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나는 유토피아 꿈을 꾸고 있었다. 토마스무어경(卿)은 ‘유토피아(Utopia)’란 책에서 브라질과 인도 사이 어느 지점에 유토피아가 실재한다고 주장했고, 프란시스 베이컨은 ‘New Atlantis’란 이상향이 South sea(남해)에 있다고 주장했다. 성경은 에덴동산과 신예루살렘 사이 어딘가에 성곽의 기초석이 벽옥과 남보석, 녹보석, 홍마노, 청옥, 자수정으로 이뤄진 유토피아가 있다고 했다. 중국의 첫 유토피아 사상은 산도(山濤) 완적(阮籍) 향수(向秀) 등의 죽림7현 사상이고, 우리나라 유토피아 사상은 두개가 있다. 하나는 고려가 망하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에 은거한 두문동(杜門洞) 72인의 고사고, 두 번째는 예천 금당실, 운봉 행촌, 가야산 만수동, 속리산 사증항 등 십승지지(十勝之地) 사상이 그것이다.
나는 쑈펜하우엘이나 니체를 읽으며, 인간의 숙명은 고뇌이고, 실존은 연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영향 때문에 피안의 땅에 관심 많았다.
어느 날 나는 서쪽 바닷가 솔밭 사이에서 희미한 오솔길을 발견했다. 산짐승 길은 대개 덤불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길은 산짐승 다니는 길과 달랐다. 그 길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온 길 같았다.
진나라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어느 날 물길을 따라 나섰다가 얼마나 왔을지 모를 무렵, 산에 동굴이 있어 들어가보니, 갑자기 향기로운 풀이 무성하고, 복숭아꽃이 바람에 어지러히 날리는 곳이 있었다. 거기 뽕밭과 대나무와 연못이 있고, 사람들은 옛사람 옷차림을 하고있었다. 어부는 거기서 며칠 보내고 돌아왔는데, 나중에 표시한 곳을 따라가봤지만 그곳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산굽이 몇 개 돌아가자 쏴아쏴아 키 넘게 자란 솔밭에서 솔바람 소리 들릴 뿐, 바다와 하늘은 소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나무 뿌리는 땅 위로 뻗어 파란 이끼와 고사리에 덮혔고, 솔잎은 땅에 수북히 쌓여 흙으로 변해, 그 위에 하얀 버섯이 자라고 있다. 흙 속 작은 구멍에서 나온 멧새는 나뭇가지로 날라가더니 은구슬 같은 맑은 목소리로 울고, 어디서 다람쥐가 나타나 입을 오물거리며 까만 눈으로 날 쳐다본다. 가날픈 물소리 들려오자, 그 소리에 산이 더 적막해진다. 물소리 나는델 가보니, 실개천과 암반과 작은 폭포가 있다. 여울엔 도톰하게 모래가 쌓였고, 모래 위에 억새와 춘난처럼 생긴 풀이 있다. 까만 물잠자리가 비단같은 날개 펄럭이며 꼬리로 물을 축이고 있고, 갑자기 나뭇가지에 앉았던 목덜미 파란 물총새가 총알같이 수면으로 날라가 피래미를 사냥한 후 다시 나뭇가지에 올라가 앉는다.
적막은 고요함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섬증을 준다. 바스락 낙엽 구르는 소리도 사람 놀래킨다. 그 호젖한 곳에서 빨리 사람 있는 곳을 찾아 발걸음 옮기니 와촌이란 동네가 나온다. 인적 없는 고요한 백사장에 그물만 널려있는데, 닥아가니 해초 늘어놓은 방파제 뒤에서 여인 몇이 빼꼼히 얼굴 내민다. 낮선 총각 하나 나타나자 여인들이 반색을 한다. 사내들은 원양선 타고나가 1년에 한번 집에 들릴까말까 하는 동네다. 일년 열두달 찾아오는 건 갈매기 뿐인 동네다. 여인들은 젊었거나 늙었거나 일제히 반색을 하고 닥아와 나를 둘러싼다. 밥 먹었느냐, 어디서 왔느냐 묻더니, 넓직한 어떤 집으로 데려가 밥과 미역국, 싱싱한 우렁쉥이 내놓는다. 한 여인은 급히 어디로 가는가 했더니 커다란 말린 문어 갖고온다. 그걸 내 앞에 내놓고 얼굴을 붉힌다. 여인들은 모두 뭐던지 가진 건 다 내놓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갑자기 수십 마리 물개 거느린 숫놈이 된 느낌이다.
밥 먹고 그들과 방파제로 나가, 마침 그 시간대에 인끼리에 방영되던 연속극 틀었다.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이미자의 간들어진 목소리로 <섬마을 선생님> 흘러나오자, 여인들은 숨도 못쉬고 듣는다. 그들은 아마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처음 본 듯 했다. 조금 뒤 나타난 사람이 있다. 홍일점 그는 와촌 분교 여선생이다. 그와 함께 학교 운동장에 갔다. 교실 두개 있는 너무나 작은 학교였다. 거기서 나는 아이들에게 철봉 기술 가르켜 주었고, 그는 교실에서 풍금을 연주해주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음악은 금빛 노을에 물든 바다 위로 퍼져나갔다. 부친이 삼천포 모은행 지점장이라 했다. 섬마을은 고졸이면 교사 자격증이 나온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함께 아이들 가르치면 어떠냐고 물었고, 나는 한번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나 역시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그런 바닷가에 살고 싶었다.
서머셋 모옴은 <달과 6펜스>에서 타히티로 들어간 고갱의 일생을 그렸다. 고갱은 문명이 지배하는 서구 사회를 벗어나 타히티로 떠났다. 그는 원주민들 속에서 예술적 영감과 생의 활력을 얻자 친구에게, ‘당신은 문명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데, 나는 야만 세계에서 다시 활력을 얻고 있다’라는 편지를 썼다.
나는 그에게 혹시 교회 다니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욕지도 오기 전엔 그랬다고 대답했다. 나는 중세 유럽 수도원을 떠올려 보았다. 수사와 수녀는 청빈과 정결, 기도와 복종을 중시한다. 노동으로 먹을 것 해결하고, 기도와 명상을 하고, 성서를 필사하면서 신과의 교류를 추구한다.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에는 높이 4백여 미터 바위산 위에 살면서, 도르래와 밧줄과 그물을 이용해서 세상과 만나는 수도원이 있다. 나는 와촌도 그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수사, 그는 수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날 자부랑깨로 오면서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