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5: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5: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회당은 구약의 끝무렵인 바벨론 포로기 이후 생겨난 작은 예배처소들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생겨난 회중모임 장소 정도로 생각해도 되겠다. 회당은 점차 많아졌고 예수님의 시대에도 존재했다. 헤롯대왕이 성전을 크게 신축하였음에도 회당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4복음서에는 회당에 들르신 예수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여기서 강론도 하고 봉독도 하고 나눔도 했다. 그 회당을 관리하는 사람이 회당장이다.
오늘 등장한 회당장은 '야이로'라는 사람이다. 21세기를 사는 내게 야이로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진 않는다. 다만 성경에 아비나 조상의 이름이 앞서 붙어서 누군가 소개되면 그가 어떤 가문의 누구인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등을 알 수 있는 정보가 된다고 배웠다. 히브리 이름에 저마다 의미가 있고 쓰여진 연유가 있겠지만, 오늘날 그들 이름의 원어적 의미에 천착하는 것도 바람직하진 않은 듯 싶다. 숫나사 하나를 붙들고 맞는 암나사를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수리공처럼 보여서다. 그런 지엽적인 것들이 성경본문을 해석하는 큰 틀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라 생각한다. 그 놈의 알레고리적 해석... 오용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 곁길로 샌다.
회당은 바리새파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곳이다. 바리새파의 핵심적 영향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곳의 관리자인데 예수를 찾아왔다는 것이 놀랍지만, 더 높은 지위와 학식이 있었던 니고데모 같은 사람도 예수께 왔었으니 놀랄 일만은 아니다. 야이로의 신앙을 폄훼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위고하, 사상과 신학적 성향을 무론하고 예수께 이끌린 이들이 있었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될 일 아닌가 싶다. "자 봐라, 야이로가 얼마나 대단한가! 우리도 야이로를 본받자!" 어지간하면 이러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 놈의 알레고리.
그런데 여기 본문에 천착할 만한 단어가 나온다.「달리다굼(Talitha-kum)」-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이란다.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다. 우리가 현재 원문이라 생각하는 성경본문은 구약이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되어있다. 왜 이 문장만 아람어 그대로 사용하면서 고유명사처럼 활용했을까 하는 것에 대해 찾아봤다. 인터넷을 찾아보다 이어령 박사가 이를 소재로 세미나에서 다룬 글이 있어 나눈다.
이어령 박사는 “달리다굼, 할렐루야, 마라나타, 호산나, 에바다, 아멘처럼 성경에는 번역이 안 돼 원어 그대로 나오는 말들이 중요하고, 여기서 기호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며 “언어라는 게 뭔가, 하나님은 무슨 말을 쓰시는가, 하나님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 오늘의 주제가 될 것”이라고 서두를 열었다.
이 박사는 “신약성경 기자들이 다른 말은 모두 헬라어로 번역했는데, 실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람어인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면 될텐데 굳이 왜 원문 그대로 썼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령 박사의 설명은 이렇다. 예수님 말씀은 크게 ‘비유로 된 말’과 ‘하나님의 말’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은 성령, 살아있는 말, 음을 고치면 안 되는 말, 우리가 말하는 ‘주문’ 같은 말인데, 이런 부류는 산스크리트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처럼 종교마다 존재한다. ‘달리다굼’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말씀과 가장 가까운 원형이었다. -‘달리다굼’은 왜 어느 나라에서도 번역하지 않았을까(크리스천투데이 기사 중/이대웅)
그러나, 이런 해석에도 불구하고 "소녀야, 일어나라"는 한글 부연이 붙지 않았다면 달리다굼은 나에게 어떤 유의미한 단어로는 다가오지 못했을 것이다. 주문처럼 느꼈겠지. 이 단어를 주문처럼만 느낄까봐 일부러 부연해석까지 달아줬는데 우리가 다시 특정 단어에만 천착한다면 그것도 웃픈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옆에 설명도 써 줬잖니"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설교와 묵상의 시간에 왜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 걸까? 특별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확인받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자기가 과연 신앙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불안, 증명하고 싶은 욕구, 인정받고 싶은 갈망이 내면에서 만들어내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럴싸한 결과물. 나를 유능하게 보이도록, 혹은 나의 불안을 잠재워 안도하게 하고 증명해 줄만한 어떤 것. 그것이 우리를 알레고리의 세계로 손쉽게 인도한다. 성경을 볼 때 알레고리적 해석방법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매우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고 나 역시 그 수혜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것을 얄팍하게 손에 쥐고 자기를 증명하려는 가여운 이들이 있는 것일 뿐.
그런 불안하고 피폐한 모습이 깨달아진다면, 그가 바로 '달리다굼'의 복음을 들어야할 사람이 아닐까 싶다. 예수의 의지가 담긴 말씀이 아니고선 홀로 일어설 수 없는 자신의 실체를 깨달은 자는 실로 복되다 할 수 있다. 단어의 뜻에 몰두하면서 무언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보다 몇백배 복된 이들이다.
나에게도 달리다굼의 시간이 있었다. 정확히는 영적 죽음의 시간이 있었다. 사실 내게 그것은 달리다굼의 사건보다는 나사로의 무덤 사건으로 해석되어 피부에 스몄다. 왜 주님은 나를 구하러 오시지 않는지, 그토록 신앙을 지키며 살고자 노력했는데, 왜 모든 게 스러질 때까지 두셨는지... 절망 속에서 눈을 감고 3년, 아니 5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해를 바꿔가며 계속 안팎으로 썩어가는 내 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시간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무덤의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는 내 인간성의 민낯을 잘 봤다. 매우 끔찍하고 더럽게.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시간을 끝낸 것은 다시 시작한 묵상이었다. 왜 그런 결심이 섰는지 모르겠다. 살기 위한 준비가 되었는지,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풀렸는지, 그것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여전히 모른다. 다만 내 의지만으로 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말씀을 펼치자 서서히 쏟아지는 빛줄기는 내가 굳은 의지를 가진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 성경을 읽어도 한 줄기의 빛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불안과 피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강렬한 체험을 찾아 헤메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생각나는 말씀이 있다. 디모데후서 3장이다.
3: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3: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3: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 역시 그런 이들 중에 하나였다. 주님이 여전히 그런 상황에 있는 누군가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내가 받은 것과 같이, 가장 비천한 자에게 주신 그 은혜를 그들에게도 주시기를 간구한다.
묵상을 시작하며 마음 속 무덤의 문은 조금씩 열리고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래 전 나를 구원하시고 만나주신,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은 여전히 거기 서 계셨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은혜가 은혜되기까지 내가 깨닫고 인정한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내 힘과 의지로는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은혜는 그 이후에 구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잘나고 잘하고 잘되고 그럴 때는 은혜가 아니라 훈장을 구하게 되더라.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되새길 수 있어야, 그게 정말 영혼 깊은 곳의 고백이자 인정이 된 상태라야, 그래야 은혜를 구하는 바른 마음? 그런 게 되는 것 같다.
그래, 내가 말하는 은혜란 하나님의 전적인 돌보심이자 나의 상태와 상황에 관계없이 베풀어 주셨으면 하는 자비로우신 선물이다. 그 선물은 하나님 자신과의 만남이며, 하나님과 함께이지 않고는 호흡이 불가능하다는 자기 고백이자 성찰이기도 한 것 같다. 누가 이렇게 고백하라고 가르치고 시켜서가 아니다. 예배시간에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고 앞에서 이런 멘트를 날려서가 아니다. 삶의 자리에서 홀로 이것이 피부로 느껴진 것이다.
아... 내 속에 있는 이것을 내가 가장 잘하는 모국어로 써놓아도 속 시원히 설명이 안된다. 성에 차지 않는다. 그저, 내게 일어났던 사건, 내게도 일어났던 사건. 나사로야 나오라!는 그 말씀. 그저 그게 내게도 일어났었다고 밖에는... 마치 달리다굼이 달리다굼으로 쓰여져야 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