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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역사에 심취되어 날새는줄 모르던 때 고구리 역사는 한반도 역사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병도의 스승이며 대한민국의 통사를 주도한 이마니사 류가 주장한 高句麗에서 요금원청으로 내려 오는 또 다른 역사가 존재 한다는 학설과 필자의 주장의 맥락이 같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아이신 구룬(金)과 다이친구룬(淸)의 역사는 정통 고구리를 잇는 역사가 아니며 오히려 거란이 고구리의 계보를 잇는 다는 것아 이마니시 류의 주장과 필자의 생각과 다르다. 이마니시 류는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 하면서 고대 삼국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잇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일제가 한국 통사를 쓰는 이유가 한반도의 영구 침탈에 의한 영구 소유라는 목적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 고대사를 모두 한반도로 축약한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거란의 멸망과 아이신구룬의 등장 80만 팔기군의 위용을 자랑 하던 거란은 거란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天祚帝 때 어처구니 없게도 불과 2천500명의 生女眞 부족장인 아이신 쥐러 아구다가 이끄는 민병대에게 괴멸 당하고 아구다의 민병대와 宋의 협공에 의해 천조제가 살해 당하면서 거란은 그야말로 고구리와 같은 戎(西遼)으로 돌아 가는 역사를 쓰는 것이다. 고구리는 강해져서 遼東으로 다시 돌아 왔지만 거란은 요동으로 돌아 오지 못하고 곧 이어 나타나는 몽골에 영원히 멸망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우리가 흔히 金나라라고 하는 나라는 말 그대로 김씨의 나라다. 어떤 사람들은 금나라가 金을 좋아 해서 金나라 라는 나라 이름을 가졋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훈민정흠 해례본이 발견 되기전 화장실 창문틀을 보고 한글을 창제 했다는 논리와 비슷한 주장이다. 금 나라 스스로 부르는 국호는 "아이신구룬"이다. "아이신"이란 우리 고대어의 아스, 아사, 아시, 아이신은 지역 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밝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것은 아침이라는 의미를 뜻하는 "朝"라는 한자로 표현 하기도 하지만 "金"과 "朴"이라는 漢字로 표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아이신구룬을 漢字로 표기 하면 金國이라 하는 것이다. 아이신쥐러 아구다는 생여진의 대부족장이엇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 시키고 여진족을 통치 하는데 거란의 직접적 통치를 받는 여진을 熟女眞(숙여진)이라 하는 것이고 반독립적인 여진을 生女眞이라고 한다. 女眞이란 靺鞨(말갈)을 거란인들이 부르는 이름이며 말갈의 어원이 "마라하라"라는 학설에 따라서 해석해 보면 "마라"란 우리말의 마나님의 "마나"의 어원이며 하라란 "근본적" "원래"이라는 의미의 原과 합하여진 調合語이며 말갈이라는 용어는 唐朝에 만들어진 말이며 말갈이라는 말은 한족 사관들이 마라하라라는 말을 자신들의 병음으로 처리한 한자 표현으로 보인다. 즉 거란의 표현인 여진이란 "마라하라"의 마라=女와 하라=眞(근본)으로 표현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즉 唐代에는 말갈로 불리웠고 거란에 의해 여진으로 불리우는 생여진이 화가 낫다. 천조제가 생여진의 대부족장이 아이신쥐러 아구다를 모욕을 준 것이다. 화가 난 아구다는 2천5백명의 민병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거란에 도전하엿고 주위의 부족들이 아구다와 합세 하면서 아구다의 민병대의 세력이 불어나면서 결국 거란의 80만 팔기군은 힘 없이 무너져 깄으며 화남 까지 후퇴를 하면서 거란에게 온갖 수모를 겪던 송에게 북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모르는 북쪽의 사정이 알려지게 되고 송은 아구다와 내통하여 결국 협공으로 거란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를 살해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송은 싸우는 척만 하고 모든 전투는 아구다의 군대가 치뤄 나갔고 송은 아구다에게 전쟁 비용을 지급 하기로 약속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송은 소위 말하는 오랑캐는 오랑캐로 잡는다는 以夷制夷의 전술을 쓴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공정 중국에는 2대 忠節(충절)이 있다.
蜀의 諸葛孔明(제갈 공명)과 趙宋의 岳飛(악비)가 그들이다. 중국에는 두개의 송이 있엇는데 오호십육국 시대의 송과 오대십국을 평정한 송이 있는데 오호십육국의 송을 劉宋이라 하고 오대십국을 평정한 송을 趙宋이라 한다.
악비의 뛰어난 무용은 금나라와의 싸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전공을 세우고, 정강의 변으로 휘종과 흠종이 아이신구룬/금에게 잡혀가자 조송은 멸망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흠종의 동생인 조구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南宋의 황제가 된다.
이때 악비는 고종을 따라서 남송으로 가게 되고 무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 성(湖北省)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1126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군대가 화북(華北) 지방을 침입하여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했고, 금나라가 화북을 점령하고 북송의 수도인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기고, 백성들에게는 결코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백성들이 앞 다투어 술과 고기를 바칠 정도로 남송 백성들의 신방이 두터웠다고 한다.
이때 아이신구룬의 군대는 송나라 전역을 피로 물들이며 송의 인구가 급감할 정도로 살육을 감행 햇다.
아이신구룬의 선봉대는 검은 옷을 입의 조의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시대를 살앗던 性理學의 朱子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금나라 군대를 까마귀로 표현 하며 주자의 제자들에게 가르쳣으며 훗 날 조선은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의 근본을 만드는데 조선의 사대부 및 유생들은 성리학을 가감 없이 받아 들임으로서 길조인 까마귀는 유독 조선에서만은 재수 없는 동물이 되는 역사를 만든다. 동양에서 유독 우리나라 만이 까마귀를 凶鳥(흉조)로 여기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이 군단은 '악비가 이끄는 군대' 라는 뜻의 '악가군'이라 불리며 남송 제일의 최정예 군단으로 꼽혔다.
악가군은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등의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 강(淮河), 친링산맥(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그는 구릉지가 많은 강남지역의 지리적인 이점을 잘 이용하여 금의 기마공격을 막았다. 고종과 함께 남쪽으로 퇴각한 악비는 정원장군(靖遠將軍)·절도사(節度使)를 거쳐 무승진(武勝鎭)·정국진(定國鎭)의 2개 진의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136년 선무부사(宣撫副使), 1137년 선무사에 임명되어 長江과 淮河 남부 사이에 위치한 중원(中原) 지역의 회복에 진력했으며, 이로써 금이 점령했던 일부 지역을 수복할 수 있었다.
악비는 조정 내에서도 북벌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북진하여 잃어버렸던 모든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주화파(主和派)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들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소속 병사들을 모두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1141년 조정의 군제 개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양자 악운과 악가군의 최고 간부인 장헌과 함께 투옥된 뒤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 악운의 나이는 23세 였다.
그리고 북방의 영토를 포기하고 금을 섬기며 조공을 바친다는 내용의 화의(和議)를 체결하였고, 이 화의를 굴욕으로 본 인사들에 의해 當代에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다.
1155년 진회가 죽고 난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고,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1204년 악왕(鄂王)으로 추봉되어
뒤에 忠武의 시호가 가증되었다.
훗 날 明나라에 의해 국가 차원에서 그를 구국의 상징으로 추앙해 왓으나 현재의 中華人民共和國은 악비를 역사의 反動(반동)으로 몰아 가고 있다.
동북공정에 의해 金나라를 중국의 역사로 보려는 생각으로 중국의 2대 충절인 악비가 역사의 반동 분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영역 확대를 위해서 라면 못하는 것이 없는 중국.
존재 했던 역사 영역 마져 축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대한민국. 靖康之變(정강지변) 금나라 아구다와 송나라 휘종이 합세하여 마침내 거란(遼)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으나 宋나라 휘종은 전연지맹의 약속을 어기다가 금나라 군대가 송나라 수도 카이펑을 공격하여 휘종과 흠종을 사로잡아 금나라로 압송하는데 이것이 "靖康之變"이라고 한다.
漢族은 지금의 中華人民共和國까지 포함해서 한족 역사상 달랑 4번 나라를 세우는데 2번째 나라인 宋의 휘종과 흠종이 아이신 구룬(金)의 아구다(阿骨打)에 의해 사로 잡혀 금나라의 수도인 연경으로 잡혀가서 애비인 휘종은 "정신나간 놈이"라는 뜻의 昏德公(혼덕공)이라는 칭호와 아들인 흠종은 "정신 나감이 중증"이라는 뜻의 重昏侯(중혼공)라는 칭호를 부여 받은 두 父子가 죽을 때 까지 금나라의 땅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다 결국 송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들이 말하는 오랑캐의 땅에서 개처럼 죽은 사건이 "靖康之變(정강지변)" 이다.
휘종은 아이신 구룬의 공격으로 항복을 하면서 막대한 배상금과 조공을 약속했지만 갖은 핑계를 대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북방 부족을 시켜 아구다에 반란을 하도록 이간질 시키다가 이를 알아 챈 아구다의 공격을 받자 잽싸게 아들인 흠종에게 양위를 한다.
흠종의 연호가 靖康(정강)이며 정강이 즉위 하던 해, 즉 정강 원년에 휘종과 흠종과 그의 신하들 모두가 사로 잡혀 燕京(연경)으로 끌려가서 모두 죽는 사건이다. 연경은 지금의 북경이다.
조선의 인조가 三田渡의 굴욕이라 하여 우리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역사로 기록한 삼전도의 굴욕은 정강지변과 비교하면 굴욕이라 할 수 도 없음이다.
이때 두 父子을 압송하는 총 대장군은 텍리장군이었는데 압송중 신안현이라는 곳에서 그곳의 현령을 대동하고 주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만취한 택리는 휘종의 마누라인 주황후에게 술시중을 들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주황후는 휘종과 흠종이 다칠까하여 죽지 못해 노래를 부른다.
"어린시절 부귀하여 비단치마 싫증나네
성장해서 입궁하여 귀한 술잔을 받았네 이제 나이들어 타향을 헤매니 조물주여 빨리 죽여 주시어 나를 강하게 하소서" 라며 구슬프게 노래 했다.
그러나 한족의 말을 모르는 택리는 아주 좋아 하며 그곳 현령에게도 술을 따르도록 명령하고 노래 한곡을 더 부르라 명한다.
"얼마 전에도 천상 같은 보석으로 된 궁궐에 살았는데
이제는 들판에 있으니 이를 어이 할까 몸을 굽혀 치욕을 당하니 이 한을 어이 다 풀까 한시도 빨리 저 세상으로 가면 이 치욕을 끝낼 수 있으련만"
이 노래를 듣고 있던 휘종과 흠종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데 택리는 황후에게 자신 곁으로와 술 시중을 들라 명하나 황후가 미동도 하지 않자 그녀에게 다가와 강제로 끌고 가려 하자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을 한다.
대노한 택리는 황후가 정신을 잃을 때 까지 두둘겨 팬다.
10여일 만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거지꼴을 하고 수도 연경에 도착한 그들은 아구다의 동생 오걸매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고 흙으로 된 움막에서 썩은 고기와 보리밥 2그릇으로 하루의 삶을 이어 간다.
치욕과 상심으로 몸져 누운 주 황후는 3일만에 그곳에서 죽었으며 멍석으로 대충 말려져 야산에 버려 졌다.
나머지 세 사람은 영주로 보내져 토굴에 기거 했으며 그들의 감시관은 흉기를 검사 한다며 흠종의 정황후의 몸을 뒤지며 성적 수치심을 주었으며
그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했으며 오국성으로 옮겨지며 정황후도 죽는다.
3년 뒤 휘종은 눈이 멀더니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그 후로도 개 같은 삶을 이어 가며 宋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꿎꿎하게 살던 흠종은 송나라의 황제가 바뀌고 남쪽으로 도망가서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때 宋은 또 다시 아이신 구룬과의 약속을 어기자 황제 완안량이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조련 하던 중 흠종을 데려 오게 하고 그를 과녁 삼아 화살을 난사하고 그가 죽자 진흙 바닥에 내 던지고 말들을 달리게 하여 짓밟아 버린다.
아이신구룬의 황제가 얼마나 송나라 한족들을 얼마나 증오 했는가를 앐 수 있는 대목이다.
흠종의 나이 56세였다.
中華人民共和國 사람들에겐 차라리 지워 버리고 싶은 참담한 역사. 이것이 靖康之變 이다. 아이신 쥐러 아구다는 경순왕의 후손인 김함보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청의 건륭제는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신라를 자신들의 조상 국가로 지목하고 잇지만 신라와 여진을 묶을 수 있는 뚜렸한 역사적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김함보가 아구다의 조상이라면 모르지만....,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자신들의 첫 조상 국가로 지목한 "肅愼(숙신)은 여진의 말로 읽으면 "쥬신'이라고 한다. 여진인들의 開國神은 "開天弘聖帝"라고 하는데 개천홍성제의 뜻은 말 그대로 하늘을 열고 널리 성스럽게 하는 임금이라는 의미다. 즉 우리의 단군 사상과 같다. 여진인들은 매년 백두산에서 개천홍성제께 제사를 지냈으며 이와 같은 이유로 백두산은 그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되는 여진인들의 성지엿던 것이다. 함경도와 평안도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 하기 전 까지는 유사이래 여진의 영토 였다 따라서 평안도 사람들과 함경도 사람들은 여진인들인 것이다. 숙신 부터 여진 까지는 모두 이족들에 의해 이름이 불리워 오다가 드디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다. 文殊=만쥬 우리가 文殊라는 漢字를 읽으면 "문수"로 읽지만 여진인들 스스로 읽으면 "만쥬"인 것이다. 문수란 백두산 문수보살 사상에 의한 작명 되어진 이름이며 문수족의 근원이 백두산임을 알 수 있는 이름인 것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며 자신들이 중국인이라고 생각 했다. 위계질서를 중요시 하는 성리학은 큰 나라인 송을 위계가 낮은 북방 오랑캐인 金이 宋을 작살 내는 것은 조선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었던 것이다. 불꽃 같이 일어난 금은 곧 이어 나타난 징기스 칸에게 속절 없이 무너지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