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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3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주님 앞에서는 죽기에만 합당한 죄인이요 허물밖에 없나이다.
내가 주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하겠나이까?
나의 약함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이다.
나보다 약한 자들에게 나의 의를 드러내려 한 죄는 내가 하나님 되려는 자기주장의지이오니 이런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예수로 사는 자 되게 하소서.
나의 약함과 예수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나의 자랑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나의 허물과 죄를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 앞에 정결한 신부요, 기름을 예비한 슬기로운 처녀로 서게 하옵소서.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거룩한 불구자요, 영적 하루살이로 살기 원하나이다.
나의 육신의 소욕은 불태워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6:9-20
제목 :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 나의 묵상
세 명의 여인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과 흰 옷을 입은 천사의 부활 고지를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
한편 오늘 본문인 9-20절까지는 ‘대괄호〔 〕’로 처리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신약 성경의 대부분의 사본에서 본문의 내용을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을 가리켜 ‘연장된 종결부’라 칭하며 많은 학자들은 보다 많이 발견되는 짧은 종결부를 원문에 더 가깝다고 인정하여 연장된 종결부는 추가된 기록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저자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의 종결부를 기록했지만 초기에 본문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그 종결부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종결부에 있어야 할 내용이 없음을 발견한 초대 교회가 그것을 보충한 내용이 9-20절인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오늘 보는 9-20절의 내용은 다른 병행 본문들의 내용을 보충해 주고 있으며, 그 내용의 진실성을 의심할 문제가 전혀 없으므로 정경의 일부로 보아도 무방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9-11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셨고,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마리아의 말을 들은 제자들의 불신이 그대로 드러난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예전에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 받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슬픔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린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과 현현에 대한 마리아의 증언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은 요한복음에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구부려 울면서 무덤 안을 보았다.
무덤 안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이 뉘어 있던 위아래에 각각 앉아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묻자, 그녀는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가져가서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하고 두리번거렸는데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인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울면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실 때, 마리아는 그가 동산을 괸리하는 사람인 줄 알고, 당신이 주님을 옮겨놓았다면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달라고 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하여 아람어로 ‘랍오니’ 하고 대답하였다.
랍오니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인 줄 알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를 그렇게 계속 붙들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는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와 동시에 내가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셨다.
이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를 보았고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전하였다.
그런데 본문 11절에서는 마리아가 그런 사실을 알렸음에도 제자들은 이를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13절, 두 제자에게 다시 예수님이 타나나셨고 그 사실을 열한 제자들에게 알렸으나 여전히 그들은 믿지 못하였다.
14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 모두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앙을 꾸짖으신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당시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까?
나 역시 장담할 수 없다.
3년 동안이나 예수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도 잘 믿지 못했는데 내가 뭐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나 자신을 잘 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말이다.
복음도 모르고 생명은 더더욱 알지 못했던 자였는데 주님의 공의로 받은 심판을 통하여 복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영생을 얻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가 그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더라면 나의 반응은 과연 어떠했을까?
아마도 나의 연약한 믿음을 잘 아신 하나님께서 그 당시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복음을 듣게 하심을 믿는다.
그 때 내가 존재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 잘 걸러지고 정제된 복음을 듣게 하셔서 그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메시야 사건 곧 십자가죽음과 무덤에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과 현현의 복음을 알게 하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마리아의 증언과 두 제자의 증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열한 제자들.
주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의 완악함을 꾸짖으셨다.
본문에서 사용된 ‘믿음 없는 것’은 헬라어로 ‘아피스티아’인데 이는 믿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일에 사용된 강렬한 용어이다.
또한 ‘마음이 완악한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클레로카르디아’ 역시 확실한 증거를 거절하는 굳은 마음을 뜻한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제자들의 마음이 이미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방금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그 단어들은 이제까지 제자들을 꾸짖으실 때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닌 단어라는 점에서 그들의 불신앙과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렇게 마음이 완악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로 돌변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가 분명 유대인의 왕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고 자기들은 그 옆 자리 하나씩 차지할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꿈에 부풀어 있던 자들 앞에서 왕이 아니라 죄인 중에 괴수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렸으니 그들의 믿음인들 온전할 리 만무할 것이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부활에 대한 증언을 들었음에도 그것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누구라서 그들을 깔아뭉개고 비난하겠는가?
나는 그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지극히 부족하고 연약하며 죄 짓기를 밥 먹듯 하는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던가?
나는 복음을 알기 전까지는 예수를 이용해서 나의 온갖 유익을 창출해내며 나의 필요를 채우려는 자로 살았었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면 무엇이든 갖다 바치는 도깨비방망이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류의 기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내 유익을 위한 기도가 잘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나의 기도는 점점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기도가 항상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를 하되, 이것도 안 될 거야, 하는 자포자기식의 기도, 제자들처럼 믿음 없는 기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기도를 포함한 일련의 모든 행위들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에도 다 있다는 것이다.
나는 복음과 영원한 생명을 전혀 알지 못하였기에 그저 다른 종교에서 하는 행위와 똑같이 그저 열심을 부리고 최선을 다하여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어내고자 애써 노력을 하곤 하였다.
심지어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 역시 그런 마인드로 하였다.
내가 열심히 하면 무언가 잘 이루어지겠지, 하는 지성이면 감천이 내 신앙의 모토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지기 시작하시고 당신의 공의로 나를 심판하셔서 내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으셨다.
조그만 교회 안에서 관계의 문제가 엮이고 꼬이게 하신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최선을 다하면 할수록 더 꼬일 뿐이었다.
나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참으로 신묘막측하시다.
바로 그 때 복음을 듣게 하셨다.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행하신 구속사역 곧 십자가복음과 장사복음 그리고 부활복음과 현현복음을 들었다.
목회의 출구가 막혀서 도무지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 이 복음을 들으므로 출구가 생긴 것이다.
이는 바로 장사복음이었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했던 내게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나를 주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당한 어려움과 고난은 주님이 주신 은혜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감사의 제목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이 땅에서는 부자가 되고 인정을 받는 성공한 목회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땅에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끌림을 받아서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관점에서는 실패한 목회자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복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오늘도 말씀의 교제와 사귐으로 그 나라를 누리며 살아간다.
교회도 없어지고 사랑하던 성도들도 다 잃었다.
그리고 이곳 베트남에 와서 아주 작은 한인 목회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목회보다도 행복하다.
그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그 뜻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작지만 주님 안에서 큰 교회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마음과 내 뜻대로 살며 나의 필요를 채우려던 자는 죽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 복이 아님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결국 나를 진짜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나를 그 탐욕의 전쟁터에서 건져주시고 영원한 안식처인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하셨는데 사망으로 가기 전에 나를 구해 주셨으니 이것이 웬 은혜요 웬 사랑인지요?
여러 차례 부활의 증언을 듣고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 안에 내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아니 그들과 어찌 견주겠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런 나를 사랑하시어 구하셨으니 오늘도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원합니다.
오늘 마가복음 묵상을 마칩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주님 안에서 복음으로 듣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마가복음 함께 마쳐서 감사!
명예욕과 소유욕, 탐욕의 전쟁터를 방불하는
세속 목회에서 건져내사 아버지 집으로 이끄시고,
소수라도 마음껏 생명을 전하는 복된 자리로 인도하심에 감사!
달려갈 길 마치기까지 신실하게 인도하소서!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