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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대의 붓다의 가르침(2010년 붓다의 날 법문)
오늘은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늘을 ‘부처님 오신 날’이라기보다는 ‘붓다의 날’이라고 해야 합니다. 붓다의 날이란, 2554년 전, 인도의 카삘라 왕국에서 한 보디삿따가 고따마 싯타르따라는 왕자로 태어난 날입니다. 또한 오늘은, 그 왕자가 성장해 29세가 되었을 때, 부귀와 영화의 왕위가 보장된 왕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깨달음’을 증득하여 태어남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서원하고, 출가자가 되어 6년 고행 후 마침내 36세에 ‘붇다가야’에서 붓다를 성취한 날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45년간을,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길을 많은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전법한 후 80세 되던 오늘, 대열반에 든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하니 ‘붓다의 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붓다의 탄생을 상기하여 보겠습니다. 약 2550년 전, 인도의 카필라 왕국의 왕인 숫도다나와 왕후인 마야 부인 사이엔 여왕의 나이가 40이 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였습니다. 40세가 되던 해, 마야 부인은 한낮에 잠시 눈을 붙였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네 명의 천인이 마야부인을 들어 올려 히말라야의 Anotatta 호수엘 데려 갔습니다. 그들은 여왕을 그 호수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은산 안에 있는 금으로된 전각으로 데려가서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잠들게 하였습니다.
그녀가 잠에 든 순간, 은산에서 멀지 않은 금산 주변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던 흰 코끼리 한 마리가 금산을 내려와서 은산으로 올라가서는 금 전각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여왕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돌고는 오른 편에서 여왕의 자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런 꿈을 꾼 후 마야부인은 곧 태기가 있었고, 그 10달 후 분만을 위하여 당시의 관습에 따라 친정인 이웃 나라의 왕궁인 Devadaha로 향하였습니다.
카필라 왓투와 데와다하 사이에 양국 사람들이 소풍을 자주 가는 ‘룸비니’라는 사라나무 동산이 있었습니다. 마야부인이 이 룸비니 동산에 도착하였을 때, 모든 사라나무들은 나무 전체에 꽃으로 가득하였고, 5색의 나비들이 환희의 춤을 추고 있었고, 많은 종류의 새들이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른 듯이 분주하게 날며 아름답고 달콤한 멜로디의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마야 부인은 이 룸비니 사라나무 공원에 들어서자 분만의 산통을 느꼈습니다. 시녀들이 급히 아름다운 장막을 치자 마야부인은 산통으로 인하여 활짝핀 꽃으로 가득한 사라나뭇가지를 붙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라 나무의 가지가 마치 지팡이 손잡이 마냥 마야부인의 손에 닿도록 스스로 굽어 마야부인의 손에 붙잡혀졌습니다. 이렇게 하여 보디삿타는 천상의 생으로부터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붓다왐사는 보디삿타가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 보디삿타의 수많은 공덕에 의하여 이미 인간 생에서 16세에 해당하는 성숙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보디삿타는 바깥 세상으로 나오자 북쪽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은 후 멈추어 서서는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습니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다 고통 속에 있으니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이 게송에는 일체 중생의 마음속에 똑같이 갖추고 있는 참 성품에서 보면 모두가 다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이 다 존귀하다고 말씀하셨듯이, 불교는 어떤 존재에 의하여 구원받는 종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붓다께서는 룸비니 동산에 중생들을 위해 몸을 나투셔서 모든 중생들이 모두 다 존엄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존엄의 궁극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보디삿타는 고따마 싯탓타라고 불리었습니다. 보디삿타가 태어난 일주일 후 마야부인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고따마 싯탓타는 이모인 마하빠짜빠띠 고따미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숫또다나 왕이 권유해 마지않는 정반왕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 라훌라가 태어나던 29세에 생・노・병・사의 절대적인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 대자유의 증득을 향한 도를 찾기 위해 출가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보디삿타는 당대 저명한 수행자인 Ālāra Kālāma 문하에서 무소유처 선정을 얻었습니다. Ālāra Kālāma는 고따마가 자기 문화에 남아 더불어 제자들을 가르칠 것을 제의하였으나, 보디삿타는 완전한 자유의 증득이 목적이었으므로 그의 제의를 거절하고 떠났습니다.
보디삿타는 Udaka 문하를 찾아가서 지도를 받았습니다. 보디삿타는 얼마되지 않아 비상비비상처 선정을 얻게 됩니다. 보디삿타의 훌륭한 성정에 감탄한 Udaka 역시 자기 수행 문중에 남아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쳐 줄 것을 제의합니다. 이번에도 보디삿타는 아직 자신은 완전한 자유를 증득하지 못했음을 알고는 Udaka의 문중을 떠납니다.
보디삿타는 수행에 적합한 장소로 나란자라 강이 흐르는 Uruvelā의 숲을 선택하고는 독자적으로 수행할 것을 결심합니다. 보디삿타는 자신을 따라 나선 다섯 수행자들과 더불어 6년 동안을 극한적 금욕과 고행으로 수행을 하였습니다.
극한적 금욕 고행의 수행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판단한 보디삿타는 당신의 수행방법을 어렸을 때 농경의식 때 선정에 들었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중도 방법으로 할 것을 결심합니다.
미래의 붓다가 될 보디사타는 웨사까 달(양력 4-5월)의 14번째 달이 차는 날 새벽이 되어 가는 한 밤중에 다섯 가지의 꿈을 꿉니다.
① 지구의 표면은 침대, 히말라야는 벼게, 왼쪽 팔은 동쪽 대양, 오른 쪽 팔은 서쪽 대양, 두 다리는 남쪽 대양에 얹고 자는 꿈 : 이것은 全知를 얻어 붓다가 됨을 상징하는 꿈
② 띠리야(tiriya) 라고 부르는 풀이 보디삿타의 배곱에서 나와 하늘을 향해 점점 자라다 결국에는 하늘에 닿는 꿈 : 중도(中道)인 팔정성도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꿈
③ 몸은 흰색, 머리부분은 검은 색의 구더기들이 발에서부터 무릎으로 올라오면서 점점 온몸을 덮는 꿈 : 머리는 검고 하얀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붓다를 경외하며 귀의하는 상징적인 꿈
④ 푸른 색, 황금 색, 붉은 색, 회색의 새들이 네 방향에서 날아와 그의 발에 엎드리며 모두 흰색의 새들로 변하는 꿈 : 네 계급 모두의 인간들이 붓다의 가르침으로 아라한과를 얻는 상징적인 꿈
⑤ 보디삿타가 오염되지 않은 분뇨의 거대한 산 위에서 반복하여 걷고 있는 꿈
보디삿타는 이 꿈으로 깨달음을 성취할 것에 대한 확신을 합니다. 수자타가 올리는 유미죽을 공양 받으시고는 나란자라 강으로 내려가 목욕을 하면서 성도를 다시 한번 서원합니다. 둑으로 올라와 숲을 걷는 도중 한 브라흐민에게 솟띠야 풀을 공양 받습니다. 한 보리수 나무를 선택하여 공양 받은 풀로 자리를 만드시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으십니다. 바로 그 때 마라의 공격이 시작되고 초경이 거의 될 무렵 마라를 극복하십니다.
초경 : 과거 존재들에 대한 지혜의 깨달음
보디삿타가 마음을 과거 존재들의 비범한 지혜 쪽으로 기울이면, 과거의 활동, 사건 그리고 경험들이 다 회상되어졌습니다. 수메다 수행자였던 과거로부터 바로 전생인 세따께뚜 데와의 생까지 모두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혜를 초경에 성취하셨습니다.
이 지혜를 통하여 보디삿타는 ‘한량없는 존재의 순환 속에 있는 것은 오직 나마와 루빠 뿐이다. 무시 이래로 태어남, 삶, 죽음의 세 가지 경우 위에 오직 나마와 루빠 그 현상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연속을 통하여 안, 이, 비, 설, 신, 의 6 관에 보임, 들림, 냄새맡음, 맛봄, 닿음, 생각 등과 같은 관계되는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나마와 루빠의 연속체일 뿐이다. 실제로 ‘나’ ‘그 사람’ 등으로 불리워지는 절대화된 개체는 전혀 없다.’ 는 것을 깨치셨습니다.
보디삿타는 이러한 지혜를 통하여 순간적으로 아타(나, 본체)에 잘못된 20 가지의 견해를 멀리 버리셨습니다.
중경 : 천안의 비범한 지혜의 성취
보디삿타께서 초경에 과거 존재에 대한 대 지혜를 깨달으신 후 20가지의 유아의 잘못된 견해를 일시에 버리시고는 감정적 존재들의 죽음과 생을 보는 지혜와 감정적 존재들이 생을 형성하는 공덕행과 비공덕행을 분석하고 보는 지혜 쪽으로 당신의 마음을 향하시었습니다.
그 지혜를 통하여 당신께서는 죽음의 맨 끝에 있는 혹은 이제 막 잉태된 존재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존재들의 계급, 아름다운가 추한가, 행복한 존재인가 불행한 존재로 되는가를 아십니다. 탐욕이 없는 과거 공덕행 때문에 부자 혹은 번영스러운 존재로, 탐욕의 과거의 비공덕행으로 인해 가난하고 궁핍한 존재로 태어남을 보십니다. 그리고 고통 받는 네 군데 낮은 세계의 존재물들을 이 지혜를 통하여 보시고는 이들 존재들이 어떤 종류의 행위로 인해 이와 같은 두려운 불행의 고통을 당하는가를 회상하시었습니다.
그러한 지혜를 통하여 육도 윤회하는 존재물들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원인, 결과의 법칙을 환히 보십니다.
삼경 : 도덕적인 마취의 소멸의 지혜(보디삿타에 의한 마하위자라 위빠싸나 냐나의 계발)
보디삿타께서는 무지와, 부수적인 일반적인 번뇌들을 다 제거하시었습니다.
보디삿타께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각각의 우주에서 살고 있는 그들 존재들의 참 성품에 마음을 집중하시면 한 우주에 있는 인간, 천인, 브라흐마들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그들 모두를 완전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12 연기의 12 요인들로 환원되어질 수 있습니다.
12 연기 요인들의 각각은 3 가지 통찰지혜, 즉 아니짜위빠싸나 냐나, 둑카위빠싸나 냐나, 아낫따위빠싸나 냐나를 증진시킵니다. 12연기를 회상반조하시어 마하와지라 위빠싸나 냐나를 경작하신 후 다시 아나빠나 4 선정에 들어 들어갑니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자기집 처마에 도달한 사람이 문 입구에서 전혀 주저함이 없이 문이 열려져 있음을 알고는 곧바로 집안으로 들어가듯이 보디삿타께서는 거기서 멈추심이 없이, 우다야바야 냐나, 방가 냐나, 바야 냐나, 아디와 냐나, 닙비다 냐나, 문찌뚜까먀 냐나, 상카루뻭카 냐나와 같은 냐나의 8 단계를 연속적으로 통과하시면서 쉽게 더 높은 위빠싸나 냐나를 깨달으시고는, 마침내 마지막 단계인 아누로바 냐나에 도달 하신다. 닙바나 도시로 들어가는 통로의 문과 같은 아누로마 냐나에서 멈추지 않고, 곧 이어 아누로마 냐나의 3 가지 수단으로서 사성제가 감추어진 무지와 미혹의 구름과 어둠을 말끔히 걷어버리시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시었다. 진리를 숨긴 그 뚜꺼운 칠흙을 쫓아 버림으로써 당신께서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달을 확연히 보듯이 고뜨라부 냐나(세속적인 얶매임을 극복하는 지혜)를 거쳐 소따빠띠 막가의 지혜를 거쳐 닙빠나를 깨달으시었습니다.
소따빠띠 막가를 얻으시므로서 보디삿타의 마음체에서 완전히 3 가지 번뇌 我가 있다는 잘못된 믿음, 법에 대한 회의적인 의심, 규범과 儀式에 얽매이는 것이 제거 되었습니다 이들 번뇌들은 다시는 당신의 마음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 높은 과와 도의 깨달음에 의한 붓다에 도달함
소따빠띠 막가, 팔라를 성취하신 후 보디삿타께서는 다음을 반조하십니다.
① 소따빠띠-막가
② 소따빠띠-팔라
③ 닙빠나
④ 소따빠띠-막가,팔라로서 파괴된 번뇌들
⑤ 소따빠띠-막가,팔라로서 파괴되지 않은 번뇌들
이렇게 회광반조하신 후 다시 위빳사나 냐나를 다시 경작시키십니다. 그리고는 곧 사까다가미-막가, 팔라를 성취하신 후 계속하여, 아나가미 도와 과를 성취한 후 마침내 아라하따-막가,팔라를 성취하신 후 아라하따-막가, 팔라, 닙빠나, 제거된 모든 번뇌들을 회광반조를 하는 지혜가 일어났습니다.
보디삿타께서는 아라하따-막가와 팔라를 성취하신 후 당신의 마음은 매우 명확하였고, 당신은
사성제의 진리,
네 가지의 빠띠삼비다 냐나 : 뜻을 잘 구분하는 지혜, 문법을 구분해서 잘 아는 지혜, 문법, 문장을 구분해서 잘 아는 지혜, 위의 세 가지를 잘 구분해서 분명히 아는 지혜
여섯 가지의 아싸다라나 냐나 : 모든 중생들이 원하는 것을 아는 지혜, 구제해야 할 중생의 빠라밋의 성숙, 미성숙을 아는 지혜, 일체 모두를 보는 지혜, 물과 불을 같이 나오게 하는 신통을 낼 수 있는 지혜, 막힘이 없이 모두 보는 지혜, 매우 큰 연마심에 항상 들어계시는 지혜
아웨니까 냐나 : 붇다께서만 특별히 구분해서 아시는 18가지 지혜
네 가지 웨사라자 냐나 : 두려움이 없는 네 가지 지혜, 4 무외심
삽바뉴타 냐나 : 일체를 다 아시는 지혜를 얻으므로서 삼 세계의 최고인 삼마삼붓다(스스로 완전한 정각을 얻으신 분)가 되십니다. 붓다가 되셨을 때 새벽의 서쪽 하늘에는 샛별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49일 동안 일곱 장소에서 머무심
1. 보디팔란가 위에서
2. 응시의 주일
3. 거닐음의 주일
4. 황금의 집에서의 주일
5. 아자빠라 반얀 나무에서의 주일 : 마라의 딸들의 유혹
6. 무짜린다 호수에서의 주일
7. 라자야따나 나무에서의 주일
이렇게 49일 동안 보림을 하십니다.
이 깨달음을 이루신 장소는 지금의 붓다가야 대탑이 있는 금강석 자리입니다. 그 후 붓다께서는 사르나트에서 다섯 비구에게 첫 법의 가르침의 바퀴를 돌리신 후 45년 동안 중생들을 위하여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법의 가르침 북인도를 중심으로 펼치십니다. 80세가 되는 때, 많은 비구들을 이끌고 고향인 카필아왓투를 향하던 중, 웨살리에서 비구들을 강당에게 다 모이게 하시고는 37 조도품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
“비구들이여, 조건지워진 것은 결국 멸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여 수행을 완성하여라. 여래는 이제부터 3개월 후, 열반에 들 것이니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다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시었습니다.
이 몸에도 늙음은 닥쳐오고
생명의 불꽃 가냘펴지니,
자,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비구들이여,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바르게 사념하여
바른 계(善戒)를 지키고 사유를 다스리며
자신이 마음을 지켜라
내가 설시한 법과 율을
결코 게을리 말고 정진하면
세세생생 윤회를 끝내고
괴로움의 끝은 다하리.
그리시고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난 45년 동안 너희들에게 설법을 해왔다. 이제 너희들이 나의 설법을 잘 배우고 익혀 소중한 보물로 여겨야 한다. 또한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지금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과 너희 후손들의 행복을 위해 크게 활용될 것이다.
당부하노니 너희들은 정직해야 한다. 사려 깊고 순수한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 나의 가르침에 대한 지치지 않는 추진으로 나고 죽는 윤회의 사슬을 뛰어 넘어서 마침내 고통을 끝내야 한다.”
붓다의 입멸 후 우리 승단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아난다의 질문에 대해 붓다는 “내가 입멸하고 난 후에는 나의 가르침과 규율이 너의 스승이 될 것이다.”하시며,
“법의 형제를 이끌고 있는 자는 바로 나, 붓다이며, 승단이 나에게 의존해 있고,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붓다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난다야, 등불을 켜고 너 스스로를 피난처로 삼아라. 다른 곳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하지 말라. 진리의 등불을 밝히고 진리를 너의 피난처로 삼아라 다른 어느 곳에서도 너의 피난처는 없으니”
붓다가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 세상 모든 것 가운데 영원한 것은 없으니”였습니다.
붓다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붓다는 어떠한 세속적인 이적의 힘을 보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입멸에 들었습니다. 붓다 자신의 삶조차도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임을 보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이 다 존귀하다고 말씀하셨듯이, 불교는 어떤 존재에 의하여 구원받는 종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붓다께서는 룸비니 동산에 중생들을 위해 몸을 나투셔서 모든 중생들이 모두 다 존엄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존엄의 궁극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가르치시려고 내용은 무엇일까요?
1. 붓다의 가르침은 사실주의요, 합리주의 입니다.
붓다는 일체의 신비주의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인식의 범위 내에서 논리와 이성을 통한 방법으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한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았습니다. 붓다께서는 논리와 이성을 넘어선 경계는 관념의 세계로서 그것은 우리 삶의 사실적 대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초월적인 본체로서의 신, 절대자, 창조자, 조물주 등은 형이상학으로 간주하며 실재가 아니라 부정하고, 인식의 주체인 인간 중심으로 일체를 파악하는 인본주의의 종교입니다.
2.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에 바탕을 둔 실용주의 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과거와 미래의 장밋빛 행복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오로지 진리 자체로서 존재할 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진리는 인간의 현실적인 삶과 관계되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지금, 여기’의 삶이 고통이며, 우리는 그 고통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의 원인인 ‘욕망과 성냄과 무지’에서 벗어나야 함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주의이며, 실용주의를 벗어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여래는 고와 고에서 벗어나는 길에 관한 것만 가르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붓다의 가르침은 궁극에는 ‘깨달음’을 목적으로 합니다.
신(神)을 가진 종교는 허구의 신을 믿는 조건 안에서 모든 것이 성립하므로 ‘믿음’을 지향하는 종교인데 반하여, 불교는 믿음보다는 앎(지혜), 즉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붓다를 믿는 종교이기보다는 붓다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정법이 있어 정법에 의하여 나는 깨달았다. 이 법, 진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생・노・병・사의 고통 그리고 존재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경계로부터 완전히 떠난 절대 고요함과 평온, 절대 행복, 절대 자유가 ‘깨달음’으로부터 찾아듭니다.
4. 붓다의 가르침은 경험주의를 표방합니다.
절대적 신이 있다면 신에게 오로지 기도하여 구원을 기구하는 것이 행복을 얻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우주의 본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절대신, 창주조 혹은 신비주의적 진리체계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합니다.
붓다는 우리들이 오로지 감각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세계에서 가치와 의미 그리고 행복의 문제를 대하기를 주장합니다. 이와 같이 본체적 절대신・창조주 등을 부정하므로 붓다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이 직접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경험주의적 자력 종교입니다.
또한 붓다는 태어날 때부터 보장된 신분 등의 절대적인 존재를 부정합니다. 자유는 구원자에 의해서서나 어떤 의식에 의해서 그리고 우연하게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직 스스로의 말과 행위 의지로써 계・정・혜 삼학의 수행을 통해서만 찾아드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붓다께서는 “Tumhehi kiccamatappam akkhataro tathagata.” “너 자신이 스스로 노력하라. 여래는 다만 길을 가르쳐 줄 뿐이다”라고 하셨읍니다.
5. 붓다의 가르침은 평등주의 입니다.
붓다께서는 인간은 물론이고 모든 존재의 가치는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조건에 따른 유용성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인간은 조건에 따른 유용성을 절대적 가치로 혼동하여 차별과 분별의식 속에서 평등과 보편을 파괴하며 대립과 갈등으로 고통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가치는 평등하기 때문에 남녀노소, 사회적 신분의 차이와 아무 상관이 없이 누구라도 수행하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실로 수상한 삶의 시대입니다. 수상한 부문이 하도 많지만 그 중 너무나 우려되는 부문 중 하나가 교육입니다. 이 나라의 교육은 오로지 경쟁만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자율형 사립고 정책은 현 정부가 추진하는 ‘고교 다양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국에 자율형 사립고를 100개 설립하겠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올해 서울지역에서만 모두 13개의 고등학교가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되었고, 내년에는 5개 학교가 추가로 전환될 예정입니다. 기존 외고, 과학고 등 특목고를 합하면 서울지역 전체 300여개 고등학교 가운데 10%가 특권층을 위한 학교로 바뀌는 것이지요.
자율형 사립고에서 말하는 ‘자율’이란 신입생 모집, 교육과정, 재정, 세 가지를 학교 자율로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자율형 사립고에서는 교육과정 자율권이 주어지니 국ㆍ영ㆍ수 등의 과목은 두 배 가량 늘고, 음악ㆍ미술ㆍ체육 같은 과목은 아예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재정의 자율이란 교육청의 지원금을 전혀 받지 않고 학생 등록금만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 고등학교의 등록금이 한 학기에 90만원 정도가 되니 자율형 사립고의 등록금은 한 학기에 250만원이 넘습니다. 여기에 급식비, 보충수업비, 수학여행비 등을 합치면 한 학기 학비가 사립대학 등록금에 맞먹습니다. 서민의 자녀들은 입학을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구조이지요. 교사와 학부모, 학생 사이에 교육적 관계는 사라지고, 공급자와 소비자 관계라는 살벌한 시장의 논리만 남게 됩니다.
이것을 극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예를 봅시다. 자율형 사립고는 학교별로 모집하기 때문에 자기 학교를 홍보하는 입학설명회를 열게 됩니다. 이화여고를 비롯한 몇몇 학교는 서울 시내 유명 백화점 vip룸에서 입학설명회를 개최하였습니다. 학교라는 교육기관을 ‘소수의 구매력 있는 소비자를 위한 명품’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작태입니까?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30대에 CEO가 된 주인공이 자기 운전사에게 성공의 비결을 알려주는 내용이지요.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이 어린시적 ‘마시멜로 실험’에서 얻은 교훈에 있다고 합니다. 네 살 당시 방에 홀로 남겨진 채 눈앞에 놓여 있는 마시맬로를 먹지 않고 15분을 참으면 마시맬로를 하나 더 주겠다는 실험이지요. 그는 당장 마시맬로를 먹지 않고 인내했기 때문에 두 배의 보상을 얻었고, “오늘 인내하면 내일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얻어 CE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얘기입니까? 어린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욕구를 억제시켜 내적 감정을 말살 시키다니. 그리고 그 CEO는 성공한 인생이고 운전사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가치를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과연 언제 메시멜로를 먹을 수 있을까요? 고등학생에게는 대학에 가면 메시멜로 먹을 수 있다고 하고, 대학생에게는 취업 후에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직장인에게는 집을 장만한 다음에, 집을 구한 다음에는 노후 대책이 마련된 후에는 메시멜로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년기에 접어들면 이미 씹을 수 있는 이빨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인생을 늘 내일에 속으며, 결코 누리기를 포기하고 살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오늘 날의 경쟁 논리의 작태입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자는 내일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에 명심해야 합니다.
불교는 CEO나 운전사의 가치는 동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CEO나 운전사 모두가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느낄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평등 가치주의에 의식을 돌려야 합니다.
6. 붓다의 가르침은 생태주의입니다.
앞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로서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을 관심하는 ‘실용주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라고 하지만 인간을 존재일반의 우위에 두고 사고하지 않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존재는 유일한 가치를 지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직접 혹은 간접으로 조건지워져 관계 맺으며 생태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의 환경 파괴, 유전자 조작의 복합적인 문제, 전쟁 등의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문학적 배경이론으로 역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정부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는 4대강 토목공사에 대하여 서사시 <남한강>의 시인 신경림은 근래 어느 모임에서 “나는 이 정부가 대운하를 포기하고 ‘4대강 살리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안도했다. 그러나 나는 정말 어리석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장에 가보고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휩싸였다. 거기에는 천벌을 받을 짓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이 일을 추진하는 측은 말할 것도 없고, 방관하고 있는 사람들도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왜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말했겠습니까? 그는 아무리 썩은 정치, 아무리 엉터리 권력이라 할지라고 이토록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국가권력이 오늘날 아프리카도 아닌 이곳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맹렬한 속도로 파괴되는 강을 보면서 특히 종교인들과 시민운동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낙담하는 정도가 아니라,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수천 수만년 동안 산맥 사이를 굽이굽히 흐르며 들과 모래톱과 여울을 만들어 인간을 포함한 무수한 생명체들이 새끼들을 낳고 즐겁게 생을 향유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었던 우리의 강들이 참혹하게 파괴되고 있습니다. 가증스러운 것은 이 가공할 파괴행위가 ‘4대강 살리기 사업’ 혹은 ‘녹색 뉴딜 정책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제는 6월의 중간 선거를 앞두고 이러한 비판과 저항의 움직임들이 선거법 위반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워 정당화시키려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강의 흐름을 끊고 대규모 댐들을 곡곡에 세우고, 깊이 6미터가 넘게 강바닥을 파헤친다는 것은 결국 뱃길을 만들겠다는 의도이다는 것은 바보라도 알 수 있습니다. 깊이 준설을 하고, 보를 세우면 수질개선이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낙동강을 버리고 엉뚱하게 부산지역 취수장을 지리산 쪽으로 옮길 계획을 한다든지, 절대로 대운하를 위한 공사가 아니라고 하면서 대통령은 버섯이 공개된 자리에서 내륙지역 대구가 조만간 항구도시가 될 것임을 천명하는 모순된 언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4대강’ 개발로 일자리를 만든다면서 오히려 현실은 수많은 농민들의 삶의 터전과 생계수단은 무자비하게 뺏는 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기농을 장려하고, 세계유기농대회를 유치한다면서 수도권의 가장 모범적인 팔당 유기농단지을 없애고 관광위락시설과 자전거도로를 건설하겠다는 게 지금 국가권력의 행태입니다. 이 모든 노골적인 속임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은 국민을 전부 바보로 여기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작태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오로지 경쟁구조에 세뇌당하여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알아차리려 하지 않고 있으니 이러한 속임수가 그대로 통용되는 것입니다.
이 4대강 사업의 속임수가 계속되는 한 인간생존을 위한 자연적 토대 중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들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될 것이며, 한국사회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가 된다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4대강 사업이 이대로 추진될 경우, 물의 오염으로 식수 재앙, 농경지 침수와 홍수 재앙이 일어날 것이며, 아울러 재정 재앙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붓다의 날을 맞아, 미시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항상 향하고 있는 의식을 놓치지 않고, 거시적으로는 더불어 살기 위한 바람직한 사회 구조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시민 사회 운동을 동참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소승이 평소에 얘기하고 있는 안으로는 인식의 오류를 제거하여 지혜를 증득하고. 밖으로는 사랑을 실천하여 더불어 사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붓다께서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해 받는 것이 되는 것임에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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