파운드[1kg=2.2파운드]의 힘을 내는 이 신비의
파워 툴(power tool)을 오래전부터 사용하고 있었다.
미국에 오기 전에는 압축공기 호스를 연결할 때 철사로 조여서
사용했는데 이곳에 와보니 퀵 커플러(quick coupler)라고 밀면
1초 만에 금방 연결하는 쇠로된 것이 있으니 내가 미국 땅을 밟아보기
전에는 본적도 들은적도 없으니 “우물 안의 올챙이가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벌판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격”(‘A man of narrow outlook’)이었다.
그 당시는 손에 묻은 기름때를 양잿물이 섞인 검정색 빨랫비누로 씻었는데
유성의 때를 수성으로 뺀다는 것은 불가능이었지만 미국에는 이미
핸드클리너[hand cleaner]라는 액체가 있어서 깨끗한 손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FM이 없던 시절, 클래식 음악을 스테뤼오(stereo)가 아닌
AM방송으로 듣고 음질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을 자인하는데
“손오공이 아무리 높이 날아도 부처님 손바닥 안(掌心)이다.”
는 말이 생각난다.
모르면 바보인데 정중지와에 대한 보충설명으로 중학교 시절 산성과
알칼리성을 구별한다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비디오테이프 넓이의
반도 안 되고 길이는 새끼손가락보다 짧은데 한 번도 대한적이
없는 나는 초등학교에서 배울 때 리트머스시험지라고 해서 학년말 고사
시험지 정도의 크기로 생각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나의 생애에서 정비사로서 14년의 자영업을 하는 기간 동안 꾀를
써서 회사를 쉰 날은 단 하루도 없었으니 건강한 체질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고 혹시 독감이라도 걸리면 정신력으로 버티어 나갔다.
어쨌든 현재까지 내 생애에 꼬일 것 같은 실타래의 매듭을 잘 잡아당겨,
잘 풀렸다 할 수 있지만 그 옛날 시청의 건물 벽 위의 합격자 발표문
두루마리의 처음이나 끝 부분에 ‘공무원’또는 '정비사 필기시험 합격자'이라는
3자 만 명시 했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수험 번호의 중요함은 해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공무(公務)를
경시(輕視)하여 별것도 아닌 것처럼 아무렇게나 팽개쳐 버려 공무(空無)가
되어 버릴 뻔 한 그들의 자질(資質)을 오늘도 나는 생각해 본다.
내가 필기시험을 칠 때에는 모두 다 아는 쉬운 문제들이어 교실에서
제일먼저 답안지를 제출하려는데 수 십 명 중 첫 번째로 나보다 3미터
더 앞을 걸어가는 사람이 딱 한사람 있었으니 내가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필기시험에 자신감이 없어 다시 시청에 되돌아가보지를 않았다면
정비사 자격증 시험에 낙방(落榜; 榜文에 이름이 없다)의 고배를 마시게 되고
영원히 사장(死藏)되어 나의 인생항로는 기관 고장을 일으킨 선박마냥
항로를 이탈 부류(浮流)했을 것이니 나에겐 모공(毛孔)에 소름을 돋게 할 정도의 큰 사건이었다.
이 자동차정비사자격증 한 장 덕으로 그 당시는 급여도 많아졌고
지금은 미국으로 귀화했으니 지하도에서 포착한 그 느낌은 비중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수가 없는 ‘위대한 것’ 이었다.
매릴랜드주의 우리 집에서 양력설날 떡국잔치를 벌렸는데 나로 하여금
연결된 이민1세 2세 등 나보다 젊은 일가친척 방문객이 30명을 넘었는데
정비사 자격증 한 장의 위대함이 나를 높게 비상(飛上)시켜 준 셈이다.
내가 정비사자격시험 제 2회에 응시를 했으니 1회에서는 몇명이 아니되었나보다.
'일련번호 79호 1970년 8월 14일 교통부장관 + 관인’
***미국에서는 1996년에 8개종목의 정비사자격증을 따서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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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동차 정비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
잘보고 갑니다 상세하게 ,알려주시어
감사합니다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성동공고.
왕십리
전 광희 국민교 출신인데 이런 우연이
마국가셔서 너무도 빛나게 사시는 모습
자랑스러워요
성동공고가 덕수상고옆에 있었지요 아마도..... .
을지로 6가가 되는것 같네요.
저의 교통부 자격증 일련본호가 84번 이었답니다.
어휴 하나터면 불합격 인줄알고 확인안했으면 지금의 선배님은 아마도 안계셨을 겁니다 ㅎㅎㅍ
하마트면 9백만불이 날라갈뻔 했습니다.
아이들의 교육진로까지도요..... .
박대통령시절이었답니다.
감솨요
응원합니다.
훌륭하세요.
대단하십니다 의지의 한국인이십니다
추천.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바꾼다.'는 말을 절감하는 사건이었네요.
기능, 기술은 여러 부문의 자격증으로 이미 검증, 공증이 되었거니와
부전공으로 문예창작을 해오셨는지 글솜씨 또한 일필휘지 대단히 호쾌하십니다.
백세시대 남은 여생 늘 수복강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는 어릴적부터 무엇이든지 호기심이 많았던 소년이엇지요.
공부잘한다고 부자가 되는건 아닌것 같아요.
군대서 배운 정비기술로 미국을 왔고 가족들도 초청을 하고
55세에 조기퇴직 지금은 주 7일 골프를 때린답니다.
먹는 약은 한가지도 없네요.
아내는 3일.
감솨요
세상에나!
못하시는게 무엇이 있으실까요?
존경 합니다
모든 살아오신 삶을요~~♡
매일 1필이니 치매가 좀 늦게 나를 찾기를 바란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베운다고 했습니다.
그저깨는 코빋 백신맞으러 호험회사의 병원으로 갔더니
예방주사는 건물을 임대해서 맞게 되네요.
개념과 실체는 다르다는 것을 느꼇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