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본문 주해)
1~4절 :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아리마대 요셉이 만들어 놓은 예수님의 무덤을 주목해서 보았었다(15:47).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무덤의 돌을 어떻게 굴려 열 수 있을까를 걱정하며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이다.
‘안식 후 첫날’(2절)이라는 말은 이제 구약이 완성되고 참된 안식이 주어지는 시대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셨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안식 안에 살아감이 참된 삶이다. 그것은 거룩한 시간과 거룩한 공간 안에서 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가 없게 된다. 세상에 참된 평화와 안식이 없는 이유는 인간의 죄로 인한 것이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율법을 주셔서, 거룩한 공간은 성전으로, 거룩한 시간은 안식일로 지키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
성전도, 안식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으로 공간의 거룩함이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가 되기에 성령이 임한 자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십자가로 시간의 거룩함인 안식일도 완성하였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어떤 시간도 거룩한 시간인 것이다.
5~7절 : 무덤 문이 열려있고 무덤 안에 흰 옷 입은 한 청년(천사)이 있으니 세 여인이 몹시 놀란다.
천사는 그가 살아나셨기에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를 두었던 곳을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천사는 예수님께서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그 말씀을 다시 전한다.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곳에서 예수님을 뵐 것이라고 여인들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전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14:2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텐데 왜 갈릴리로 가시는 것일까?
예수님은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 갈릴리이고,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기 위하여 오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면 한 자리를 하려고 따라왔다.
그런데 부활하시고서는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영광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가셔서 제자들을 새롭게 세우시기위함이었다.
8절 : 여자들이 부활의 소식을 듣고 기뻐함이 아니라 두려워 도망가고 아무 말도 못한다.
유대인 중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었다.
그런데 그들이 믿었던 부활은 마지막 날의 부활, 즉 메시아 오시는 날의 부활을 믿은 것이다. 그래서 나사로의 죽음 사건에서도 마지막 날 다시 살아날 것을 마르다도 마리아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가 지금 자신들 앞에서 다시 살아날 것은 믿지 않았다.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사로를 살리신다.
예수님께서 부활이며 생명임을 말씀하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지만, 이제 십자가에 죽어버린 예수님이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도 너무 두려워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나의 묵상)
부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급하게 치른 예수님의 장사라도 미진했을 리 없겠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
39~40)
그런데도 세 여인은 다시 시신에 향품을 바르겠다고 이른 아침에 주님의 무덤을 찾으니,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했어도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못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것을 이토록 밀착하여 따르며 섬긴 여인들이 못 들었을 리 없겠건만 이들 역시 제자들처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 자체였던 것이다.
이제 눈앞에 빈 무덤을 보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도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커진 여인들임을 본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천사의 말도 귀에 들리는지 안들리는지 무서워 떨 뿐이다.
그러나 이후에 보면 이 연약하고 불완전한 믿음의 소유자들(여인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문을 걸고 꼭꼭 숨어 있는 제자들...그리고 실의에 차서 물고기나 잡으러 가는 제자들...) 앞에 주님이 직접 나타나 만나주시고, 말씀하여 주시고, 보여주시고, 먹여주심으로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신다.
결국 주님께서 친히 다 이루시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이미 매장한 시신에 향품을 바르겠다고 나서는 여인들처럼 때때로 나의 믿음이란 것이 어리석은 행동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주님의 분명한 은혜 가운데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모습을 볼 때도 있다.
주님 시키시는 대로 할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놀라기만 하고 미적거리는 답답한 행동을 할 때가 많다.
그럴 때도 주님께서 다 행하시고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 앞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보란 듯이 나타내 보이시면 정말 드라마틱 할 텐데, 굳이 다시 시골 구석 갈릴리로 가신다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님은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그곳으로 가셔서 쭈그러진 제자들 앞에 부활의 모습을 보이시며, 새 힘을 부어주시되, 세상 영광이 아닌, 십자가로 나아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겠다고 나서는 여인처럼 때때로 대책이 없기도 하고 무모하기도 한 나 자신이지만, 이런 나를 주님께서 안고 계심을 믿는다.
장차 주님이 갈릴리에서 만나주실 때 어떤 기쁨과 은혜를 주실지도 모르고, 때때로 어깨가 처진 모습으로 있는 나 자신이지만, 이런 내게 새 마음을 회복시켜 주실 주님을 믿는다.
만약 주님이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보란 듯이 부활의 모습을 보이셨다면, 내가 언제 숨어 있었냐는 듯이 달려가, ‘봐라,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고는 어깨에 힘을 주면서 다시 ‘한 자리’의 꿈을 꾸며 설치는 자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주님은 이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세상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임을 갈릴리에서 새롭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창세전 나 같은 자를 택하심에서부터,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모든 일 가운데 내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아침이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부활로 보여주시는 예수님, 완전하신 나의 주님이시다.
(묵상 기도)
주님,
주님의 무덤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고 숨죽여 있었을 존재가
여인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을 많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무지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제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영광임을 보여주시는 갈릴리로 달려가서
새 마음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