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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 제자도는 심장이 약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가 보다. 그렇지만 우리는 누가복음 14장에서 혼인 잔치의 주인이나 손님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배웠기 때문에 이에 대해 조금 준비가 되었다. 지난주와 이번 주 본문 사이에는 또 다른 잔치의 비유가 나오는데,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초청을 거절하여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이 대신 잔치에 초대받은 이야기이다. 이런 주제들은 예수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이 어떤 값을 치러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큰 값을 치러야 하는지를 강력한 언어로 표현한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신중한 고려와 결단을 통한 전적인 헌신을 뜻한다. 즉흥적으로 제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이 맥락에서 본 훼퍼의 책 “십자가의 도 (The Cost of Discipleship)”에 대한 연속 강의를 시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설교는 연속강의와는 다른 접근 방법을 취한다.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값”의 신학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자”라는 단어의 의미와 함께 “값”이라라는 단어의 의미도 살펴봐야 한다. “값 (비용, cost)”이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값”은 우리가 어떤 것을 취득하거나, 이루거나, 유지하거나, 생산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이익을 위해 요구되는 희생, 손실, 혹은 벌을 계산하는 일이 요청된다. 이 계산에는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포함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일>과 함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아주 큰 헌신을 요구한다. 제자도는 과정이다. 제자가 되는 과정은 시행착오가 포함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믿음의 진보, 더 완전한 인간성 회복, 거룩한 삶의 구현 등을 점차 이루게 된다. 제자로서 우리는 삶에서 겪게 되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사랑과 소망과 믿음과 평화를 갖고 대응하기를 배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깊은 영성과 예언자적 삶의 태도를 기르게 된다.
예를 들어 2005년 카트리나 허리케인 이후, 많은 사람들이 느릿느릿 진행되는 연방정부의 재건 지원에 만족하지 못하여 뉴올리언스 지역을 방문하여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활용하여 직접 재건 노력에 참여하였다. 부실하게 축조된 제방과 부주의한 관리 등으로 큰 손해를 입은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활동을 교회가 할 때 제자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명실상부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포기해야 하는 것에는 소유욕, 성공에 대한 욕구, 질투,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 편견, 증오 등이 포함된다. 토기장이의 뜻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자신의 언행을 살피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한다.
교회나 사회생활에서 흔히 보게 되는 사례를 들어보면 본문의 의미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한 가지 예로 “일중독”의 경우를 살펴보자. 일중독은 우리를 가족, 친구,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중독이다. “이번 일만 마치면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을 약속한다”는 식으로 변명하지만 일중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인지, 하나님의 자가 아닌 인간의 자로 인생을 재고 있는 것이 아닌지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제자도의 핵심은 변혁이다. 제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참된 삶을 사는 방법에 관한 많은 정보를 쌓아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의 윤리를 삶의 구석구석까지 적용하겠다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수는 우리가 “헌신하지 않는 신자”로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 변혁의 과정에서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탐구와 노력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삶의 문제에 관한 어려운 질문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지고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된다. 제자도는 궁국적으로 구원과 연결된다. 이것이 지난 3주 동안 누가복음 본문이 말하려고 했던 핵심이다. 오늘의 본문은 언뜻 보면 무시무시한 견책과 경고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본 훼퍼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자로의 부름은 은총의 선물이다. 그 부름은 은총과 분리될 수 없다.”
주석적 관점
- 오늘 본문은 복잡한데, 듣는 사람들이 제자직의 댓가를 계산해야 하고, 그들이 예수를 따를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 댓가에는 모든 가족(26)과 모든 소유물(33)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자됨의 예비적 자격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우리들이 이 순례여행을 끝까지 가지 않는 한은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고 담대하게 선언한다.
- 예수는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고 말한다. “가족의 가치”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우리에게 친족이기 때문에 미워하라고 명령받은 사람들의 인상적인 리스트가 있다. 왜, 사랑의 인격체와 구현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장 가까운 가족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도 미워하라고 요청할까? 이 본문은 읽기 어려운 본문이다. 왜냐하면 본문은 우리는 가장 끌어안을 것 같은 사람들을 내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누가복음에서 이전의 예수의 교훈을 비추어 보면, 이 말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결국, 본문은 12:51-53의 교훈과 공명하는데,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그들의 공동생활과 사회 질서의 기초가 되는 도구적인 결합이 예수가 선포한 근본적인 신앙(radical faith)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다. 이 신앙이 “가족적 가치”에 익숙한 패턴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편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신앙은 가까운 사람들이나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가족에 대한 교훈은 18장에 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18:18)라고 물은 어떤 지도자의 방문을 받은 뒤에 예수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로 받을 것이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18:29-30). 이러한 재규정에는 많은 것들이 문제가 되지만, 그러나 충실한 제자는 그들의 희생이 그들이 잃은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고(욥1:13-22, 42:1-17과 비슷하다) 영생을 받는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한다.
- 이 본문에서 더 어려운 것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14:27)했기 때문이다. 이 교훈은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9:23)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이 말은 예수의 길이 어디로 인도할지 아는 오늘날 기독교공동체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말이다. 이 말은 은혜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들에게 주신 의무의 말씀이다. 나쁘게는 결과로서의 의무인데, 십자가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제자직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 메시지는 분명하다: 제자직은 댓가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제자직은 모든 것을 요구한다(12:33-34을 보라). 몇 년 전에 노스 캐롤라이나주 샤롯의 큰 뽀족탑 교회에서 들었던 설득력있는 설교에서 이 교훈이 강조되었다. 돈이 많고 영향력있는 교회에서 설교한 이 목사는 편안한 회중들에게 제자직의 도전을 제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당신들이 이러한 요청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들의 세례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상황적으로 이 메시지는 통렬했는데, 중산층 이상의 교회멤버들은 신앙이 그들에게 가장 귀한 어떤 것을 요구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날 목사의 교훈은 모든 회중들을 흔들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부분이 될 수 있는 의시적인 행동들을 우리가 행해야 하고, 행동이 없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 이 본문을 보면 독자들은 이 짧은 글 안에 예외적으로 부정관사들이 많이 씌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안돼”를 말하는 것이다. 27-33절에는 최소한도 하나의 부정관사나 부정부사가 있고, 몇곳(27,28,29,33)에는 두 개가 있다. 이러한 부정관사나 부사를 반복하는 것은 “댓가를 세지않은” 사람들이 예수를 충실히 따른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예수의 교훈의 실용성이 나타나는데, 그의 제자들이 희생없이 그가 걸어가는 길을 갈수 없다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이 무거운 요구없이 힘들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보이는 결과없이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만약에 우리가 예수의 길을 따르는 약속된 보상을 경험하기를 소망한다면 이러한 결과들을 참고 견뎌야만 할 것이다.
목회적 관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선택하는가? 또 그들이 제자가 되기로 했을 때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예수를 따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모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만큼 생생하게 알려주는 것은 없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는 세 번에 걸쳐 확실한 결단 없이는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먼저, 자기 부모와 배우자와 아이들, 형제들과 심지어 자기 자신의 생명까지 미워할 것이 요구된다. 두 번째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고 명령한다. 세 번째는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미워하라”는 단어를 부드럽게 한다고 해도, 예수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족들 사이의 연대와 평범한 자기 보존을 그를 따르는 일에 종속시키라고 한다. 기독교 공동체의 목회 사역은 우리가 예수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사람이 되고 예수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일을 하기 위해 엄청난 도전과 무시무시한 요구가 있다는 것을 명확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장 칼뱅의 가르침은 오늘날 기독교인의 복종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이해하기 위한 고전적 자료이다. 이 개혁자는 자기가 가르치고 있던 목사들에게,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기독교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그는 베드로가 신앙고백(막 8:34; 마 16:24; 눅 9:23)을 한 다음에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을 가지고 오늘의 누가복음 본문에 적용했다. 칼뱅은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의 가르침이 가진 네 가지 의미로부터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1) 자기 부인, (2) 십자가 지기 (3) 영생에 대한 명상, (4)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적절하게 사용하기. 목회적 상상력과 조심스러운 해석을 통하여 이 의미들을 오늘 교회에서 설교, 교육, 목회적 돌봄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
1. 칼뱅의 해석에서 자기부인은 자기 파괴적인 경향을 포함하거나 즐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Charles Dickens’s의 David Copperfield(1868)에 나오는 Uriah Heep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과 타인 파괴적인 행동 그리고 자랑스러워하는 겸손을 즐기는 불쾌한 예일 것이다. 다른 면에서 자기부인은 예수가 이기심과 “전쟁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방법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주님의 뜻을 찾도록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자신을 부인하는 데 실패한 사람은 하나님이나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자기 부인은 우리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관계 안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확언으로 이끈다.
2.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고통과 직면할 수 있게 해주는 자기부인의 차원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의 고통과 상실 속에서, 인생의 비극과 시련과 비통을 직면할 때에도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미지는 고통 가운데 우리의 인내를 끌어내는 기독교인의 상상에 호소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질병과 상처를 치료하는 치료약이고 우리의 실수에 대한 처벌과 교정이며,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에 대한 위로라고 칼뱅은 가르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응원하고 우리의 상처를 정직하게 인식하게 해주고 비통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3. 영생에 대한 명상은 예수의 부활 안에 있는 약속의 신비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하고 그에 대한 경외심을 소중히 여기게 한다. 칼뱅은 중세 경건주의의 관상 언어를 물려받고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육신을 “영혼의 감옥”으로 경멸하는 표현을 포함했다. 이런 종류의 경건은 Desiderius Erasmus(1469?-1536)과 Ignatius Loyola(1495?-1556) 같은 다른 개혁자의 생각 속에서도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경건에 대한 이런 표현이 때로는 우리가 반대할 만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생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인생에서 육체의 죽음에 대한, 그리고 물질에 대한 탐욕스러운 욕망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제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통해 우리에게 온 생명 안에서 이루는 좀 더 큰 성취와 그런 것들을 비교하게 한다.
4. 칼뱅이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의 부르심을 해석할 때,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은사의 적절한 사용을 위한 신뢰할 만한 기반을 발견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필수(필요)적인 것과 기쁨(즐거움)을 주는 것 양쪽 모두에 대해서, “세상의 좋은 것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가르친다. 칼뱅은 우리가 세상에서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길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단순하게 살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과도한 진지함과 지나친 방종 모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금욕주의도 방탕도 기독교인의 삶의 특징일 수 없다. 칼뱅은 삶의 균형을 위해 네 가지 지침을 제공한다: (a) 우리는 가능한 한 적은 것으로 자족해야 한다; (b) 만약 우리가 가진 것이 적다면, 우리는 인내하면서 가진 것 없이 견뎌야만 한다; (c)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 있는 청지기로 삼아 모든 것을 위임하셨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d) 우리가 살면서 하는 모든 행동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오늘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상생활에서 제자로 사는 것이 겉보기에 번듯하고 자유로운 것을 대가로 요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할 수 있을까?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사랑에 헌신하며, 고통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 또 창조세계와 은사들에 대한 신실한 청지기가 되는 것에 대한 칼뱅의 지지가 어떻게 교회의 안팎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울리게 될까? 주택과 경제 위기; 화석 연료의 연소에 의한 지구의 손상; 그리고 기아, 가난, 세계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전염병들은 예수가 우리를 값비싼(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제자직으로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
설교적 관점
-“미워함”(hate)이란 단어는 낭만주의적 신앙에 찬물을 끼얹는다. 제자가 되는 일은 부모, 배우자, 자녀, 형제 자매 심지어 자신의 생명조차 “미워함”을 요청하는 것인가? 이 “미워함”은 과장법으로 쓰였다고 볼 수도 있으나 제자됨에 따르는 잠재적 손실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미워함”이란 말을 부모, 배우자, 자녀등이 들어있는 문장에서 사용할 때 그는 구체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추상적 관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 이상 (교인, 친구)을 사랑할 수 있다. 부모,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심지어 우리들 자신을 모두 사랑할 수 있고 그 각각의 사랑은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하지만 때로 그 균형을 잃을 때도 있다. 아버지가 아프게 되고 그 아들에게 의존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를]돌봐야 할 의무는 [아들의 가족 구성원에 대한]관심이나 재물을 희생해야 할 때가 있다. 배우자나 자녀에게 일상적으로 가야 할 것들이 그 부모와 나누어지는 것이다. 세 자녀를 둔 어머니는 심각한 자폐증을 앓고있는 아이에게 그녀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음을 알게된다 [균형이 잃게 되는 예들]. 나머지 두 아이에게는 거의 주고있지 못하는 것이다. 시골의 외과의사는 시급한 환자들로 인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모두 내어주어야 함을 발견한다. 사랑을 나누어야 할 이러한 갈등은 우리를 가슴아프게 한다.
-우리의 사랑과 관심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일은 비단 가족 구성원들 문제만은 아니다. 가족 말고도 사람은 도시, 조국, 국기, 교회, 주님을 사랑한다. 대개 한 사람에게 있어 여러 가지 충성심과[사랑] 의무가 균형을 맞추고 있지만 때로 그 이해관계가 충돌을 일으킬 때도 있다 [위에서 가족 내 사랑의 균형을 잃게 될 때를 보았듯이].
모든 사람이 제자로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제자됨은 책임적 인간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제자됨이 다른 형태의 충성을 요청하는 곳과 늘 충돌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더라도, 때로 그것은 우리에게 보통 첫 번째라고 여겨지던 의무나 습관의 우선순위를 변경하여 다른 방향으로 갈 것을 요청한다. 예수께서는 그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27절) 충성을[사랑] 쏟을 곳이 서로 경쟁할 때 우선순위에 따라 분류가 된다.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수 자신이 그 분류의 기준이 된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자비와 긍휼을 구현하는 일이 나침반이 되는 것이다.
-28절부터 32절은 많은 비용이 들게 될 프로젝트를 시행함에 있어 그 비용을 신중하게 계산할 필요가 있는 예들을 보여준다. 제자됨은 일반적인 삶에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작은 글씨로 된 세세한 항목을 읽어보지 못했다고 말해선 안된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물로 기록한 세세한 항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롬 6:4). 모든 세례는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공유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세례를 통해 교회는 그 본연의 사명을 연습한다. 공동체는 그 사명 안에 살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치고 보여준다. 신앙의 여정은 여기에서 시작되고 어려운 선택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청한 그 물(세례)로 인해 내려지게 될 것이다.
-누가의 본문은 어려운 말로 시작해서 어려운 말로 끝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33절) 누가는 예수께서 “많은 무리”(large crowds)에게 말하고 있는 중임을 보여준다. 예수는 어려움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붙어있는 사람들을 솎아내려고 하는 것인가? 그는 자신과 끝까지 함께 할 사람들을 더 강하게 하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예수의 이 말은 다가오는 갈등 속에서 여전히 그와 함께 있을 소수의 사람들을 향한 문자적 가르침인가?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문자적으로 적용되는가?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 가능성은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도전을 문자적으로 심지어는 소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구하는 지혜로 이해할 수도 있다. 때로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 철저한 포기가 필요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언제나 문자적 명령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만일 내 배우자와 내가 공동으로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면 내 처가 꺼림직해하는데도 영적 승리를 위해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국가의 피보호자나 거리의 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서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바르고 명예로운 일이겠는가?
-예수의 권면을 좀 더 사려깊은 문제를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보인다. 분명히 이 말은 적어도 제자들은 여행시에 필요한 것 이상을 지녀서 지장을 받지 않도록 가볍게 여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 이해가 상충될 때 제자들은 안전함보다는 먼저 해야 할 것을 선택해야 함을 뜻한다.
제자도를 이해함에 있어 우리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를 고려하는 일도 중요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영적 싸움에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와 우리를 지배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이미 한 결정에 대해서는 보통 심각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을 편견없이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서로 가르치고 격려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일반적] 특정한 상황에서 제자도의 의미를 구현하기 위한 토론의 장이 될 수 있는가? 제자도에의 부름을 우리는 어떻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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