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화시모음 6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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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사화
이해인
아직 한 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내 분홍빛 애틋한 사랑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오랜 세월 침묵 속에서
나는 당신에게 말하는 법을 배웠고
어둠 속에서
위로 없이도 신뢰하는 법을 익혀왔습니다
죽어서라도 꼭 당신을 만나야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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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사화 꽃 길
김기갑
붉은 꽃이 떨어지는 날
그 사람과 선운사 꽃길을
걸으니 금새 가을 바람이 분다
붉은 빛 낙엽들이 간헐적
간격을 두고 뒤흔드니
발 등 위에 툭 툭 떨어진다
빨강 빛 낙엽들 보다
갈색 빛 낙엽들 보다
더 짙은 붉은 눈물을 떨굽니다
이루지 못한 그 사랑
뒷 켠에 묻어 놓은 채
붉게 물든 그 길을 다시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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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사화
구재기
내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지나는 바람과 마주하여
나뭇잎 하나 흔들리고
네 보이지 않는 모습에
내 가슴 온통 흔들리어
네 또한 흔들리리라는 착각에
오늘도 나는 너를 생각할 뿐
정말로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은
내 가슴속의 날 지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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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사화
홍해리
내가
마음을 비워
네게로 가듯
너도
몸 버리고
마음만으로
내게로 오라
너는
내 자리를 비우고
나는
네 자리를 채우자
오명가명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
마음의 끝이 지고
산그늘 강물에 잠기우듯
그리움은
넘쳐넘쳐 길을 끊나니
저문저문 저무는 강가에서
보라
저 물이 울며 가는 곳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곤비한 영혼 하나
낯설게 떠도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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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상사화
나호열
하행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회덕인터체인지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논산, 익산, 고개 숙인 만경강
슬쩍 곁눈질하고 김제나 태인
그렇지 않으면 정읍에서 고창, 영광 쪽으로
빠져 이십칠 킬로 선운사 앞마당
사랑, 사랑 말들 많지만 전국 사랑을
볼 수 있다기에 동백꽃 지고 잎만
푸르른 날을 골랐네
봄이면 수줍은 듯 가녀린 이파리 몇 촉
올라오고 시들고 한참 뒤 그자리에 더
수줍은 꽃이 피어 무엇이 몸이고 마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데 잎 지고 꽃 진 자리
서성거리는 한여름 늘어진 두 그림자
우리가 그런 사랑 아닌가 정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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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상사화
이명수
속내를 드러내지 말라고
아리고 쓰려도 감추고 살라고
귓속말로 타일렀건만
배롱 나무 꽃 진자리
붉은 속살 들키고 마는 걸
어찌하랴
죽어도 끝내 병이 될 바에야
살아서 한철
주체할 수 없는 화냥기로
제살 태워 몸이라도 풀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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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꽃무릇
박종영
꽃무릇 너
상사화 흉내 내듯
온통 붉은 울음으로 그리움이다
그냥 임을 가늠하고 솟아올라도
꽃대는 푸른 잎 감추고 너를 이별하고
네 생애 단 한 번도
찬란한 얼굴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슬픔으로
붉은 눈물 뚝뚝
지상에 흩뿌려 한이 되것다
오늘도 강산은 핏빛이네
하늘빛 싸리꽃 너머
흔들리는 억새 춤을
불타는 네 가슴에 안겨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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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석산꽃
박형준
한 몸 속에서 피어도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해
무덤가에 군락을 이룬다
당신이 죽고 난 뒤
핏줄이 푸른 이유를 알 것 같다
초가을
당신의 무덤가에 석산꽃이 가득 피어 있다
나는 핏줄처럼
당신의 몸에서 나온 잎사귀
죽어서도 당신은
붉디붉은 잇몸으로 나를 먹여 살린다
석산꽃 하염없이 꺾는다
꽃다발을 만들어주려고
꽃이 된 당신을 만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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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시를 찾아서
정희성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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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슬픔의 힘
권경인
남은 부분은 생략이다
저 물가, 상사화 숨막히게 져내려도
한 번 건넌 물엔 다시 발을
담그지 않으리라
널 만나면 너를 잃고
그를 찾으면 이미 그는 없으니
십일월에 떠난 자 십일월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번뇌는 때로 황홀하여서
아주 가끔 꿈속에서 너를 만난다
상처로 온통 제 몸 가리고 서 있어도
속이 아픈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
오래 그리웠다
산을 오르면서 누구는 영원을 보고
누구는 순간을 보지만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사람이 평생을 쏟아 부어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온몸으로 말하는 나무와 풀꽃같이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은
무욕의 정신이여
그때 너는 말하리라
고통이라 이름한 지상의 모든 일들은
해골 속 먼지보다 가볍고
속세의 안식보다 더한 통속 없으니
뼈아픈 사랑 없이는
어떤 하늘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마침내 밤이 오고
마지막 새소리 떨어져 내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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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무인도
도종환
너의 운명은 네 성격 탓이었으리라
육지의 발끝에라도 달려가 붙어 있거나
아니면 물 속으로 차라리 잠겨 버릴 일이지
이만큼 거리를 두고 외따로 떨어져
댓잎으로 바람 향해 울을 치고
아침바다같은 것들만 네게 오게 하는 것이
오지 못하게 한 것들로 한없이
외롭게 사는 것이
너의 운명은 네 고집 탓이었으리라
떠나온 곳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버리거나
아니면 네 기슭에 인가 몇 채라도 지어
고즈넉한 사람 한둘쯤은 살게 할 일이지
제 깊은 곳에 상사화 몇 포기 자라게 하고
저녁마다 언덕 위에 왕달맞이꽃 키우면서도
바위너설이 물살에 다 문들어지도록
홀로 사는 것이
부드러운 네 고집 탓이었으리라
댓잎같은 네 성격 탓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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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상사화
정형택
아니올 줄 뻔히 알면서도
기다려 보는 일
사랑이 아니런가
만에 하나
오시기라도 한다치면
기다림 없이 돌아선 사랑
어찌할꺼나, 어찌할꺼나
기다림도 사랑이 된다면
내 이 자리
천년토록 기다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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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상사화
이재성
긴 긴 밤 애타는 그리움으로
행여나 님의 소리인가 바람결에 잠이든다
잎새 떠난 그 자리에 피어난 안개처럼
풀잎지고 꽃이피니 눈물꽃 상사화 라네
붉게 젖은 눈망울에 노랗게 타버린 가슴이여
이룰 수 없는 사랑 애처로움에 흐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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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상사화
이태수
따끈한 맨발로 뛰어내리는 햇살
진초록 잎들이 다 진 뒤에야
달아오른 홍자색 그리움
잎이 꽃을 그리워하듯이
꽃은 잎을 저리 그리워할까
한여름 천사의 저 애달픈 사연
상사화 활짝 핀 오후 한나절엔
멀리 떠나버린 그대 그리워
아득한 하늘 우러러본다
물같이 가고 오는 세월,
속절없이 꿈길을 걸어가는
그대는 오늘도 나를 그리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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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붉디붉은 그 꽃을
나희덕
산그늘에 눈이 아리도록 피어 있던 꽃을
어느새 나는 잊었습니다
검게 타들어가며 쓰러지던 꽃대도,
꽃대를 받아 삼키던 흙빛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바위에 남겨진 총탄자국도,
꽃 속에서 흔들리던 총성도,
더는 내 마음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 다, 잊었습니다, 잊지 않고는
그의 잎으로 피어날 수 없어
상사화인지 꽃무릇인지
이름조차 잊었습니다
꽃과 잎이 서로의 죽음을 볼 수 없어야
비로소 피어날 수 있다기에
붉디붉은 그 꽃을 아주 잊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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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상사화와 우주론
박남준
크고 높고
화려한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의 조화로움에 다 쓰임이 있는 것이다
태양과 행성과 거기 위성이 존재하며
별들의 우주가 반짝이듯이
어제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솟아오른 것들
상사화 꽃대가 올라왔다
이 삼복의 더위에
꽃과 잎이 끝내 이름처럼 만날 수 없는
숙명이라지만
때가 되어 이윽고 꽃대를 밀어 올리는
묵묵하고 꿋꿋한 생의 자세
이토록 놀라운 서사가 바로 곁에 있다니
새롭고 비상하는 일상이 따로 있을까
눈 들어보면, 귀 기울여보면,
그대 안에, 그대의 문 밖에
내 안에, 내 마음의 멀고 가까운 눈앞
펼쳐져 있는
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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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상사화 피다
정진규
도대체 이건 말 그대로 정체불명이다
잠입이라는 말씀의 막강한 실체다
어디서 오셨는가 가을 초입 새로
찾아오시는 가을 것들 적지 않으시지만
초라한 내 뜨락 서너 뼘 흙마당에 난데없이
초록 기둥들 이파리도 없이 빼곡하게
솟아오르더니 정수리마다 꽃 터졌다
붉은 꽃들 떼로 터졌다 만개 만개 중이다
상사화라지 아득한 가을 하늘,
허공 끌어당겨 바로 제 머리에 푸르게 얹고
붉게 가슴 탄다 상사화라지 이건 침략이며
점령군들이 다 당당하다 이상하지
그들이 나는 무섭지 않다 나는 주눅들지도 않고
숨지도 않는다 나도 덩달아 점령군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오래 쫄았다
사랑에 쫄고 쫄은 나도 상사화다
이제 무서울 게 없다 작살을 내겠다
마지막 한판이다 활짝 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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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상사화
조상명
봄부터 여름까지
하늘 향한 훤출한 잎
비 맞고 햇빛 받아
다음 세상에 올
꽃을 위하여
사랑의 열매
모으고 또 모아서
뿌리에 간직해 두고,
늦여름 어느날
홀연히 자취 감추면
연초록 투명한 꽃대
힘차게 솟아나
화려하고 붉은 꽃이
뜨겁게 뜨겁게
온 세상 밝히누나...
잎의 은혜에
내내 감사하면서...
뭇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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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상사화
이문조
잎 지면 꽃 나고
꽃지면 잎나고
가혹한 형벌
저주 받은 운명
서로 사모하다
세월 만 가는구려
아무리 아무리
사모해도
만날 수 조차 없는 걸
사모하다
사모하다
길어진 모가지로
먼데 하늘 쳐다보다
지쳐버린
슬픈 운명의 꽃
상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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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꽃무릇
박수빈
푸른 촛대에 불꽃들이 일렁인다
이루고 싶은 간절한 기원들
관계란 없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바람 불고 비에 젖으며
사라진 당신을 향해 물이 오른다
무엇이 붉게 달아오르게 하나
꽃은 무릇 뒤척이는 몸속의 길
뒤늦은 당신의 그림자에 내 눈이 불타고
눈에 닿은 기억이 번진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타들어 가는
이 세상은 불난 집
일생을 숨바꼭질하면서
길고양이처럼 울며
피 흘리는 저 숨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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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상사화의 노래
김두경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어찌 사랑의 문을 닫겠는가
그대와 함께 꽃필 수 없음에
그립다 목놓아 부르노니
어디로 가야 우리 서로 만날 수 있으려는가
언제쯤이나 우리 함께 웃어볼 날 있으려는가
영영, 우리 만날 수 없다 해도
나, 그대 향한 가슴 붉은 꽃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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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상사화
주응규
꽃피는 춘삼월 삼짇날 남짓이
말쑥이 초록 치마저고리 단장하옵고
애달피 임 기다리시다
오뉴월 볕에 메마른 눈물
앞 져간 고운 임의 넋 자리
팔월을 지르밟고 뒤져오시는
임을 맞아
함초롬히 꽃불 놓으시네
여인이여!
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치시기에
꽃으로 피어나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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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상사화 2
양전형
길이 내 자동차를 태워
시속 육십 키로미터로 달리고
시속 육십 키로미터로 그대생각 나다가
제주농고 정문 지나
길가 풀숲을 보는 순간
내 눈이 꽃에 맞았네
이파리 없이 활활 피어 어찌나 뜨겁던지
차가 멈추고
그대가 멈추고
그때부터
내 눈 속에
때도 없이 그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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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상사화 눈물
이도연
가는 허리 곧추세우고
못다 한 핑크빛 연정 달빛에 고고하게 흐르더니
그리움 사무치는 향기 전할 곳 없고
저 홀로 외로워라
구름이 달빛을 가려
가랑비로 울음 울어 서럽더니
길고 긴 황금빛 속눈썹이 이슬에 젖는구나
얼마나 울어야
상사화 이름을 이승에 버리고
꿈길 같은 천상에서 재회할지 모르건만
오늘도
이슬비에 젖어 울어 옷 끝을 부여잡더니
가랑비로 눈물 적셔
기어 코는 구름 같은 모습으로
재 넘어 길을 나서는구나
상사화 등지고
꽃무릇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기다리라 하였더니
밤새워 울음 울어 파란 밤을
하얗게 새웠구나
새벽이슬에 눈 떠보니
핑크빛 꽃잎은 눈을 감아
황금빛 속눈썹을 발아래 떨어트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가여워 바라보니 홀로 남은 줄기마저
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그리움이
외로움에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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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꽃무릇 봉오리
김창환
가을이 성큼 안겨와
푸른 들판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날
가슴에 풍성함을 채우지 못하고
텅 빈 허전함으로 부어
쓸쓸한 바람을 뿜다가
가을비가 대지를 녹이는 때를 틈타
쑤욱 꽃대를 밀어 올린다
그저 흐르는 물처럼 살아도 좋을
나 혼자만의 삶으로 좋다 하던
어제는 어디 가고
무릇 혼자라는 생각에
손을 내밀어 허우적거리면서
열정적이던 여름을 밀어낸
시원한 바람에서
머지않아 가슴을 찌르는
칼바람을 느끼는 걸까
하루아침에 풀쩍 뛰어내린 기온에
반사적으로 외로움을 쏟아내고
쑤욱 올라온 꽃무릇 꽃대 봉오리에
올려놓은 내 가슴이 처량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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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꽃 무릇
최설운
붉은 양탄자를 내리 깔아 놓고
고개를 우뚝 내밀어 기웃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데
날개도 없이
온 몸으로 날아가고자 하는
그대가 안타까워
호랑나비
나풀나풀 다가와
날개를 갖다 붙이려 하건만......
머리를 쭈삣거리며
함께 어울려
방글 방글 웃음을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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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꽃무릇 글 무릇
최이천
꽃무릇 피던 날
글 무릇 피였지
만나지는 못해도
그리워 애달픔은
동병상련 같아서
껴안아 보았다네
상사화 애절함에
글 무릇이 울고 있다
푸르고 청청한 잎새의
어울림은 꿈속에서나
만나야 하는 몽환이라
잊으렵니다
글 무릇 피었어도
찾는 이 없는
민둥산 잡풀 되어
눈 한 번 주는 이 없으니
그냥 시들어버립니다
☆★☆★☆★☆★☆★☆★☆★☆★☆★
(28)
상사화
이동순
꽃보다 먼저 잎은 지고
빈 천지에 바람만 도는데
꽃은 저 홀로 피어
하루종일 연분홍
저희들 한 대궁으로
생겨나고서도
어이 잎 먼저 저물고
꽃은 나중에 벙그는지
저희들 한 뿌리에
터 잡고 가쁜 숨 뱉으면서도
어이 꽃과 잎들은
서로 만나지를 못하는지
이 꽃만 보면 아무렴
죽은 문둥이 형님 생각에 목메이누나
그래 그래 목이 잠겨
말도 안 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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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꽃무릇
유필이
안고 있어도 불안한가
둘이 아닌 하나로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고 있어도 보고 싶은가
어쩌다가 만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번뇌에 시달리는 중생이 되었던가
전생에 지은 업보
이승에서 지독한 그리움으로
씻어내고 있는가
선홍빛 핏물로 서럽게 꽃 피워도
초록빛 눈물로 서럽게 잎 돋아도
너는 나를 향해 그리워하고
나는 너를 향해 그리워하지만
너와 나 뗄 수 없는 하나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 붉은 꽃잎에도 고운 향기가 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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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경주남산
김찬일
지금 묻노니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부꾸미 가득담은 둥근달에 탁발하며
경주고을 남산 숲에 숨어있는가.
그대는 무엇을 하는가.
산골짜기 물 따라 흘러간
다시 오지 않을 그날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가.
보면 눈물 날 것 같은
상사화 한다발 안고
그대 찾으러 남산 간다.
더할나위없는 추억의 기쁨이
나를 부축하는 그리운 그곳
그대와 은밀하게 나눈 사랑의 금오봉
여기였네.
옛날의 속삭임 간직한 상선암에서
하느적거리며
금빛 발자국으로 떨어지는 범종소리
나비 눈빛으로
야생화 꽃가루 물고 날아오는 운판소리
나비야 너의 날개 빌려주면
하늘 가는 화엄의 길 만날 수 있으리라.
산사에서 누군가가 목탁을 두드린다.
부화한 음표가 작은 물고기처럼
지느러미 반짝거리며 사라져간다.
이승의 욕정처럼 타오르는
은빛 갈대밭 건너, 남산에 들어와
바위와 합환하여
남산의 일부가 된 신라인이
천년 빗살문 열고
바람의 손가락으로 수화를 한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법열이 쏟아져
속세를 흔근히 적셔도
사랑은 여전히 괴로움으로 끝나고
소돔의 그 짓은 계속되고 있다.
남산속에 숨어 있는 그대여
이제 몸을 드러내
목관 밖으로 맨발을 보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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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상사화
정은정
꽃이 되었구나
물같이 흐르는 그리움에
애태우다 녹아 터졌구나
연분홍 입으로
꽃잎에 눈물띄운
타는 눈을 보고야 말았구나.
한 밤
별들이 내릴 때
작은 가슴 오므려
기다리다
기다리다
꽃이 되었구나.
타 들어가는 뜨거운 마음으로
애닯은 상사꽃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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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상사화
염규식
비 오는 하늘 짙은 구름 아래 두려움마저도
그리움에 몸부림치는 숱한 세월의 기다림도
그대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참아 낼 수 있습니다.
싸늘한 겨울바람 휘몰아치는 눈보라에도
보고 싶어 긴 긴 날을 기다리는 외로움도
그대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움에 지쳐 어느덧 울컥하는 가슴 저림도
칠흑 같은 어둠 속의 깜깜한 밤에도
오직 돌아온다는 말 한마디로 참을 수가 있습니다.
당신이 주고 간 소중한 사랑의 향기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그대의 포근한 사랑
그래도 한 몸이기에 아픈 이별을 참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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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도깨비도로에 상사화 피었어요
양전형
길 옆 풀숲에 껑충 핀 연홍 상사화
갈기갈기 베어진 상처 참 아름답네
천백도로 가는 길 도깨비 도로
신기하다 재재대는 사람들 뒤로하고
오르막길 자동차 저 혼자 오르는데
세상사 오르내림 알아버린 탓일까 꽃은,
피어야 하는 늦여름이 섧기만 하네
나에게도 이런 오르막길 있네
그대에게 가는 길 가없이 설레는 길
내리막 사랑인 줄 감감 모르고
나 혼자 줄곧 오르고만 있었네
그리움 한평생 오르고 또 올라도
도무지 닿을 수 없는 그대여,
가붓한 바람 비껴나는 이 길섶에 서니
갈래갈래 쪼개지며 나도 피겠네
☆★☆★☆★☆★☆★☆★☆★☆★☆★
(34)
상사화
박상희
그리움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슬픔 일인지 당신은 모릅니다.
우리의 어긋나는 안타까움은
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
날마다 그리움으로 길어진 꽃술
분홍빛 애틋한 그리움은
언제까지 홀로여야 할까요.
긴 세월
침묵 에서
당신을 그리는 법을 배우고
기다림 속에서
위로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배워갑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요
내 가슴에 심어진 당신의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어제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
(35)
상사화
주명희
잎이 다 지고 나면
꽃이 피고
꽃이 다 지고 나면
잎이 피고
계절이 바뀌고 몇 백 년 몇 천 년이 지나도
결코 만날 수 없는
너와 나는
꿈에서나 만나 보려나
살아도 살 수 없는 이 세상에
울며 울며 보내는 시간만이
그리워 그리워 하는 시간만이 그득하여
하릴없이
한숨만 토해낸다.
☆★☆★☆★☆★☆★☆★☆★☆★☆★
(36)
꽃무릇에게
박미란
벤치에 그가 누워있었다
눈을 감은 건 아니지만 눈을 감은 듯
거친 몸뚱이조차 맡길 데 없는
그때 나는 그 옆을 지나다가
꽃무릇을 보고 있었어
잎사귀 없이 피어도
하나같이 아름다웠는데
그걸 왜 굳이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눈물을 흘리는 그를 훔쳐보다가
그 자리를 떠나오고 말았지만
이제는
만난 적도 헤어진 적도 없는 이야기들
가끔씩 나도 바닥이 되길 원했던 것처럼
몸을 돌돌 말고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면
몇 송이는 나의 애인처럼 왕관을
펼친 채 피어났어
같은 계절, 같은 공간에서
어떤 꽃은 찬란하고
또 어떤 꽃은 기가 막히게 누추한지
각자 피는 일에 집중할 때
그 안쪽은 너무 어둡거나 밝아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
(37)
상사화
김인영
눈 안에 들어서
가슴에 박힌
하나의 이름으로
수 만개의 아픔을
간직한
떨리는 손으로
모두어 들인
서러움을 간직한
그대
☆★☆★☆★☆★☆★☆★☆★☆★☆★
(38)
꽃무릇
조한직
얼마나 그리워서
그토록 그리다가
허공에 곧은 절개 뻗쳐 들고
애끓는 붉은 심장 꽃으로 피우나
오직 한 사랑 그리워하여
한 생 온정으로 키운 줄기 위에
그리움의 붉은 눈망울 뜨겁다
마주 하지 못하고 질 설움에
다 녹아든 애간장
타오르는 정열 누를 길 없어
그리다가 그토록 그리다가
그리움 더는 못 참고서
그 가슴 온통 진홍빛으로 살라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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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상사화 1
이순옥
애절한 것은
저토록
검게 바스러지는가
생각의 그물은 멈추지 않고
마음속에 숨긴 글자
세상 밖으로 꺼내
발끝으로 떨어뜨린다
눈동자 가득 잘게 떨리는 빛
깊이를 알 수 없는 맑고 투명한 눈 속에
붉은 바다가 담겨있다
태양이 잠자고
삼라만상이
작은 우주가
타오르는 불꽃으로 수없이 담금질하여
마침내 형체를 갖춘
불의 차가움을 품은
봄 연못 위에 그려진 푸른 달빛아
☆★☆★☆★☆★☆★☆★☆★☆★☆★
(40)
꽃무릇 순정
김경희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지
모릅니다
하루 배웅을 하러 갔습니다
그때의 시간
늦은 밤 내내 허물어집니다
당신의 말씀 배려인 거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향하는 그리움으로
여전히 걱정입니다
해가 뜨기 전
눈으로만 봐도 좋은
당신을 사랑하며 기다립니다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
(41)
상사화(1)
이여진
만날수 없음을
윤회라 믿고
참아온 세월 몇백년
삭풍속에
견뎌온
인동초 설움보다 더 골깊은
마음의 상체기
한으로 남고
삼켜온 눈물은 꽃을 피웠다
만날 수 없음을
윤회라 믿고
그래도 기다릴 다시 몇 백년
☆★☆★☆★☆★☆★☆★☆★☆★☆★
(42)
상사화 애달게 피어
최길준
가녀린 몸매
고운 미소 하늘로 향한
긴 기다림의 그리움
한 올씩 벗어 던져
그대 영혼 속에
사랑 안에 아름답게 피어난다
귀밑머리 보송보송한 솜털
수줍은 마음
청순한 기품으로 서 있다
거역할 수 없는 순수
빨갛게 피어난 사랑
가슴 떨림에 설렘으로 다가온다
하늘거리는 자태
갈 바람 속에 맡기고
임 그리워 눈물짓는 밤
홀로 우는 애달픈 상사화여
☆★☆★☆★☆★☆★☆★☆★☆★☆★
(43)
상사화 꽃
허정인
한올 한올
빨간 꽃술 풀어
고백합니다
만날수 없어도
한번도
잊은적 없다고
한올 한올
꽃술 끝에 매달려
고백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내 사랑
변함 없다고.
☆★☆★☆★☆★☆★☆★☆★☆★☆★
(44)
꽃무릇
홍사윤
떠나간 님을 못 잊어
그리움 속에
애처로이 피는 꽃이여!
언제나 오시려나
피눈물 흘리며
망부석이 되어버린 꽃이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애간장 태우며
그리움 안고 피어 있구나
만날 수 없는 꽃잎 사랑
애절한 그리움
피를 토하며 핀 상사화야!
속절없이 진다 해도
피눈물 흘러내린 대지 위에
사랑의 꽃피우리라
☆★☆★☆★☆★☆★☆★☆★☆★☆★
(45)
상사화 피다
정진규
도대체 이건 말 그대로 정체불명이다
잠입이라는 말씀의 막강한 실체다
어디서 오셨는가
가을 초입 새로 찾아오시는
가을 것들 적지 않으시지만
초라한 내 뜨락 서너 뼘 흙마당에
난데없이 초록 기둥들 이파리도 없이
빼곡하게 솟아오르더니
정수리마다 꽃 터졌다
붉은 꽃들 떼로 터졌다
만개 만개 중이다
상사화라지 아득한 가을 하늘,
허공 끌어당겨 바로 제 머리에
푸르게 얹고 붉게 가슴 탄다
상사화라지 이건 침략이며
점령군들이 다 당당하다
이상하지 그들이 나는 무섭지 않다
나는 주눅들지도 않고 숨지도 않는다
나도 덩달아 점령군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오래 쫄았다
사랑에 쫄고 쫄은 나도 상사화다
이제 무서울 게 없다 작살을 내겠다
마지막 한판이다 활짝 피겠다
☆★☆★☆★☆★☆★☆★☆★☆★☆★
(46)
꽃무릇
구연배
올곧은 채로 살다가
외로워지는 날이 오면
꽃이 되는 마음도
타래처럼 얽힌 인연으로
가슴이 탄다
흔적은 있는데
찾을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내 안의 그대
그대 안의 나를 위하여
부지런히 일궈놓은 꽃밭에
선명히 찍힌
새벽새 발자국
상사화!
누가 붙인 이름인가
불같고
얼음 같고
영영 이별인
먼 인연의 걸음으로
앉은자리에서
마음만 흔들며 살아간다.
☆★☆★☆★☆★☆★☆★☆★☆★☆★
(47)
상사화
이정자
당신과 나는
같은 뿌리를 지녔으면서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잎 지고 나면 꽃 피어나는
어긋나는 사랑의 길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사랑의 형벌
오늘은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나
한 뿌리에 나고서도
하나가 되어 본 만남이 없었듯이
둘이 되어 본 이별도 우리에겐
없었습니다
☆★☆★☆★☆★☆★☆★☆★☆★☆★
(48)
꽃무
김병래
선운사
가는 길에
붉은 학들이
무리지어
무리지어
춤을 추네
갈바람을
부여안고
사무치게
사무치게
누굴 그리워
하는지
그리움으로
그리움으로
춤을 추네
☆★☆★☆★☆★☆★☆★☆★☆★☆★
(49)
꽃무릇
김영환
해년 이맘때면 찾아오는 슬픈 연인
진한 그리움과 무진 기다림의 인연
천년의 선홍빛으로 가을을 물들인다
무엇 그리 애타게 피워 내는가
연초록 꽃대 위에 붉은 꽃술들
이루지도 못할 애절한 사랑을
온 힘을 다해 한 세상을 열어낸다
홀로는 외로워 그리하는가
찬 바람 쓸쓸히 불어오면
하나둘 붉은 마음 토해내
그리움 일렁이는 파도가 된다
그리움이 바다가 되고
계절이 파도처럼 무수히
오고 또 와도 슬픈 연인들의
속절없는 인연만 애달프다
오늘도 진한 그리움이
붉은 꽃 바다로 피었다 지고나면
내일은 무진 기다림이
푸른 잎 바다로 또다시 피어난다
☆★☆★☆★☆★☆★☆★☆★☆★☆★
(50)
상사화
이영하
꽃이 피었네
빨간 사랑해 꽃이.
임 가슴에
내 가슴에
서로가 그리워
병 돋친
저녁놀 붉게 타
지는 것보다
꽃잎 떨어져 붉은 울 움 진
상사화보다
못 가는 발걸음
빨갛게 태운 애간장보다야
아파할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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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꽃무릇
강지혜
길죽 길죽 꽃손
산자락이 온통 꽃물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세상 일 꽃불로 다 태우고
마음에 한 웅큼 사랑의 불씨를
환하게 지핍니다
잎이 없어 더 붉은 눈부시게 화려해서
더욱 슬픈 꽃무릇이 온산에 피었습니다
내 얼굴이 꽃잎마다 얼비칩니다
혹시 누가 보았을까,
빠알갛게 달아오른 두 뺨
저 먼발치 가을이
소리없이 걸어 오고 있습니다.
☆★☆★☆★☆★☆★☆★☆★☆★☆★
(52)
꽃무릇을 순례하다
김종제
무릇, 사랑이란
저리해야 할 것 아닌가
잎이 뚝뚝 진 후에
꽃이 나고
꽃이 훨훨 날린 후에
잎이 피어나는
상사想思의 꽃 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
결코 닿을 수 없는 한 사람을
오체투지로 찾아가서는
문고리 흔들어보지도 못하고
덜컥 쓰러져
묘막만 남겨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저 지난至難한 사랑을 보겠다고
일주문 들어서지도 못하고
붉게 피멍이 든 꽃을 순례한다
불갑사에 용천사에 선운사에
어찌 절집에 많이 피었을까
애틋한 사랑이
또 하나의 눈물겨운 사랑을 바라보려니
측은지심으로 피었을 것이다
무릇, 사랑이란
무릎 꿇기 전에
목을 먼저 끊어야 할 것 아닌가
☆★☆★☆★☆★☆★☆★☆★☆★☆★
(53)
상사화
도종환
여름이 다 가도록 상사화 꽃이 보이지 않아
올해는 꽃을 피우지 않으려나 보다 하고
볼 생각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여름 끝 무렵에 꽃대 몇 개가
쑤욱 올라오더니 연이어 마당
가득 피웠습니다
여름 한철 푸른 잎으로 가득한 산이
분홍색 꽃등으로 환했습니다
봄에 푸른 칼 같은 상사화 잎이
딱딱하게 굳은
땅을 뚫고 올라올 때는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모릅니다
그러다
천천히 무너져 사라지면 한동안
상사화를 잊고 지냅니다
그러나 잊어버리고 사는
어느 날 불쑥 나타납니다
잎은 꽃을 볼 수 없고
꽃 또한 잎을 본 적 없는 채
서로 그리워한다고 해서
상사화라 부른다는 건 다 아실 겁니다
상사화 솟아오른 곳은 잎이 자라다
사라진 자리입니다
뿌리 내린 적 없는 자리에 피는
꽃은 없습니다
마당 잔디에 섞인 풀을 뽑다가
한 뼘 정도 되는 상수리나무 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쑥 뽑았더니
뿌리 끝에 반으로 갈라진 도토리가
매달려 올라옵니다
다람쥐가 묻었든 스스로 떨어져
땅속으로 들어갔든 씨앗이 있어
잎이 올라왔을 겁니다
그냥 버리기 미안해 비탈진 언덕에
옮겨 심었습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데 불쑥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려 한적 없는데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냥 제 발로 걸어 나옵니다
그렇게 튀어나오는 생각은 모두 내가
저장해 놓은 것이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뒤 머릿속에
저장된 것입니다
내가 저장해 두지 않았는데
튀어나오는 것은 없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은 저장해 두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풍경, 가슴 저미는 음악,
잊을 수 없는 사랑
고마운 사람, 감동적인 장면, 착한 언어,
선한 마음 즐거운 기억, 베풀고 나눈 시간,
좋은 만남, 가르침이 된 글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평소 좋은
것을 많이 저장해야 합니다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
그것들이 언제 상사화처럼 불쑥
솟아나올지 모릅니다
☆★☆★☆★☆★☆★☆★☆★☆★☆★
(54)
상사화 사랑
정종명
영원히 사랑하자 언약했는데
한쪽의 배신도 잘못도 아닌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되어 버린 사랑에
하나가 웃으면 하나가 울어야 하는
끊을 수 없는 비련의 고리 장난 같은 운명
혹시나 하는 그리움에 길어진 목
바람 따라 사방으로 흩날리는 향기에
반쪽소식 묻어올까 노심초사 애달픈 심정
첫사랑은 이룰 수 없다는 마법에 걸려
지쳐버린 기다림에 지금도
눈물 마를 날이 없다
짝사랑이면 돌아보지 않았을 것을
행여 만날 날 있으리란 기대에 찬 그리움은
끝나지 않을 외사랑이라 영원히 기다린다.
☆★☆★☆★☆★☆★☆★☆★☆★☆★
(55)
상사화
서혜미
그대 기다림에
야위어진 기~인 목
가을 햇살 남세스레
붉어진 얼굴,
목화솜 널어놓은
청자 빛 하늘 아래
저리도
선명한 꽃물을 풀어놓고
내 사랑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나
자꾸만 어긋나는
우리들의 사랑을
붉디붉은 화관(花冠)으로
곱게 단장하고
살아서 만날 수 없으면
죽어서라도 만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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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슬픈 힘
권경인
남은 부분은 생략이다
저 물가 상사화 숨막히게 져내려도
한 번 건넌 물엔 다시 발을 담그지 않으리라
널 만나면 너를 잃고
그를 찾으면 이미 그는 없으니
십일월에 떠난 자 십일월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번뇌는 때로 황홀하여서
아주 가끔 꿈속에서 너를 만난다
상처로 온통 제 몸 가리고 서 있어도
속이 아픈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
오래 그리웠다
산을 오르면서 누구는 영원을 보고 누구는 순간을 보지만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사람이 평생을 쏟아부어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온몸으로 말하는 나무와 풀꽃같이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는
무욕의 정신이여
그때 너는 말하리라
고통이라 이름한 지상의 모든 일들은
해골 속 먼지보다 가볍고
속세의 안식보다 더한 통속 없으니
뼈아픈 사랑 없이는
어떤 하늘도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마침내 밤이 오고
마지막 새소리 떨어져 내릴 때
☆★☆★☆★☆★☆★☆★☆★☆★☆★
(57)
나의 상사화
안용기
가는 시간과 오는 시간이 다르지 않은 것이고
삶과 돌아감이 함께하는 것이라
밀려 가고 밀려오는 시공이 하나로 이어지고
사라 지게 되는 것과
남겨 주고 가는 것이 다르지 않을 것이니
허무만 가슴에 남기 전에 넘겨 주는 것이
행복의 꽃이거늘
돌아가는 시간 앞에서도
무소유가 세상사
무한 아름다움의 소유로
영원히 지지않을 소유의 꽃으로
피어 있을 수 있는 것이오니
살아 있는 온기 따뜻한 가슴 가슴에
꽃씨 한알 심어 주고 떠나는 마음은
살아 있는 시간 앞에서도
떠나 가신 시간 속에서도
영원히 아름다운 삶의 꽃으로
피오 오르는 것이거늘!
☆★☆★☆★☆★☆★☆★☆★☆★☆★
(58)
상사화
임미숙
좋아한다 말 하지 마세요
내가 그대를 좋아할 수 없으니
사랑한다 말도 하지 마세요
그 사랑 받아 줄 수 없으니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빈 가슴을 좋아하시나요
수 없이 스쳐 간 인연 중에
어찌하여 어설픈 연에 이끌리셨나요
좋아해도
사랑해도
말하지 못하는 그대
좋아하고 싶어도
사랑하고 싶어도
받아 줄 수 없는 나
속울음 들킬세라 엇갈린 눈길
어느 땅 어느 하늘 어느 생애
우리 서로 껴안을 수 있을까요
☆★☆★☆★☆★☆★☆★☆★☆★☆★
(59)
상사화
장영길
분홍 기다림으로
빚어낸 비연의 꽃
잎마다 가득 담긴
천만겁의 그리움
혼절한 눈물 되고
맑은 잎 타버려서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날이 온다 해도
그대와 함께 하는
푸른 하늘이 있고
그리움 녹아내린
그대 품에 잠드는
영원한 꿈 있으니
☆★☆★☆★☆★☆★☆★☆★☆★☆★
(60)
꽃무릇
박희홍
한솥 부부로 한집 살림하면서도
서로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
토해낸 한숨이 바다를 이룬다
오는가, 목을 내밀어 봐도
기척이 없어 망연자실한데
먼 길 가려던 뻐꾸기 슬피 울며 위로한다
토해 낸 한숨이 선홍빛 피가 되어
간들바람 따라 산야에 흩뿌려져
님의 손잡고 오지 않고 혼자서 왔다
사방에 예쁘다는 입소문 자자하나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제각기 애간장 녹아 문드러진다
☆★☆★☆★☆★☆★☆★☆★☆★☆★
(61)
상사화 피었다고
엄영란
선운사 가자 했습니다
길은 아득한데 그저
꽃이 보고 싶다 했습니다
극락교 이쪽 꽃은 벌써 모가지 꺾였다 했습니다
그늘진 뒤쪽은 더 오래 핀다 했습니다
몇 번을 가도 그 자리인
장사송을 또 지나간다 했습니다
온 하늘이 자꾸 서쪽으로 붉어진다 했습니다
어쩌면 꽃무릇 탓인지도 모른다고
상사화 피었다고
선운사 가자 했습니다
꽃무릇도 피었다고
상사화처럼 피었다고
도솔암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에
구멍 숭숭 뚫렸다고
상사화는 어쩌라고
저 속 저리 환하냐고
상사화 피었다고
선운사 가자 했습니다
마당 귀퉁이에 심어 놓은
상사화 네 송이 피었다고
그는 바위처럼 말했습니다
☆★☆★☆★☆★☆★☆★☆★☆★☆★
(62)
상사화
서순임
희미하게 안개 속에 떠오르는
님이여~
처절하게 애태우는
그리움의 갈증은
가슴속에 맴돌고 멍들어간다
보고품에 잠 못 이루는 밤
홀로 임의 향기 그리워
창가에 부서지는 달빛 그림자
행여나 그 님일까
애타게 기다리다가
옹이가 된 상사화
멍든 가슴 슬픈 영혼되 어
상사화로 꽃 피우고
눈물방울 토해낸다
못 잊어 그리운 임 기다림에 지쳐
타들어 가는 가슴
피 빛으로 물들었나
시원하게 초록 옷 벗어 던진
상사화
꽃대만 새우고 머리에
선홍빛 쪽두리 화려하구나
☆★☆★☆★☆★☆★☆★☆★☆★☆★
(63)
상사화
박정순
어떤 천형의 죄를 지었기로서니
피었다 지는 순간까지
옷깃한번 스칠 수 없고
눈빛 한번 맞출 수 없는
운명의
너를 이름하여
누가 상사화라 불렀는가
이른 봄 피어난 잎사귀가
형태도 없이 폭삭 삭은
그 자리에서
한여름 연보라 빛 얼굴
살며시 내밀다
울컥 솟은 그리움에
목만 길어진 연두 빛 꽃대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한
이승, 아닌 저승에서조차
서로를 그리워하다 지는
업보의 꽃
누가 상사화라 이름지었는가
☆★☆★☆★☆★☆★☆★☆★☆★☆★
(64)
상사화
류인서
살 밖의 뼈가 어둡다고
달팽이는 저녁이슬 하나씩 깨물어 먹는다
살 밖의 뼈가 어둡다고
숲은 간이 싱싱한 어린 참나무를 찾고 있다
꽃대궁은 이미 뜨겁다
잎은 혼례에 늦는 신부를 데려오느라 아직 피지 않고 있다
살 밖의 뼈가 어둡다고
멀리 동구 밖 홰나무는 말울음 소리를 낸다
☆★☆★☆★☆★☆★☆★☆★☆★☆★
(65)
상사화의 전설
배은미
세상과의 긴 이별을 고하는 날까지
당신만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당신의 향기 따라 이만큼 살았습니다.
온 세상이 당신의 그 매무새처럼
청아한 빛으로 내 가슴에 물이든 것은
어쩌면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
태어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고
마지막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당하기 벅찬 사랑으로
당신 곁에 내려주신 하늘에게
온 마음을 모아 감사 드립니다.
태어나 하는 일이 아주 많겠지만
나는 당신 곁에만 머무르면
내 할 일은 다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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