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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1호 : 대악후보(大樂後譜) 국립국악원
조선 영조 35년(1759) 서명응이 세조 때의 음악을 모아 두꺼운 종이에 편집한 7권 7책의 악보이다. 크기는 가로 31.4㎝, 세로 44.5㎝이며, 세종 때의 음악 22곡을 모아 수록한『대악전보』는 청일전쟁(1894∼1895) 때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이 책의 권1에는 세조 때의「속악보서 」외 8곡이, 권2에는「시용보태평도」외 1곡, 권3에는「시용향악보」외 2곡, 권4에는「시용향악보」외 1곡, 권5에는「시용향악보」외 4곡, 권6에는「시용향악보」외 5곡이, 권7에는「동동」외 3곡이 실려있다. 특히 권5에서 권7까지에 수록된 것은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전기의 악보로 귀중한 것이다.
이 책은 18세기 간행된 악보이기는 하나,『조선왕조실록』과 별개로 독립되어 최초로 관에서 편찬한 악보이며, 세조 때의 음악을 비롯하여 여러 시기 음악을 담고 있다는 점과, 고려에서 전래된 정읍 등 다양한 향악곡 및 조선후기까지 다양한 변화와 생성과정을 거친 정악곡의 초기형태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역사적인 자료이다.
제1292호 :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東海 三和寺 鐵造盧舍那佛坐像)
삼화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제1293호 : 계룡산중악단(鷄龍山中嶽壇) 공주 신원사
중악단은 국가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 5악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구릉지에 동북·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에 단묘(壇廟)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중악단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라고 한다.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마련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설치하여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다.
1.5m의 높은 돌기단 위에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장식하여 화려하고 위엄있게 하였다. 또한 각 지붕 위에는 각각 7개씩 조각상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쓴 점도 특이하다. 조선시대 상악단과 하악단은 없어져서 그 유적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중악단이 잘 보존되어 있어 나라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일한 유적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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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2호 | 제1293호 |
제1294호 : 이제개국공신교서(李濟開國功臣敎書)
조선 태조 원년(1392) 10월에 이성계가 배극렴, 조준 등과 더불어 나라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이제(?∼1398)에게 내린 공신교서이다.
이제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고려시대 고위관료의 자제들에게 시험없이 벼슬을 내리던 음직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이성계의 셋째딸인 경순공주와 결혼하였으며, 태조 2년(1393) 우군절제사에 올랐지만 태조 7년(1398)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일파로 몰려 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개국공신교서로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며, 최초의 공신교서의 형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서로 평가된다.
제1295호 : 괴산각연사통일대사탑비(槐山覺淵寺通一大師塔碑)
고려 전기의 승려인 통일대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비로, 각연사 동남쪽의 보개산 계곡을 따라 1㎞쯤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대사는 고려 전기에 중국유학을 다녀온 이로, 그가 왕실에서 불교의 교리를 강의하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통일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당대의 문장가였던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돌로 쌓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는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다. 거북받침돌은 등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로 바뀌어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오면서 나타나게 되는 양식상의 특징이다. 비몸에 새겨진 글씨는 해서체인데, 원래 새겨진 3,500자 가운데 현재는 대부분이 깍여 260자 정도만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
머릿돌의 네 면에는 4마리의 용을 웅장하게 새겨 놓았는데, 그 용들이 머리를 들어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받도록 하였다. 원래의 자리에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몇 안되는 석비중의 하나로, 고려 광조 9년(958)에 건립되었다. 받침돌에 새긴 거북머리의 양식상 변화나 각 부분에 새긴 조각수법은 당시 석비의 우수함을 잘 보여준다.
제1296호 : 제천신륵사삼층석탑(堤川神勒寺三層石塔)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하나씩 본떠 새겼고, 탑신에서도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빗물을 받는 낙수면은 경사를 약하게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약간씩 치켜 올려진 상태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으며, 머리장식부의 무게중심을 지탱하기 위한 쇠꼬챙이(찰주)가 뾰족하게 꽂혀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고려 전기의 탑으로, 특히 이처럼 머리장식이 잘 남아있는 예는 드문 편이며, 각 부재를 만든 솜씨도 세련되어 보인다. 1981년 탑을 해체하여 복원할 때 기단 내부에서 흙으로 빚은 소형 탑 108개와 사리함 조각이 발견되었다.
제1297호 : 김수온발선종영가집(金守溫跋禪宗永嘉集) 서울시립박물관
중국 당나라 현각선사(647∼713)가 선종의 요결(要訣:긴요한 뜻)과 수선(修繕)을 깨달은 내용을 찬술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회암사의 혜근화상이 처음 입수하였고, 그의 제자 훤선이 이방직의 도움을 받아 고려 우왕 7년(1381) 봄 충주 청룡사에서 출판하였다. 조선 성종 3년(1472) 인수대비가 세조, 예종, 의경왕의 명복을 빌고, 정희대왕대비, 주상전하와 왕비전하의 만수무강 등을 기원하기 위해 여러 불경을 간행하였을 때, 이 책 200부를 인출하였다.
목판과 활자판을 같이 적용하여 간행한 인쇄물이 원형 그대로 전래된 것으로, 고려말과 조선초의 불교사 및 인쇄문화사 등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1298호 : 조영복초상(趙榮福 肖像) 경기도박물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조영복(1672∼1728)의 초상화 2점으로 하나는 흰색의 도포를 입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공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조영복은 조선 숙종 31년(1705)에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도포를 입은 모습의 초상화는 동생인 조영석(1686∼1761)이 그린 것으로 길이 125㎝, 폭 76㎝ 크기이며,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조선 초상화에서는 드물게 양손이 나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영정은 유학자의 기품이 잘 드러난 사대부의 모습을 생생하고 실감나게 담아낸 매우 가치있는 그림이다.
다른 하나의 초상화는 공복을 입은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길이 154㎝, 폭 79㎝의 크기의 이 그림은 당대 유명한 화가인 진재해가 그린 것인데, 세밀하고 정교한 묘사가 돋보이며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공신상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도포를 입은 모습의 초상화는 경종 4년(1724)에 그리고, 그 이듬해인 영조 1년(1725)에 공복을 입은 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다. 같은 시기에 동일한 인물을 그린 두 영정은 그림의 성격과 특성을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제1299호 : 괴산보안사삼층석탑(槐山寶安寺三層石塔)
보안사의 북쪽 담장 옆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1단의 기단(基檀)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탑신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본떠 간략히 조각해 두었다. 충북지역에서 발견된 석탑 가운데에는 이처럼 탑신에 감실을 새긴 예가 드물어 특이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석탑의 각 부분이 훼손되지 않은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탑신부가 균형을 보이고 있어 안정감을 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3단으로 줄어들고 뭉툭하게 표현된 점이나, 기단이 완전하지 않고 간략하게 표현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1300호 : 해인사홍제암(海印寺弘濟庵)
해인사에 속해 있는 암자로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수도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다. ‘홍제암’이라는 이름은 사명대사 입적 후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에서 따왔다. 광해군 6년(1614)에 혜구대사가 사명대사의 초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1979년 10월에 해체·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법당과 생활공간의 기능을 겸한 인법당(因法堂) 형식의 건물 1동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인법당과는 달리 사명대사와 관련이 있는 여러 기능의 공간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기본 평면은 工자형으로 가운데 법당을 중심으로 조사전, 영각, 홍각, 조실, 시자실 등이 있으며, 각각의 공간은 툇마루를 통해 모두 연결되고 있다.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보물 제1301호)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홍제암은 여러 기능의 공간이 하나의 건물 안에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의 암자로, 각 공간의 위계와 기능에 따라 건물구조나 양식의 수법을 여러 형태로 표현하고 있어 역사적 의의 뿐만 아니라 건축적인 가치가 크다.
제1301호 : 해인사사명대사부도및석장비(海印寺四溟大師浮屠및石藏碑) 해인사홍제암
해인사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의 부도 및 비(碑)이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승려로, 이곳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수도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홍제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사명대사 입적 후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에서 따온 것이다.
홍제암의 북동쪽 약 20m 지점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사명대사 부도는 조선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한 종 모양의 부도로, 당당한 형태와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2단을 이루었는데, 아랫단은 사각형이고 윗단은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부도의 꼭대기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다.
사명대사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광해군 4년(1612)에 세웠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시대(1943년) 때,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이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문장이 매우 빼어날 뿐 아니라 비문에 대사의 행적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역사적인 가치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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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0호 | 제1301호 |
제1302호 : 청룡사감로탱(靑龍寺甘露幀) 안성
감로탱은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그린 불교그림이다.
이 그림은 가로 200㎝ 세로 237.5㎝ 크기이며 3단으로 화면구성을 하고 있다.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가운데 아미타삼존을 포함한 7여래와 극락세계로 영혼을 인도하는 인로왕보살 등을 그려 이상세계를 표현하였다. 특히 불·보살의 몸을 금가루로 칠했는데, 이는 다른 불화에서는 거의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그림의 중간에는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영혼이 극락으로 인도되길 기원하는 제사상을 차려 공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아래부분에는 속세의 여러 장면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당시 풍속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숙종 18년(1692)에 제작된 이 불화는 명료한 주제와 안정된 구도, 선명한 색채로 조선 후기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중생제도와 유교의 효사상 강조에 따른 종교적 의의 또한 매우 크다.
제1303호 : 백지금니금강보문발원합부(白紙金泥金剛普門發願合部) 직지사
고려 공민왕(恭愍王) 20년(1371)에 비구니(比丘尼) 묘지(妙智), 묘수(妙殊)의 시주(施主)에 의해서 사성(寫成)된 것이다.
권수(卷首)에는 일반적인 경변상(經變相)과는 구도가 다른 협시보살을 거느린 불상과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각각 금니(金尼)로 묘사되어 있고, 이어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제25(妙法蓮華經 觀世音菩薩 普門品第二十五), 영가대사 발원문(永嘉大師 發願文)이 필사되어 있다.
권말(卷末)에는 "홍무4년 신해 7월 일지(洪武四年辛亥七月日誌), 시주 비구니묘지(施主比丘尼妙智), 동원 비구니 묘수(同願比丘尼妙殊)"의 지기(識記)가 있어 시주지와 사성연대(寫成年代)를 알 수 있다. 고려본에서만 적용되고 있는 피휘결획(避諱缺劃)은 연호의 "武"자가 혜종 이름이므로 내리긋는 획이 결획되었다. 서체는 고려말에 일반적으로 쓰여진 안진경체(顔眞卿體)로 쓰여졌으며, 당시의 불교신앙의 일단면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1304호 : 유몽인위성공신교서(柳夢寅衛聖功臣敎書) 전남 고흥
조선 광해군 5년(1613) 3월에 임진왜란 때 왕세자인 광해군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영양군(瀛陽君) 유몽인에게 위성공신(衛聖功臣) 3등을 내린 상훈교서(賞勳敎書)이다.
이 교서는 '교갈충진성위성공신 가의대부 한성부좌윤 영양군 유몽인서(敎竭忠盡誠衛聖功臣 嘉義大夫 漢城府左尹 瀛陽君 柳夢寅書)'란 제목아래에 5개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을 보면,
첫째, 공신의 공적사례(功績事例)로 유몽인의 충심, 인품, 문예 그리고 역관사실(歷官事實)을 서술하고 이어서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에서 호종하여 진충(盡忠)한 공을 찬양하고 있다. 둘째, 공신의 상전(賞典)으로 위성공신 3등인 유몽인에게 내려지는 특전 및 상사(賞賜)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셋째, 공신과의 서맹(誓盟)으로 태산이 숫돌처럼 작아지고 황하(黃河)가 띠처럼 가늘어지더라도 맹약(盟約)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넷째, 위성공신의 명단으로 1등에 최흥원(崔興源) 등 10인, 2등에 이헌국(李憲國) 등 17인, 3등에 이순인(李純仁) 등 53인 총 80인이고 유몽인은 3등 19번째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사실증명으로 '만역사십일년삼월일(萬曆四十一年三月日)'이라 하여 상훈교서의 발급년월을 적고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란 새보(璽寶)를 찍어 시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 교서는 조선조 공신연구 및 임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설화문학의 대가인 유몽인의 전기자료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제1305호 : 김완초상(金完 肖像) 영암
높이가 낮고 뿔이 넓으며 둥근 오사모(烏紗帽)에 단령(團領)의 정장관복본을 입고 공수(拱手) 자세를 취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취각(取角), 화려한 채색의 채전(彩氈)의 문양과 기법, 족좌대(足座臺) 위에 놓인 혜(鞋) 등이 모두 조선조 중기 공신상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초상화의 인물은 학정금대(鶴頂金帶)를 두르고 해태문양의 흉배를 하여 초상화 인물의 품계가 종2품임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1624년 진무공신(振武功臣) 책록을 받은 직후 그려진 것이 아니라,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있었던 1630년대에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 상은 공수자세를 취한 양손 사이로 흰 창의(창衣) 소매가 보이는 점에서 선무(宣武), 호종(扈從), 정난(靖難) 공신상 등과 같은 고식을 보여주며, 단령의 트임 사이로 내비치는 안감 및 첩리의 형식상 나란한 배열은 17세기 초 중기공신상의 변모해 가는 형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제1306호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직지사
이 사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으로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조계종의 대선(大選), 신희(信希) 등이 기로(耆老)들을 위해 보기에 편리하도록 중자(中字)로 간행하기를 원했는데 성달(成達生)·성개(成槪) 형제가 상중(喪中)에 이를 듣고 선군(先君)의 추복(追福)을 위해 필사(筆寫)한 것을 도인(道人) 신문(信文)이 전라도 운제현(雲梯縣) 도솔산(兜率山) 안심사(安心社)에 갖고 가서 조선 태종 5년(1405)에 간행한 것이다.
권수(卷首) 앞에는 정씨(鄭氏)라는 사람의 시주로 고려 우왕의 극락왕생을 위해 변상을 그리고 목판에 새겨 유통시킨다는 글이 담긴 변상도가 있다. 이어 송(宋)의 급남(及南) 화상(和尙)이 쓴 묘법연화경 요해서(妙法蓮華經要解書)가 나오며 본문에는 묵서로 쓴 구결(口訣)과 두주(頭註)가 있다. 권말(卷末)에는 권근(權近)의 발문(跋文)에 이어 토산군(兎山郡) 부인 김씨(金氏), 전사헌시사 송결(前司憲侍史 宋潔)의 처(妻) 영인(令人) 원씨(元氏) 등의 시주자(施主者) 명단이 있다. 후쇄본(後刷本)으로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서발(序跋)·변상도(變相圖) [지기(識記)]가 완전하여 묘법연화경 간행 사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1307호 : 능가사대웅전(楞伽寺大雄殿) 고흥
능가사대웅전은 18세기 중엽에 중건된 정면 5칸, 측면 3칸, 57.58평의 건물로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다포계의 일반적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머리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외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보물로 지정된 영광의 불갑사대웅전, 부안의 개암사대웅전과 그 맥을 같이 하며, 포벽 수장재에 도드라지게 새긴 첨차(影공)는 사찰건물에서 보기 드문 예에 속하는 등 조선 중·후기 호남지역 사찰건축의 일면을 보여주는 건물로 학술적·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제1308호 : 호성공신홍진교서(扈聖功臣洪進敎書) 홍천 남양홍씨예사공파종회
이 교서는 임진왜란 때 호종한 공으로 조선 선조37년(1604) 10월 당흥부원군 홍진에게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을 내린 교서이다.
내용을 보면, 홍진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선조가 몽진(蒙塵)할 때 의주까지 시종 수행한 공로로 2등 공신에 봉해졌으며, 영정을 그려 후세에 전하고, 본인과 부모·처자의 벼슬을 2계(階)씩 승진 시키고, 적장자에게 군호(君號)를 세습하는 외에, 반당(伴당) 6인, 노비(奴婢) 9구, 구사(丘史) 4명, 전(田) 80결, 은자(銀子) 7양, 표리(表裏) 1단, 내구마(內廐馬) 1필을 상으로 내렸다.
호성공신 명단으로는 1등 공신에는 이항복 등 2명, 2등 공신에는 유성룡 등 31명, 3등 공신에는 허준 등 53명이고, 홍진은 2등 13번째에 기록되어 있다. 끝으로, '만력삼십이년십월(萬曆三十二年十月)'의 발급연대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선조의 어보(御寶)가 날인되어 있다.
홍진 교서에는 2등 공신에 해당되는 녹훈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호성공신에 대한 포상 규정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1309호 : 영암엄길리암각매향명(靈巖奄吉里岩刻埋香銘) 영암
전라남도 영암군 엄길리 철암산(鐵岩山)의 자연암반에 새겨진 '영암 엄길리 암각매향명'은 주변 서호면 청용리, 장천리 일대의 지석묘 발굴조사 당시 현지조사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21행 118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암각매향명의 조성시기는 1344년(고려 충혜왕 5년)으로 이미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사천매향비(보물 제614호, 고려 우왕13년, 1387) 보다 43년 빠르고 명문이 전해오지 않는 평북 정주의 침향석각(고려 충숙왕 4년, 1335) 보다 9년이 늦지만 국내 현존 매향비 가운데 연대가 가장 앞서고 있다. 보존상태가 좋아 대부분의 명문(銘文)을 판독할 수 있으며, 조성시기, 목적, 매향장소, 매향집단, 발원자, 화주와 각주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고려말 매향풍속의 일면을 알 수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제1310호 : 나주불회사대웅전(羅州佛會寺大雄殿)
불회사대웅전은 상량문 및 건축수법 등으로 볼 때 1799년(정조 23년) 중건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장식성이 돋보이는 조선후기의 화려한 다포집이다. 자연석 기단위에 세워진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에는 모두 궁창판이 있는 4분합의 빗살문인데 한국전쟁 이전에는 꽃살문으로 장식 되어 있었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은 덤벙주초로 비교적 큰 편이며 그 위에 세워진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 기둥 위 창방 위에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짜 올려 다포계(多包系)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른 것으로 보이나 가운데 칸의 양 기둥사이로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즉, 용두를 밖으로 나오게 하고 그 꼬리를 건물 안쪽 대들보 밑에 끼어 넣은 수법, 양쪽 대들보 사이로 상호 중앙을 향해 마주 보도록 또 다른 두 마리의 용을 목각으로 조각한 수법, 건물 내부에 연꽃봉오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부안 내소사대웅보전(보물 제291호) 등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한 사찰과 건축수법에 있어서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제1311호: 순천선암사대웅전(順天仙岩寺大雄殿) 순천
조계산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하였던 것을 통일신라 헌강왕 5년(87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져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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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10호 | 제1311호 |
제1312호 :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극락보전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모습이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쳐진 듯 표현되었으며,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며, 연꽃대좌와 하나의 나무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손은 앞에 모아서 보병을 받쳐들고 있다. 이 삼존불좌상은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형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인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 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목조불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으로 조선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제1313호 : 결번(국보 제313호 승격)
제1314호 : 무위사극락전백의관음도(無爲寺極樂殿白衣觀音圖)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제1315호 : 무위사극락전내벽사면벽화(無爲寺極樂殿內壁四面壁畵)
극락보전 안쪽 벽에 그려진 벽화로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를 포함하여 총 29점이다. 지금은 모두 해체되어 보존각에 보관ㆍ진열되어 있다. 이 벽화는 삼존불화, 아미타래영도, 오불도 2점, 관음보살도를 비롯한 보살도 5점, 주악비천도 6점, 연화당초향로도 7점, 보상모란문도 5점, 당초문도 1점, 입불도 1점 등으로 극락보전 안쪽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삼존불화는 동쪽벽 중앙에 그려져 있던 그림으로, 가로로 긴 화면 가운데에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서있는 모습의 보살상과 6비구를 배치하였다. 배경으로는 바위산을 그려 넣었다. 본존불의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입고 있는 옷주름은 매우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아미타래영도는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아미타불을 그렸는데 8대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모습이다. 전체적인 구도가 매우 자연스러우며, 인물의 익살스럽고 자유로운 얼굴 표정, 움직이는 듯한 자세 등 회화성이 돋보인다.
제1316호 : 율곡사괘불탱(栗谷寺掛佛幀) 산청
화면 가득 보살형의 인물만을 단독으로 그린 그림으로, 가로 475㎝, 세로 827㎝ 의 크기이다.
이 보살형 인물은 머리에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의 중앙에는 5구의 작은 화불이 모셔져 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치켜 뜬 듯한 눈썹과 긴 코, 작은 입, 적당히 큰 귀 등 이목구비가 매우 단정하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옷은 부처가 입는 법의 형태로 속옷의 끝단과 소매자락, 윗부분 등에 걸쳐 여러 형태의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겉옷의 왼쪽 아래 끝자락을 황금색실을 이용하여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그림 바탕의 좌우로는 8열로 대칭되게 모란꽃이 그려져 있는데, 녹색 잎사귀에 붉은색, 흰색, 분홍색, 회색, 주황색 등 다양한 꽃색을 하여 화면의 명랑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 숙종 10년(1684)에 그려진 이 그림은 화면 아랫쪽에 화기(畵記)가 마련되어 있어 이 그림을 그린 사람과 조선 영조 5년(1729) 중수된 기록까지 확실히 알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인물의 두 발 사이에 왕과 왕비와 세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글이 있는데, 이는 다른 괘불탱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제1317호 : 운흥사괘불탱및궤(雲興寺掛佛幀및櫃) 경남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