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의 환자를 환자의 의사(intention)에 따라 인간다운 존엄한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 부르고 있다.
우리 형법상으로는 살인죄 편에서 관련문제로서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인데, 의사가 환자의 치명적인 고통을 보면서 그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거나 또는 의식불명의 환자가 더 이상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환자나 그 가족의 부탁에 따라 급식장치나 산소공급장치를 떼어내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가의 이슈가 등장하고 있다.
치명적인 병에 걸리거나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a terminally ill or comatose patient)에게 존엄하게 죽을 권리(right to choose to die with dignity)가 인정되는가의 문제에 관하여, 최근 미국에서는 15년째 식물인간 상태로 살아오면서 2005년에 40대 초반으로 접어든 테리 시아보(Terri Schiavo)를 둘러싸고, 그녀의 부모 쉰들러(Mary and Bob Schindler) 부부와 남편 마이클(Michael Schiavo)이 각 제기한 소송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주 및 연방 차원에서의 입법 과정을 통하여 미국 전역에서는 초유의 관심을 끌어 왔다.
테리라는 이 여성은 섭식장애(eating disorder)로 인하여 27세이던 1990년경 일시적으로 심장발작(heart failure)을 일으킨 바 있는데 이로 인하여 심각한 두뇌 손상(profound brain damage)을 입은 후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후 급식튜브(feeding and hydration tube)에 의해 24시간 간병을 받아야 하는(round-the-clock care) 상태로 연명해 오고 있었다.
남편 마이클은 1998년경 플로리다 주 법원에 아내 테리의 몸에 부착된 급식 튜브를 제거(removal)해 달라는 취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 청구이유로서 『아내가 평소 자신에게 인공적 장치에 의해 연명하고 싶지 않았다는 의사표시를 하였음(Terri told him that she did not want to be kept alive by artificial means)』을 주장하였다. 사실 급식 튜브를 계속 설치한다면 천문학적인 병원비가 계속 필요한 것과 마이클이 현재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는 점도 이와 같은 소송을 제기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고 한다. 법원이 지명한 의사들의 감정결과 테리는 지속적인 식물인간 상태(persistent vegetative state)로 의식이 회복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이에 대하여 쉰들러 부부는 테리가 자신들을 향해 미소를 짓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간단한 의성어(“Ah… ”)를 들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깨어날지 모르므로, 급식 장치의 재연결(restoration)을 명하는 취지의 소송을 주 법원에 제기하였지만 이는 의식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이유로 패소하였다.
식물인간의 생명 연장에 관한 이 소송 사건은 부시 대통령의 동생인 젭 부시(Jeb Bush) 플로리다 주지사가 직접 나서서 주지사의 명령으로 급식장치의 재연결을 명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하여 시행함으로써 급식장치가 제거된 지 6일째 되던 날 테리에게 다시 급식장치가 연결되었으나, 이 법안이 주 대법원에 의해 삼권분립의 원칙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그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형인 부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텍사스 크로포드 목장에서의 휴가 일정까지 단축하고 백악관으로 급히 돌아와 연방 상,하원이 통과시킨 특별법안(‘테리의 법’이라 불림)에 서명함으로써 마이클과 쉰들러 부부의 소송은 주의 차원이 아닌 연방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마련하게 됨에 따라 연방법원으로 이관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전 미국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여론이 남편 측과 부인 가족 편으로 극명하게 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시간으로 2005. 3. 24. 미국 연방 대법원(U.S. Supreme Court)이 쉰들러 부부가 제기한 테리의 급식장치를 다시 연결해 달라는 청구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써 사실상 소송은 마무리되었고, 테리는 급식장치가 제거된지 13일만인 3월31일 숨을 마침내 거두었다.
인간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는 미국 사법역사상 그리 오래되지 않은 분야로서 1990년에 선고된 Cruzan 사건(Cruzan v. Missouri Deptatment of Health, 497 U.S. 261, 1990)에서 문제된 바 있는데, 테리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과 같은 때인 1990년이라는 것에 묘한 느낌을 준다.
낸시 크루잔(Nancy Cruzan)은 1983년 자동차 사고로 심각한 두뇌 손상(severe brain damage)을 입고 지속적인 식물인간 상태(persistent vegetative state)에 빠졌고, 그 후 인식이나 사고 능력을 갖지 못하는(no awareness or cognition) 혼수상태에서 호흡만 가능한 상태로 미주리 주 병원(Missouri state hospital)에 입원하여 급식 튜브(feeding and hydration tube)를 위에 연결한 채로(implanted in her stomach) 연명하고 있었는데, 그 비용은 주가 부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낸시의 부모는 병원에 급식 튜브에 의한 영양 공급의 중단을 요청했고, 병원은 법원의 결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면서 거절하였다.
이에 낸시의 부모는 법원에 급식 튜브의 제거를 청구하면서 그 청구원인으로 미국인에게는 원치 아니하는 의료 장치에 의해 살아가지 않을 권리(Right not to be kept alive by unwanted medical procedures)가 미국 연방 헌법 제14조에 규정된 적법절차 조항(Due Process Clause) 에 의해 보장되는데, 주 병원이 원치 않는 급식을 계속함으로 인하여 낸시의 이러한 헌법상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과 교통사고 이전에 낸시는 친구에게 그와 같은 혼수상태에 빠질 경우 인위적인 기구에 의지하여 살지 않겠다고 말하였음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 연방 대법원은, 우선 원치 않는 의학 장치를 거부할 권리가 미국 연방 헌법상 보장되는가와 관련하여, 판단 능력이 있는 사람은 원치 아니하는 의학 장치를 거부할 자유 권리가 연방 헌법상 적법절차 조항에 의해 보장된다(“A competent person has a liberty interest under the Due Process Clause in refusing unwanted medical treatment.”)고 판시함으로써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판시하였다.
다만, 그와 같은 거부 의사가 있었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증거 입증보다 고도의 증명을 요하는 분명하고 납득할 만한 증거(clear and convincing evidence)가 있어야 한다고 설시하면서, 낸시가 ‘교통사고 1년 전’ 동거한 친구에게 자신은 ‘식물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여, 그 진술이 이루어진 시점이나 그 말의 의미상 식물인간 상태에 빠질 경우 의학장치를 거부하기로 하였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판시한 바 있다.
그러나 재심에서 낸시의 가족들에 제출한 새로운 증거(new evidence)에 의해 미주리 주 법원은 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가 있다고 판단하면서 급식 제공의 중단을 결정하였고, 낸시는 그 후 사망하였다.
테리 사건에서도 남편 마이클 측 변호사는 법원에서 테리가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식물인간이 되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였다는 입증책임을 다하여 승소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혼수상태에 빠지기 이전의 의사표시에 대하여 서류로 분명하게 남겨두기 위해 미국에서는 생존 유언(living will) 또는 기타 서류들을 통하여 추후 어떤 예기치 못한 상태가 발생할 경우 특정한 의학 장치에 의한 연명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증인의 면전에서 미리 기재하고 서명하여 두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최근 일본의 연립 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은 존엄사를 인정하는 법안을 만들어 봄철 정기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동경 신문은 2004년 12월경 보도한 바 있다. 미국, 유럽에서는 존엄사를 법률로 인정하는 추세가 확산되고 있는데, 일본에서 이 법안이 통과되면 아시아에선 첫 사례가 된다고 한다. 일본 여당이 준비 중인 법안에 명시될 것으로 보이는 내용은 환자는 말기 암 등 불치상태에서 인공호흡기 등으로 생명을 유지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갖고, 환자의 뜻에 따라 과도한 연명조치를 중단한 의사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등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4년 1월경 치료비가 없어 식물인간 상태인 딸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내 숨지게 한 아버지에 대해 법원이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한 바 있다. 이는 존엄사가 아닌 간접적 방법에 의한 적극 안락사에 포함될 것으로 보이는데 위법성이 조각되지 않으므로 유죄 판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로서는 딸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기 전 테리나 낸시와 같은 의사표시를 하였다면 그 의사를 존중하여 법원의 결정을 우선 청구하였어야 할 것이나, 아마 그런 의사표시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대한의사협회가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본인 또는 가족의 동의 아래 진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명시한 새로운 의사 윤리지침을 제정하여 시행한 이래, 2004년 6월경 의사가 가족의 요청에 못 이겨 퇴원시 사망 가능성이 있는 환자의 퇴원을 허용한 행위는 살인방조죄로 형사 처벌의 대상이라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온 바 있다. 의료계에서 일명 ‘보라매 사건’으로도 불리는 이번 판결은 퇴원을 요청한 보호자는 물론 퇴원을 마지못해 허용한 의사까지 처벌받는다는 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의료계의 일반적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은 물론 사실상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법원의 입장을 확인한 것이어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만약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환자의 가족이나 배우자가 병원에 급식 튜브나 호흡장치의 제거를 요구하였는데 병원이 형사책임을 면하고자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는 경우, 또는 환자의 부모와 배우자 간에 테리 사건과 유사한 이견이 발생하여 법원에 소송이 향후 제기된다면 우리나라의 법원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