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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의 실록에 등장하는 목은이색의 후손 졸기를 마지막으로 삼가 게시한다
이영은 인재공파 이봉 양경공파 이여 인재공파 이지번 양경공파 이상 1-3탄 인물이 왕의 행적에 등장하는 자랑스런 졸기입니다
혹시 추가 졸기가 발견되면 이후에도 연재하겠습니다
선조님의 기리며 해산공파 약와 이현정의 후손 이대원 삼가 글을 게시하다
1. 이영은
성종 2년(1471년) > 성종 2년 윤9월 > 성종 2년 윤9월 19일
성종 12권, 2년(1471 신묘 / 명 성화(成化) 7년) 윤9월 19일(무오) 1번째기사
한산군 이영은의 졸기
한산군(韓山君) 이영은(李永垠)이 졸(卒)하니,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이영은의 자(字)는 자건(子健)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인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현손(玄孫)이다. 경태(景泰) 1615) 병자년1616) 에 과거에 올라 승사랑(承仕郞)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고, 정축년1617) 에 중시(重試) 1등에 뽑혔는데, 세조가 그 대답한 글을 보고 4품 벼슬을 주고자 하였으나, 전조(銓曹)1618) 에서 논박하여 통덕랑(通德郞)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특별히 뛰어 올렸다. 얼마 안 있다가 세자 필선(世子弼善)에 오르고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 옮겼다. 성화(成化) 1619) 을유년1620) 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올라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논하였는데, 세조가 매우 좋게 여겨 말하기를, ‘너의 말이 시대의 병통을 깊이 맞추었고 또 소장(疏章)의 격식에도 적합하니, 참으로 너의 조부(祖父) 목은(牧隱)의 문장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대우가 매우 융숭하여 얼마 아니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탁배(擢拜)되고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가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병조(兵曹)·형조(刑曹)의 참판(參判)을 거쳤다. 신묘년1621) 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38세이다. 정도(丁悼)라고 증시(贈諡)하니, 사실을 진술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한 것을 정(丁)이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 죽은 것을 도(悼)라 한다. 아들은 이효문(李孝文)이다. 이영은은 총명하고 글을 잘하며, 항상 큰소리치기를, ‘다만 몸을 곧게 함을 요할 것이고 남의 말은 돌볼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좌우 시종(侍從)이 한 사람도 이영은을 천거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특립(特立)1622) 한 사람이다.’ 하였으니,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성품이 본래 탐묵(貪墨)하여 형조 참판이 되어서는 뇌물받기를 만족함이 없게 하였다. 일찍이 혜장(鞋匠)1623) 에게 가죽을 주고 신[鞋]을 만들게 하여 값 얼마를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값을 깎고 만들기를 매우 엄하게 독촉하여 조금 더디면 문득 가두었다. 그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것이 이와 같음이 많았다. 예조 판서 김겸광(金謙光)과 더불어 첩(妾)을 가지고 다투다가 사헌부(司憲府)에 고소하니, 사헌부에서 이영은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의금부(義禁府)에 옮겨서 국문(鞫問)하자, 이영은이 분(憤)이 발하여 졸(卒)하니 당시의 평론이 더럽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6장 A면 【영인본】 8책 602면 【분류】 *인물(人物) [註 1615] 경태(景泰) : 명(明)나라 경제(景帝)의 연호. ☞ [註 1616]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1617]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1618]전조(銓曹) : 이조와 병조. ☞ [註 1619] 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 [註 1620]을유년 : 1465 세조 11년. ☞ [註 1621]신묘년 : 1471 성종 2년. ☞ [註 1622]특립(特立) : 많은 사람 가운데 특별히 뛰어나 우뚝 섬을 말함. ☞ [註 1623]혜장(鞋匠) : 신[鞋]을 만드는 장인(匠人). ☞
원문
成宗實錄 > 成宗實錄 二年(1471年) > 二年 閏九月 > 成宗 2年 閏9月 19日
成宗 12卷, 2年(1471 辛卯 / 명 성화(成化) 7年) 閏9月 19日(戊午) 1번째기사
한산군 이영은의 졸기
○戊午/韓山君李永垠卒, 弔祭、禮葬如例。 永垠字子健, 韓山人, 牧隱李穡之玄孫。 景泰丙子登第, 授承仕郞權知承文院副正字。 丁丑擢重試第一名, 世祖覽其對, 欲授四品官, 銓曹駁之, 特超通德郞司諫院獻納, 俄陞世子弼善, 轉直藝文館。 成化乙酉, 陞司憲執義, 上疏論時弊, 世祖深善之曰: “汝言, 深中時病, 且合章疏之體, 眞乃祖牧隱文章也。” 自是待遇甚隆。 未幾擢拜同副承旨, 中拔英試, 轉左副承旨陞嘉善, 歷兵刑曹參判。 辛卯賜純誠佐理功臣號, 封韓山君。 至是卒, 年三十八。 贈諡丁悼: 述事不第, 丁; 中年早夭, 悼。 子孝文。 永垠聰悟, 善爲文辭, 常大言曰: “但要直己人, 言不足恤。” 世祖嘗曰: “左右侍從無一人薦永垠者, 此必特立人也。” 其見遇如此。 然性本貪墨, 爲刑曹參判, 索賂無厭, 嘗授鞋匠皮, 令造鞋, 約以給價若干, 已而減價, 督造甚嚴, 少稽遲, 輒囚之。 其治獄, 多類此。 與禮曹判書金謙光爭妾, 訴于司憲府, 憲府請罪永垠, 移義禁府鞫之。 永垠發憤而卒, 時論鄙之。 【태백산사고본】 3책 12권 6장 A면 【영인본】 8책 602면 【분류】 *인물(人物)
2.이 봉
성종 24년(1493년) > 성종 24년 11월 > 성종 24년 11월 13일
성종 284권, 24년(1493 계축 / 명 홍치(弘治) 6년) 11월 13일(갑진) 2번째기사
지중추부사 이봉의 졸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봉(李封)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26881) 하고 부의(賻儀)와 제사(祭祀)를 예(例)대로 하였다. 이봉의 자(字)는 번중(藩仲), 호(號)는 소은(蘇隱)이니, 한산인(韓山人)이며,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이고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의 증손(曾孫)이다. 천순(天順) 26882) 기묘년26883) 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문음(門蔭)으로 보의 장군(保義將軍)에 제수되었고, 성화(成化) 26884) 을유년26885)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제수되었다. 병술년26886) 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고 정해년26887) 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하여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가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더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가 다시 천전(遷轉)하여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갑오년26888) 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제수받았고 을미년26889) 에 옮겨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리고 무술년26890) 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제수받았고, 신축년26891) 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제수받았다가 옮겨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임인년26892) 에 특별히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제수받았으며, 갑진년26893) 에 특별히 가정 대부(嘉靖大夫)를 더하여 체직되었다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었다. 병오년26894) 에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더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가 홍치(弘治) 26895) 무신년26896)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기유년26897) 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는데 사건에 연좌되어 부안(扶安)으로 유배당하였다가 얼마 안되어 풀려나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천전(遷轉)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계축년26898) 에 천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니, 나이가 53세였다. 시호(諡號)는 헌평(憲平)인데, 견문(見聞)이 넓고 능(能)한 것이 많은 것를 ‘헌(憲)’이라 하고, 강직(剛直)함을 펴고 기강(紀綱)을 다스림을 ‘평(平)’이라고 한다. 이봉은 성품이 고집스러워 의위(依違)26899) 하지 않았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리(地理)와 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또한 섭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5책 284권 16장 A면 【영인본】 12책 439면 【분류】 *인물(人物) [註 26881]철조(輟朝) : 국상(國喪)을 당하거나 대신(大臣)이 죽었을 때, 혹은 재앙(災殃)이 있을 때 근신하는 의미에서 임시로 조회(朝會)를 정지하던 일. 정조(停朝). ☞ [註 26882]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 [註 26883]기묘년 : 1459 세조 5년. ☞ [註 26884] 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 [註 26885]을유년 : 1465 세조 11년. ☞ [註 26886]병술년 : 1466 세조 12년. ☞ [註 26887]정해년 : 1466 세조 12년. ☞ [註 26888]갑오년 : 1474 성종 5년. ☞ [註 26889]을미년 : 1475 성종 6년. ☞ [註 26890]무술년 : 1478 성종 9년. ☞ [註 26891]신축년 : 1481 성종 12년. ☞ [註 26892]임인년 : 1482 성종 13년. ☞ [註 26893]갑진년 : 1484 성종 15년. ☞ [註 26894]병오년 : 1486 성종 17년. ☞ [註 26895] 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 [註 26896]무신년 : 1488 성종 19년. ☞ [註 26897]기유년 : 1489 성종 20년. ☞ [註 26898]계축년 : 1493 성종 24년. ☞ [註 26899]의위(依違) : 마음이 확정되지 아니한 모양.
원문
成宗實錄 > 成宗實錄 二十四年(1493年) > 二十四年 十一月 > 成宗 24年 11月 13日
成宗 284卷, 24年(1493 癸丑 / 명 홍치(弘治) 6年) 11月 13日(甲辰) 2번째기사
지중추부사 이봉의 졸기 ○知中樞府事李封卒。 輟朝、賻祭如例。 封, 字藩仲, 號蘇隱, 韓山人也。 領中樞院事季甸之子, 韓山君穡之曾孫。 天順己卯中司馬試, 以門蔭授保義將軍, 成化乙酉魁文科, 授藝文館直提學, 丙戌擢重試, 丁亥拜承政院同副承旨, 累陞左承旨, 秋加嘉善工曹參判, 轉吏曹參判, 甲午拜江原道觀察使, 乙未遷同知中樞府事, 戊戌拜黃海道觀察使, 辛丑拜司憲府大司憲, 遷吏曹參判, 壬寅特除全州府尹, 甲辰特加嘉靖, 遞拜漢城府右尹, 丙午加資憲刑曹判書。 弘治戊申拜永安道觀察使, 己酉爲知中樞府事, 坐事配扶安, 未幾放還, 授漢成府判尹, 遷刑曹判書, 癸丑轉知中樞府事, 至是以疾卒。 年五十三, 諡憲平, 博聞多能, 憲; 布剛治紀, 平。 封性執不依違, 好學不倦, 以至地理、卜筮, 亦皆涉獵。 【태백산사고본】 45책 284권 16장 A면 【영인본】 12책 439면 【분류】 *인물(人物)
3 이여
중종 39년(1544년) > 중종 39년 1월 > 중종 39년 1월 15일
중종 101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嘉靖) 23년) 1월 15일(갑인) 3번째기사
시강원 문학 이여의 졸기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이여(李畬)가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여의 자(字)는 유추(有秋)이고 본관(本貫)은 한산(韓山)이며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형 치(菑)와 함께 뜻을 가다듬어 배움을 도타이 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기되 낯빛을 부드럽게 하여 봉양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맛있는 것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부지런히 글을 읽었다. 불행히도 어머니가 나질(癩疾)에 걸렸는데, 이여가 치와 함께 옷을 벗지 않고 밤낮으로 구완하며 처자를 물리치고 몸소 곁에서 간호하였다. 몇 해를 이렇게 하였으나 마침내 살리지 못하매, 형제가 애훼(哀毁)하며 예(禮)를 극진히 하였다. 이치가 먼저 젊어서 죽으니, 여가 그 남긴 고아를 자기 자식처럼 돌보았다. 평생 학문을 하며, 오직 옛사람과 같게 되려고 스스로 기약하여 동정(動靜) 하나하나를 다 감히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에 의논하는 자가 소세양(蘇世讓)을 정승으로 삼고자 하매 이여가 지평(持平) 이윤경(李潤慶)을 가 보고 ‘소세양이 정승이 되면 내가 공박하겠는데, 임자의 뜻은 어떠한가?’고 말하였는데, 이윤경이 응답하는 것이 시원하지 않으므로, 이여가 탄식하며 ‘당세의 선비 중에 임자 같은 이가 몇 사람이나 되겠으며 함께 일을 논할 만한 이가 또한 몇 사람이나 되기에 임자도 그러한가?’고 말하니, 이윤경이 부끄럽게 여기고 사과하였다. 일찍이 ‘황헌(黃憲)이 으르렁거리며 착한 사람을 물어뜯는 것이 소세양보다 심하니 뒷날의 화는 아마도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평소에 병이 많아서 말미를 많이 얻었는데, 사진(仕進)하지 않은 날을 계산하여 많으면 으레 녹봉(祿俸)을 받지 않았고 선물을 보내와도 일체 받지 않았으나, 남들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문학(文學)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병을 얻었으나,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므로 제때에 학문을 진취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여 병을 무릅쓰고 진강(進講)하되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역학(易學)에 정통하여 터득한 것이 매우 높았으므로, 진강할 때에는 깊은 뜻을 분석하고 예(例)를 끌어대어 비교해서 반드시 덕(德)을 진취하게 하려고 정성을 지극히 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안국(金安國)이 일찍이 ‘경연(經筵)·서연(書筵)20788) 때에 이여와 함께 입시(入侍)하면 내가 말할 것이 없이 물러나오더라도 편안히 잘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니, 그가 존중을 받은 것이 이러하였으며, 죽게 되니 사림(士林)에서 한탄하고 아까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51책 101권 69장 A면 【영인본】 19책 35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註 20788]서연(書筵) : 세자(世子)가 경사(經史)를 읽고 도의(道義)를 익히는 자리.
원문
中宗實錄 > 中宗實錄 三十九年(1544年) > 三十九年 正月 > 中宗 39年 1月 15日
中宗 101卷, 39年(1544 甲辰 / 명 가정(嘉靖) 23年) 1月 15日(甲寅) 3번째기사
시강원 문학 이여의 졸기 ○侍講院文學李畬卒。 【史臣曰: “畬字有秋, 韓山人, 李穡之後。 與兄菑, 勵志篤學, 事母色養, 家貧不能具甘旨, 孜孜讀書。 不幸母遘癩疾, 畬與菑晝夜侍藥, 不解衣帶, 屛去妻孥, 親自扶護。 如是者數年, 竟至不救, 兄第哀毁盡禮。 菑先折, 畬撫其遺孤如己生。 平生爲學, 一以古人自期, 一動一靜, 皆不敢慢。 爲正言時, 議者欲以蘇世讓爲相, 畬往見持平李潤慶曰: ‘世讓爲相, 吾當擊之, 君意如何?’ 潤慶應之不快, 畬嘆曰: ‘當世之士, 如君者幾人, 可與論事者亦幾人, 而君亦如是耶?’ 潤慶慙謝。 嘗曰: ‘黃憲之狺然吠善, 甚於世讓, 異日之禍, 恐至不測。’ 云。 居常多病, 多賜告, 計其不仕之日, 多則例不受祿, 凡遺苞苴, 一切不受, 然人無知者。 其爲文學時, 已得疾, 以儲副國之根本, 不可不及時進學, 力疾進講, 一日不懈。 精於《易學》, 所得甚高, 故進講之際, 分析蘊奧, 引援譬喩, 期於進德, 至誠不怠。 金安國嘗曰: ‘經筵、書筵時, 與畬幷入侍, 吾雖無言而退, 安寢矣。’ 其見重如此。 及卒, 士林無不嘆惜。”】 【태백산사고본】 51책 101권 69장 A면 【영인본】 19책 35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4. 이지번
선조 [수정실록] 8년(1575년) > 선조 [수정실록] 8년 12월 > 선조수정 8년 12월 1일
선수 9권, 8년(1575 을해 / 명 만력(萬曆) 3년) 12월 1일(을축) 4번째기사
전 내자시 정 이지번의 졸기
전 내자시 정(內資寺正) 이지번(李之蕃)이 졸(卒)하였다. 지번은 목은(牧隱)157) 의 후예인데, 가정(嘉靖)158) 병오년159) 에 진사(進士)에 올랐다. 어릴 적부터 침착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다리를 찔러 피를 받아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상중(喪中)에 몹시 슬퍼하였고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라 행하였다. 일찍이 김안로(金安老)의 재앙을 입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가, 안로가 패망하자 석방되었다. 성균관의 추천으로 재랑(齋郞)160) 이 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는 출사(出仕)하지 않다가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사평(司評)이 되었다. 아들 산해(山海)는 어릴 적에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는데 윤원형이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아주려 하자, 지번이 즉시 벼슬을 버리고 아우 지함(之菡)과 함께 단양(丹陽)의 구담(龜潭) 곁에 가 살면서 열심히 학문을 닦고 담박한 생활을 하며 만족스럽게 스스로를 즐기니, 사람들이 그를 구선(龜仙)이라 불렀다. 이황(李滉)이 그와 벗하여 도학(道學)을 권면하였다. 금상 초년에 청풍 군수를 제수하여 옛날 은거하던 곳에서 가깝도록 하였는데, 이황이 강요하여 취임한 뒤 애쓰지 않고도 깨끗하게 잘 다스렸다. 떠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리었으며, 후인들은 모두 그의 풍절(風節)을 숭상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9권 17장 A면 【영인본】 25책 464면 【분류】 *인물(人物) [註 157]목은(牧隱) : 이색(李穡)의 호. ☞ [註 158]가정(嘉靖) : 명 세종의 연호. ☞ [註 159]병오년 : 1534 명종 1년. ☞ [註 160]재랑(齋郞) : 참봉(參奉)의 별칭. ☞
원문
宣祖修正實錄 > 宣祖修正實錄 八年(1575年) > 八年 十二月 > 宣祖修正 8年 12月 1日
宣修 9卷, 8年(1575 乙亥 / 명 만력(萬曆) 3年) 12月 1日(乙丑) 4번째기사
전 내자시 정 이지번의 졸기 ○前內資寺正李之蕃卒。 之蕃, 牧隱之後也。 嘉靖丙午, 陞進士。 自幼沈靜不好弄, 母病, 刲股血, 和藥以進, 疾得瘳。 居喪哀毁, 一遵《家禮》。 嘗被金安老媒孽, 流配海島, 安老敗, 得釋。 用太學薦爲齋郞, 謝恩不仕, 後累官爲司評。 子山海幼稱神童, 尹元衡欲以女妻之, 之蕃卽棄官, 與弟之菡, 遁居丹陽龜潭上, 攻苦食淡, 囂然自樂, 人稱爲龜仙。 李滉與之友, 勸勉以道學。 今上初年, 除淸風郡守, 使近舊隱, 李滉强之屑就, 臥理淸淨。 旣去而民思之, 紀石頌德, 後人皆尙其風節。 【태백산사고본】 2책 9권 17장 A면 【영인본】 25책 464면 【분류】 *인물(人物)
첫댓글 맨 앞 한산군의 졸기 중에 연도가 맞지 않는데 어찌된 것인지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출처 및 댓글 올려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하루되세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현손(玄孫)이다. 경태(景泰) 1615) 병자년1616) 에 과거에 올라 승사랑(承仕郞)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고, 정축년1617) 에 중시(重試) 1등에 뽑혔는데, 세조가 그 대답한 글을 보고 4품 벼슬을 주고자 하였으나, 전조(銓曹)1618) 에서 논박하여 통덕랑(通德郞)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특별히 뛰어 올렸다. 얼마 안 있다가 세자 필선(世子弼善)에 오르고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 옮겼다. 성화(成化) 1619) 을유년1620) 에" 1615년 1617년 1618년 1619년은 1415 1417 1418 1419년이 될 것 같습니다. 확인 바랍니다.
아우님 수고가 많소. 난 미국에 있는지라 선조들 자료구하는게 쉽지가 않은데 이렇게 귀한 자료를 올려주셔서 내가 나중에 미주카페에 선조님들 글 올릴때 큰 도움이 될것임. ^^
귀한 자료 늘 올려 주셔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충주 孝遠
과찬이십니다 제가 짧은 식견에 많은 한산이문 문중 어르신들에게 100%검증되지 못한 잘못된 정보로 인한 결례를 범할까봐 이것이 제일 두려운 일 중 하나입니다 여러 문중어르신 및 기타 분들의 많은 충고와 조언 부탁드립니다
목은 인제 양경 문혜 양도 순절 공무 문열 할아버지 졸기문중 순절공 졸기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손자대까지 8분이외도 더 실록에 나오는지 궁금하네요
비가 내리는 불금 입니다 지면으로 처음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실록양이 너무 방대하여 사실 저도 읽고는 있는데 아직다 파악을 못했습니다 현재까지 11분 졸기 파악하여 올려두었고 한산이씨 관련 인물은 실록진이 파악하여 올려둔분은 대략151명 졸기보다 양은 적지만 파악되며 그 이외에 타성씨와의 행적으로 몇대사로 등장하는 분 까지 치면 제사견으로 대락 200~300분 정도 유추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졸기문 151건이 왕조실록상 우리선조님의 기록이 있다는 것이지요 감사합니다
예 졸기에 가까운 수준 완벽한 졸기는 아닙니다 시대순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또한 승정원일기 고려사절요 등의 자료도 계속 번역되고 있기에 추가 자료도 계속 향후 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