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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양제(隋煬帝)의 고구려(高句驪) 침략(侵略)로
○ 오늘은 수 양제(隋煬帝)의 고려(高驪) 침략(侵略)시 진격(進擊)로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의문(疑問)점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알아보고자 합니다. <원문(原文)은 자치통감 수기(隋紀)5 / 양(煬)황제 대업8년(A. D 612) 본문임>
○ 수 양제(隋煬帝)에 대한 반도(半島)에서의 평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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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 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수 양제 양광(隋煬帝 楊 廣, 569년: 북주 천화(天 和) 4년 ~ 618년: 의 녕(義 寧) 2년 3월 11일)은 중국 수의 제2대 황제이며, 수 문제 양견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문헌 황후 독고 씨이다. 본래 묘호는 세조(世祖)이며 시호는 명 황제(明 皇帝)이나 당(唐)에서 올린 시호인 양제로 불린다. 진시황제보다도 성격이 더 포악하고 무자비하여 중국의 여러 황제 중 가장 폭군으로 손꼽히는 황제이기도 하다.
남조의 진(陳)을 토벌하는 데 매우 크게 활약했으며, 589년에 진을 멸망시킴으로써, 부황에게 태위의 작위를 받았다. 양광은 양주총관을 맡아서, 은 후방에서 아우 한 왕(漢王) 양 량을 도왔으나, 전염병과 폭염에 의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30만 강남의 땅을 감시했다. 598년 2월, 영양왕의 고구려 군사들이 수의 영토를 침범하자, 양광대군이 전멸해서 부황 양견에게 크게 질책 받았다. 양견은 두 자식들인 양광과 양 량에게 자결을 하라 했으나, 모후(母后)인 독고황후가 말렸다고 한다.
태자에 오른 그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나, 602년 8월에 어머니 독고황후가 죽자, 큰 버팀목을 잃고 금욕적인 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으나,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무서운 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계책을 쓴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양광’은 평소 사모했던 부황의 후궁, ‘선화부인 진 씨’를 범하려 했고, 이 소식을 들은 ‘양견’은 당시 병이 위중했다. 하지만 자신의 후궁을 범하려 한 아들을 문책하려 했으나, 그것을 안 ‘양광’은 상서우복야 '월 국 공' '양소'와 결탁하고, '시종 무관 장 장형', '장군 우문술' 등을 대동하여 그날 밤에 장안(長安) 인수 궁 대보 전에서 아버지를 시해하였으며 뒤이어, 형인 '양용'에게 조작된 유언장을 보내어 자결하라 일렀으나 겁을 먹고 자결하지 않자, 자신의 '근위 장 우문지급'을 보내 죽여 버렸다. 뒤이어 '양광'은 그토록 사모하던 선화부인 '진 씨'를 강제로 범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패륜행위를 행한 양광은 곧 제위에 오르니, 그가 수의 제2대 황제인 양제(煬帝)이다.
대외적으로도 수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북방에서 중국을 넘보는 돌궐과 토욕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여 영토는 넓어졌다. 그러나 양광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고, 아버지 양견이 축적한 모든 부를 탕진해서, 612년에 동북부에서 세력이 커지고 있는 고구려에 113만 대군을 보내어 자신이 친히 지휘했다. 고구려 원정 전에, 양광은 대규모 전함을 건설케 했는데, 거기서 물 안에서 작업해서 구더기가 생겨 죽은 자가 열 명중 서너 명이었나 되었으며, 그 선박의 행렬은 1천여리가 넘었다 한다. 또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서 죽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에는 훌륭한 장군 을지문덕이 있었고,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강을 건너던 30만 군사를 물속에 수장시켜서,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2700명뿐이었다고 한다. 이에, 양광은 군사를 철수시키고, 613년에 다시 침범하였으나 예부 상서 양현감이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돌려 회군하였다. 2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타격은 컸다. 그 후로도 한 번 더 군사를 보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중략).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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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양제(隋煬帝)는 황제(皇帝)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으며, 많은 계책(計策)을 썼다는 것이 그에 대한 후세(後世)사람들의 평가로 볼 때, 그는 아주 똑똑하고, 영리했으며, 문무(文武)를 겸비했으며, 계책을 잘 쓰며, 청렴하였고, 야심차고, 냉혈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또한 위의 위키 백과에서 설명한 것과는 다른 내용들이 많다.
<일례로 어머니 독고황후의 뜻을 잘 따랐으며, 아버지의 후궁(後宮)이었던 선화부인 “진씨”는 아버지 “양견(楊堅)”의 총애(寵愛)를 받고 있었으므로, “진씨”에게 잘 보여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바로 “베게송사”로 인한 이득(利得)이 있기 때문이다. 후 아버지 후궁(後宮)을 범했다는 패륜(悖倫)은 당시의 사정(事情)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없으니, 후세(後世) 사람들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를 죽였다는 패륜(悖倫) 역시 기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수나라 역사서는 후대(後代)의 승자(勝者)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수서(隋 書)】는 ; 85권으로 당(唐)나라 <태위 양주도독 감수국사상주국 조국 공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의 봉칙 찬(奉 勅 撰)이다. 당(唐)나라 초기에 조서를 내려《수서》85권을 완성하게 했는데, 위징(魏徵) 등은 기 5권, 열전 50권을 찬하고, 장손무기 등은 지(志) 30권을 찬했다. 처음에 안사고(顔 師古)·공영달(孔穎達)에게 명하여 편수하게 하고 위징(魏徵)에게 그 일을 총괄(總括)하게 하니, 서론(序論)은 위징(魏徵)이 지은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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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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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본문> : 《壬午,➊詔左十二軍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菟,扶餘,朝鮮,沃沮,浪等道.➋右十二軍出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蹋頓,肅慎,碣石,東施,帶方,襄平等道,駱驛引途,➌總集平壤,凡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人,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宜社於南桑乾水上,類上帝於臨朔宮南,祭馬祖於薊城北. : 임 오, (황제)가 알리기를, ➊ 좌(左) 12군은, 루 방(鏤 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토(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등의 길로 나아가게 하고, ➋ 우(右)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 돈(蹋頓). 숙신(肅愼). 갈 석(碣石). 동( )시. 대방(帶方). 양평(襄平) 등의 길로 나가도록 하고, 서로 끊어지지 않도록 길을 인도하여, 평양(平壤)에 총 집결하도록 하였는데, 모두 1,133,800인 이며, 칭하기를 2백만이라 하였는데, 그것을 보내고 운반하는 자들까지 배(倍)가 되었다.(4백만 가까이 되었다는 뜻). 상 건 수 위(上) 남쪽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상제(上帝)는 임삭 궁 남쪽에서 제사를 지내고, 계성(薊城)의 북쪽에서 마조(馬祖)에 제사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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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본문(本文) 내용대로 수 양제(隋煬帝)는 좌우(左右) 24군을 동원(動員)하여, 고려(高驪)를 침략하기에 이른다. 좌우(左右) 24군이란 군대는 옛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군대(軍隊)로써 상상(想像)을 불허(不許)하는 규모(規模)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총병력 1,133,800 명>이 24군 편제(編制)라면 <1군 당 평균 47,240 명> 정도로 편성(編成)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진군(進軍)하는 군대(軍隊)에게 먹을 것과 전쟁에 사용될 무기(武器)와 기계(器械)등을 운반해 줘야 하는 병침수송병까지 합하면 그 갑절이 된다. 위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2백만 내지 4백만 가까운 사람들이 전쟁에 동원(動員)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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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양제(隋煬帝)의 24군의 진격(進擊)로를 살펴보자. 과연 반도(半島)와 그 북방지역에 고려(高驪 : 고구려)가 있었는지, 평양성(平壤 城)이 있었는지를 말이다. < 참고 : 주석(註釋)>
➊ 《左十二軍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菟,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주석(註釋)> : 多用漢縣舊名.漢志:鏤方,長岑,朝鮮,屬樂浪郡。蓋馬,屬玄菟郡,有蓋馬大山.遼東,漢郡名.溟海,蓋即漢樂浪 郡之海冥縣.建安,南蘇,扶餘,皆高麗國城守之處.沃沮,亦古地名,是時其地已入新羅界.
가) 루 방(鏤 方) : 한지(漢志) - 낙랑군 속현이다.
나) 장잠(長岑) : 한지(漢志) - 낙랑군 속현이다.
다) 명해(溟海) : 한(漢) 낙랑(樂浪)군의 해명(海溟)현이다.
라) 개마(蓋馬) : 현토(玄菟)군에 속했으며, 개마대산이 있다.
마) 건안(建安) : 고구려(高句驪)의 성이 있고, 수비하는 곳이다.
바) 남소(南蘇) : 고구려(高句驪)의 성이 있고, 수비하는 곳이다.
사) 요동(遼東) : 한(漢)의 군(郡) 이름이다.
자) 현토(玄菟) : 한(漢)의 군(郡) 이름이다.
차) 부여(扶餘) : 고구려(高句驪)의 성이 있고, 수비하는 곳이다.
카) 조선(朝鮮) : 한지(漢志) - 낙랑군 속현이다.
타) 옥저(沃沮) : 옛 지명이며, 그 땅은 이미 신라(新羅)의 경계에 들어가 있었다.
하) 낙랑(樂浪) : 한(漢)의 군(郡)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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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右十二軍出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蹋頓,肅慎,碣石,東( )施, 帶 方, 襄 平 等 道》<주석(註釋)> : 漢志; 黏蟬, 含資, 渾彌, 提奚, 東( )施,帶方等縣,屬樂浪郡.候城,襄平,屬遼東郡.臨屯亦漢武帝所置郡名.蹋頓,即漢末遼西烏丸蹋頓所居.肅慎,古肅慎氏之國,其地時為靺鞨所居.碣石,禹貢之碣石也.杜佑以為此碣石在高麗中.佑曰: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秦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가) 점선(黏蟬) : 한지(漢志) - 낙랑군 속현이다.
나) 함자(含資) : 한지(漢志) - 낙랑군 속현이다.
다) 혼미(渾彌) : 한지(漢志) - 낙랑군 속현이다.
다) 임둔(臨屯) : 한(漢)무제(武帝)가 설치한 그곳이다.
라) 후성(候城) : 요동(遼東)군 속현이다.
마) 제해(提奚) : 한지(漢志) - 낙랑군 속현이다.
사) 답 돈(蹋頓) : 한(漢)말에 요서(遼西)오환(烏丸)추장 답 돈(蹋頓)이 살던 곳이다.
자) 숙신(肅愼) : 옛 숙신 씨 나라이며, 그 땅에는 말갈(靺鞨)이 살고 있다.
차) 갈 석(碣 石) : 우공(禹貢)의 갈 석(碣 石)이며,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이 갈 석(碣石)은 고려(高驪)안에 있다.”하였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갈 석(碣 石)산은, 한(漢)낙랑(樂浪)군 수성(遂 城)현에 있으며, 이 산(山)에서 진(秦)나라 장성(長城)이 일어났다. 그 증거로 장성(長城)은 동쪽으로 요수에서 끊어져 고려(高驪)로 들어가는데, 지금도 역시 그 터가 있어 후세(後世)에 전하고 있다.
카) 동( )시(東( )施) : 한지(漢志) - 낙랑군 속현이다.
타) 대방(帶方) : 한지(漢志) - 낙랑군 속현이다.
하) 양평(襄平) : 요동(遼東)군 속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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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總 集 平 壤》: <주석(註釋) : 平 壤 城, 高 麗 國 都 也, 亦 曰 長 安 城, 東 西 六 里, 隨 山 屈 曲, 南 臨 浿 水。杜 佑 曰: 高 麗 王 自 東 晉 以 後 居 平 壤 城, 即 漢 樂 浪 郡 王 險 城。
《평양(平壤)으로 총 집결토록 하였다.》 주석(註釋) : 평양성(平壤 城)은 고려(高驪)의 도성(都城 : 황성)이다. 또한 말하기를 장안 성(長安 城)이며, 동서(東西)로 6 리이며, 산(山)을 따라 이리저리 꺾이고 굽었는데, 남쪽에 패수(浿水)에 임한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 고려(高驪)왕이 동진(東晉)이후, 평양성(平壤城)에서 살았는데, 곧 한(漢)의 낙랑(樂浪)군 왕검(王儉)성이다.
○ 수 양제(隋煬帝)의 총 병력 200만 대군(수륙양군)이 당시 고구려(高句驪)의 북쪽, 북동쪽, 남쪽, 서쪽지방의 모든 영토를 향해 진격하여, 고구려(高句驪) 수비군을 격파(擊破)하고, 평양(平壤)성 주위로 총 집결토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당시 당나라를 개국시킨 원로 등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고구려(高句驪) 영토를 반도(半島) 북방에 있었다는 반도사관(半島史觀) 입장에서 보면, 당시 수 양제(隋煬帝)의 군대는 하 북 성 ‘계(薊)’지역에서 약간 ‘동북’쪽으로 진격하여, 북진(北鎭)과 의무려산(醫巫閭山) ‘남’쪽을 지나, ‘동북’방에 있는 ‘심양’ 남쪽의 ‘요수(遼水)’를 건너, 남쪽지방인 ‘압록강(鴨綠江)’쪽으로 진격해야만 한다.
○ 따라서 24군 중에서 절반 이상의 진군(進軍)로는 불필요한 것이다. 또한,
●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는 이 『장안 성(長安 城)』에 대해 ;
1) 평양(平壤)에 장안 성(長安 城)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터(址)는 전혀 발견(發見)조차 할 수 없고, 기록(記錄)조차 없는데, 말로만 있었다고 하며,
2) 어떤 이들은 서울을 장안(長安)이라고 하니 일반명사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라고 말로만 이야기할 뿐 뚜렷한 답은 내 놓지 못한다.
● 본인(本人)은 이에 대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평양성(平壤 城)은 장안 성(長安 城)이며, 당시 고려(高驪 : 고구려)의 도성(都城)은 대륙(大陸)의 장안(長安)에 있는 장안 성(長安 城)이라 주장하였다. 그 예로,
1) 후에, 고려【高麗 : 왕 건(王建)의 고려】의 장락궁【長樂宮 : 한(漢)의 장락궁과 고려(高麗)의 장락궁(長樂宮)】과 서경(西京)과 호경【鎬 京 : 주(周)의 도읍지)】 은 바로 대륙 장안(長安)임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곧 ;
➡장안(長 安) : 섬서 성(陝西 省) 현 서안(西 安)이다. <漢 都 長 安>이라 했다.
➡호경(鎬 京) : 섬서 성(陝西 省) 장안 현(長安 縣) 서남(西南)에 있으며, 주 무왕(周 武王 : 발(發)의 소도(所 都)라 했으며,
➡유경(柳 京) : 섬서 성(陝西 省) 장안(長安 : 서안)지역을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흐르는 위수(渭 水)가에 수없이 늘어진 버드나무(柳)로 인해 장안(長安)의 별칭(別稱)이 되었으며, 사랑하는 연인(戀人)들의 이별(離別)의 장소가 되었으며, 이별(離別)에 비유한 옛 시(詩)의 대상이 되었다.
2) 각 대륙사서 속의 고려(高驪) 도성(都城)의 기록으로 볼 때,
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면 (평양(平壤)은 장안 성(長安 城)이며, 낙랑(樂浪)군이다)
② 북사(北史) 고려(高驪)전에 <고구려(高句麗)의 도읍지는 평양(平壤)이며, 장안 성(長安 城)이며 동(東) 6 리에 있다>,
③ 주서(周 書)에 <평양(平壤)에서 다스렸으며, 동서(東西) 6 리이다. 남(南)쪽으로 패수(浿 水)에 임 한다>
④ 수서(隋 書) 기록에 <도읍지(都邑地)는 평양성(平壤 城)이며, 또 장안 성(長安 城)이라 한다. 동서(東西) 6 리이다>,
⑤ 구당서(舊唐書) 기록에 <고구려(高句麗)의 도읍지(都邑地)는 평양성(平壤 城)이며, 한(漢)의 낙랑(樂浪)군의 옛 땅이다>,
⑥ 신당서(新唐書) 기록에 <왕(王)이 거하고 있는 것이 평양성(平壤 城)이며, 또 장안 성(長安 城)이다. 한(漢)의 낙랑(樂浪)군의 땅이다>,
⑦ 원사(元 史) 기록에 <동 녕 로(東寧路)는 본시 고구려(高句麗)의 평양성(平壤 城)이며, 또 장안 성(長安 城)이라 한다. 한(漢)의 낙랑(樂浪)군이다>,
⑧ 명사(明史) 기록에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은 낙랑(樂浪)의 땅이다, 왕 건(王建)이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했다>
⑨ 통전(通典) 기록에 <동진(東 晉)이후에 고구려(高句麗)왕은 평양성(平壤 城)에 있었다. 또 장안 성(長安 城)이다. 한(漢)의 낙랑(樂浪)군의 땅이다. 남쪽으로 패수(浿 水)에 임하고, 그 나라 즉 고구려(高句麗)는 점점 커져 수(隋)나라 때에 동서(東西)가 6 천리나 되었다>
⑩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기록에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고, 호경(鎬 京)이며, 유경(柳 京)이고, 낙랑(樂浪)군이다>
⑪ 난중잡록(亂 中 雜 錄) 一 임진(壬辰)년 / 만력(萬曆) 20년, 선조(先祖) 25년(1592년) : 《三 十 日。車 駕 西 幸。初 三 日. 賊 入 長 安 城 中》: 30일, 어가(御駕)가 서(西)쪽으로 행차하였다. 초 3일, 적(왜적을 말함)이 장안 성(長安 城) 안으로 들어왔다.>
⑫ 신증동국여지승람 / 평양 부 : 《기성(箕 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 《당서(唐書)》에, “평양(平壤)을 또한 장안(長安)이라 이른다.” 했다.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 京)ㆍ유경(柳 京) 최자(崔 滋)의 〈삼 도부(三 都 賦)〉에 있다.》
⑬ 芝 峯 集. 送 大 同 權 察 訪 之 任. : 《浿 水 日 東 流 : 패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
⑭ 五 峯 先 生 集. 箕 城. 送 卞 荊 山 獻。: 《天 空 流 水 唯 東 走 : 하늘은 그 끝이 없고 흐르는 물은 오직 동쪽으로 달려간다.》
⑮ 浮 査 文 集. 西都懷古 : 《悠 (悠) 興 廢 東 流 水. : 흥폐(흥하고 망하고)에도 물은 유유히 동쪽으로 흐르고, 》
⑯ 蓬萊詩集. : 《浿 水 東 流 幾 多 時 : 어려움이 많은 때, 패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
● 참고 : 자치통감(資 治 通 鑑) 隋 紀 八 / 恭 皇 帝 下 / 義 寧 元 年 조 기록을 보면 ;《淵命劉弘基,殷開山分兵西略扶風,有六萬,南渡渭水,屯➡長安故城.城中出戰,弘基逆擊,破之.世民引兵趣司竹,李仲文,何潘仁,向( )志 皆 帥( )從之,頓于阿城,勝兵十三萬,軍令嚴整,秋毫不犯.乙亥,世民自盩厔遣使白淵,請期日赴長安.淵曰:屈突東行不能復西,不足虞矣!乃命建成選倉上精兵自新豐趣➡長樂宮,世民帥新附諸軍北屯.至並聽教.延安,上郡,雕陰皆請降於淵.丙子,淵引軍西行,中略》이곳의 ➡를 보면, 장안고성(長 安 故 城 : 장안 옛 성)과 장락궁(長樂宮)이 등장하고 있다. 참고하시길!!!!!!!!! 그 다음 기록에는, 《淵 自 長 樂 宮 入 長 安 : 연(당 고조 이연을 말함)이 장안의 장락궁으로 들어갔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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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보면 ; 반도(半島) 땅은,
주(周)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한 곳이 반도(半島) 땅?
진(秦)을 멸하고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가 반도 땅?
이렇게 반도사관을 주창하시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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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의 사) 답 돈(蹋 頓) : 한(漢)말에 요서(遼西)오환(烏丸)추장 답 돈(蹋頓)이 살던 곳이다.
오환(烏丸)에 관한 것은 이미 위략(魏略)에 기록된 것을 설명하였다. 이는 곧 【 地無山,有沙漠,流水,草木,多蝮蛇,在丁令之西南,烏孫之東北,以窮困之. : 땅(地)에 산(山)이 없고, 사막(沙漠)과 유수(流水)와 초목(草木)이 있고, 살모사 뱀이 많다. (오환(烏丸)은 정령(丁令)의 서남(西南)에 있고, 오손(烏孫)의 동북(東北)인데, 궁벽(딱하고 곤란한)한 곳이다.】
● 『정령(丁令)은 강거의 북쪽에 있다. 강거(康居)는 카스피 해로부터 동쪽 아랄 해 지역까지를, 북쪽은 우랄산맥 동서(東西)쪽 지역까지로 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오환(烏丸)은 오손(烏孫) 동북(東北)에 있고, 정령(丁令)의 서남(西南)에 있다.』 고 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오환(烏丸) 선비(鮮卑)전에서 기록한 것으로 지리적 위치를 찾으면, 『우랄산맥(山脈)을 중심으로 서남(西南)지방에 “오환(烏丸)”이 있었다.』 고 보면 ; “카스피 해 북쪽으로부터 흑해(黑海)까지의 땅이다.”
● 『오환(烏丸)은 『오손(烏孫)의 동북(東北)지방에 있었다.』 고 했으니, 당시 “오손(烏孫)”은 현재의 “터-키나 불가리아”지방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 또한 오환(烏丸).선비(鮮卑) 동이(東夷)전에 나오는 지리적 형태는 반도(半島)나 그 북방(北方) 지대(地帶)와는 본래부터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대륙 사(大陸史)는 서역(西域) 땅에 오환(烏丸).선비(鮮卑)가 있었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 수 양제(隋煬帝)가 천지(天地)만물(萬物)을 창조(創造)하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창조주(創造主)”였다면 몰라도, 그도 인간(人間)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인간(人間)의 능력(能力)으로 서북(西北)쪽 5-8천리에 있었던 오환(烏丸)추장 “답 돈(蹋頓)”이 살던 지방을 “동북(東北)”지방5-7천리에 심어 놓고, 그곳으로 황군(皇軍)을 보냈다면 그는 황제(皇帝)는 고사하고, 농부(農夫)도 될 수 없는 인간(人間)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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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의 자) 숙신(肅愼): 옛 숙신 씨 나라이며, 그 땅에는 말갈(靺鞨)이 살고 있다.
○ 말갈(靺鞨)의 선조(先祖)는 읍루(挹婁)이며, 읍루(挹婁)의 선조(先祖)는 숙신(肅愼)이다. 숙신(肅愼)은 이미 주(周) 나라 때부터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은 “산해 경(山海經)”에서 찾아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산해 경(山海經)에서는 “숙신(肅愼)”은 서쪽과 북쪽사이 곧 서북(西北)방향에 있었다고 하였다.
◌ 구당서(舊唐書) 철륵(鐵勒)편 : 《復建牙於大漠之北郁督軍山下,在京師西北六千里.➋東至靺鞨,西至葉護,南接沙磧,北至俱倫水,回紇,拔野古,阿跌,同羅,僕骨,口諸大部落皆屬焉. : 아장【牙帳: 본영. 왕도】 을 『대막(大漠)의 북쪽, 욱 독 군 산【郁 督 軍 山 : 천산(天山)을 말한다.】』아래(下)에 다시(復) 설치하였다. 경사(京師 : 장안?)로부터 서북 6000 리에 있다. ➋동(東)쪽으로 “말갈(靺鞨)”에 이르고, 서쪽으론 “엽호 (葉 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사적(沙磧=沙漠)”에 접하였으며, 북쪽으로는 “구륜 수”에 다다른다. 『회흘. 발 야 고. 아 질. 동라. 복골. ( )』의 여러 큰 부락들이 모두 이에 속했다.》
【十一月.中略.癸酉,薛延陀以同羅,僕骨,迴紇,靺鞨,霫之眾度漠,屯于白道川.命營州都督張儉統所部兵壓其東境;兵部尚書李勣為朔方行軍總管,右衛大將軍李大亮為靈州道行軍總管,涼州都督李襲譽為涼州道行軍總管,分道以禦之 : “설 연 타 외 동라, 박골, 회흘(回紇), 말갈(靺鞨), 습(霫)”>등의 무리가 사막(漠)을 건너 백도 천(白 道 川)에 진을 쳤다. 명을 받은 영주도독 “장 검”의 여러 부대를 통솔하여 그들의 동쪽지경을 압박하고, 병부상서 “이 적”이 삭방행군총관과 우위대장군 “이 대량”이 령 주 (靈 州 : 오원서북방)도 행군총관, 량 주 도독 “이 습 예”가 량 주 도 행군총관이 되어 나누어서 길을 나와 방비하였다.】
● 이들이 사막(沙漠)을 건너 “백도 천”에 진을 쳤다면 <‘설 연 타’ 외 ‘동라’, ‘박골’, ‘회흘’, ‘말갈’, ‘습’>등은 최소한 <준갈이 사막(沙漠) 또는 고비사막(沙漠)>을 “건너왔다”는 뜻이다.
● 당시의 말갈(靺鞨)은 중원(中原) 동북(東北)방이나 반도(半島) 북방(北方)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 수 양제(隋煬帝)가 천지(天地)만물(萬物)을 창조(創造)하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창조주(創造主)”였다면 몰라도, 그도 인간(人間)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인간(人間)의 능력(能力)으로 서북(西北)쪽 5-8천리에 있었던 오환(烏丸)추장 “답 돈(蹋頓)”이 살던 지방을 “동북(東北)”지방5-7천리에 심어 놓고, 그곳으로 황군(皇軍)을 친히 거느리고 진군(進軍)했다면, 수(隋)나라의 황제(皇帝) “양광(楊廣)”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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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의 차) 갈 석 (碣 石)과 갈 석 산(碣 石 山)
《주석(註釋) : 碣石,禹貢之碣石也.杜佑以為此碣石在高麗中.佑曰: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秦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 우공(禹貢)의 갈 석(碣 石)이며,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이 갈 석(碣 石)은 고려(高驪)안에 있다.”하였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갈 석(碣石)산은, 한(漢)낙랑(樂浪)군 수성(遂 城)현에 있으며, 이 산(山)에서 진(秦)나라 장성(長城)이 일어났다. 그 증거로 장성(長城)은 동쪽으로 요수에서 끊어져 고려(高驪)로 들어가는데, 지금도 역시 그 터가 있어 후세(後世)에 전하고 있다.》
○ 현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 “갈 석(碣 石)”은 <하 북 성 산해(山海)관 바다 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우공(禹 貢)의 갈 석(碣 石)이라 한다.
○ 헌 데 말이다. 이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보면, <하 북 성 산해 관(山海關)은 당시 고려(高驪)의 영토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갈 석(碣 石)산의 장성(長城)은 요수(遼水)에서 끊어져 물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이며, 이 터(유적)는 당시에 그대로 있어, 후세(後世)에 전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산해 관(山海關)의 갈 석(碣 石)은 요수(遼水)가 아닌 바다 가에 있기 때문에 지형(地形), 지물(地物)이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 또 요수(遼水)를 심양(瀋陽)주위를 흐르는 하천(河川) 볼 때 장성(長城)의 터는 어디에 있어, 숨바꼭질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 두우(杜佑)의 말에 따르면, 낙랑(樂浪)군 수성(遂城)현에 갈 석(碣石)산이 있으며, 『이 산(山)에 진(秦)의 장성(長城)이 일어났다.』고 하였으니, 이곳은 반도나 북방 3성 지역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한 내용이나 『진(秦)의 장성(長城)은 섬서 북방의 하(河)의 북쪽 지대에 있는 양산(陽山)에서 그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현존(現存)하는 진(秦)의 장성(長城)에 관한 기록은 사기(史記)의 진(秦)본기와 몽 념(蒙恬). 이사(李斯) 등의 열전 내용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진(秦)의 장성(長城)은 현 섬서(陝西) 북방의 내몽고 땅을 흐르는 황하(黃河), 그 북쪽지방의 양산(陽山) 동(東)쪽으로는 존재(存在)할 수 없는 것이다.
○ 수경 주(水經注)에 따르면 현 <영하 성과 내몽골>의 접경지역을 흐르는 황하(黃河)가 밀 운 산【密 雲 山 : 횡산(橫 山)을 말한다.】 의 계곡을 흐르는 곳에 갈 석(碣 石)이 있으며, 황하(黃河)의 물속으로 들어갔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 장성의 동문(東門)이 있다고 하였다.
⒜ 청의 학자 목재(牧 齋) 전 겸 익(錢 謙 益)이 산해 독사(山 海 督 師) 원 종환(袁 崇 煥)의 시(詩)를 화답한 시에,
임유는 지금 곧 우리나라 울타리인데 / 臨 渝 今 是 國 儲 胥
만 대의 병거(兵車)로 동문을 잠그도다. / 鎖鑰 東 門 萬 革 車
⒝ 갈 석 청 조(碣 石 晴 照)
海 門 從 古 浪 奔 雷 / 해문은 예로부터 풍랑이 거세게 치는데,
一 帶 黃 河 袞 (袞) 來 / 한 줄기 황하가 끝없이 콸콸 오누나.
我 欲 攀 緣 登 碣 石/ 나는 당장 갈 석(碣 石)을 부여잡고 올라가서
俯 看 溟 渤 小 於 杯 / 술잔보다 작아 뵈는 바다(溟 渤)를 굽어보고 싶네.
⒞ <水 經 注 河 水>편을 보면 ; 《 門, 即 橋 山 之 長 城 門 也. 始 皇 令 太 子 扶 蘇 與 蒙 恬 築 長 城 , 起 自 臨 洮 , 至 于 碣 石 , 即 是 城 也. : 문(門), 곧 교산【橋山 : 횡산을 말한다.】의 장성(長城) 문(門)이다. 시 황제(始皇帝)의 명을 받은 태자 부소(扶蘇)와 몽 념(蒙恬)이 함께 쌓은 장성은, 림 조(臨洮)에서 일어나, 갈 석(碣 石)까지 이르렀는데, 곧 이 성(城)이다.》
● 횡산 《【橫 山 : 교산(蛟山)이라고도 하며, 밀운(密雲)산. 자오(子 午)산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 황제(黃帝)의 묘가 있다고 전한다.】일명 교산(橋 山)이다. 남쪽 요주(耀州)에 연이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염주(鹽州)에 막히고, 동쪽으로는 연안(延安)에 접하며, 8백리에 뻗쳤다. 감숙 통지에 의하면 ; 산의 길이는 천 여리이며, 북쪽으로 대막(大漠)으로 들어가며, 남쪽에서 물리 갈라지는데, 동쪽의 물은 모두 동남(東南)으로 흘러 연안(延安)지경으로 가고, 서쪽의 물은 서남(西南)으로 흘러, 경양지경으로 흐른다.(중략). : 一名橋山,南連耀州,北抵鹽州,東接延安,緜互八百餘里,甘肅統志;山長千餘里,北入大漠,南盡分水,其東水皆東南流,爲延安界,其西水皆西南流,爲慶陽界,(中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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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古典)의 여러 기록을 지리(地理), 지형(地形), 기후(氣候) 등의 여러 관계를 생각하면서 보았을 때, 중원(中原)지방의 장안【長安 : 함양. 호경. 장안 등을 포함】을 기준으로 하는 진(秦)나라, 한【漢 : 전한(前漢)과 후한(後漢)】나라, 위. 오. 촉 및 북위(北魏), 주(周), 수당(隋唐)등의 왕조(王朝)의 정체가 불분명(不分明)하며, 그 후대(後代)의 왕조(王朝) 역시 불분명한 것은 똑같다. 역사서 기록에 따라 가보면 지리(地理), 지형(地形)과 방향(方向)이 서로 매치되지 않고, “뒤죽박죽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지울 수 없다.
○ 한, 두 가지 사항(事項)만을 설명(說明)하려 해도 분량(分量)이 많아, 줄이고, 줄여보지만 장문(長文)의 글이 됩니다. 시간(時間)이 된다면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알기 쉽게 풀어보고 싶으나, 그게 맘대로 되질 않으니 여러 회원님들께 미안(未安)할 뿐입니다.
2011년 03월 27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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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김인희 교수가 쓴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그 많던 망국의 유민은 어디로 갔을까?' 란 책을 보고 위 글을 떠올리니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 글을 씁니다. 김 교수 역시 반도사관에 얽매인 채로 책을 쓰셨는데, 중국 서부에 사는 사람들 중 먀오족과 일부 야오족들이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점을 증명하였습니다.
평양이 장안이라면 당시 고구려는 현 시안(西案?. 정확하지가 않네요....)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소리이고 중원의 대부분의 땅이 고구려 땅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시안에서 먀오족과 일부 야오족의 거주지들이 그리 멀리 안 떨어져 있지요. 현 먀오족 거주지가 당시 고구려 영토일 수 있습니다.
김 교수는 현 반도 평양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오며 이런저런 고생을 한 끝에 현 먀오족 지역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저는 현 먀오족이 사는 가시광족 자치구 지역이 옛날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포로로서 끌려온 게 아니라 원래 이 곳에 고구려가 있었길래 고구려 인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먀오족의 생김새를 보면 동양인 쪽에 가깝습니다. 저는 '몽골비사' 의 창세 신화에서 몽골과 고구려가 같은 부족이거나 비슷한 계통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틀릴 가능성도 있지만 말입니다. 몽골인의 생김새는 동양인보다는 러시아 사람 쪽에 가까운데 이 먀오족의 생김새를 보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몹시 고민했습니다.
아마 백인과 황인의 혼혈인들인 고구려인들이 남방 계통의 황인들과 섞이며 현재의 먀오족과 같은 모습이 만들어졌으며 혹은 고구려의 넓은 영토를 가졌다고 볼 때 고구려가 다인종 사회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남부의 해안 지대를 보면 현재 전라도의 지명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저의 사촌누나가 하이난(海南)으로 중국 여행을 가고 나서 전라도에 온 줄로 착각할 뻔 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남부 지역 쪽에는 백제가 있었던 곳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중국 남부 지역 어느 부분이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 카페의 전 글을 보시면 백제의 영토를 논한 글이 있습니다.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니나 마지막 백제의 왕도가 무너지던
곳에 대한 대략의 설명이 있습니다. 다소의 영토 차이는 어절 수 없구요. 대륙조선사의 핵심은 고구려. 백제. 신라등의
나라는 바로 현 대륙지방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서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를 중국으로 하는 분도
계시나 현 대륙의 사서나 조선의 사서로 고증될 부분이 없다는 것이지요.
역사서 기록으로 보면, 아주 헷갈리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거슬리기는 한데, 서역의 한양, 중국이라는 것에는 현재로서는 무리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앞으로 깊은 연구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