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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김원섭의 소원이 이뤄질 때 타이거즈는 앞으로 더 많은 기적을 연출할 것이다(사진=KIA) |
9월 12일 KIA-두산전이 열리는 잠실구장은 경기 시작 1시간 전부터 만원 관중의 열기로 뜨거웠다. 야구장에 처음 온 이라면 아마도 한국시리즈가 열린다고 착각했으리라. 그러나 관중석의 열기와는 상관없이 대기는 온화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구장 위에는 솜을 뜯어놓은 것처럼 하얀색 구름이 듬성듬성 떠 있기까지 했다. 야구관전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그때였다.
“어라, 이거 뭐야.” 안경집에서 안경을 꺼내 끼던 KIA 외야수 장성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그도 그럴 게 안경알 한쪽이 빠져 있던 것이다. 다행히 발아래 안경알이 떨어져 있어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건 또 뭐야.” 안경알은 찾았지만, 이번엔 안경 코 받침이 문제였다. 무슨 큰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코 받침이 부러져 있었다. 안경알이야 다시 끼우면 된다지만 부러진 코 받침은 고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경기 시작은 불과 30분을 남긴 상태.
이날 장성호는 선발 좌익수 겸 6번 타자였다. 안경이 없으면 타격도 수비도 불가능할 게 자명했다. 하지만, 장성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가방에서 새로운 안경집을 꺼냈다.
“에이, 한 개 더 준비해뒀죠. 오늘처럼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장성호가 밝게 웃었다.
그렇군. 역시 9년 연속 타율 3할 타자답다. 사소하지만, 이런 준비도 하지 않는 프로선수가 얼마나 많은가. ‘만약’을 대비해 늘 ‘준비’하는 게 프로가 아닌가. 그래서 ‘주전’이 있고 ‘백업’이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더그아웃 한편에서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타자와 눈이 마주쳤다. 김원섭(32)이었다.
우투좌투의 유격수에서 외야수로
프로 9년 차 김원섭은 만약을 대비해 모든 팀이 ‘준비’하는 전형적인 ‘백업’요원이었다. 2006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어쩌면 2001년 두산에 입단했을 때부터 그의 운명은 ‘백업’이었는지 모른다.
배명고 재학시절 김원섭은 희귀한 유격수였다. 그가 ‘희귀’했던 이유는 간명하다. 우투좌타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왼손 타자 유격수는 ‘희귀’한 존재였다.
1996년 황금사자기대회에서 타격상을 받기도 한 김원섭은 발도 빨라 프로스카우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실제로 1996년 11월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두산은 김원섭을 호명했다. 하지만, 김원섭은 두산지명을 뒤로 하고 단국대행을 선택했다. “대학을 저버리고 프로로 보내는 건 아들을 팔아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부모의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김원섭은 곧바로 주전 자리를 꿰찰 선수로 평가받았다. 동계훈련에선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가장 돋보였다. 탄탄대로일 것 같던 김원섭의 질주는 그러나 그즈음 최대 고비를 맞는다. 강 전 감독은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그라운드를 뛰던 12년 전의 김원섭을 정확히 기억한다.
“팀 훈련을 전혀 따라오지 못했다.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설령 뛰어도 숨을 ‘헉헉’ 거리기 일쑤였다. 이유가 뭔가 싶어 병원에 보냈더니.”
간염이었다.
운동선수에게 간염은 치명적이다. 극심한 피로 때문에 정상적인 훈련을 따라오지 못하고, 그러다 도태되게 마련이다. 특히나 강 전 감독은 간염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내가 간암으로 세상을 떴었다. 그래 (김)원섭이가 간염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최대한 배려하려고 노력했다.” 강 전 감독은 이때부터 김원섭이 무리하지 않게끔 훈련량을 조절해줬다. 그 가운데 하나가 포지션 전환이었다.
김원섭은 고교시절 타격과 비교하면 수비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유격수치고는 어깨가 약하고 발놀림이 빠르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여기다 간염에 걸리며 체력적인 문제가 불거졌다.
“수비 부담이 덜한 외야수를 보면 타격도 더 좋아지리라 예상했다.” 강 전 감독의 회상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김원섭이 외야 포지션에 빠르게 적응하며 타격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이다.
2002년 두산에서 KIA로 트레이드된 김원섭의 앳된 얼굴(사진=KIA) |
자신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 그리고 꾸준한 치료 덕분에 김원섭은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실력이 부쩍 늘었다. 1999년 대학 3학년 때 국가대표에 뽑힌 건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김원섭은 박한이(삼성), 박용택(LG) 등과 함께 대표팀 외야진을 형성하며 크고 작은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2001년 두산에 계약금 1억 원을 받고 입단했을 때 많은 이가 수비범위가 넓은 김원섭이 드넓은 잠실구장의 외야를 책임지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의 정교한 타격이 베어스의 타선을 이끄리라 예상했다. 마치 아직 덜 익었지만 다 익으면 큰돈을 벌어줄 푸른 과일처럼 김원섭은 그렇게 두산의 미래를 이끌 선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김원섭은 데뷔 첫해 타율 1할7푼1리만을 기록한 채 사라졌다. 이듬해는 아예 1군 무대를 밟지도 못했다. 2002년 KIA 내야수 이동수와 트레이드됐을 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만큼 무명선수가 돼 있었다.
“프로는 아마추어와 확실히 달랐다. 타자들은 죄다 힘이 넘쳤고, 투수들의 공도 정말 빨랐다. 당시 나는 기술적으로 한참이나 뒤떨어진 선수였다.” 김원섭의 솔직한 평가다.
김원섭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건 2006년부터다. 그해 94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3푼7리를 기록했다. 깜짝 스타의 탄생이었다. 비록 181타수에 불과했지만, 그의 가능성을 증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당시 KIA 사령탑이던 서정환 전 감독은 김원섭을 “올 시즌보다 다음 시즌이 더 기대되는 선수”라고 가리키고 “타율 3할에 20도루 이상을 기록할 타자”라고 칭찬했다. 덧붙여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2번 타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즈음 많은 야구전문가가 서 전 감독과 같은 예상을 했다. 이듬해인 2007년 김원섭은 데뷔 이래 처음으로 100경기(114), 300타수(313) 이상을 기록하며 명실 공히 KIA의 주전 외야수로 도약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타율 2할4푼3리, 9도루는 서 전 감독이 기대했던 성적이 아니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잘했을 텐데, 그게 꼭 원섭이 발목을 잡으니….” 그해 시즌이 끝나갈 무렵 서 전 감독은 김원섭의 부진을 ‘그것’ 탓으로 돌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간염이었다.
대학 새내기 때 발병한 간염은 이제 만성이 된 상태였다. 멀쩡히 괜찮다가도 갑자기 간 수치가 올라가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럴 때면 그는 그라운드 대신 병원을 향해야 했다.
KIA 1위의 숨은 공신 김원섭(사진 왼쪽부터)과 이용규는 리그 최강의 테이블 세터다. 두 이는 올 시즌 모진 풍파를 겪었지만, 그라운드에선 한번도 흔들리지 않았다(사진=KIA)
지난해는 그에겐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시즌이었다. 최희섭의 가세로 기존 1루를 보던 장성호가 좌익수로 전향하며 KIA 외야진은 어느 때보다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쳐야 했다. 장성호, 이종범, 나지완, 이용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김원섭도 이를 잘 알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훈련에 매달렸다. 조범현 신임감독은 그런 김원섭을 보고 희망을 품었다. 결국, 조 감독의 희망은 현실이 됐다. 김원섭이 타율 3할5리로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3할 타자가 된 것이다. 여기다 21도루를 기록하며 김원섭은 과거 서 전 감독이 예상한 데로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2번 타자로 우뚝 섰다.
올 초 일본 미야자키 스프링캠프에서 조 감독이 KIA 타선의 핵으로 김원섭을 꼽은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조 감독은 “1번 이용규와 2번 김원섭이라면 리그 최강의 테이블 세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타격 정교하고, 발 빠르며 수비범위가 넓은 1, 2번 타자는 모든 야구 감독이 꿈꾸는 이상형이 아닌가.
올 시즌 조 감독의 이상형은 어느 정도 실현된 듯 보인다. 1위 KIA의 기적에 이용규, 김원섭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김원섭의 활약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8월 9일 군산 SK전에서 끝내기 역전 만루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도는 김원섭(사진=KIA) |
김원섭은 2군에 내려가 있는 동안 간염보다 지독한 불행과 만나야 했다. “대학을 두고 프로에 아들을 보내는 건 부모가 자식을 파는 것과 같다”고 말했던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 병마와 모친상까지 겹치며 김원섭의 1군행은 불투명해 보였다.
하지만, 스스로 길을 내는 물처럼 김원섭은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시련을 이겨냈다. 간 수치가 조금씩 떨어지면서 7월 17일 1군으로 복귀한 것이다. 그리고 8월 9일 군산에서 열린 SK와의 홈 경기에서 극적인 9회 말 역전 만루홈런을 터트리는 기적을 연출했다.
줄곧 3위를 달리던 KIA는 김원섭의 복귀 이후 정확히 11경기 만에 1위에 올랐다. 김원섭이 없었다면 KIA가 2,516일 만에 정규시즌 1위에 올라서는 기적은 연출되지 않았거나, 더 늦게 이뤄졌을 것이다.
김원섭의 소원
12일 KIA-두산전에 김원섭은 선발출전하지 않았다. 자신은 “컨디션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무리하면 안 된다”는 조범현 감독의 의중이 반영됐다. 치열한 순위 다툼 속에서도 조 감독은 절대 김원섭을 무리시키지 않을 방침이다. 포스트 시즌에서 김원섭의 맹활약 없이 팀의 선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원섭은 최근 간 수치가 올라 병원을 다녀온 터였다.
어떤 고난과 시련이 닥쳐올지라도 김원섭은 참고 이겨낼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김원섭이 아니다.(사진=KIA) |
정규시즌이 7경기 남은 상황에서 김원섭은 9월 14일 현재 타율 3할1리, 8홈런, 40타점, 19도루를 기록하고 있다. 2년 연속 타율 3할, 20도루 이상을 기록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렇다면 김원섭 스스로 설정한 목표는 달성하는 셈이다.
“정작 달성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다.” 김원섭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정작 달성하고 싶은 것이라, 그게 뭔지 궁금했다.
“타율 3할? 20도루? 글쎄. 개인 성적이 아무리 좋아 봐야 팀이 우승하지 않으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여기까지는 다른 선수들과 다르지 않았다. 김원섭은 잠시 말을 중단한 채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과묵하고 투명한 눈길이었다. 이윽고 입을 연 김원섭이 한 말은 이랬다.
“정말 소원은 매일 경기에 나가는 것이다. 다른 선수에겐 날마다 출전하는 게 당연한지 모른다. 어느 선수에겐 때론 ‘힘들고 지겨운 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겐 꿈이고 소원이다. 올 시즌이 끝나면 스프링캠프에서 정말 죽어라 훈련해 내년시즌엔 꼭 전 경기 출전에 도전할 생각이다. 그게 팀을 위해 보탬이 되고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기회라면 꼭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방금 눈이 내린 들판에 오직 자신의 발자국만 찍히듯, 김원섭은 자신만의 스텝으로 야구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병마와 불운이 닥쳐도 김원섭의 발자국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 눈으로 발자국이 덮일 즈음 그는 새로운 걸음을 내디딜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누울 자리를 잘 못 택한 사랑! 그것은 얼마나 길고 아픈 것인가? 정작 그 아픔의 제공자는 오늘도 해맑게 웃고만 있는데...
'눈으로 발자국이 덮일 즈음 그는 새로운 걸음을 내디딜 게 분명하'다는 건 최고의 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