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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Rome)>
3,000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는 테베레 강의 하류에 위치한 이탈리아의 수도로 영원한 도시라고 불리며 일찍이 고대세계의 중심지였고,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시대를 통해서 긴 시간동안 유럽문명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로마의 전설로 BC 753년 로마의 건설자인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다. 이들은 레아 실비아와 전쟁신 마르스 사이에 태어나 티베르강에 버려졌는데 늑대가 물어다 길렀다고 한다. 이들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났으며 그 후 누가 이 도시를 통치할 지를 두고 싸우다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 후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계 왕을 추방하고 귀족에 의한 공화제를 실시함으로 로마는 여러 라틴 도시의 맹주가 되어 고대 로마국가의 중심이 될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이곳은 카미돌리오 언덕, 첼리오 언덕, 아벤티노 언덕, 에스퀄리노 언덕, 퀴리날레 언덕, 비미나레 언덕으로 처음 집단이 이주하게 되면서 테베레 강의 왼쪽에 있는 7개 언덕이 로마의 중심거주지가 되었다.
로마인의 도시건설은 우선 공공광장을 만들고 그 주위에 벽돌을 쌓고 교회당과 대하수도를 둘러싼다. 또한 로마유적의 특징은 완벽한 복원이라든가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고 시간이 흐름과 자연미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정신적, 물질적 중심지로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발자취를 남겼으며, 인류의 예술 및 지성사에 커다란 금자탑을 쌓아올린 도시이다. 이 도시는 1,000년 이상 유럽의 모든 문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중세말기에 이르러 제국의 영토축수, 경제의 마비, 정치적, 군사적 무력 등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의 세력은 잃었지만 입법, 교육, 건축도시로서 전 유럽에 계속 빛을 발했다. 6-15세기에 교황들의 입지는 때로 위태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전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킨 도시로 영광을 누렸고, 궁극적으로는 부와 힘을 되찾았으며 또다시 미, 지혜, 예술의 도시가 되었다.
아름다움과 고색창연함과 명랑함과 여유로움이 로마의 좋은 면이라면, 좀도둑과 소매치기와 집시와 난폭운전은 로마의 악명 높은 대도시로 만드는 주요인이란다. 이곳에는 집시 말고도 소매치기가 어느 지역보다 많으며 치안상태가 취약하단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테르미니역 부근, 콜로세움, 공회당, 화려한 쇼핑세터, 재미있다고 정신없이 바라보는 축제행렬 옆이나, 혼잡한 버스 안에는 항상 이들의 눈이 반짝인단다. 4-5명씩 떼 지어 신문지를 들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특히 조심해야 하는데, 이들은 프로 소매치기들이어서 얕보다간 큰코다친다고 가이드가 누차 환기시켰다.
13. 바티칸 박물관과 베드로 성당
이탈리아의 흥망사를 보면 BC 27년부터 AD 962년 오토 1세에 의해 성립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에 들어가기까지 이탈리아는 약 천 년 동안 서구 세계에 군림하여 왔다. 그 중에도 후대에 5현제로 불리는 초기 200 년간이 최고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11세기 이후에는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영주들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여 도시 국가로 분열되었다. 1453년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1861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에 의해 통일왕국이 성립되기까지는 주위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고, 지금의 이탈리아 반도의 완전한 통일 국가가 이루어진 것은 1870년 이후이다.
로마의 아침이 밝았다. 버스에 오르면서 가이드는 말한다. 관람객이 많을 경우 길게 줄을 설 수도 있으니 미리 양해 해 달라고. 아니나 다를까 조식 후 서둘러 갔는데도 이미 150미터 이상 길게 늘어섰다.
이 안에서 일행을 놓치면 영원한 국제미아가 된다고 겁을 주어 무작정 가이드만 졸졸 따랐다. 안에 들면 사람들에 밀리어 충분히 감상할 여유가 없어 광장 한 쪽에 명화의 복제품을 전시하여 미리 감상과 설명에 부응토록 하였다. 그런데 여기도 단체 관광 인파가 차례를 기다리고 섰으니 가히 관광도 하나의 전쟁이었다.
여러 문과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내리며 궁 안 전시실을 두 시간 이상 돌았는데 전체 벽과 천정이 온통 벽화와 그림으로 꽉 찼다는 느낌뿐이다. 오직 기억에 남은 것은 바티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이라는 시스타나 성당 천정에 그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뿐이다. 그리고 조각 중에서도 역시 미켈란젤로의 작품,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특히 이 작품에는 유일하게 작자가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다음은 말로 수없이 들어온 ‘산 피에트로 대성당’(베드로 성당)으로 안내되었다. 와! 첫 인상은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것과 온통 그림과 조각으로 치장하여 황금보석의 진열장을 방불케 하였다. 인간의 재능이 신과 견주어 그 한계상황의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우리나라처럼 성당 안은 텅 빈 예배공간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부는 독립된 십여 곳의 예배 처소를 따로 갖추었고 그것들은 그들대로의 독특한 예술로 장식되어 있었다.
원래 이 성당은 4세기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성 베드로의 순교를 기념하여 지은 것인데 내외 건물과 조각은 당시의 것들이 아니라 긴 세월을 두고 보강되었으며 16세기 교황 율리우스2세의 명에 따라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마데르노 등 당대의 거장들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중앙 오른 편에 있는 베드로의 동상은 하도 만져서 발가락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동상 뒤로 보이는 바로크 양식의 커다란 청동 기둥(天開)은 베르니니가 27세 때 만든 작품이며, 천장을 덮고 있는 높이 120m의 돔은 미켈란젤로가 만들다 죽은 후 도메니코 폰타나가 1590년에 완성한 것이라 하는데 규모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말문을 잃게 한다.
한 시간쯤 무엇에 홀린 듯 취했다가 밖으로 나오니 머리가 빙빙 도는데 성당 앞 산 피에트로 광장이 장엄한 모습으로 다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바로크 예술의 거장 베르니니가 설계했다는 원형 광장으로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엄청난 넓이다. 광장 양쪽으로 한 아름씩 되는 142개의 도리아식 돌기둥이 반원형 회랑을 이루었는데 회랑 상단부마다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조각한 142개의 성인 입상이 광장을 제압하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장 한 가운데는 가난과 무지에 팔려온 거구의 오벨리스크(25.5m)가 영원한 향수에 젖어 장승처럼 외롭게 섰고 그 좌우로 하늘을 찌를 듯 내뿜는 분수대의 폭포가 감상에 달뜬 머리를 잠시나마 시원하게 씻어준다. 광장 끝 도로에 흰 줄이 그어져 그것이 바티칸시국과 이탈리아와의 국경이라고.
런던과 파리와 로마에서 본 박물관의 인상을 나대로 정리해 본다. 대영박물관은 석조미술 즉, 조각의 비중이 훨씬 크다고 하겠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시절 문화적 가치에 먼저 눈을 돌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희대의 예술품들을 수단껏 모아들였기에 프랑스보다 한발 앞선 수준이었다. 루브르박물관과 바티칸 박물관은 그림 위주라고 하겠다.
14. 프로 로마 유적지와 콜로세움
인류흥망성쇠의 무상감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로마의 대표적 유적지가 바로 이곳 ‘포로 로마노’ 유적지다. 이천년 전 로마 전성시대의 잔해들이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먼저 찾은 곳이 트레비 분수대였다. 교황 클리멘스 13세의 명에 의해 1762년에 완성된 것으로 바다의 신 넵튠이 마차를 타고 달려 나오는 모습이 사실감으로 조각되었다. 이 트레비 분수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어깨 너머로 동전을 던지는 오드리 헵번의 청순한 모습으로 하여 더욱 유명해졌다고. 전하는 속설로 동전을 하나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게 되고, 둘을 던지면 사랑을 이루게 되며, 세 번 던지면 오히려 이혼을 하게 된다던가.
첫 키스의 장소엔 젊거나 늙었거나 연인들로 초만원, 아이스크림을 먹던 곳엔 어김없이 가게가 있었다. 일행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돌리고 나서 아내와 함께 “브라보”를 외치며 웃음을 날렸다.
다시 들른 곳은 바울이 로마로 이송되어 갇히었던 지하 감옥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인상 깊은 곳이다. 좁은 통로로 내려가 지하 2층에 십여 명 겨우 앉을 만한 장소다. 바울이 옥중 서신을 집필한 곳이기도 한데 그가 감옥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어느 죄수에게 세례를 주려고 기도하자 감옥 바닥에서 샘이 솟아나 세례를 베풀었다는 ‘기적의 샘’이 지금도 더도 덜도 않고 졸졸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울이 앉았던 그 자리에 나도 앉아 기적의 샘물을 손으로 움켜 본다.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뭉클 치솟는다. 바로 이 자리가 기독교의 세계화, 오늘날 찬란한 서구 기독교 문명의 산실이 되지 않았던가?
포로 로마노는 엄청나다 할까. 장관이라 할까. 고대 로마시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기나긴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깨지고 무너지고 어떤 것은 주춧돌만, 어떤 것은 기둥만, 어떤 것은 바람벽만, 또 어떤 것은 반쯤 무너진 채, 오직 찬란했던 과거의 영화를 반추하면서 쓸쓸히 나그네를 맞고 있었다. 잠시 왔다가는 나그네의 마음도 함께 외롭고 측은해짐은 어찐 일일까.
천 년의 풍우를 이기고 오롯이 그날의 모습대로 남은 것은 오직 개선문과 원로원 건물뿐이었다. 이 근처에는 세 개의 개선문이 있었다. 입구에 셉티미우스 세베레스 황제가 아라비아와 앗시리아와의 전승을 기념해 세운 세베레스 개선문. 그와 200미터쯤 마주보는 언덕에 세운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 그리고 콜로세움 앞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승전을 기념해 원로원과 시민이 합심하여 세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그것이다. 규모나 예술적으로나 맨 나중의 것이 가장 걸작인데 이것이 파리 개선문의 모델이 되었다고.
로마를 대표할 만한 콜로세움(원형 경기장)을 시간이 없어 외형만 둘러본 것은 두고두고 아쉽다. 콜로세움은 로마의 전성기인 서기 80년에 완성된 것으로 외국의 전쟁포로들을 끌어다 8년에 걸쳐 지은 것이다. 둘레 527m의 타원형 4층 건물로 5만 명을 수용했다. 도리아식 회랑 장식이 웅장함을 더해 준다. 지금은 앞부분 일부만 남아 있는데 그것도 반 이상이 땜질로 복원한 것이었다. 이곳은 지배자들의 쾌락과 영화의 상징물이자 피지배자들의 고통과 죽음의 장소이기도 했다. 지배자들의 즐거운 눈요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검투사와 노예들이 죽어갔는가? 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자 밥으로 희생된 곳이던가?
콜로세움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최고최대의 조형물인 동시에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영욕의 세계를 함께 증언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의 마지막 날 밤, 로마를 떠나는 아쉬움에 로마의 밤바다를 한번쯤 더 보고 싶어 길을 물어물어 아내와 함께 포구의 방파제로 나갔더니, 검은 바다와 시가지의 불빛이 마치 천국과 지옥처럼 명멸하는데 성난 지중해 바람은 사정없이 우리를 휩쓸어 갈 듯 사납다. 그 때 해수욕장 모래밭 속으로 검은 두 그림자가 나타나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섬뜩했는데 반가워라, 일행 중 약국을 경영하는 부부가 아닌가. 함께 포구를 돌다가 어느 bar에 들러 밤이 그윽토록 세상얘기와 여행담으로 생맥주 몇 잔에 취해 본 것이 이번 여행 중 유일한 낭만이었다.
15. 지하 도시 폼페이(Pompeil)를 찾아
오늘은 멀리 남쪽으로 나폴리를 찾아 떠났다. 우리나라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이탈리아의 고속도로를 그 모델로 삼았다고 가이드는 전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형 풍토가 비슷해서 그런지, 꼭 우리나라 어느 지방을 달리는 기분으로 착각할 정도다.
나폴리(Naples)에서 사설(私設)기차를 갈아타고 먼저 신비와 전설에 싸인 폼페이 유적지를 들렀다. 제정 로마시대 귀족들의 휴양과 쾌락의 도시였던 인구 2만의 도시가 하루아침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을 상상으로 재구성해 놓은 영화가 <폼페이 최후의 날>이다.
약 천 미터쯤 되는 베수비오 화산은 로마에서도 육안으로 보일만한 거리에 위치한다. AD 63년에 이 산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서 도시의 절반이 파괴된다. 그러나 당시 통치자 네로 황제는 도시를 복구하고 더 화려한 향락의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로부터 16년 뒤인 AD 79년에 이번엔 엄청난 화산이 폭발하여 도시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그로부터 1700여 년간 역사에 묻혀 있다가 1748년에 우연히 발견된 이후, 지금은 80% 정도가 발굴되어 관광객에게 개방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나대로 정리해 본 성서적 판단은 다음과 같다. 구약성경의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하면 된다. 이 도시에 성의 타락과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더 이상 묵인할 수 없어 하늘은 지진으로 일차 경고하였다. 그러나 인간들은 회개는커녕 신에게 도전이나 하듯 더욱 방탕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진노한 하늘의 신은 화산을 열어 불과 진흙으로 폼페이 도시 하나를 완전히 덮어버리고 말았다.
베수비오산의 화산재가 가까운 마을들은 모두 놓아두고 하필 6Km쯤 떨어진 폼페이만을 덮쳤다는 것은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지금의 유적은 4,5m의 두께로 덮이었던 화산재와 진흙더미를 파내고 옛 건물들의 자취를 추적해 뼈대만 복원해 놓은 것이다.
폼페이의 유적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당시의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당시의 생활환경 구조와 모습들, 그리고 조각 그림들이 그대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시가지는 바둑판처럼 잘 정비되어 포장되었고 하수도, 목욕탕, 극장, 공중화장실, 체육관, 공회당 등을 갖추고 있어 고도의 문화수준을 알게 한다. 관람객이 몰리는 어느 윤락가 창녀의 집은 현관에 성행위의 다양한 그림을 새겨놓고 손님이 방을 선택하도록 한 것도 있어 당시 향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화석으로 남은 당시의 시신들은 한결같이 고통스러운 모습들로 최후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폼페이의 교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늘의 경고가 아직 유효함을 말해 주는 것이나 아닌지. 명심보감 천명편(天命篇)에도 ‘악관(惡罐)이 약만(若滿)이면 천필주지(天必誅之)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악이 가득 차면 하늘이 반드시 베인다는 뜻이다.
16. 쏘렌토(Sorrento)에서 배를 타고
여기서 모처럼 중국 해물 요리로 점심을 넉넉히 하고 이번엔 낭만이 출렁이는 쏘렌토를 향해 남행열차에 올랐다. 바다를 멀리 보며 큰 산줄기를 긴 터널로 빠져나가니 창밖 풍경이 일신하였다. 남이탈리아의 아열대 수목들이 화려하게 전개되더니 황금빛으로 치렁치렁 늘어진 유자와 오렌지가 마을마다 온통 뒤덮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오라 소렌토>로 유명한 민요의 고장 소렌토다.
바닷가 절벽 위에 고풍스런 호텔들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거기서 에메랄드 빛 바다와 멀리 카프리 섬을 바라보는 전망이 상상만 해도 멋들어질 것 같다. 카프리 투어는 1인당 120유로로 꽤 비싼 편이였으나 모두는 결단을 내렸다.
야생화동산인 카프리 섬은 따뜻한 기후와 천혜의 경관으로 하여 고대 로마시대부터 황제와 귀족,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던 휴양지로 유명하다. 옛날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이 지금껏 남아있다고.
섬은 두 개의 도시로 되어 있는데 포구를 중심으로 계단식으로 전개된 도시가 카프리이고 600미터쯤 올라가 고원지대에 형성된 도시가 아나 카프리이다. 온통 푸른 산에 하얀 석조의 마을이 대조적으로 인상적이다. 부호들의 별장이 아니면 여름 한철 피서객들을 위한 여관들이란다.
우리는 아나 카프리에서 859m의 정상을 리프트를 타고 올랐는데 발밑에 전개된 초원이 바로 생태계 학습장, 야생화의 천국이었다. 늦봄과 초여름의 들꽃들이 어울리어 꽃동산을 이루었다. 마을 근처 텃밭에는 강낭콩이 막 나와 두 잎씩 퍼지고, 감자밭에 드문드문 뿌린 완두콩이 하얗게 피어 우리나라 어느 농촌을 보는 듯 반갑다. 할미꽃도 뻐꾹채도 엉겅퀴도 보인다.
리프트 반대쪽 라인으로 이국여인들이 선글라스에 머리카락 날리며 미소로 손을 흔드는 인사도 멋진 낭만이었다. 정상에 서서 세찬 지중해 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이 물길 따라 끝없이 부침했던 인류 역사를 회상하니 감개무량하다.
카페리로 회항하는 선상에서 맥주파티가 벌어졌는데 카프리의 자연경관은 우리나라 제주도나 울릉도, 홍도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소감이었다.
첫댓글 선글라스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미소로 손을 흔드는 이국 여인들 모습에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청암...하! 청암의 여행후기. 참 귀한 자료입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