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제주도 다녀 오셨군요.
그럼 저의 어리광을 받아주신곳이 제주도 였습니까?
정말 좋은 세상이지요.
저도 일요일 아버지 뵈러 갔었답니다.
아버지께서는 영천 호국원 6.25참전 용사 기념탑 밑에 양지 바른 곳에 계신답니다.
오랫만에가서 찾을 수가 없어 울었답니다.
'아버지 어디계시나요, 제가 왔는데'라고요.
어머니께 전화로 여쭈었두니 "니 무슨 일 있제."하십니다.
"일은 무슨.시간이 나서 왔지요."부모는 안봐도 자식의 마음까지 꽤 뚫어 보시나 봅니다.
영천시 고경면에 있는 호국원은 재향군인회에서 운영하는 참전 용사나 군경 유가족등 나라에 헌신한 사람들의 쉴곳을 마련해주는 묘지지요.
내년 부터는 국립 묘지가 된다는 말도 있드군요.
상사 주**의 묘.
묘비를 쓰다듬으며 실컷 울었답니다."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못났지요."
대답없이 누워계시는 내 아버지는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누구든지 아들 딸 구별않고 공부한다하면 *묻은 솟곳이라도 팔아서 공부 시켜주마.'하셨는데
"앞으로는 여자들도 다 일하며 사는 세상이 될끼다.그라이 여자 직업으로서는 선생님이 최고다"
하시며 당신의 양념 딸이 공부해서 교단에 서는걸 원하셨던 내 아버지.
쉰 고개에 이르러서야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왜 아버지께서 나에게 공부를 많이 하라 하셨는지 알게 되었답니다.
스물다섯 꽃 같던 나이에 시골로 시집을 가서 농부의 아내가 되겠다는 딸이 못내 아쉬었던 아버지.
농사 짓는 일 안 시키려고 도시로 유학시켰드니 홀로 농사 짓겠다 떠나는 딸을 데려다 주시고는 그렇게 울며 가셨다는 내 아버지.
내 자식이 출가할 나이가 되어서야 그 마음을 알다니.
친정을 다니러가면 그렇게 좋아라 웃으시고 떠나 올때면 서운하셔서 대문앞에서 안 보일때까지 손 흔들고 계시던 내 아버지.
그때 나는 바위 같고 굵은 기둥 같았던 아버지가 저렇게 작아 보일까? 당신 품안에 있으면 모든 비바람 다 막아 줄수 있으리라 장담하셨을텐데,뼈속에 바람이 들어 조금만 부딫쳐도 부러질것 같고 조금만 거센 바람이 불어도 쓰러질것 같은 아버지의 힘 빠지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 당신이 살아계실때 좀더 여유있게 살았으면 당신 마음이 좀 편하셨겠지만 농삿일에 지치고 어른 모시고 시형제 공부시켜 출가시키느라 힘든 딸을 보시며 늘 안스러워 하셨던 내 아버지.
그 아버지가 가시는 그날 조카 자식까지 다 모였는데 하나뿐이 딸이 보이지 않아 말도 못하시면서 눈으로 찾으시드니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는 내 아버지.
말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늘 양념딸이라 친구분들께 소개하시던 내 아버지는 지금 어둡고 갑갑한 그 땅속에 한줌의 재가 되어 울부짖는 딸을 보시며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까
정말 정말 죄송하구요, 사랑 합니다 아버지,!.
양지 바른 그곳, 탁 트인 시야가 오늘의 날씨가 아주 좋아 아버지와 둘이 독백(?)하기엔 참 좋았답니다.
잡숫지도 못하는 소주 한잔 드리고 괜히 어려워 했던 지난 날의 아버지를 생각 합니다.
"아버지 열심히 살게요. 또 언제 뵈러 올런지 모르겠네요. 늦어져도 섭섭해 하시지 마세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내 양념 딸 잘 살고 있구나 믿어 주세요"
첫댓글 아이~아버님께서 참전용사였군요.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회장님은 수요일까지 제주도에 계신다 했는데요...
좋은 곳에서 잘 계실겝니다..훌륭한 아버님을 두셧군요...*^^*
귀숙아. 아버지한테 다녀 왔구나. 잘 했다. 다녀 와서 글 쓰고 나니 속이 후련하지? 선생님 오늘 돌아 왔어. 네 글 이제 읽은거야.
귀숙이 글 읽으니 눈물이 ..나도 8남매 막내라 삼십대 초반에 고아가 되었단다..엄만 언제나 내가슴에 계셔도 아버진 잊고 살았는데 네 글읽으니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무너질것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